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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명의 신원 (伸冤)
글쓴이 권순긍 / 등록일 2024-02-20
혹시나 하며 기대했던 일이 역시나, 참담한 결과로 드러났다. 지난 1월 30일 국회를 통과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국무회의를 거쳐 대통령에 의해 거부된 것이다. 거부권 행사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하고 대통령이 재가함으로써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2022년 10월 29일 ‘할로윈 축제’를 맞아 멀쩡하게 길을 가던 159명의 사람들이 왜 죽어야 했던가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제 역사 속으로 묻혀 버렸다. 사건이 일어나고 459일째 되는 날이었다.
왜 정부에서는 국가적 대형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주저하거나 덮으려 하는지 모르겠다. 대형참사에는 당연히 진상규명이 우선이고, 다음으로 이에 합당한 책임자 처벌, 마지막으로 예방대책과 지원책이 뒤따라야 하는 게 수순이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시늉만 내고 지원책만 강조하고 있으니 유족들이나 국민들이 어찌 납득할 수 있겠는가.
“유족의 요구를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묵살했다”
한 총리는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이태원특별법에 대해 “자칫 명분도 실익도 없이 국가 행정력과 재원을 소모하고 국민의 분열과 불신만 심화시킬 우려가 있다.”며 “이태원 참사로 인한 아픔이 정쟁이나 위헌의 소지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논리라면 정치적 사건이나 국가적 대형참사는 이제부터는 특별조사를 할 수가 없다. 모든 사건이 행정력과 재원을 소모하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더 문제는 159명이 죽은 이태원 참사를 정쟁(政爭)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정쟁이 되려면 정치적 입장이 갈려야 하는데, 이태원 참사로 죽은 자식들에 대한 더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이 어떻게 정쟁이 되겠는가? 딸을 잃은 김남희 씨는 “부모가 자식 떠난 이유를 알고자 하는 그 마음이 어떻게 정쟁일 수 있나?”고 반문했다. 국무총리의 이런 빈약한 논리는 이태원 참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덮자는 얘기나 다름 아니다.
그러니 유족들은 "유족이 언제 재정적 지원과 배상을 요구했냐?"며 "바란 것은 오직 진상규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정부는 유족의 요구를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묵살했다."며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더욱이 입장문에서는 “윤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 ‘국민의 힘’ 의원들은 자신들의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결정으로 역사에 남을 죄를 지었다.”며 “최소한의 명분도 근거도 없는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은 국민적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유족들은 특별법이 폐기되질 않길 바라며 삭발과 삼보일배(三步一拜), 오체투지(五體投地) 등 필사적인 호소의 노력을 벌여왔었다. 더욱이 대한(大寒) 추위가 기승을 부린 1월 22일에는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특별법 공포를 촉구하며 죽은 159명당 100배(拜)를 바쳐 15,900배를 밤새워 봉헌하기도 했다. 죽은 자식들을 위해서 부모가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진상규명’이 망자(亡者)에 대한 신원(伸冤)
고전소설 <장화홍련전>을 보면, 계모에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장화와 홍련 두 자매의 원귀(冤鬼)가 철산부사 앞에 두 번이나 나타난다. 계모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함이 아니라 자신이 낙태를 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이를 하소연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그래야만 원혼이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 유족들이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일 것이다. 자식들이 왜 그렇게 죽어갔던 가를 명명백백히 밝혀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진상규명은 뒷전이고 유가족과의 협의를 통해 피해자 생활 안정을 위한 지원금과 의료비·간병비 확대 등 ‘10·29 참사 피해지원 종합 대책’을 수립하여 바로 추진할 태세다. 하지만 김덕진 대외협력팀장은 "진실을 찾지 않은 채 정부의 지원을 원하는 유족은 없다."라며 "유족 동의 없이 피해자 지원을 위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생때같은 자식이 죽은 마당에 물질적 보상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진상규명이 왜 중요한가? 그날 사람들이 몰릴 것을 알면서도 왜 경찰은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고, 사건이 발생하고서도 제대로 구호를 하지 못했던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국가’는 도대체 어디 있었는가? 이런 진상이 정확히 규명돼야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진상규명이야말로 억울하게 죽은 자식들의 원혼 (冤魂) 을 풀어주는 일, 이른바 ‘신원(伸冤)’인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그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는가. 유가협 운영위원장인 이정민 씨는 “1년 동안 그렇게 애원하고 호소하고 사정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정권”이라며 “아이들과 같이 우리도 죽음으로 내몰아 달라.”고 울부짖었다.
이제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재의결되려면 국회 재적의원 과반 출석에 출석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전원 출석 시 199명의 찬성표가 필요해 ‘국민의 힘’에서 당론을 바꾸지 않는 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참사의 진상규명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이다. 대통령은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 후 “국민은 늘 옳다. 어떠한 비판에 대해서도 변명하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국민’이 아니라는 말인가? 영원한 안식을 취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159명의 원혼들을 ‘국가’는 어찌 풀어줄 것인가?
글쓴이 : 권순긍(세명대 명예교수, 전 한국고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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