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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김대건 신부와 홍익자연 정신
글쓴이 이기영 / 등록일 2023-01-10
한국의 천주교는 교조적 통치로 부패한 조선을 개혁하려는 남인 사림파 학자들에 의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자생적으로 탄생했다. 이를 높이 산 교황 바오로 2세는 1984년 직접 한국을 방문해 무려 103명의 조선 순교자 들을 성인으로 추대했다. 개화기 초기에 성호 이익 계열의 남인 계통 선비들은 백성의 교화보다는 수직적 통치 논리가 되어버린 주자학을 혁파하기 위해, 그리고 관리들의 매관매직과 수탈로 인하여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실학운동을 시작했다. 남인 사림파 선비들이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구의 과학문명에 눈을 뜨면서 만민평등과 사랑을 담은 천주학을 접하고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회가 만들어진 것이다.
지난해 11월 말 개봉한 영화 ‘탄생’은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1821~1846, 세례명: 안드레아)의 목숨을 건 개혁, 즉 의(義)를 향한 탐험적 발자취를 조명한 영화로, 김대건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에 16년 앞서, 서울(Seoul)을 포함하는 조선의 지명이 처음으로 영문자로 기록된 지도인 조선전도(1845)를 제작하는 등의 근대화 활동을 한 선구자로 그렸다. 만일 그때 조선이 당시 세도정치에 굴복하지 않고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 중국어, 스페인어 등 5개 언어를 구사할 뿐 아니라 지리학, 조선학, 측량학 등 다양한 학문을 습득한 김대건을 살려 개혁, 개방의 길로 나갔다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고 근대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며칠 전 딸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사제가 되기 위한 탐험을 그린, 이 영화 '탄생'을 다시 관람했다. 그 전날도 식구들이 다 함께 이 영화를 보았는데 고증이 충실하고 이야기도 좋아 딸을 꾀어내 한 번 더 본 것이다. 관련 도서를 찾아 읽고 방송 동영상을 참고해 내용을 충실히 알고 나서 보니 훨씬 더 감동적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 1845년 사제 서품을 받은 지 겨우 1년 만에 스물다섯의 나이로 한강 변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당시 조선왕조는 주리론적 통치논리인 주자학을 신봉해 명나라에 추종하며 정권을 이어오다가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도 무시하며 소중화를 자처했다. 그러나 세도정치의 폐해로 어지럽혀진 조선 조정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이 힘없이 무너지자 국제정세도 모른 채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때문에 어린 헌종은 국제정세와 서학을 아는 인물이 필요했지만, 외환을 부를 수 있는 김대건이란 존재를 하루라도 빨리 없애야 한다는 신하들의 집단항명으로, 김대건의 참수를 막지 못했다.
한국 최초의 신자인 이승훈은 1783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서 40일간 머물면서 필담으로 교리를 배워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이승훈은 이벽, 권일신, 정약용 등에게 세례를 주고 명례동 김범우의 집에서 정기적 신앙모임을 열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되도록 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23세 때인 1784년 큰형수 제사를 위해 고향 마제에 갔다가 돌아오는 배 안에서 큰형수의 동생인 이벽으로부터 천주교에 대한 설명을 듣고 천주교 관련 서적을 건네받아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한국의 가톨릭은 서양 제국에서 보낸 선교사가 아니라 청나라를 오가던 사신과 역관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태어난 것이다. 남인 사림파들은 먼저 청나라를 드나들면서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접하고 실학을 발전시켰는데, 특히 천주실의를 탐독한 다산은 중용을 재해석한 중용강의보를 써서 개혁을 꿈꾸던 정조의 총애를 받는다. 그러나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 이후, 노론벽파가 세력을 잡자 남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1801년 신유박해에 이어, 1839년에는 기해사옥으로 앵베르 주교 이하 모방, 샤스탕 등 세 신부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또한 이 프랑스 신부들을 데려온 정하상과 유진길도 참수되어 교회는 완전히 무너졌다. 박해 전 모방신부는 성직자 없이 미사를 드린다는 것이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알리고 한국인 사제를 양성하기 위해 청년 3명을 마카오로 보냈는데, 이들 중 김대건이 제일 먼저 1845년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는 배를 타고 비밀리에 입국해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백령도에서 외국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뱃길을 개척하다가 잡혀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는다.
