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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을 향한 돌진인가, 진정한 용기인가 - 송혁기

by 귤담 2023.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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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을 향한 돌진인가, 진정한 용기인가

글쓴이 송혁기 / 등록일 2023-10-10

3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늘려 오던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이 갑자기 16.6%나 삭감된 안으로 국회에 제출되었다. 이제까지 정치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이들까지 격하게 반발하고 나설 게 뻔한 일인데,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소신 있게 밀어붙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비효율과 카르텔”.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작년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국가재정운용계획과 그에 따른 올 3월의 예산안 편성 지침 따위는 과감하게 폐기되고, 기관별 조정도 덜 된 듯한 예산안이 2달 만에 전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거침없는 과단함과 용기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민간의 연구개발 예산이 정부의 3배를 넘어선 시점에서 소중한 혈세를 구태의연한 기준으로 사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미래를 준비하는 장기적 관점에서 정부가 아니면 지원하지 못할 분야를 잘 가려서 예산을 편성하는 방향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진단에 동의한다. 정부 출연기관의 기획에 참여한 연구진이 과제 수주와 평가에까지 관여하는 폐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구조에 대한 분석과 대책 마련의 과정을 신중하게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비효율과 카르텔이라는 낙인을 찍어 예산안부터 덜컥 감축해 버린다면, 결국 약한 고리에만 심각한 타격을 줄 뿐 폐단은 오히려 심해질 수 있다. 늘 그렇듯이 문제는 ‘졸속’에 있다.

 

옳다는 확신도 잠시 묵혀야 하는 이유

 

졸속이 원래 나쁜 뜻으로만 사용되던 것은 아니다. 손자(孫子)는 “전쟁은 졸속(拙速: 서툴더라도 빠르게)해야지 교(巧: 능숙하게 잘)하려고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승리를 추구하는 전쟁에서 가장 피해야 할 일이 군대를 오랫동안 동원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한 말이다. 모두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쟁의 상황이라면 졸속도 미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아 미래를 준비하는 일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졸속이야말로 가장 피해야 할 일이다.

 

옳은 일을 위한 결단과 실행은 빠를수록 좋지 않을까? 공자(孔子)의 제자 자로(子路)는 옳은 일이라는 확신만 있으면 물불 안 가리는 용기를 지닌 인물이다. 공자가 용기만큼은 자신도 자로에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할 정도였다. 공자는 자로가 용맹함을 너무 좋아해서 악기를 연주해도 살벌하게 들린다며 핀잔을 주면서도, 고명하고 정대하여 뭇사람들과는 다른 차원에 이미 올랐다며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묵혀두는 일이 없이 늘 과감하게 실행하는 자로를 보며 공자는 옳은 일을 들었더라도 일단 물러나서 생각해 보라고 타일렀다. 용기와 굳셈만 좋아하고 배우려 하지 않다가는 난(亂)과 광(狂)의 폐단에 이를 것이라고 경계하기도 했다. 아무리 옳다는 확신이 있더라도 주도면밀한 숙고와 준비가 없다면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자신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우려한 것이다.

 

진정한 용기는 자기 잘못을 바로잡는 것

 

약점 많은 자로였지만 그 모두를 덮고도 남을 만한 장점은 “남이 자신의 잘못을 말해주면 기뻐했다.”는 면모다. 저돌적이고 용감한 사람일수록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에는 귀를 닫기 십상이다. 자기 확신이 워낙 강해서 그에 맞는 말만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자로가 공자의 애제자일 수 있었던 것은, 외부만이 아니라 자신의 과오와 폐단을 바로잡는 데에도 용감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연구개발 예산 졸속 삭감의 구체적인 내용과 그것이 야기할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다시 살펴서 잘못된 부분들을 과감하게 바로잡을 일이다. 백신 연구개발 예산의 80%, 긴급재난 대응 연구의 90%를 삭감하면서 과연 철저한 검토와 조율을 거쳤는지, 학문의 근간을 이루는 기초연구사업 예산마저 큰 폭으로 삭감한 것이 향후 연구인력의 생태계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그야말로 “원점에서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로는 제명에 죽지 못할 듯하구나.” 일의 경중과 선후를 깊이 따지지 않고 확신을 향해 돌진하는 제자에 대한 공자의 애정과 걱정이 담긴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결국 자로는 그리 명분이 서지도 않는 전쟁에서 작은 의리를 위해 싸우다가 허망하게 죽고 말았다. 옳다고 확신하는 일일수록 그것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 더 넓고 깊게 살핀 뒤에 실행해야 마땅하다. 사리를 헤아려 차근차근 이루어가는 지혜를 갖추지 못한 용기는, 자신뿐 아니라 많은 이들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고 만다.

 

글쓴이 : 송혁기 (고려대학교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