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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5월 2일

by 귤담 2023. 3. 25.

오늘의 역사 5월 2일

 

 

멧사리나 눈빛 속에 강물이 흐른다

刺殺의 늪에 유혹하는 클라우디우스

우리들 몸에 부과된 소득세 같은 달이 뜬다.

                       -이재창 시인의 「年代記的 몽타주·3 - 물의 변증법」 전문

 

 

*국기의 날: 폴란드

*교사의 날: 부탄, 이란

*5월(음력4월 즈음) 모든 만물에 가지와 잎이 생긴다고 해서 여월(餘月)이라고도 함, 독일어 5월(Aprilwetter)은 ‘4월날씨’라는 뜻으로 날씨가 변덕이 심하고 비가 오락가락한다고 해서 ‘미친 날씨’ 쯤의 뜻으로 쓰임

 

 

937년 [음]태조(太祖) 20년, 김부(金傅)가 신라의 국보인 성제대(聖帝帶)를 바침

1012년 [음]현종(顯宗) 3년, 황룡사(皇龍寺)탑을 수리함

1036년 [음]정종(靖宗) 2년, 전국 명산의 땔나무 채취를 금함

1059년 [음]문종(文宗) 13년, 현릉(顯陵) 묘실(廟室)에 도적이 듦

1094년 [음]선종(宣宗) 11년, 왕이 연영전 내침에서 훙서함

1428년 [음]세종 10년, 호구 대장(戶口臺帳)의 조사 방식과 서식 등을 정함

ㅡ호조에서 계하기를, "각인의 호구(戶口)는 서울은 한성부가, 지방은 각 고을의 수령이 그들의 장고(狀告)에 의하여 작성하여 주게 하고, 그 서식(書式)은, 어느 대 연호 월 일, 호구는 부(府)에 있는 어느 해에 작성한 호적에 준하여, 호구 대장(戶口臺帳) 내의 어느 부(部)에 있는 어느 방(坊) 몇째 동리에, 지방이면 어느 면(面) 어느 동리에 거주하는 아무개·직(職)·성명·나이·본관·사조(四祖), 처 아무개·나이·본관·사조(四祖), 거느리고 있는 자식 아무개 아무개, 노비 아무개 아무개 등을 기재하게 할 것이며, 준급(准給)하는 자는 한성부로 하고, 지방이면 주·현으로 하고, 주(周)042) ·협(挾)043) ·고친 글자의 수와 〈그것이〉 있고 없음을 모두 서명(署名)하되, 횡서(橫書)로 쓰고 관인(官印)을 찍어, 한 벌은 입안(立案)에 붙여 두고, 한 벌은 장고(狀告)한 호주에게 내어 주며, 거듭 내주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64년 [음]세조 10년, 원각사(圓覺寺)로 세우게 함

1486년 [음]성종 17년, 전라도에 버려진 아이가 104명에 이름

1496년 [음]연산 2년, 함경도 삼수·갑산에서 전염병으로 300여 명이 죽음

1505년 [음]연산 11년, 시강원(侍講院)을 혁파함

1563년 [음]명종 18년, 명나라에 종계(宗系) 개정을 요청함

1571년 [음]선조 4년,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사고(史庫)에 봉안함

1588년 [음]선조 21년, 명나라에서 종계(宗系)가 개정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가지고 옴

1592년 [음]선조 25년, 선조가 개성에서 유숙함(임진왜란)

1601년 [음]선조 34년, 명나라에서 《태학지(太學志)》를 사 오게 함

1632년 [음]인조 10년, 인조의 생부인 이부가 원종(元宗)으로 추존됨

1688년 (조선 숙종14)천체 측정기구 준기옥형(樽機玉衡) 완성

1689년 [음]숙종 15년, 인현 왕후(仁顯王后, 숙종 비)를 폐함

ㅡ왕비(王妃) 민씨(閔氏)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리기를,

"내가 양조(兩朝)291) 의 폐비(廢妃)할 때의 고사(故事)를 보건대, 윤씨(尹氏)가 잘못한 바는 단지 투기(妬忌)에 있었는데, 죄상이 이미 드러나자 성묘(成廟)께서 종사(宗社)를 위해 깊이 근심하고 먼 앞날을 생각하시어 단연코 폐출(廢黜)하셨다. 더욱이 오늘날 민씨는 허물을 지고 범한 것이 윤씨보다 더하고, 윤씨에게 없었던 행동까지 겸하였으며, 선왕(先王)·선비(先妃)의 하교를 지어 내어 종사에 죄를 얻었다.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아 사제(私第)로 돌려보내니, 종묘에 고하고 교서(敎書)를 반포하며 그 부모의 봉작(封爵)을 빼앗는 등의 일은 한결같이 구례(舊例)에 의하여 즉시 속히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중궁(中宮)은 왕후의 자리에 오른 지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안으로는 후궁(後宮)의 투기와 이간이 있었고, 밖으로는 간신(奸臣)의 부추김이 있어서, 위험이 핍박하는 변(變)에 빠져 폐출(廢黜)의 액운(厄運)을 당하였다. 임금이 바야흐로 총애에 치우치고 분노에 과격하여, 무릇 잘못을 크게 드러내어 그 죄를 만드는 것에 이르지 아니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동정과 언어에 일찍이 한 가지 일도 지적해 낼 만한 잘못이 없었으니, 이에 신민(臣民)이 비로소 곤의(壼儀)292) 의 결함이 없음을 더욱 알았다. 아아! 이와 같지 아니하였다면 어찌 능히 뒤에 명철(明哲)한 임금이 회오(悔悟)하여 그 과실을 재빨리 고친 것이 일식·월식이 지난 뒤 해와 달이 다시 광명을 찾는 것과 같을 수 있었겠는가?

