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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의 세종 28년 11월 8일 언문청 기록 - 심경호

by 귤담 2024.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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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의 세종 28년 11월 8일 언문청 기록

글쓴이 심경호 / 등록일 2024-02-19

한문은 고약하다. 서너 해 전, 정약용의 한시를 전부 새로 번역하여 네이버 지식백과에 올릴 때 무척 고생했다. 한글로 시를 남겼더라도 풀이가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한문 문법, 한시 형식, 수사법의 특성 때문에 해독이 곤란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근 세종과 <팔준도>에 대한 글을 쓰다가, 각주 하나 때문에 『세종실록』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세종 28년 병인(1446) 11월 8일(임신)의 기사에 대해, 기존 번역문이 다음과 같이 되어 있어,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자를 가능한 한 삭제하고 제시한다.

 

[『태조실록』을 내전에 들여오기를 명하고, 드디어 언문청을 설치하여 사적을 상고해서 용비시(龍飛詩)를 첨입하게 하니, 춘추관에서 아뢰기를, “『실록』은 사관이 아니면 볼 수가 없는 것이며, 또 언문청은 얕아서 드러나게 되고 외인의 출입이 무상하니, 신 등은 매우 옳지 못하였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임금이 즉시 명령하여 내전에 들여오게 함을 돌리고, 춘추관 기주관 어효첨과 기사관 양성지로 하여금 초록하여 바치게 하였다.]

 

이 번역에 따르면 ㉠‘『태조실록』을 내전에 들여오기를 명하고’, ㉡‘드디어 언문청을 설치하여’, ㉢ ‘사적을 상고해서 용비시를 첨입하게 하니’의 세 사항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혹자는 ㉡에 주목하여, 세종 28년 11월 8일에 ‘처음’ 언문청을 설치했다는 증거로 삼는다. 혹자는 ㉡과 ㉢은 연결시켜, 언문청은 용비시 편찬과 관련이 있는 기구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기존 번역의 오류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원문을 보면 “命『太祖實錄』入于內, 遂置諺文廳, 考事迹, 添入『龍飛詩』.”라고 했다. 『태조실록』을 내전에 들여오도록 명했다가 마침내 언문청에 두게 하고 사적을 상고해서 용비시에 첨입하게 했다는 뜻이다. 기존 번역은 ‘용비시를 첨입하게 했다’고 했는데, 용비시를 어디에 첨입한다는 말인가? ‘용비시’ 즉 『용비어천가』의 주석으로 『태조실록』의 사적을 첨입하게 했다는 뜻이다. 『용비어천가』의 ‘용비시’가 완성된 이후로 세종은 주해를 첨입하게 했으며, 「팔준도」 관련 찬(贊)과 지(誌)를 첨입하게 했다.

 

춘추관에서는, 언문청은 외인의 출입이 무상하므로 외인이 실록을 보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아뢰었다. 세종은 즉시 『태조실록』을 내전에 도로 들여오게 하여 춘추관의 기주관 어효첨과 기사관 양성지로 하여금 초록하여 바치게 한 것이다. 실록의 “還入內(환입내)”를 기존 번역은 ‘내전에 들여오게 함을 돌리고’라고 오역했다.

 

문제의 실록 원문에서 ‘置(치)’와 ‘‘添入(첨입)의 다음 어휘는 목적어가 아니다.

 

우리 말이 ’주어-목적어-술어(동사)’의 순서인데 비하여 한문은 영어나 마찬가지로 ‘주어-술어(동사)-목적어’의 순서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문에서 술어(동사)의 뒤에 오는 어휘는 목적어만이 아니다. 장소를 나타내는 말이 올 수 있다. 그래서 목적어라 하지 않고 ‘빈어’라고 부른다.

또 우리말이나 마찬가지로 한문도 주요 성분을 생략할 수 있는데, 그 생략이 우리 말보다 더 심하다. 앞에 『태조실록』이란 말이 나왔으므로 ‘置’의 다음에 다시 쓰지 않은 것이다.

 

『세종실록』에서 언문청 관련 기록은 이 기사가 가장 빠르다. 하지만 언문청은 그 전에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의 소중한 고전자료들을 AI로 처리하고 디지털화해야 하지만, 기존의 오류를 바로잡지 않은 채 기술적 처리만 서두른다면, 그 결과물은 매우 끔찍한 것이 될 수도 있다.

 

심경호(고려대학교 특훈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