그러나 아무리 쇄국정책으로 일관해도 근대화는 거스를 수 없는 세계의 흐름이었다. 그 알맹이는 평등화로, 이는 조선의 주자학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치였으므로, 박해가 일어난 것이다. 초청하지 않은 서양의 방문에 헌종은 놀랐지만, 16세 김대건은 이를 적극적으로 뜨겁게 받아들여 죽음을 무릅쓴 고난을 선택해 조선을 돕고자 했다. 평등화의 가치를 가슴에 안고 국경을 걸어서 넘어 마카오로 유학을 결행한 그는 6개월 동안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마카오에 도착해 사제수업을 시작했고 이로 인하여 박해 때 친구와 가족까지 잃었다. 관헌의 감시를 따돌리고 국경을 수차례나 드나들며 한국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고자 노력하면서 1846년에 한국인 최초의 신부가 된 김대건은 안타깝게도 겨우 1년 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순교했다. 그러나, 이후 조선은 결국 일본, 미국 등의 외압에 나라를 개방하고 1886에는 프랑스와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에 선교의 자유가 허락된다.
이렇게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탄생한 조선의 사상적 토양은 권력을 통한 사리사욕을 좇기보다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백성을 존중하고 검소하게 사는 풍류도 선비들의 의(義)로움에 있다고 생각된다. 김대건 신부가 꿈꾼 빈부귀천이 없는 만민평등의 미래 세상은 사실 새로운 세상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 9,000년 전에 시작된 부도(符都), 즉, 하늘의 뜻에 따라 치세를 하는 연방제국가인 배달국과 단군조선 시대는 강제적 법은 최소화하고 모든 백성들이 자재율(自在律)로 사는 상생의 세상이었다. 이는 자연철학에 기반한 순리적 평등사상으로 우리 민족의 수천년 역사를 관통해온 홍익인간 정신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홍익인간 정신은, 생육신 김시습에게 선비정신을 이어준 최치원의 풍류도에도 나타나 있으며, 최근 재야사학자들의 큰 관심사인 ‘천부경(天符經)’적 세계관이 그 기원으로 생각된다. 김시습의 징심록 추기를 실은 저서 부도지에 따르면 민족의 창세기인 부도지를 포함한 징심록이 신라시대 영해 박씨 집안을 통해 천여 년을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정조가 등용한 남인 사림파 선비들이 꿈꾸던 백성을 소중히 받드는 홍익인간 정신은 이미 징심록과 금척으로 예악의 정치를 펼친 세종대에서 잠시 꽃을 피웠으나 이어지지 못하고 단종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세조의 탄압으로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생태적 가치를 지닌 '한사상'의 민주주의 DNA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핏줄 속에 남아 동학 및 3.1 운동을 통해서 이어졌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4.19, 5.18을 거쳐 세계적 이목을 끈 촛불 시민운동으로 귀결되었다고 사료된다. 이젠 대학의 사학자들도 주변강대국이 손댈 수 있었던 식민사관사료들을 실증사료로 인정하는 것에서 벗어나 겨레의 혼을 지키기 위한 일념으로 목숨을 걸고 민간에 숨겨져 전해져 내려온 희귀한 고대 사료들을 함부로 위서라 치부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근원적인 연구를 시작해 그 심오한 철학적 가치부터 재평가해야 한다.
특히 우주가 율려, 즉 파동으로 시작되었고 시작도 끝도 다 하나라는 일원론적 자연철학인 한사상의 세계관은 빅뱅 이론이나 최근 노벨상을 받은 양자얽힘 현상으로 우주가 하나라는 과학적 사실과 부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홍익인간 정신은 바로 자연이 인간과 한 몸이니 자연을 본받아 자연을 파괴하는 과도한 물질소유 추구 탐욕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서로 필요한 만큼 나누며 살자는 유기생태적 쌍무적 민본주의 사상이다. 그리고, 홍익자연정신은 인간은 물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만물들을 이롭게 하자는 정신으로, K-spirit으로 정의해보자. 지금 국내외에서 정치, 경제, 환경, 국제관계를 포함한 여러 분야에서의 문제점과 갈등이 노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K-spirit을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과 남북한은 물론 전 세계인들과 공유해 기후위기 극복에 앞장서며 위기의 인류문명을 선도하자.
글쓴이 : 이기영(초록교육연대 공동대표, 호서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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