1694년 [윤]인현 왕후(仁顯王后)의 복위 책봉례를 연기함

1699년 [음]숙종 25년, 해주(海州)와 개성부(開城府)에서 조수(潮水)가 창일하였고, 강화부(江華府)에서는 태풍이 불고 해일(海溢)이 있었다. 강원도(江原道) 철원(鐵原)·금성(金城)에서는 우박이 내렸고, 충청도(忠淸道) 한산(韓山)에서는 해일이 있었다. 평안도(平安道) 강계(江界)에서는 눈이 내렸고, 창성(昌城)에서는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계란만하였다. 황해도(黃海道) 수안(遂安)·장연(長淵)에서는 서리가 내렸다.

1741년 [음]영조 17년, 처음으로 한림 권점법(翰林圈點法)을 시행하여 19인을 선발함

1762년 [윤]영조 38년,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파직됨, 신만(申晩)을 영의정으로 삼음

1765년 [음]영조 41년, 구선복(具善復)이 훈련대장(訓鍊大將)이 됨. 구선복은 구선행(具善行)의 종제(從弟)인데 교대로 병권(兵權)을 장악(掌握)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다.

1778년 [음]정조 2년, 후궁을 들이고자 13~16세 처자들에게 금혼령을 내림

1785년 [음]정조 9년, 공납물(貢納物)의 규격을 일정하게 함

1790년 [음]정조 14년, 전염병으로 인해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여제(癘祭)를 지냄

1809년 [음]순조 9년, 규장각 관리를 역임한 자에게 증직(贈職)하도록 함

1835년 [음]헌종 1년, 청주성 화약고(火藥庫)가 벼락으로 파괴됨

1863년 (조선 철종 14) 석왕사 중건

1895년 (고종32)덕수궁에 최초로 전기 가설

1896년 (고종33)동대문 밖 삼선평서 영어학교(교사 허치슨), 화류회 개최(우라나라 최초 운동회, 육상 경기)

 

1920년 김광제·노병희 등, 조선 노동 대회 결성

1921년 시인 조병화 출생

1924년 경성제국대학교 예과 개교

1925년 간도 조선청년총동맹, 간도 용정에서 창립총회 개최

1927년 흥남에 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설립.

1927년 마봉옥, 한국 최초의 마라톤 공인기록(3시간 29분 37초) 수립.

1930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이승훈 세상떠남(66세),

ㅡ44세때 평양 모란봉에서 안창호의 강연에 감명받아 술 담배 끊고 오산학교 세움, 신민회 가입, 1910년 기독교 입교, 평양신학교 졸업후 목사가 됨, 1911년5월 신민회사건으로 제주도 귀양, 1911년9월 105인사건으로 4년2개월 옥살이, 1919년 3.1운동으로 3년옥살이, 1924년 동아일보사장

1936년 영화감독 임권택 출생

1940년 정부 저축 강요

1941년 경성제국대학 이공학부 발족

1942년 조선총독부, 전국 3천여 국민학교에 일본어 강습회 개최 결의

1947년 재일 거류민단, 외국인 등록령 반대 적정화(適正化) 운동 위원회 결성

1948년 직업 소개소 발족

1955년 한-미 민간구호협정 조인

1956년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 후보, 한강 백사장 선거 연설(청중 30만 명)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 자유당 126석 민주당 79석 무소속 27석

ㅡ의원정수 233명을 뽑는 제4대 민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선거에는 후보자 841명이 나서 평균 3.6대 1의 경쟁률을 보였고, 유권자는 1천16만명이었다. 정당별 당선자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통일당 1명으로 여당인 자유당이 의석의 54% 를 차지했으나 개헌선에는 크게 미달했다. 특히 자유당은 서울에서 15석중 겨우 1석을 차지하는 등 대도시에서 참패해 민심의 흐름이 잘 드러났다. 그 후 6월 7일 개원하여 국회의장에 이기붕, 부의장에 이재학, 한희석을 선출했다.

