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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당(淸聞堂) : 성호학의 후원자 - 김학수

by 귤담 2023.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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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당(淸聞堂) : 성호학의 후원자

글쓴이 김학수 / 등록일 2023-05-08

주인공에 대한 열광에 못지 않게 감초같은 조연에게도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은 문화적 성숙함에 바탕한 수준 높은 감상의 태도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은 이익(李瀷)을 부양하며 성호학의 숙성을 도왔던 후원자 그룹에 대해 눈길을 돌려 보기로 한다.

이익이 살던 첨성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부곡(釜谷)이라는 사대부 마을이 있었다. 이곳은 진주유씨 세거지로 유영문(柳榮문)․유시회(柳時會)․유석(柳碩)․유영(柳穎) 등 17세기 정계 및 문단이 명사들을 다수 배출하여 근기남인의 거점으로 인식된 공간이었다. 선조의 부마였던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 숙종조 근기남인을 이끌었던 유명천(柳命天)․명현(命賢) 형제도 이 마을 사람들이었다.

물론 갑술환국(1694)과 무신란(1728)의 정치적 된서리는 극심한 가화로 이어졌지만 성호가 활동하던 18세기 중반까지도 유여(裕餘)한 가산과 섬부(贍富)한 문장을 바탕으로 세가의 전통을 꼿꼿하게 이어갔다. 이 마을에는 청문당(淸聞堂)이라 불리는 격조와 품위를 갖춘 고옥이 있었다. 본래의 기능이야 유씨 집안의 종가였지만 ‘만권장서(萬卷藏書)’가 발산하는 문향은 학사․문인들의 지적 욕구를 한껏 자극하여 ‘명사만당(名士滿堂)’의 호황을 누렸다. 이익과 유문(柳門)의 사위였던 강세황(姜世晃)은 청문당이 구축한 지식문화인프라의 대표적 수혜자였다.

18세기 청문당가를 이끈 것은 유명천의 손자 유경용(柳慶容, 1718-1753)과 종손자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이었다. 이들은 성호문하에서 ‘학문에 배부르고, 덕에 취한다’는 학덕(學德)의 포만감을 누렸고, 그것은 강렬한 사은의식(謝恩意識)으로 발전하여 이익을 물심 양면으로 지원하는 이유가 되었다. 지식인사회의 호혜성(互惠性)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이에 이익은 부곡을 수시로 왕래하며 독서와 저술에 전념할 수 있었는데, 한때 그가 기거했던 모산촌(茅山村;부곡의 부속 촌락)의 우거(寓居)는 유경용의 종숙 유채(柳采)의 집이었다.

천생학인(天生學人) 이익에게 청문당가의 유여함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유했던 만권진장(萬卷珍藏)은 극복할 수 없는 핸디캡이었음에 분명했다.

언젠가 선생께서 나의(柳慶種) 거처로 오셔서 서가(書架) 위의 책을 보시고는 밝은 표정으로 말씀하시길, ‘늘 다른 곳으로 옮겨가 살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그대 집안의 책을 버려두고 가기는 어렵겠네’라고 하셨다.(유경종 지음, 윤재환 옮김, 『국역성호선생언행록』, 147쪽)

이익에게 청문당가의 서책은 이사조차도 주저하게 만드는 너무도 살가운학문적 족쇄였던 것이다. 청문당가의 방조인 대제학 유근(柳根)의 괴산 별업인 고산정을 회화 및 문학적으로 묘사한 시첩인 『고산도(孤山圖) 36운(韻)』을 완상하는 행운도 이들의 선의에 바탕했다. 관광 기호(嗜好)가 남달랐던 이익에게 이 시첩은 와유(臥遊)의 지취(旨趣)를 만끽하는 소중한 기회였고, 그 특별한 감상은 발문에 남아 두고두고 회자되기에 이른다.

이익은 담수(淡水)처럼 맑은 성정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물욕의 기미조차도 감각하기 어렵지만 책에 대한 이끌림만큼은 그도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익은 청문당의 서책을 장기대출하는 경우가 잦았고, 대출 서목에는 『고려전사(高麗全史)』라는 책이 있었다. 하루는 김아무개가 이 책을 열람코자 하여 유경종을 부추겼다. 급기야 반납 요청이 들어왔고, 독촉하는 이가 김아무개임을 안 이익은 반납을 완곡하게 거부했다. ‘깜’이 되지 않는 자에게 귀중한 책을 넘기는 것은 일종의 ‘모험’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고려전사(高麗全史)』도 우리 집의 책을 몇 년 동안 빌려 보셨는데, 한 마을의 김아무개가 빌려보기를 청했다. 이 요청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여쭈니 선생께서, ‘그대가 보는 것이라면 마땅히 돌려줘야 하겠지만, 다른 이에게 빌려주려고 한다면 차라리 우리 집에 두어서 오랫동안 열람[看閱]하게 해 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싶네’라고 했다.

일견 책에 대한 집착, 독점적 장악 욕구로 비쳐질 여지도 없지 않지만 행간에 흐르는 정서는 학술문화자산에 대한 깊은 애정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성호학’이라는 거대한 학문적 산은 이런 과정을 통해 몸집을 키울 수 있었으니, 성호학을 입론함에 있어 청문당의 역할과 기여를 간과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유경종이 찬술한 『성호선생언행록』에 담겨 있으며, 그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국역하여 학계에 보급한 윤재환(단국대) 교수의 안목 또한 결코 예사롭지 않다. 이러한 전후인(前後人)의 상응이 있기에 성호학의 앞날을 몹시 밝아 보인다.

글쓴이 / 김학수(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한국사학 전공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