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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 위기의식 속에 호명된 실학
글쓴이 김태희 / 등록일 2024-01-22
영재 이건창(1852~1898), 매천 황현(1855~1910), 백암 박은식(1859~1925), 위당 정인보(1893~1950). 이 4인과 실학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지난해 11월 13일, ‘신아구방(新我舊邦) 실사구시(實事求是) 연속 학술집담회’라는 큰 제목 아래 ‘실학 연구의 새 국면’이란 제목을 단 학술모임이 있었다. 이 4인에 관한 강연(각각 이은영, 정은주, 노관범, 김윤경)이 있고 집담회가 덧붙여졌다.
이건창은 강화도 출신으로 개항(1876) 전후 관리였다. 그의 할아버지 이시원은 병인년(1866)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했을 때 자진함으로써 저항의식을 표현했던 바 있는데, 이건창은 개항과 근대 개혁에 대해 어떻게 보았을까. 그는 관리가 되어 중국을 견문한 후 기존 질서가 유지되기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 위정척사파와 달리 자주적 개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개화파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실(實)에서 구하고, 내[我]게서 구해야
그의 ‘의논시정소(擬論時政疏)’에 대략 이런 내용이 있다. 최근 변경을 한다고 많이 하지만 이름만 바꾸고 껍데기만 바꾸지, 실(實)의 변경이 아니다. 진실로 부강의 실효를 거두려면, 명(名)에서 구하지 말고 실(實)에서 구해야 한다. 진실로 실에서 구하려면, 이웃 나라에서 구하려 하지 말고 우리나라에서 구해야 한다. 부강하지 못한 이유가 이웃에 있지 않고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實)’과 ‘아(我)’의 강조는 이건창 집안이 양명학을 수용한 강화학파의 일원임을 상기시킨다. 또한 이는 개화파의 외세 추종과 표피적 모방에 대한 비판이며, 개화파를 실학과 쉽게 연관시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겠다. 이건창은 조선사를 반성하는 역저 <당의통략>에서 당쟁의 제1 원인으로 ‘도학태중(道學太重)’을 들었다. 도학(道學) 즉, 성리학을 너무 존중했다는 것이다.
이건창은 특성 세력이나 권세가에게 줄을 서지 않았다. 암행어사로서 조병식과 같은 탐학한 관리의 회유를 뿌리치고 그를 탄핵했다. 그 결과 앙갚음으로 유배를 당하기도 했다. 이건창은 나라의 관리로서 나아가 활동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지만, 갑오년(1894) 일본군의 경복궁 무력 점령 사건 이후로는 더 이상 그 소신을 견지할 수 없었다. 고종이 내린 관직들을 사양하고 귀향했다. 그는 1898년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에게 재주를 인정받은 황현은 전라도 구례에서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그 시대를 아파하고 기록했다. 그는 <매천야록>에서 정약용의 학문에 주목하고 현실에 쓸모 있는 학문이라고 평가했다.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을 더욱 확충한 것이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이건창이 먼저 세상을 뜨자 애도했던 황현은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관서 출신 박은식은 처음엔 서당 훈장인 아버지 아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준비했지만 지적 교류를 넓혀 나갔다. 경기도 광주 두릉에서 어울리며 정약용의 저술을 탐독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화서 이항로의 문인인 박문일·박문오 형제의 문하에서 정통 도학을 계승했다. 그는 다양한 지적 편력을 통해 어느 한 학문이나 사상에 갇히지 않았다. 그가 성리학자에서 양명학자로 변신하는데, 그것은 유학을 개혁하여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삼으려 할 때 간이(簡易)직절(直截)한 양명학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박은식이 독립운동 차원에서 쓴 <한국통사>의 갑오개혁 부분에 붙인 내용이 주목된다. 우리나라가 도학을 숭상하고 장려한 것은 좋은 일이라고 일단 전제한 후, 그 편중됨의 폐해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도학 일파가 높은 지위를 독점하여 특수한 영예를 누렸고, 이로 인해 당쟁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학문이 허(虛)를 높이고 실(實)을 버린 결과, 실용적 학문을 공리(功利)라고 배척하고 유형원·정약용·박지원의 대정론(大政論)이 밀려나 빈약한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도학(道學) 편중을 비판하고, 실학(實學)의 계보를
이건창이 세상을 떠난 후, 그와 강화도에서 함께했던 동생 이건승, 종제(從弟) 이건방, 그리고 벗 홍승헌은 함께 앞일을 도모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각자 있던 곳을 몰래 떠나 개성에서 만났다. 먼저 도착한 이건승은 황종희의 <명이대방록>을 읽고 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건승과 홍승헌은 북으로 이동하여 신의주에서 강물이 얼기를 기다려 야음을 타서 국경을 넘었다. 이건방은 남으로 발길을 돌려 서울로 왔다. 일종의 역할분담으로 여겨진다. 이때 이건방의 제자가 된 인물이 정인보였다.
강화학파의 양명학을 계승한 정인보는 유형원-이익-정약용이라는 실학의 계보를 세우고,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도 이들과 연결시켰다. 그의 ‘조선학’에서 실학은 주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세계질서가 바뀌고 가치가 흔들리고 나라가 망했던 일종의 전환기였다. 조선시대 마지막 유학자 그룹에 속하는 위 네 분은 공동체적 위기의식 속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실학담론을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역사를 반성하고 미래를 모색하는 가운데 과거의 정신적 유산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이 실학적 자세이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절실한 것이리라.
(사족. 이날 학술모임은 오늘날 실학담론의 쟁점사항과 관련한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했다. 지면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룬다.)
글쓴이 : 김 태 희 (역사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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