제4대 민의원선거는 선거공영제와 정당 참관인제 등 공명선거를 위한 장치까지 마련했으나 대법원에 의해 선거무효 9건, 당선무효 2건이 선고될 정도로 전국 곳곳에서 부정선거가 판을 쳤다.

이로인해 제 4대 국회는 임기 4년을 채우지 못한 채 1960년 해산되고 마는 비극의 운명을 간직한 국회가 됐다. 어쩌면 4대 국회는, 4ㆍ19혁명의 격류에 밀려 만 2년 1개월 남짓하여 죽을 「死」자의 팔자를 면치못한 사대(死代)국회였는지도 모른다.

1960년 국회의장에 곽상훈 의원 선출

1961년 벨기에와 외교관계 수립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주민등록법 통과

1963년 윤치영, 민주공화당 당의장에 임명

1964년 민주-자민-국민 3당 통합선언

1964년 기본 환율, 3일부터 255대 1로 개정한다고 발표

1964년 서울 도동서 4층집 무너져 14명 사망 27명 부상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진해에서 “학생 데모는 애국 아니다. 언론은 무책임하다. 지식인은 옹졸하다”고 연설

1968년 국무회에서 한글전용 5개년계획(안) 의결되고, 이어 1970년부터 한글 전용을 실시하기로 결정됨

1968년 국회 국방 위원회, 〈향 토예비군 설치법 개정안〉 변칙 통과

1972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몰래 평양방문, 김일성·김영주(노동당 조직부장)와 회담

ㅡ적대적 관계였던 미국과 중국이 이른바 ‘핑퐁외교’를 통해 중국 베이징에서 화해의 축배를 들고 양국 간 거리를 서로 좁혀가고 있던 1972년, 한반도에도 데탕트(긴장완화)의 바람이 불었다. 미·중 간의 밀사가 키신저였다면 한국의 밀사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었다.

1972년 5월 2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정홍진 대한적십자사 과장과 비서·의사 각 1명씩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판문점을 경유, 평양을 방문했다. 출발에 앞서 이후락은 만일을 대비해 청산가리를 챙겼다. 그만큼 긴장관계가 첨예하던 때였다. 이후락은 5월 5일까지 나흘간을 평양에 머물며 김일성과 두 차례 면담을 갖고 얽혀 있는 실타래를 풀어보려 했다. 김일성도 “과거는 과거고 다시는 남침 않겠다”며 ‘남침’을 시인했고, 청와대를 습격하려 했던 1·21사태는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김일성은 박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5월 29일 박성철 제2부수상도 서울로 보냈다.

이후락이 방북하기 전에 행해진 남북 간 비밀회담은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남북이산가족찾기’를 제안하고 북한이 이에 동의하면서 계기가 마련됐다. 11월 19일, 판문점에서 가진 제9차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에서 정홍진이 북한에 비밀접촉을 제의함으로써 시작된 11차례의 비밀접촉은 3월 28일 정홍진을 북한으로 보내 이후락의 방북을 합의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이후락·박성철의 상호 방문으로 최소한의 신뢰를 쌓았다고 판단한 남북한은 마침내 7월 4일, 이후락과 박성철이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7·4 남북공동성명’을 동시에 발표했다.

1975년 서울대 교수 일동, 〈국가 안보에 적극 참가〉 결의문 채택

1977년 일본 북한의원외교단8명 입국 처음 허용

1977년 단국대발굴팀 충북 진천에서 국내최대 마애여래상 발견

1979년 발트하임 유엔사무총장 방북, 김일성과 한반도문제의 유엔 역할 논의

1980년 대학생들, 민주화 투쟁·계엄 철폐 요구 가두 시위 격화

1980년 한국-키리바시 국교 수립

1980년 서울형사지법,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 선고공판(이재문등 4명 사형)

1981년 에르난도 투르바이 컬럼비아 하원의장 내한

1981년 정부, 청백리상수상자로 박대현외 6명 선정발표

1981년 국립 경주박물관, 경북 월성 내남면 덕천리에서 신라시대 유리공장 터를 발견

1983년 잭 앤더슨 컬럼, 미국은 이미 한국에 전술핵 무기를 배치휴전선지역에 핵지뢰를 부설했다고 밝혀

1983년 정부, PLO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지역 회의에 대표단 6명을 파견(말레이시아)

1983년 문교부, 성교육 교재 보급

1985년 전두환 대통령, 3당대표에게 임기보다 더도 덜도 않겠다고 밝힘

1986년 도시고속도로인 올림픽대로(행주대교 남단-암사동) 개통

ㅡ서울시가 한강종합개발사업의 하나로 건설한 올림픽대로가 착공 3년7개월 만인 1986년 5월2일 개통됐다

한강상류인 행주대교 남단에서 강동구 암사동 까지 한강 남쪽 강변을 따라 서울의 동서를 관통하는 올림픽대로는 총연장 36km, 폭17.4∼22m의 차량 전용도로로 총사업비 1412억원이 투입됐다

