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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의 묘제(墓祭)를 맞으며
글쓴이 박석무 / 등록일 2024-04-01
꽃 피고 새 우는 봄, 4월이 또 돌아왔습니다. 양력으로는 4월 7일이지만, 음력으로는 2월 22일, 그날은 선생이 15세의 나이로 결혼식을 올린 날이자, 75세로 세상을 떠난 날이며, 결혼 60주년의 회혼례를 맞은 날이었습니다. 그러니 금년의 4월 7일은 선생 서세 188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삼가 추모의 정을 이기지 못하며 명복을 빌어 마지않습니다. 우리 다산연구소는 창립하던 그해부터 해마다 기일을 맞으면 많은 후학들이 모여 선생의 묘소에서 묘제를 올리고 추모하며 학덕을 기리는 행사를 진행해 왔습니다.
지난 몇 년은 코로나19 때문에 초라하기 짝이 없이 몇 사람이 모여 약식 제사를 올렸으나 금년에는 예전처럼 볼품 있게 행사를 치르려고 합니다. 선생이 누구인가요. 이런 기회에 다시 한번 선생이 어떤 분이었던가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무릇 육경사서(六經四書)의 학에 있어서, 『주역』은 다섯 번 원고를 바꾸었고 그 나머지 구경(九經)도 두세 번씩 원고를 바꾸었다. 공의 탁월한 식견에 부지런하고 민첩함을 겸하여 이 큰일을 완성했던 것이다. 저술이 풍부하기로는 신라・고려 이전이나 이후에 없었던 바이다.”라고 500권이 넘는 다산의 저서가 완성되던 과정을 설명하며, 신라・고려에서 조선 때까지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분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습니다. 『사암선생연보』의 편자인 다산의 현손(玄孫) 정규영이 기록한 내용입니다.
“대체로 다산은 재주와 학문이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나 경전・사서(史書)・제자백가 이외에, 천문・지리・의약・잡방(雜方)의 책까지 넓고 정밀하게 꿰뚫어 알지 못한 것이 없었다. 13경(經)에 대하여 모두 새로운 학설을 세워 저술한 책이 집안에 가득하였다. 『흠흠신서』・『목민심서』와 같은 책은 모두 수사와 재판을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한 문자이다. 추사 김정희와 견주어도 재주가 높고 실학에 대한 업적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근세의 일인자일 뿐 아니라, 중국의 학자들과 비교해도 기효람(紀曉嵐)・완운대(阮芸臺)의 아래에 세우면 불만일 것이다.”(홍한주, 『지수염필』)라고 말하여 조선에서도 최고이고 중국의 최고 학자들의 위에 있을 학자라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다산과 동시대의 노론계 최고 문장가이자 학자이던 대산 김매순은 다산의 저서를 읽어보고 “유림의 대업이 이보다 더 클 수는 없도다(儒林大業, 莫之與京)”라고 평하여 유학자로서는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음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해방 후 한국 최고의 한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위당 정인보는 다산의 문집 『여유당전서』의 간행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산 학문의 전모를 가장 정확하게 알려준 최고의 학자인데, 그는 다산이야말로 “조선 유일의 법정가(法政家)이다”, “다산의 경학(經學)은 민중적 경학이다”라고 말하여 최고의 유학자이면서 법학과 정치학자요 주자학에서 다산 경학으로 새롭게 해석한 민중적 경학임을 세상에 알려주었습니다.
세상에서 전해지고 있는 말로,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있고 독일에는 괴테가 있으며 조선에는 정약용이 있다”라고 말하는데, 왜 다산은 셰익스피어나 괴테처럼 세계적인 명성에서 뒤져 있을까요. 이번 188주기 묘제를 위해 우리 모두 다산의 묘소 앞에 모입시다. 선생의 위대한 학문에 대한 찬사를 올리고, 선생의 탁월한 애국심과 백성 사랑의 뜨거운 마음을 우리 모두가 이어받기 위해 모여서 제사를 올립시다. 요즘처럼 민주주의가 후퇴해버린 때, 선생의 민본정신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선생에게 절을 올리는 기회를 갖도록 합시다.
글쓴이 : 박 석 무 (다산학자・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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