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다산 글방

디케의 여신과 명심(冥心)의 정신 - 박수밀

by 귤담 2023. 11. 13.

> 다산글방 > 풀어쓰는 실학이야기

디케의 여신과 명심(冥心)의 정신

글쓴이 박수밀 / 등록일 2023-11-13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의 여신상은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칼은 불의에 대해 엄정하게 단죄하는 정의를 위한 힘을, 저울은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정의의 기준을 상징한다. 흥미롭게도 디케의 여신상은 두 눈을 눈가리개로 가리고 있다. 눈을 뜨고 보면 공정한 판결에 영향을 끼치므로 눈을 가림으로써 편견과 선입견에 흔들리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판결하라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인간은 돈과 권력, 혈연, 지연에 매이면 사사로운 마음이 생긴다.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어야 정의로운 판결이 가능해진다. 두 눈을 안대로 가린 정의의 여신상은 연암 박지원의 ‘명심(冥心)’의 정신과 한가지로 연결된다.

 

1780년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사절단에 참여하여 사행길에 오른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는 도중 뜬금없이 수석 역관에게 묻는다. “자네 도(道)를 아는가?” 이어 말하길, 도는 강 언덕에 있다고 말한다. 연암의 설명인즉슨, 압록강은 조선과 중국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 도는 강물과 언덕이 만나는 경계에 있다는 것이다. 뒤이어 연암은 도를 아는 사람만이 경계에 잘 처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학에서 자명한 도(道)가 어디에 있는지를 되묻고 있다는 점에서 연암의 질문은 지극히 도발적이고 불온하다. 연암은 도가 경계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경계의 자리는 성리학의 밖에 있기에 위험하면서 틀에 갇히지 않았기에 변혁이 일어나는 자리다. 압록강을 건너면서 말한 경계의 자리는 열하일기 전체를 지배하는 정신이 된다. 경계의 자리에 있다는 도의 정체는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 사연을 다룬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글에서 연암은 눈과 귀가 심어주는 두려움과 위태로움을 경험하고서 깨달음을 얻는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다. 명심(冥心)하는 사람은 귀와 눈이 해가 되지 않으나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병통이 된다.” “자네 도를 아는가?”라는 물음의 답은 명심(冥心)이었다. 명심은 세계를 올바로 보기 위한 현실 대응 태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눈과 귀만 의존하지 않고 사물과 현상을 편견 없이 공평하게 보는 것이다.

 

연암은 여러 장면에서 감각 기관, 특히 보는 것의 한계를 지적한다. 북경을 향해 가던 중에 중국의 가장 변방 마을인 책문(柵門)이 번화한 광경을 보고 질투심과 부러운 감정에 휩싸여 발길을 돌리고픈 충동을 느낀다. 오랑캐 변두리 땅이 조선보다 잘사는 모습을 인정하기 싫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내 반성하고는 잘못된 생각을 품은 이유가 ‘본 것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보고 들은 것이 제한적일수록, 같은 정보만 반복해서 들을수록, 자신과 다른 생각을 쉽사리 배척하고 편견과 선입견이 굳어진다. 이에 연암은 석가여래의 평등한 눈으로 두루 보면 질투와 부러움이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 말한다. 눈앞에서 한 소경이 지나가자 소경이야말로 평등한 눈을 가진 사람임을 깨닫는다. 소경은 보지 못하므로 기존의 경험과 지식에 갇혀 있지 않다. 소경은 눈으로 볼 수 없기에 마음으로 본다. 천하 세계를 다 보는 석가여래의 눈과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의 눈이 같은 상징이 된다.

 

「환희기후지(幻戲記後識)」에는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떠진 소경이 길을 잃고 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눈을 뜨고 본다는 것이 오히려 감각의 혼란을 초래하여 착각을 일으키고 참과 거짓을 뒤죽박죽 섞어버리고 말았다. 어떡하면 집을 찾아갈 수 있을까? 도로 눈을 감으라고 한다. 본다는 것이 집을 찾아가는데 장애가 되었으니 눈을 감으면 된다. 도로 눈을 감는다는 것은 지각과 경험에 갇히기 이전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연암에게 소경, 명심(冥心)하는 자, 어린아이는 모두 디케의 가려진 눈과 하나로 통한다. 평등한 눈으로 세계를 차별 없이 공정하게 보는 자이다.

 

그런데 세상을 인식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눈인데 눈을 믿지 않고서 어떻게 집(진리)을 찾아갈 수 있을까? 연암은 눈의 한계를 깊이 자각했으나 그렇다고 눈 자체의 역할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보이는 대로 보게 되면 눈은 착각을 일으키고 참과 거짓을 뒤죽박죽 인식한다. 눈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순간 편견과 관습, 허위 이데올로기에 갇혀 버린다. 그러므로 제대로 보는 눈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연암은 지금 여기의 세상이 왜곡과 허위로 가득하며 많이 모순되었다고 생각한다. 조선 사람들이 좁은 땅에서 우물 안의 개구리로 살면서 단지 한 줌의 상투를 갖고 천하에서 제일인 양 뻐기며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관습과 지배 이데올로기에 갇혀 자동화된 삶을 살아간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말한다.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믿지 말라. 기존의 가치 체계가 만든 관습과 통념을 아무 생각 없이 따르지 말라.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보기’를 하라. 한쪽의 외눈으로 보지 말고 복안(複眼)으로 보라. 눈을 감고 마음으로 보라.

 

글쓴이 : 박 수 밀 (한양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