1986년 대처 영국총리 방한

1987년 민정당, 민주당의 정강정책ㆍ총재취임사 일부를 문제삼아 4개항 공개질의

1987년 서울大 교수 122명, 시국선언

1987년 신부ㆍ목사 189명(경찰집계), 서울등지서 호헌 철폐 요구하며 단식기도

1987년 정부·민정당, 지방자치제 2단계로 나누어 88년 1월부터 실시키로

1988년 제8차 한미 무역실무회의 개막

1988년 81년 강제 해산된 청계 피복노조, 노조설립 신고필증 교부받아

1989년 문교부, 각 시도 교육위원회에 교원노조 결성 참여교사의 면직 지시

1989년 과학기술원 최계 박사팀은 고온에서 강도가 높고 내식성이 강한 새 합금물질 KM1557을 개발

1989년 공안합수부, 문익환목사 입북과 관련 김대중 총재· 이종찬·문동환씨 등 5명 조사

1990년 민족극 운동가 임진택씨(40)는 80년 5월 광주 항쟁 '10일의 뜨거운 함성'을 2시간짜리 판소리 발표

1991년 김대중 신민당총재, 한국의 유엔단독가입은 남북 긴장만 악화-유엔사무총장에게 서한을 통해 입장 전달

1991년 남북 음악인 합동공연-일본 환동해국제예술제

1992년 일본 공동통신, 김일성 북한주석이 한ㆍ중 수교 연기를 중국에 요청했으나 강택민 총서기는 거절, 보도

1992년 한국-중국,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3년 서울시, 시청과 22개 구청 및 주차능력이 있는 동사무소 주차장을 공휴일에 한해 개방.

1994년 조선일보, 북한이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일방적 으로 철수하겠다고 우리측에 통보한 사실을 보도

1994년 북,정전위철수 평화협정요구-북핵 시간끌기의혹

1995년 여성의 전화 어머니 폭행한 아버지를 죽인 전경진 씨 구명운동 전개

1996년 민변 외무부장관 상대로 정보공개청구거부처분 취소소송 제기

1996년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착공70년만에 완공

1997년 정부, 아.태경제협력체(APEC) 역내 해양 환경 보전을 위한 회원국간의 협력체제구축을 APEC에 제의

1997년 박홍 전 서강대총장,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북한지령수수 발언 관련 7천만원 배상 판결

1998년 서울지역 집중호우 지하철7호선 11개역사 침수 운행중단

ㅡ5월 1일 밤부터 내린 비로 서울 지하철 7호선이 범람한 중랑천 물에 침수돼 5월 2일 오전 7시40분부터 지하철 운행이 전면 중단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물은 마치 점령군처럼 하행선쪽으로는 사가정역까지,상행선으로는 마들역까지 차례차례 진입해 7호선 강북구간 대부분을 잠식했다.

이번 지하철 7호선 침수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중랑천 지하철 6호선 6-12공구 공사장의 임시제방(가물막이) 붕괴였다. 그러나 이 임시제방의 붕괴에는 몇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하천변에 붙어 있는 6호선 공사장이 침수되면 7호선은 물론,5호선,2호선까지 연쇄적으로 침수돼 서울 전역의 지하철 교통이 마비될 수 있다는 취약점을 사전에 알고서도 대비책을 소홀히 한 것이 이번 사고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안전사고에 미리 대처하지 못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서울시 및 서울 지하철 건설본부와 시공사인 현대건설 등은 서로가 책임소재를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모습이였다. 이번 사고로 1천억원이 넘는 피해를 입었고 복구작업 지연 등으로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1998년 박보희 한국문화재단 이사장을 단장으로 하는 리틀엔젤스예술단 64명 평양 도착, 10여년만의 남북문화예술 교류

ㅡ1일 오전 첫 민간차원의 평양공연을 위해 김포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박보희(朴普熙) 한국문화재단 이사장과 리틀엔젤스 예술단은 2일 오후 평양에 도착, 송호경(宋浩京) 북한 아시아·태평양평화위 부위원장 등 관계자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후, 공항에서 북한 만경대소년궁전 예술단원들과 함께 ‘우리의 소원’, 북한 애창곡인 ‘반갑습니다’를 불렀다.

이어 이날 저녁에는 인민문화궁전대연회장에서 열린 환영만찬에 참석,한복차림으로 ‘그리운 금강산’과 ‘선구자’를 불렀다.

리틀엔젤스 예술단은 평양에서의 첫밤을 보통강호텔에서 보낸 후, 평양 시내를 둘러봤고, 평양 시민들은 리틀엔젤스 단원들이 손을 흔들자 손을 마주 흔들며 환영했다.

