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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의 이학(理學) 논쟁과 호남학(湖南學) - 곽진

by 귤담 2023.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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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고봉의 이학(理學) 논쟁과 호남학(湖南學)

글쓴이 곽진 / 등록일 2023-06-13

조선조 학술사-유학의 심화와 발전에는 서한(書翰:편지)토론, 즉 문목토론(問目討論)이 자리 잡고 있다. 안동의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광주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두 분이 벌인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 그 대표적 사례 같다.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發)하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發)한 것”이라고 주장한 퇴계의 주장을 거의 25년 아래 제자인 고봉이 ‘그렇게 말씀해버리면 이(理)와 기(氣)가 두 개로 갈라지고 맙니다.’라고 되받는다. 퇴계는 “어린 애송이가 감히 스승에게 딴지 거나!”라고 언짢게 여기지 않고 고봉의 반론을 진지하게 검토하면서 편지를 주고받는다. 때로는 격론하고 때로는 하소연하듯 서로를 설득하고 논쟁하다 퇴계는 고봉의 견해를 일부 반영,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하고 기(氣)가 그것에 따른 것이고, 칠정(七情)은 기(氣)가 발하고 이(理)가 탄 것”으로 학설을 수정했다. 두 분의 앞 선배들도 토론을 꺼린 건 아니지만 이들처럼 자신의 주장을 치열하게 논쟁하는 모습은 당시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두 분이 주고받은 서한이 지식사회에 널리 알려지고 입에 오르내리면서 학술토론의 트랜드로 자리 잡았다. 그 시대 학인들이 저마다의 관심 주제를 가지고 쟁론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한 세대 아래인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계(牛溪) 성혼(成渾)도 두 분의 토론문을 읽고 서로의 견해를 밝히면서 자신들의 학문적 주장을 다져나갔다.

호남의 학맥(學脈)과 그 인물들

16세기 호남은 그야말로 인물의 저수지였다. 태인의 이항(李恒), 광주의 고경명(高敬命), 박상(朴詳), 박순(朴淳), 양자징(梁子渟), 김성원(金成遠), 기대승(奇大升), 장성의 김인후(金麟厚), 담양의 송순(宋純), 박수량(朴守良) 등등이 그들이다.

유교를 나라의 학문으로 삼은 조선에서 지역의 학문적 성쇠(盛衰)를 평가하는 일이 쉬울 리 없겠지만, 중세 이후 호남의 이학(理學) 연구 열기가 영남보다 식어 보이는 까닭이 무엇일까?

당시 호남의 학문을 선도했던 인물들의 단명(短命)과 벼슬길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51세에,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이 46세에 세상을 떠난 일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두 분의 단명이 호남 학문에 큰 그림자를 드리운 건 부정하기 어려울 거 같다. 아울러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화(士禍)에 식상한 인물들의 낙향을 꼽는다.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 그들은 누정(樓亭)들을 세우고 자연과 벗하며 어울리는 데 담양 소쇄원(瀟灑園)이 그 중심지였다. 시사(時事)를 걱정하고 고금의 학문을 논하는 모임으로 이를 계산풍류(溪山風流)라 부른다. 일종의 복합적인 문화공간으로 낭만적인 문화가 꽃피게 되었고 후대 호남문화의 한 줄기를 형성했다.

한 세대 후인 17세기 임영(林泳), 양득중(梁得中), 임상덕(林象德) 등이 나와 경기의 이단상(李端相), 박세채(朴世采), 그리고 논산의 윤증(尹拯) 등과 사승(師承) 관계를 이루면서 서로 소통, 토의하면서 학맥을 이어간다. 여기서 문예적 감성이 가득한 계산풍류 그룹과 성리학 연구를 본업으로 삼은 정통유학 그룹이 생겼다. 계산풍류의 이를테면 문예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기질은 조선 후기 호남 실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후기에는 경기 가평의 이항로(李恒老)와 학문적 성향이 유사한 기정진(奇正鎭)과 그 손자인 기우만(奇宇萬)이 출현하여 학문적 견해가 다른 학인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계승했고 전주에서는 전우(田愚)가 전통 유학을 굳게 지키며 강학 활동을 펼쳐나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 학술의 심화 발전에는 어떤 주장이든 그 시대의 권력자나 권위자의 말씀이 그대로 정설(定說)로 굳어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비판과 반 비판의 격론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아쉽게도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이러한 학술논쟁이 각 학맥의 정쟁(政爭) 수단으로 전락하여 학문적 순수성이 크게 위축되었으나, 우리 학술연구의 전통은 자기 견해를 논증으로 입증하는 토론문화이었음은 외면하기 어렵다.

특히 성리학 일변도의 딱딱한 학문 분위기와 달리 무등산 주변인 담양의 누정(樓亭)을 중심으로 만개한 호남의 문예 지향적이고 개방적인 학풍이 호남 실학의 바탕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눈길을 끈다.

글쓴이: 곽진(상지대 명예교수, (사)다산연구소 이사 )

· 저서

『김육연구』 (공), 태학사

『장현광연구』 (공), 태학사

『용산일고』 (역주)

『창와집』 (역주) 등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