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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 천문학자의 “북학(北學)” - 임종태

by 귤담 202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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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 천문학자의 “북학(北學)”

글쓴이 임종태 / 등록일 2023-10-16

“오랑캐” 청나라의 달력 시헌력(時憲曆)과 그 바탕의 서양 천문 지리학을 명나라의 숭고한 유산으로 기념한 최석정(崔錫鼎)의 문화적 선전이 이루어지던 1708년, 그가 후원하는 관상감 관원 허원(許遠)은 자신의 두 번째 북경 여행을 떠났다. 양반 관료 최석정이 천문학 사업에 우호적인 정치적 환경을 만들었다면, 북경에 가서 시헌력을 배워 오는 실무는 관상감의 중인 관원이 담당하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진 것이다. 하지만 사태를 보는 두 사람의 시각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있었다.

 

허원의 두 번째 연행(燕行)은 맡은 임무로 보자면 3년 전 첫 번째 여행의 속편으로서 그때 못다 배운 시헌력법을 학습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여행을 둘러싼 환경은 아주 달라져 있었다. 1705년의 연행은 그 전 해 관상감이 달력 제작에서 범한 중대한 실수의 원인을 조사하는 데 일차적 목적이 있었고, 관상감에 대한 조정의 시각도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1704년 겨울 청나라에서 반사(頒賜)한 이듬해 달력을 관상감이 이미 제작, 인쇄해 놓은 달력과 비교해 보니 11월과 12월의 대소(大小)가 서로 바뀌어 있었다. 사대 관계상 청나라의 시간 표준을 사용해야 하는 조선의 처지에서 이는 외교적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조사 결과 달력 계산에 사용된 데이터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되었고 이를 북경의 천문관서 흠천감(欽天監)에 가서 확인하기 위해 허원이 파견되었다.

 

허원의 북경 여행은 관상감 관원으로서는 무려 5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 이전 마지막 사례는 효종 4년(1653) 겨울 김상범(金尙範)의 연행이었다. 조선의 달력을 시헌력으로 바꾸는 개력(改曆) 사업을 주도했던 김상범은 일이 완료되자 시헌력의 더 고차원적 내용인 행성 운행 계산을 배우는 과제를 시작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가 여행 도중에 죽음으로써 사업은 중단되었고, 애초에 청나라의 시헌력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조정도 관상감의 시도를 더는 지원하지 않았다. 반세기가 흘러 허원은 김상범이 멈춘 데서 다시 시작했다. 청나라와 조선 달력의 차이를 해결하는 것이 공식 임무였지만, 그에 더해 그는 행성 운행 계산법을 배워왔고, 이로써 관상감의 숙원이었던 “시헌 칠정력(七政曆)”을 이듬해부터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최석정 등의 노력 덕분에 조정의 태도가 우호적으로 바뀌면서 허원의 두 번째 여행에서는 시헌력 학습이 더 필요하다는 점 외의 다른 이유를 조정에 댈 필요가 없었다. 허원은 이 여행에서 행성 계산법의 미진한 점을 배웠고, 천문 관측기구 · 항성(恒星) · 술수(術數) 관련 서적을 구해 옴으로써, 이후 관상감 사업의 초점이 시각 체제와 역주(曆註)의 개선으로 나아갈 것임을 시사했다. 이후 그는 두 번의 연행에서 습득한 시헌력 계산법을 동료 관상감 관원들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분류, 정리하여 『현상신법 세초류휘(玄象新法細草類彙)』(1710)라는 책자로 간행했다.

 

무미건조한 알고리듬으로 가득한 이 기술 서적이 흥미로운 것은 중인 천문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전문 서적을 저술한 드문 사례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서문은 관상감 관원들이 자신의 천문학 업무와 북경 여행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는지 잘 알려준다. 허원은 관상감 관원들이 고대 중국 요(堯) 임금의 천문학자 희화씨(羲和氏)와 같이 “하늘을 관측하여 백성들에게 시간을 내려주는[관상수시(觀象授時)]” 임금의 중대한 책무를 실무적으로 보좌하고 있다며 자기 업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조선의 천문학자들을 희화씨로 대표되는 중국 황제의 천문학자와 구분해주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자신과 같은 “주변부 나라”[편방(偏邦)]의 천문학자가 과학적으로 유능해지기 위해서는 선진 천문학의 원천인 “대국(大國)”으로의 유학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즉 북경으로의 여행은 조선 천문학자의 숙명이었다. 하지만 과거 김상범이 “북학(北學)”한 이후로 오랜 세월 천문학자의 북경 파견이 중단되었고, 그렇게 선진 천문학과 단절된 조선 천문학의 쇠퇴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허원은 1705년 달력 사건의 원인을 천문학자의 북경 여행을 지원하지 않은 조정의 탓으로 돌렸다.

 

흥미롭게도 허원은 자신들의 북경 여행을 “북학”이라고 불렀다. 이는 『맹자(孟子)』에 나오는 표현으로, 초나라 사람 진량(陳良)이 북쪽 중국에 가서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학문을 배워 고국의 문명화를 추구했다는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허원의 북학이라는 표현은 그가 청나라를 선진 천문학의 중심지로 흔쾌히 인정했음을 시사한다. 그가 그렇게 인정한 기준은 청나라 흠천감이 보유하고 있는 천문학의 수준, 그것을 뒷받침하는 “대국(大國)”의 문화적 역량이었다. 요컨대 그에게는 자신의 후원자 최석정처럼 야만족 청나라의 천문학을 이념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허원이 당시 조선의 국시(國是)인 숭명반청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없다. 단지 그는 양반 관료들이 중시하는 정치·이념적 문제를 자신이 대면해야 할 과제로 여기지 않았을 뿐이다. 국가적 의제에 관여하지 않고 천문학의 전문적 문제에만 집중한 허원의 북학은 그런 점에서 조선 사회 전반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청나라의 선진 기술을 도입하자고 한 훗날 박지원(朴趾源), 박제가(朴齊家)의 북학론과도 그 결이 달랐다. 이렇게 18세기 초 허원은 달력을 계산하는 하급 전문 관료로서의, 겸손하면서도 자기 전문 분야의 가치를 강조하는 뚜렷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전에는 잘 볼 수 없던 현상이었다.

 

글쓴이 : 임종태 (서울대 과학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