방문 이틀째인 3일에는 평양 시내 개선문과 주체사상탑, 노동당 창건 50주년 기념탑, 놀이동산 등을 방문했다.

리틀엔젤스 예술단은 4, 5일 평양봉화극장에서, 7일 만경대 학생소년궁전에서 세 차례 공연을 갖고 금강산과 묘향산을 관광했다.

1998년 민속학자 임석재씨 별세

ㅡ설화, 민요, 무가 수집에 평생을 바친 민속학자 임석재씨가 1998년 5월 2일 별세했다. 임석재씨는 송석하와 더불어 우리 민속학을 개척한 민속학계의 제 1세대 학자였다. 1958년 문화인류학회를 결성, 초대 회장을 맡은 것을 비롯, 굿 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펼쳤다.

1918년 경기고등학교 전신인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연루돼 퇴학된 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부터 1967년까지 서울대 사범대 교육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그의 업적은 설화-민요-무가-민속극 등 민속학 전반에 걸친 자료조사와 연구에 있다. 그의 학자적 혜안은 1960년대 이후 녹음기를 둘러메고 전국을 돌며 각 지역의 민요를 수집한 데서도 드러난다. 가사중심으로 진행되던 당시의 민요사연구풍토로 볼 때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1995년 5장의 음반과 책으로 된 `한국구연민요`가 발간돼 근대화에 밀려 자칫 사라질 뻔한 우리 민요가 보존될 수 있는 길이 트게 됐다. 1960년대 이후 한국문화의 근간을 무속으로 생각하게 된 그는 이후 무가연구에 몰두, 1970년 우리 무속연구의 기틀을 닦은 논문으로 평가받는 `한국무속연구서설`을 발표했다. 1989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1994년 자랑스런 서울대인상을 받았다

 

2007년 1기 대법원 양형위원회 발족

ㅡ1기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김석수(金碩洙·75) 위원장은 2일 위원회 출범식과 1차 회의를 한 뒤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국민의 신뢰를 벗어난 양형이 있었다고 하는데 앞으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상식의 범위에서 양형 기준을 만들겠다” 고 밝혔다.

양형위원회는 ‘투명하고 예측가능한 양형’, ‘신뢰받는 형사재판’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이날 출범한 대법원 산하 위원회다.

대법관 출신으로 30년 가까이 몸 담았던 사법부로 복귀한 김 위원장은 “수십 년간 지속된 관행을 바꾸는 일인 만큼 먼 길을 바라보되 주춧돌을 한 장씩 확고하게 쌓아간다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진행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 “법관 시절 기억을 떠올려 봐도 판사가 형량을 정하는 것은 어려운 과정” 이라면서 “형량을 정하기 위해 동료나 선배 판사에게 묻기도 하는데, 양형 기준이 나온다면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 이라고 덧붙였다.

김 위원장은 서울지법 남부지원장, 부산지법원장, 법원행정처장, 대법관, 대법원 공직자윤리위원장을 역임했고 2002∼2003년에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2007년 친일 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 위원회, 처음으로 친일파 9명의 재산 환수 결정

2008년 청계광장에서 미국산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시작,

ㅡ경찰추산 1만여명, 5.8 1,500여개의 인터넷 카페와 시민단체 광우병대책회의 결성, 5.22 이명박 대통령 대국민담화 “쇠고기 문제 송구”, 5.24 제23차 촛불문화제에서 첫 가두시위, 정부 장관고시 강행, 첫 유모차부대 등장, 5.31 경찰, 물대포 동원 228명 연행 과잉진압논란, 6.5-6.8 72시간릴레이 국민행동, 6.10 명박산성 등장, 촛불시위 규모최대(주최측 추산 서울70만 전국100만, 경찰추산 서울8만 전국14만), 6.19 이명박 대통령 특별기자회견, 6.29 서울광장 원천봉쇄, 6.30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서울광장서 첫 번째 미사집전, 7.3 개신교 시국기도회 개최, 7.4 불교 시국법회 개최, 7.5 국민승리선언 촛불문화제(주최측 추산 50만 경찰추산 5만명), 7.6 촛불집회 수배자6명 조계사 피신, 8.15 100차 촛불집회, 서울광장원천봉쇄로 서울시내 곳곳에서 산발적 시위, 8.27 서울광장에서 정부규탄 범불교도대회

2009년 신종플루 첫 확진환자 발생

2014년 지하철2호선 열차 상왕십리역에서 추돌 승객170여명 부상

ㅡ오후 3시 32분 쯤 서울 지하철 2호선 상왕십리역에서 열차 추돌 사고가 발생했다 이는 뒤따르던 차량이 급히 멈춰 서다가 발생했다.

