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다산 글방

21세기 실학의 방향과 생태 정신 - 박수밀

by 귤담 2024. 2. 12.

> 다산글방 > 풀어쓰는 실학이야기

21세기 실학의 방향과 생태 정신

글쓴이 박수밀 / 등록일 2024-02-12

지난 시절 일제 강점기와 전쟁을 경험한 우리나라는 식민 사관을 극복하고 근대 국가를 건설하는 데 힘을 쏟았으며 인문학도 민족주의와 근대 담론을 주요 관심사로 삼았다. 우리 내부에서 자생적 근대를 찾기 위한 노력은 18세기 실학에 닿았고, 실학은 근대와 민족 담론에 참여하여 민족의 손상된 자존심을 회복하는 게 크게 이바지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실학은 거센 도전과 숱한 논란을 경험하고 있다. 실학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 범위가 임의대로 확장된 것도 실학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을 부추겼다. 실학은 실체적인 용어가 아니라 역사적 산물이기에 그 개념과 범주, 전개 과정 등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고 회의적인 시선도 많다. 그렇긴 하나 조선 후기 각종 사회 문화 변동 속에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으며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타개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이 전개되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조선 후기의 서세동점에 주목해 실학은 서구 주도의 근대세계에 대한 사상적 각성이자 학술적 대응의 결과라고 한 임형택 선생의 주장은 실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성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특정한 시대에 갇혀 있는 학적 담론은 모래성과 같다. 좋은 사상과 담론은 시대가 전환할 때마다 그 시대가 요청하는 시대 정신을 새롭게 밝혀 준다. 실학을 둘러싼 논쟁은 그것대로 고민해가면서 과거의 근대와 민족주의를 넘어 지금 여기 21세기 현실에서 실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실학도 시대와의 소통 속에서 접근해야 하며 오늘날 우리 시대가 당면한 각종 현안에 대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21세기 실학이 오늘날 직면한 각종 사안에 대해 어떤 전망을 보여줄 수 있는지를 몇 차례에 걸쳐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현실에서 실학은 자본의 탐욕에 맞서 인간의 욕망을 성찰하고 생명 다양성과 공존이라는 과제를 극복해가는 데 관여할 수 있다고 본다. 그중에 먼저 실학은 생태 위기 극복의 담론에 참여할 수 있다. 기실 연암의 문학과 사상을 지배하는 요체도 생태 정신에 있다.

고전은 대체로 자연을 소재로 삼고 있으므로, 생태 사상을 다루는 논의들이 유의미한 변별력을 지니지 못하고 환경 보호 차원의 당위적 진술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생태 사상이란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기존의 환경 문학이란 용어 안에서 충분히 이야기될 수 있는데, 혼란스럽게 생태 문학이란 용어를 끌어들여 옥상옥의 결과만 낳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생태와 환경을 동일한 의미로 생각하는 데서 생겨난 오해이다. 생태는 단순히 자연환경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인간도 우주를 구성하는 하나의 유기체라고 보고 생명의 공존과 상호평등 정신을 이야기한다. 생태 정신은 단순히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평등과 관계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다.

생태 위기는 자본주의와 산업 사회가 낳은 무분별한 환경 오염에 대한 경각심으로 생겨난 것이므로 자본과 문명 이전의 역사적 환경을 지닌 전근대 동양 사회에서 생태적 위기를 조명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생태 사상에 대한 논의가 촉발된 계기는 근대에 자연환경이 파괴된 데서 기인한 것이 맞지만, 그 점이 근대 이전에는 생태 사상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근대에 들어 인간의 이기(利己)와 무한 욕망이 생태 위기를 재촉했을 뿐이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든 생명체는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생태학이 서구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생태 정신의 본질은 불교와 도교 등 동양 정신에 잘 담겨 있었으며 그렇기에 생태 문제를 동양 정신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중에도 하필 실학의 생태 정신을 주목하는 까닭은 실학자의 생명과 자연에 대한 시선이 문명과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 속에서 드러난 데 있다. 이는 반문명과 욕망의 제어를 지향하는 동양의 전통 사상과는 결을 달리한다. 고전 시대의 성리학자들이 자연을 조화와 질서의 공간으로 이해했다면 연암은 창조와 변화의 장(場)으로 바라본다. 연암의 생태 정신은 현실주의 및 문명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에 지금 이곳에서도 실질적인 시사점을 준다.(다음에 계속)

글쓴이 : 박 수 밀 (한양대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