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글방 > 풀어쓰는 실학이야기
조선의 실학 풍경(2) : 실학하는 사람들
글쓴이 이경구 / 등록일 2024-08-16
이미지의 형성
실학하는 사람들은 유학자 일반 또는 경전을 공부하여 과거에서 강경(講經) 시험에 응하는 이들이었다. 알다시피 과거의 또 한 축은 문장 시험인 제술(製述)이었다. 그런데 강경하는 이들과 제술하는 이들의 스타일이 달랐다. 중종 대 권세가이자 문장가였던 김안로(1481~1537)가 아뢴 말이다.
“신이 유생 시절에 보건대 사람의 성품이 두루 능할 수가 없으므로 혹자는 실학(實學)에 가깝고 혹자는 문장[詞章]에 가깝기에 … 실학에만 힘쓰고 문장을 공부하지 않은 자는 사리에 밝지 못하여 … 다만 가르치는 직임을 맡을 따름입니다. 문장에 능한 자는 발휘하는 일이 많기에 사리(事理)에 두루 통하므로 국가에 임용되는 경우도 또한 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 시나 문장만을 숭상하는 일을 불가하다고 여겼던 까닭은 그 말류의 폐단이 혹 경박하고 사치해질까 염려해서입니다. … 우리나라는 사대하는 나라이니 실학만을 숭상할 수 없는 형편인데 사장에 능한 자가 한 사람도 없으니 무슨 일을 조처한 연후에야 가할지 모르겠습니다.” (《중종실록》 31년 2월 6일)
실학-강경하는 사람들과 문장-제술하는 사람들의 대비가 뚜렷하다. 실학하는 이들은 가르치는 일을 주로 맡았고 경박하거나 사치하지 않았다. 반면 문장하는 이들은 사리에 밝아 임용이 잘 되었고 사대하는 일 등에 종사하지만 경박하고 사치할 수 있었다. 또 실학하는 이들이 교육에 종사한다 했으니 그들은 성균관 등에서 가르치는 교수, 박사 등에 임용되었다. 요즘에도 문과생 이미지와 이과생 이미지가 있는 것처럼 당시에도 특정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실학을 읽고, 실학을 말하다
실학자와 문장가의 이미지 등장은 ‘실학의 사회화’를 보여준다. 바야흐로 실학은 일상에서도 제법 사용하는 말이 된 것이다. 1576년(선조 9)에 선조가 경연에서 한 말이다.
“사람들이 말하길 ‘실학을 읽으면 작문을 못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말이 매우 이상하다.” (유희춘, 《미암집》18권, 〈경연일기〉)
문헌에서는 ‘실학을 읽는다’ 또는 그와 비슷한 의미인 ‘실학에 힘쓴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더 눈여겨볼 점도 있다. 선조는 ‘사람들이 말한다’고 했다. 경학을 공부하거나 강경을 준비하는 이들을 두고 ‘사람들이 불렀다는 사실’이다. 실학은 그렇게 일상에서 쓰이는 말이 되었다.
시간이 더 흐르자 실학과 관련한 새로운 말들도 나오게 되었다. 조익(1579~1655)이 아뢴 말이다.
“경학으로 과거를 응시하는 자들은 입으로만 외울 따름이어서 … 대부분이 의리도 모르고 문자도 모르고 끝내 용렬하고 비루하게 되는데 세상에서는 글뜻도 모르는 이런 자들을 ‘실학급제(實學及第)’라고 일컫습니다.” (조익, 《포저집》 11권, 〈인구언조진고변비정폐정차(因求言條陳固邊備改弊政箚)〉)
강경에는 합격했지만 외우기에 급급한 이들에 대한 비판은 꽤 많았다. 조선에서는 그런 자들을 ‘실학급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실학급제는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나온다. ‘강경으로 뽑힌 이들이 실질이 없고 문장도 변변치 않아 세상에서는 제도가 허술해졌다며 늘상 “실학급제가 빚어냈다”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사라진 용어들의 의미
지금도 입시 교육의 개선이 어렵듯, 당시에도 시험을 위한 실학 공부의 개선이 어려웠고 시간이 갈수록 비판이 세졌다. 1659년(현종 1)의 기록이다.
“향시는 더욱 심합니다. 응시자 가운데 ‘실학한다’는 이름만 있으면 [강경을 준비하는 이들에 대해 사람들은 ‘실학한다’고 말한다.] 제술이 형편없어도 방문해서 뽑고 있으니 더욱 한심합니다.” (《현종개수실록》 1년 1월 25일)
마침내 18세기에는 다소 속되거나 경멸적인 말들이 나오게 되었다. 1753년(영조 29) 영조와 승지 신회의 대화이다.
영조 : “이번에 18세에 급제한 자는 사람됨이 어떠한가?”
신회 : “신이 불러 만나보니 그가 말하기를 ‘10세부터 경서를 공부하였다’ 합니다.”
영조 : “이것이 이른바 ‘가랑이 실학[袴下實學]을 급제시켰다’는 것이다. 금번 합격자 발표 때에 내가 기운이 좋아지면 불러 만나보겠다.” (《승정원일기》 영조 29년 10월 29일)
어려서부터 경학을 준비해서 급제한 이에 대해 영조는 ‘이른바 가랑이 실학이 급제했다’고 했다. 다른 기록에서 영조는 ‘바지 실학[脚袴實學]’이란 말도 했고, 강경에서 떨어진 이들에 대해서 ‘도령 실학[都令實學]’이라고도. 했다. 아쉽게도 전후 설명이 없어 이 흥미로운 말들의 자세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이상에서 ‘사람들이 실학을 말하고’, ‘실학급제’, ‘바지실학’, ‘도령실학’ 등이 존재했던 조선의 실학 풍경을 소개했다. 그 모습들은 진작에 사라졌고 그들에 대한 연구 또한 최근에 진행되는 실정이다. 하지만 그 풍경들은 역사 용어 실학의 또 하나의 뿌리였고, 그 뿌리의 복원이 한국의 실학 역사에 풍성함을 더할 것임은 자명하다.
■ 글쓴이 : 이 경 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장)
'다산 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삶의 고난을 만난 실학자들 - 김선희 (0) | 2024.08.25 |
---|---|
역사의 퇴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 정근식 (0) | 2024.08.20 |
‘아직도 통일’과 ‘그래도 통일’ 사이에서 - 서보혁 (0) | 2024.08.13 |
조선의 실학 풍경(1) : 경학(經學)과 강경(講經) 사이 - 이경구 (0) | 2024.08.09 |
노란봉투법 - 김진균 (0) | 2024.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