사고가 난 뒤 앞차 승객들은 승강장을 통해 빠져나왔다. 선로에 멈춰 선 뒤차의 승객들은 객차를 나와 반대편 선로를 통해 탈출했다. 승객들은 “이 과정에서 대피 안내 방송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날 사고로 1000여명의 승객 중 200여명이 다쳤고 이 중 154명이 한양대병원 등 서울 시내 10개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대부분은 경상이지만 2명은 중상을 입었다.

서울시는 사고 직후 상왕십리역 주변에 시내버스 33개 노선 59대를 투입하고, 개인택시 부제도 해제했다. 하지만 복구가 밤늦게까지 지연되고, 지하철 운행이 약 8시간 이상 중단되자 시민들 항의가 빗발쳤다.

서울시는 사고와 관련해 3일 오후 3시 브리핑을 갖고, 지하철 추돌사고가 신호기의 고장으로 인해 열차 자동정지 장치(ATS)가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것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2014년 기초연금법 국회통과

2015년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 올림픽경기장 공연, 티켓가격은 30만원부터 시작

2016년 국가인권위원회 정부가 입법예고한 테러방지법시행령안에 위헌가능성 있다며 보완의견 제시

2016년 가습기살균제 제조사 옥시레킷벤키저 사과 기자회견

2019년 방탄소년단 2019 빌보드 뮤직어워드(라스베이거스) 톱 듀오·그룹 상 본상 수상 톱 소셜 아티스트 상 3년 연속 수상, 한국가수 첫 빌보드 뮤직 어워드 본상 수상

2020년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효석 작고

2021년 이재용, 상성생명 최대주주 등극...삼성 지배력 강화

2021년 택배노조 ‘아파트 갑질’ 해결 총파업 6일 결정

2022년 오늘부터 실외 마스크 해제

2022년 국회, 오늘 한덕수 총리후보 등 尹정부 1기 내각 6명 청문회

 

 

 

73년 로마군 유대인의 마사다 요새 정복

373년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 아타나시우스 작고

907년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군주 보리스 1세 작고

1194년 잉글랜드 왕국의 포츠머스가 리처드 1세의 왕실 헌장에 의해 도시로 인정

1506년 이탈리아탐험가 콜럼버스 세상떠남

1360년 중국 명조의 제3대 황제(1402~24 재위) 영락제 출생

1519년 르네상스 미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상떠남(67세)

ㅡ천재 중의 천재, 몇 세기를 앞서간 과학자, 르네상스를 이끈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둘러싼 수사는 실로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르네상스기의 뛰어난 화가, 기계학·해부학·건축학 등에 비상한 능력을 보인 자연과학자가 구체적으로 그를 설명하는 수식어다.

다빈치는 화가로 널리 알려져 왔으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외에는 화가로서 이름을 알릴 만한 작품이 흔치 않은 화가다. 열다섯 남짓한 회화 가운데 몇 점은 미완성이고 또 몇 점은 공동작품이기 때문이다. 조각은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신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듯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손꼽히는 것은 어느 분야든지 그가 관심을 갖고 파고든 후에는 여느 전문가 못지않은 업적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처 분화되지 않은 해부학, 천문학, 지질학, 항공학, 기계공학, 지리학, 광학 등의 다양한 분야를 섭렵해 '과학'이라는 용어가 아직 생소한 시대에도 사물을 과학적으로 바라보고 과학적으로 사색했다. 특히 사물에 대한 정교한 습작과 라이트 형제에 영감을 준 비행기 설계도 등의 각종 기록을 1만 3,000쪽 분량의 노트에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일종의 성형술을 창안하고 정교한 카메라의 반사장치를 발전시키고 콘택트 렌즈와 증기의 힘 등을 기록한 것만으로도 그가 발명가의 반열에 오르는 데 손색이 없지만, 특히 해부학에서 보인 노력과 성과는 단연 발군이다. 다빈치는 인체의 비밀을 풀기 위해 30여구의 시체를 해부했다. 교회가 인체의 분해를 엄격히 금했음에도 송장까지 철저히 해부했으며 간과 심장 등까지 조각조각 저몄다. 평생을 이탈리아의 피렌체와 밀라노에서 생활했으나 프랑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519년 5월 2일 67세로 숨졌다.

ㅡ‘모나리자’ ‘최후의 만찬’(한 귀족의 부탁으로 산타 마리아 그라치에 성당 식당벽에 몇년에 걸쳐 그린 작품, 유다 얼굴을 못그려 고민하다 벽화를 완성치 않는다고 화를 내는 수도원장의 얼굴을 보고 완성, 유다 얼굴이 자기와 닮은 것을 안 수도원장은 다시는 그 식당에서 밥을 먹지않았다고 함), 지리 천문 의학 수학 역사 등 모든 분야에 뛰어나 헬리콥터와 장갑차 낙하산 발명, 정밀한 인체해부, “충실하게 보낸 하루가 행복한 잠을 이루게 하듯이 충실하게 보낸 일생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한다.(As a well-spent day brings happy sleep, so life well used brings happy death.)”

