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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어른이자 스승
글쓴이 김영죽 / 등록일 2024-09-13
어머니의 자리가 쉽고 가벼웠던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모성이 자기희생적인, 안전한 화제일까?’ (『어머니의 탄생_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 세라 블래퍼 허디, 황희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모성’을 생물학적 해석, 정치적 논쟁의 자리에 놓고 다각화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추세를 인정하지만, 여전히 세상에 나와 처음 만나는 어른이자 스승은 어머니라는, 그 정해진 자리를 부인할 수만은 없다.
어느 하나 속시원한 구석이 없는 오늘도 그저 ‘엄마’, ‘어머니’를 떠올리면 기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배움은 무용하고, 올바른 길[道]마저 부정당하는 패배감이 아침마다 엄습해서일지도 모른다. 해서, 조선의 어느 한 선비가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애절하게 써 내려간 글 한 편을 꼭 소개하고 싶었다. 추석은 어김없이 다가오고 있으니, 편승하여 애틋한 모자(母子)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글의 뜻을 파고드는 아이, 일일이 응대하는 어머니
주인공은 사양재(四養齋) 강호보(姜浩溥, 1690~1778)와 그의 어머니, 안동 김씨 부인이다. 오아재(聱齖齋) 강석규(姜錫圭, 1628~1695)의 서자이며 남당 한원진의 아낌을 받은 제자, 『상봉록(桑蓬錄)』이라는 연행기의 저자 정도로만 기억되는 강호보는, 어머니 김씨 부인을 추모하며 「선모행장(先母行狀)」을 짓는다. 행장의 분량은 상당히 긴데, 어머니의 교육과 경제주체로서의 면모, 모자지간의 정서적 유대까지 생생한 일화들이 대거 실려 있다.
어머니는 측실이었지만, 적모(嫡母) 소생의 형제들은 물론 집안사람 모두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던 높은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버지 강석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의 나이가 겨우 6세에 불과했으나 주변에서 ‘혹시 자식들에게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닐까?’ 의심할 정도로 어머니께서 엄격한 가르침을 행하셨다고 술회한다. 이에, ‘내가 일찍 부친을 여의고도 대략이나마 문자를 알 수 있던 까닭은 어머님의 세심한 가르침 덕분이다.’라 하였는데, 실로 그의 글 곳곳에 편린이 남아 있다.
6~7세, 한창 글 배울 나이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므로 교육은 어머니 몫이었다. 마을 수재(秀才)를 좇아 글을 읽던 어느 날 “죽순이 새로 돋으니 송아지 뿔과 같고, 고사리 처음 자라니 어린아이 주먹 같구나[竹筍新生黃犢角, 蕨芽初長小兒拳.]”라는 구절에 이르러 한참을 머뭇댄다. 이유를 묻자 그는 “황독각(黃犢角)은 알겠는데, 소아권(小兒拳)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고사리순이 처음 날 때 그 모양이 어린아이 주먹과 비슷하단다.”라며 손으로 모양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사양재선생행장(四養齋姜先生行狀)」) 글의 뜻을 파고드는 아이와 일일이 응대해주는 어머니의 절묘한 시너지다.
붓이며, 먹, 종이 등이 필요하면 밭을 팔아서라도 마련해주는 어머니의 지원에도 과거 시험을 준비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당시 그는 윤홍(尹泓, 1655~1731)의 문하에서 그의 차남 윤여경과 수학하였는데 윤홍이 장성의 임소로 옮기자 윤여경은 강호보에게 매력적인 제안 하나를 건넨다. 공부와 관련한 일체의 편의를 제공할 테니 동행하자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반응은 강경했다. ‘아들이 공부에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자 남에게 구걸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머니 김씨가 우려했던 부분은 또 있었다. 한창 혈기 왕성할 때 타지에서 외로움을 달래려 기방 출입이라도 한다면,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학문의 뛰어남보다, 행동의 근실(勤實)함을 가르쳤던 어머니의 소신이 그대로 반영된 처사이기도 하다.
청탁(請託)을 멀리하고, 지조를 굽히지 말라
「선모행장」에는 평생 청탁(請託)을 멀리하고 지조를 굽히지 말라는 어머니의 준엄한 당부를 회고한 부분이 많은데, 이 중 백미는 다음 일화이다. 그가 32세(1721년) 때 윤홍(尹泓)을 따라 능주(綾州)로 간 뒤, 고향 친구 우경서(禹經緖)가 어머니의 소식을 전하면서도 정작 가서(家書)는 들고 오지 않아 이유를 따져 물었으니, 사정은 이러했다.
우경서는 ‘자신에게 상속된 노비들 중 도망한 자들을 추쇄(推刷)하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강호보가 도와준다면 그 과정에서 얻은 이익의 절반을 나누겠다’고 제안할 요량으로, 동생 강연보를 설득하여 이 내용을 편지에 적어 달라 청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는 편지를 아예 전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우리 아이는 본래 소송과 관련하여 청탁을 받아 이익을 나누는 사람이 아니니, 자네는 부디 능주로 가지 말게나!”라고 하였다. 경고를 겸한 당부인 셈이다.
우경서는 ‘소송이 아니요, 그저 관청의 권세를 빌려 그들을 추쇄하려는 것일 뿐이며, 불의하거나 해로운 일은 아니니 의심하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어머니는 이를 단호히 거절한다. 추쇄 과정에서 청탁을 받아 이익을 나누는 건 분명 의리와 지조(志操)를 해치는 행위라는 입장을 밝힌 것이다. 이 일화의 함의는 크다. 사노비 추쇄에 있어 관원의 힘을 빌리는 조선시대의 관행과, 세(勢)가 없는 선비들이 연루되는 일련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란 어떤 길이 나에게 이로운 길인가를 끊임없이 제시하고 고민해주던 존재가 아니었던가. 강호보의 어머니가 들려주는 말들에는 공직윤리의 엄정함, 부조리, 불의에 대한 경계가 있다. 그가 나이 60이 넘은 나이에 과거를 급제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자, 망백(望百)의 노모는 ‘오늘이 국기일(國忌日)인데, 잔치할 기분이 나더냐!’는 따끔한 훈계를 하였다. 어디 그의 어머니뿐이겠는가. 우리가 듣고 자란 심상한 잔소리를 되새겨 보면, 종종 무릎을 칠만한 경구(警句)를 만날 수도 있을 법하다.
■ 글쓴이 : 김 영 죽(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HK연구교수)
[주요 저서]
『조선 지식인이 세상을 여행하는 법』(위즈덤하우스, 2016),
『낭송 19세기 연행록』(북드라망, 2019)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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