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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표와 박은식, 숭실(崇實)의 메시지
글쓴이 노관범 / 등록일 2024-02-26
우리나라 대학 이름에는 나라 이름과 지역 이름이 많다. 나라 이름의 경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고려’, ‘조선’ 등이 있다. 별칭까지 포함하면 ‘동국’과 ‘단국’도 넣을 수 있겠다. 지역 이름의 경우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대개는 ‘서울’, ‘수원’, ‘강원’, ‘제주’ 등등 시·도 지자체 이름이다. 이색적인 이름으로 ‘서강’과 ‘인하’가 있다. 서강은 서울을 흐르는 한강 삼강(三江)의 하나인데 한강·용산강과 달리 대학 이름으로 진입했다. 인하는 인천과 하와이가 결합한 신조어인데 옛날 같으면 인하 대신 인포라 했을지 모른다. 현순 목사의 『포와유람기』에서 보듯 하와이의 옛날 한자 이름은 포와였다. 아울러 ‘아주’라는 이름도 있다. 옛날에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를 각각 아주, 구주, 비주, 미주라고 했다. 지구 대륙을 대학 교명으로 취한 사례는 한국에서 보기 드물다.
예외적으로 가치를 담아 만들어진 대학 이름도 있다. ‘홍익’과 ‘숭실’이 그러한 경우이다. 홍익은 한국사의 시원적인 건국 신화와 관계 있는 ‘홍익인간’을 가리킨다. 본래 『삼국유사』에 출처를 두는 이 말은 조선시대에는 잘 쓰이지 않다가 해방 후 자아 확립과 인류 공영의 건국 이념으로 칭양되었다. 숭실은 글자 그대로 실(實)을 숭상한다는 뜻인데 조선시대에도 쓰였지만 근대에 들어와 특히 각광을 받았다. 김윤식은 적극적인 출판 활동으로 한국인의 지식 개발에 기여하는 최남선의 학문하는 자세를 ‘거화숭실(去華崇實)’ 네 글자로 요약했다. 김윤식이 보기에는 최남선 같은 사람이 숭실의 학자였다.
숭실의 출현은 개화 세상의 실학 개념과 관계 있을 것이다. 일본 메이로쿠샤[明六社]의 쓰다 마미치[津田眞道]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학문을 크게 구별하면 두 종류가 있다. 고원한 공리를 논하는 허무적멸, 그렇지 않으면 오행성리나 혹은 양지양능의 주장 같은 것은 허학이다. 이를 실물에 비추어 보고 실제 형상에 물어봐서 오로지 확실한 이치만을 말하는 오늘날 서양의 천문학, 물리학, 화학, 의학, 경제, 그리스 철학과 같은 것은 실학이다. 이 실학이 국내에 두루 퍼져서 각자가 도리에 밝게 통달하게 되는 것을 진정한 문명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이새봄 쓰고 번역, 『메이로쿠 잡지』, 2021, 빈서재)
허학과 실학을 분별하고 실학의 확장에서 문명의 도달을 인식한다는 것. 유원표와 박은식은 모두 이와 같은 허와 실의 이분법을 공유했는데 ‘밀아자문답(蜜啞子問答)’이라는 글(『대한매일신보』 1907.6.8.)에서 이들이 설파한 ‘숭실’을 발견할 수 있다. 글의 구성은 평안도 학생과 개성 지식인 유원표 사이의 문답, 그리고 신문 기자 박은식의 비평이다. 학생의 질문. 한국이 쇠약해져 위급존망의 상태에 빠진 까닭이 무엇인가. 유원표의 답변. 천지간의 만사에는 항상 허가 있고 실이 있으니 ‘출허숭실(黜虛崇實)’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다. 일본과 달리 한국이 실패한 것은 허를 숭상해 실과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허로망상(虛勞妄想) 하지 말고 실업실사(實業實事)를 다스려 국력을 배양하라.
박은식은 유원표의 숭실에 찬동했다. 그는 한국인 포수 이야기를 보탰다. 연전에 포수 몇 명이 산골짜기 수풀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어떤 포수는 기겁하고 숨었으나 어떤 포수는 용감하게 사살했다. 용기가 어디에서 나왔을까.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감하게 경쟁하는 원동력이 다름 아닌 실력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한국은 남에게 의지하고 자립할 생각이 없으니 이제 실지사업에 힘써서 실력을 배양하자. 그는 한국 사회를 향해 거듭 ‘출허숭실’을 촉구했다.
후일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다시 ‘숭실’의 메시지를 불어넣었다. “우리나라 사회는 도학 일파가 높은 지위를 독점하고 각별한 영예를 넉넉히 누렸다...다시 그 학문이 허를 높이고 실을 버려[崇虛遺實] 무릇 정학, 법학, 병학, 농학, 공학, 상학, 재정학 등 실용 있는 각 학문을 공리라고 배척해 버려두고 연구하지 않았다...선비는 실재(實才)가 없고 백성은 실업이 없고 나라는 실력이 없어서 마침내 천하에서 지극히 빈약한 나라가 되었다.” 대한매일신보 기사에서 ‘숭실’을 부르짖은 그가 한국의 국망의 원인을 ‘숭허’에서 구했다. 유원표는 『몽견제갈량(夢見諸葛亮)』 제4장 「동토문학허실(東土文學虛實)」에서 중국과 조선은 사물의 정신을 상실하고 허문에 매몰되어 빈약해졌다고 단언했는데 이와 동일한 생각이었다.
한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유원표는 국망의 그 해 일본 관광단에 참가하면서 친일로 경사했고 그의 숭실론은 한국의 자강을 외면하고 일본 문명 예찬으로 귀결했다. 말년의 그는 내방객에게 일본은 실의 나라[實國]이고 이러한 실의 나라 같이 부자를 우대해야 국가가 부강해진다는 소리를 되풀이했다고 한다. 박은식이 조선시대 도학을 향해 ‘숭허’를 성찰했다면 유원표는 식민지 조선의 부자를 위해 ‘숭실’을 읊은 것일까. 대한제국 언론의 숭실론은 식민지 현실에서 그렇게 굴절된 것일까.
글쓴이 : 노 관 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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