ㅡ그가 ‘모나리자’를 완성하고 숨을 거둔 프랑스 끌로 뤼쎄 성은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 ‘모나리자’가 일본에서 전시됐는데 1974.4.17 일본의 국빈대우로 30여명의 무장경호 속에 장갑차로 박물관까지 옮겨졌고, 4천3백만$ 보험에 들은 이 그림은 4.19부터 공개되었는데 3명이 한 줄로 16초씩 관람

1729년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 예카테리나 2세 출생

1802년 미국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82만8천 제곱마일) 1,125만$로 사들임

1857년 프랑스시인 알프레드 뮈세 세상떠남(47세) 『밤』(조르주 상드와의 1년간 연애 고뇌로부터 탄생한 훌륭한 서정시라는 평가) 『로렌자초』 “너를 사랑하는 것들/여성이든 개든/의심하려거든 하여라/그러나 사랑 그 자체는/결코 의심하지 말아라.”

1864년 독일의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마이어베어.

1893년 미국 국립광업회사 파산. 전미국에 대공황

1902년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섬 펠레이 화산 분출로 4만명 사망

1904년 체코슬로바키아 작곡가 안톤 드보르작 세상떠남 ‘신세계 교향곡’

1906년 독일의 법학자 볼프강 아벤트로트 출생

1927년 영국에서 제트여객기 첫 취항

1945년 2차대전중 연합국 베를린 함락

1945년 영국-인도군 랑군점령

1952년 세계 첫 제트여객기 영국서 취항

1952년 '독일의 노래' (Deutschlandlied)의 3절이 독일 국가로 지정.

1953년 요르단 후세인 1세 즉위

1953년 이라크 파이잘 2세 즉위

1956년 중국최고국무회의 백가쟁명 시사

1957년 ‘매카시즘’의 선동자 매카시 사망

ㅡ“정부의 가장 중요한 부처인 국무성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린되고 있다. 나는 그 205명의 명단을 갖고 있다.” 이 한 마디로 20세기 미국을 광기 ‘매카시즘’으로 몰아넣었던 매카시가 1957년 5월 2일 실의 속에 간장병으로 4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 위스콘신주 아일란드계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29세에 최연소 주 순회재판소 판사가 됐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에 자원, 이같은 경력을 배경으로 46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예상을 뒤엎고 당선됐다.

이때부터 시작된 소위 ‘적색 사냥’ 소동은 온 매스컴에 대서특필되기 시작했다. 여론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트루먼 대통령은 즉각 조사위원회를 소집했다 . 애초에 매카시가 말한 ‘명부’란 없었다 . 석달 후에 그의 발언이 ‘근거 없음’으로 결론나긴 했지만 적색 사냥 선풍은 이미 손댈 수 없는 기세로 확산된 뒤였다. 매카시선풍의 마수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군부에까지 미치자 1954년 마침내 상원 공청회가 열렸고, 전 국민은 36일 동안 TV를 통해 이 공청회를 주시했다. 무책임하고 야만적이며 정략적인 매카시의 언동에 사람들은 속았음을 깨달았고, 마녀사냥 열기는 급속히 식었다.

결국 매카시는 ‘상원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을 했다’고 파문됐고, 4년에 걸친 집단 광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결국 매카시 선풍은 2차 대전 후의 냉전 전개와 한 정치신인의 야욕이 함께 빚어낸 한 시대의 우화였다.

1981년 미국 심리학자 데이빗 웩슬러 사망

1960년 소련영공 침해한 U2 초고속 기상정찰기 격추

1982년 영국 잠수함 포클랜드전서 아르헨티나 순양함 격침

1990년 중국 정계거물 신화통신 허가둔 미국으로 망명

ㅡ중국공산당 중앙고문위원 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으로 관영 신화통신의 홍콩 분사장이었던 허가둔이 1990년 5월 2일 홍콩을 통해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다. 그의 망명은 그가 중국의 막후 최고실력자 등소평과 군부의 최고실력자 양상곤의 측근이며, 중공당의 고급기밀은 물론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사생활까지 알고 있는 인물이기에 중국지도부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신화통신 홍콩 분사장은 중국을 대표하는 사실상의 홍콩주재대사로 간주되고 있는데 허는 1983년 6월 홍콩 분사장으로 부임한 이래 약 7년간 재직해왔으며, 1985년 3월 중국 어뢰정사건 때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한국 측과 접촉, 한-중 공식접촉의 첫 선례를 남긴 인물이다. 허의 망명은 천안문 사태 때 그 동기가 마련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당시 홍콩주재 중국대사격인 신화통신 홍콩 분사장이었던 허는 6.4사태 직전 홍콩에서도 벌어졌던 반중국 정권 시위에 좌익단체도 참가한 사실과 관련, 북경 당국과의 협의를 위해 북경으로 급히 날아갔다.

