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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 이가환 - 김선희

by 귤담 2024.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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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 이가환

글쓴이 김선희 / 등록일 2024-01-15

이벽, 이승훈, 정약종, 이가환, 권철신, 정약용.

 

익숙한 이름들이 보인다. 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나 천주교 접촉을 빌미로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정약용이 잘 알려진 인물이라면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들도 있다. 이가환도 그 중 하나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조선 후기 서학(西學)의 유입과 천주교에 관한 기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대중적으로는 물론 학계에서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그는 통상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천주교도들을 탄압했던 신유교난(1801) 때 천주교 신앙을 빌미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한 비운의 남인(南人)으로 평가받는다.

 

신유교난으로 인한 남인의 불운은 주로 정약용이 겪었던 18년의 유배가 주는 무게로 대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천주학’으로 인한 불행이라면 이가환 쪽이 훨씬 심중하고 치명적이다. 정약용의 유배가 길어진 것은 그가 진 죄의 무게 때문이라기보다는 정약용이 처한 정치적 상황과 정약용 개인에 대한 견제의 측면이 강하다. 몹시 길었음에도 유배를 끝내고 돌아와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정약용과 달리 이가환은 천주교도가 아니라는 자신의 소명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고문 끝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가환은 영조 18년인 1742년 서울 소정릉동에서 문장가로 알려진 이용휴(李用休, 1708~1782)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용휴는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과, 후에 경종이 되는 세자를 옹호하며 노론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당한 성호의 형 섬계 이잠(剡溪 李潛, 1660~1706)의 조카였다.

 

이가환은 영조 42년(1771)에 과거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 들어갔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성균관 대사성 등 요직에 올랐다. 이가환은 일찍부터 정조의 주목을 받았다. 이가환은 정조 1년(1777)에 과거에 급제했는데 이때 정조는 이가환의 답안이 장원보다 낫다고 평하기도 했다. 일찍부터 이가환의 학식을 알아본 정조는 친히 그를 불러 평소 궁금했던 것들을 질문하기도 하고 배석한 신료들에게 그에게 질문을 해보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가환에 대한 정조의 평가는 ‘해박(該博)’하다는 칭찬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가환은 여러 분야에 능통했는데 특히 수학과 천문학에 뛰어났다. 그를 성장시킨 학문적 자원 중에는 당시 조선에서 활발히 유통되던 서양 천문학과 수학 서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가환 만큼이나 서양 천문학과 수학에 관심이 많았던 정조가 이가환을 불러 서양 천문학에 관해 질문을 한 일도 있다.

 

이가환이 서양 수학과 천문학에 뛰어났던 이유를 그가 성장한 학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 서양 학문에 개방적이었던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의 방손이었다. 성호는 부친 이하진이 남긴 서재에서 부친이 연행에서 구해 온 다양한 중국 책들을 읽었는데 그 가운데는 『천주실의』, 『영언여작』, 『주제군징』, 『칠극』 등 당시 중국에서 활동하던 예수회 선교사들의 한문서학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호는 합리적인 태도로 외래의 지식을 검토했고 천당지옥설 등 유교 사회가 수용할 수 없는 교리를 제외하고 서양 이론의 유용성을 폭넓게 인정했다.

 

성호의 학문적 태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확산되었고 그 효과는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종교적 신앙에 이르는 이들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잘 알려져 있듯 조선에서 오직 서학서의 독서만으로 신앙에 이른 초기 그룹들 즉 이벽,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같은 이들이 모두 성호학파의 일원들이다. 이들과 가깝게 교류했던 이가환 역시 다양한 서학서를 읽었을 것이다.

 

이가환이 이승훈이나 정약전처럼 온전히 신앙에 이르렀는지는 답하기 어렵다. 천주교 신자였던 황사영이 조선 천주교 공동체에 대한 조정의 탄압을 고발하기 위해 비단에 작성한 기밀문서 즉 <황사영 백서>에서 이가환은 신앙에 가까이 갔지만 끝내 배교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대 측 기록 즉 『송담유록』, 『눌암기략』 등 공서파(攻西派) 남인의 기록에 이가환은 사학(邪學)에 빠져 스스로 패망한 인물로 평가된다.

 

정조의 신임을 받던 그의 길을 꺾고 막은 것은 서양 학문과의 거리였다. 서양 학문과 가까워짐에 따라 그에 대한 공격과 견제 역시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서양 천문학과 수학 지식이 별다른 제제없이 유통되던 영조 대와 달리, 정조 대에 천주교도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교리에 따라 제사를 폐했던 진산 사건, 조선에 들어와 은닉하고 있던 중국인 신부의 정체가 드러난 주문모 사건 등으로 천주교 공동체가 노출되기 시작하자 정치적 긴장도 함께 높아졌다. 이 비난과 견제의 시선에서 천주교 신앙 뿐 아니라 서양 지식의 수용 자체도 강력한 비난의 명분이 되었다. 이가환 역시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실 이가환이 겪게 된 고난은 그에 대한 정조의 신임의 크기에 비례해 무거워진 측면이 있다. 이가환은 천주교가 사회적 위협으로 부각되기 이전부터 ‘흉인(凶人)’ 이잠의 후손이라는 명분으로 공격을 받았다. 이 견제와 공격의 강도가 선명해진 것은 정조가 이가환을 성균관 대사성으로 발탁한 뒤였다. 학문적 신망이 필요한 요직이었던 만큼 노론 측에서 이가환의 등용을 반대했지만 정조는 매번 이가환을 비호했고 그의 발탁이 탕평의 일환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가환의 명운을 결정한 것은 정조가 세상을 뜬 뒤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된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그의 집안인 노론 벽파의 등장한 이후였다 이들이 모종의 정치적 돌파를 위해 주도한 신유교난 때 이가환은 천주교도가 아니라는 끝내 자신의 소명을 인정받지 못한 채 고문을 받은 끝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역사와 학계에 이가환은 ‘교난의 희생자’ 혹은 종교적 차원에서 순교자로 남았다. 그러나 이가환은 단순히 종교적 박해의 희생자로만 호명되기에는 더 중요하고 복잡한 장면을 여는 열쇠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이에 대한 해명의 과정은 조선 후기의 지적 변화와 실학풍의 형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창 역할을 할 것이다. 이가환의 학문과 그 함의에 관해서는 다음의 지면을 기약한다.

 

글쓴이 : 김선희(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