그러나 홍콩에서의 대규모 호응시위와 문회보, 대공보 등 허가 장악해야 할 중국계 언론들마저 천안문시위를 지지하는 것을 본 등소평은 허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허는 결국 총리 이붕의 지시에 따라 1990년 2월 신화통신 홍콩 분사장직에서 보직도 없이 물러났다. 결국 인사불만에 따라 미국으로 망명을 한 것이다.

1999년 파나마 대통령에 미레야 모스코소(女) 당선

2003년 중국 잠수함 사고, 70명 전원 사망

ㅡ중국 산둥(山東)성의 옌타이(煙台) 해군기지 소속 중국 재래식 잠수함 361호가 한국 영해와 접해있는 서해의 네이창산(內長山)섬 동부해역에서 훈련 중 사고가 발생, 탑승했던 해군 장병 70명 전원이 사망했다.

신화통신은 해군 소식통들을 인용, “문제의 잠수함이 사고 당시 네이창산 동부해역에서 훈련 중이었으며, 함체에서 발생한 기술적 결함 때문에 70명의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고 전했다.

장쩌민(江澤民) 국가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은 2일자로 사망한 해군 장병들의 가족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 애도를 표시했다.

중국 군사 소식통들은 이번 잠수함 사고가 중국 해군 사상 최악의 참사 중 하나라고 말했다. 지난 1980년대 중반 중국 구축함 한 척이 하이난(海南)성 남부에서 폭발, 약 100명이 사망했다.

중국 해군은 90대의 잠수함 함대를 보유하고 있으나 대부분이 노후됐고, 아직 첨단 잠수함 건조 기술에 문제점이 많아 작년 러시아와 대함(對艦) 미사일 시스템을 갖춘 636급 잠수함 8척 도입 협상을 벌인 것으로 보도됐다. 도입 액수는 약 16억달러선으로 알려졌다.

2008년 사이클론 나르기스(Nargis) 미얀마 강타 사망 13만8천여명 이재민 240여만명, 미얀마 군사정부는 국제사회의 구호의 손길 뿌리침

2011년 미해군 특수부대 파키스탄 이보타바드 은신처에서 오사마 빈 라덴 사살, 그의 시신은 매장지가 테러리스트의 성지가 될 수 있다는 우려로 아라비아해에 수장

ㅡ2011년 오사마 빈 라덴 미 특수요원에 의해 사살

테러의 배후,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bin Laden·54)을 응징하기 위한 미국의 최종 작전 단초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2일 미국은 빈 라덴을 사살하고 그의 시신을 바다에 수장(水葬)하는 것으로 10년간의 끈질긴 추적을 마무리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1일 오후 11시 35분(미 동부시각) 백악관에서 발표한 특별 성명을 통해 “오늘(1일) 미군 특수부대가 빈 라덴이 숨어 있던 파키스탄 아보타바드의 가옥을 급습해 교전 끝에 그를 사살했다”고 했다. 그는 “미국은 지난해 8월 빈 라덴의 파키스탄 내 은신처에 관한 단서를 확보하고 이를 추적해 왔으며, 지난주에 빈 라덴의 제거 작전을 단행할 충분한 정보가 확보됐다고 판단해 작전 개시를 승인했다”고 했다. 이날 작전으로 빈 라덴과 함께 남성 3명, 여성 1명이 사살됐으며, 사망자 중 1명은 빈 라덴의 아들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국 행정부의 한 관리는 “무슬림인 빈 라덴의 주검을 이슬람 전통에 따라 바다에 수장했다”고 밝혔다.

9·11 테러 직후 “‘죽여서든지 생포해서든지’ 빈 라덴을 원한다”고 했던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이날 “미국은 물론 평화를 갈망하는 전 세계 모든 이들과 9·11 테러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이들의 승리”라고 했다.

한편 알카에다는 이날 미국의 빈 라덴 사살 발표 약 9시간 후에 그의 사망을 공식 확인하고 미국에 대한 보복을 천명했다. AFP 통신은 알카에다가 성명을 내고 빈 라덴이 미군에 의해 사망했음을 인정하고, 그를 미국에 맞선 성전을 이끌면서 자신의 영혼과 재산을 바친 기사(騎士)로 추앙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2014년 아프가니스탄 바다크샨 주에서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해 2,100명 이상이 사망

2017년 오늘 언론계성차별과 맞서싸운 베트남전쟁 종군여성언론인 앤 모리시 메릭 세상떠남(83세)

2021년 미국의 영화배우 보비 언저 작고

2021년 미국 생산 화이자 백신, 멕시코 이어 캐나다 수출

2021년 유엔 안보리 “아세안 ‘미얀마 폭력 중단’ 합의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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