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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유감(順菴遺憾)

by 귤담 2022.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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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암유감(順菴遺憾)

 

 

글쓴이 김학수 / 등록일 2022-12-19

 

 

1775년 순암 안정복은 반 백년을 함께 했던 조강지처 창녕성씨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다. 세상을 떠난 지 석달이 지났어도 순암은 아내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외출해서 돌아오면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고, 배고프면 밥 달라고 하려 하고, 병이 들면 간호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문득 문득 잠을 설쳤다. 더구나 의지할 데를 잃은 아들은 방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정혼도 못한 딸(훗날 권일신의 아내)의 서러운 눈물을 지켜보노라면 가슴이 헤어지는 듯 했다. 그 절절했던 심사는 아내의 영전에 올린 ‘제문[祭淑人昌寧成氏文]’에 고스란히 실려 전하고 있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있어야 하고, 자식은 또 부모를 필요로 하는 인간사의 당연함이 순암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로부터 약 5년이 지난 1780년 무렵 ‘완귀정가(玩龜亭家)’라 불리는 영천의 일가집에 비상(非常)한 일이 발생했다. 덕곡을 왕래하며 살갑게 지냈던 안경시(安景時)의 자부 여흥이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이씨 부인은 지아비 안서중(安瑞重)이 병마와 시름하다 마흔 전에 사망하자 장례를 채 치르기도 전에 약을 먹고 그 뒤를 따른 것이었다. 아홉 살 아들과 열 네 살 딸의 피맺힌 울부짖음도 그녀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연연하지 못하고 너희 아버지를 따라 간다. 너희들은 잘 자라 훗날 지하로 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거라. (안정복, 『순암집』 권19, <열녀 여흥이씨행록 뒤에 쓰다>)  

 

 자식에게는 이토록 매정한 어머니였지만 어느새 그녀는 사회적 표창의 물망에 올랐고, 완귀정가에서는 정려사업을 추진하는 한편으로 ‘이씨행록’을 안정복에게 보내 후제(後題)를 부탁했다. 『順菴集』에 실린 ‘열녀 여흥이씨 행록 뒤에 쓰다[題烈女驪興李氏行錄後]’라는 글이 바로 이것인데, 석학의 손을 빌어 열행을 더욱 천양하겠다는 심사였다. 

 

1781년에 지은 이 글에서 안정복은 이씨부인의 비사(悲事)에 애통함을 표하면서도 유교윤리적 공감의식에 더욱 무게를 싣는다. 그는 이씨를 유순함과 정열을 아우르고 인의(仁義)를 겸행한 모범적인 여성으로 디자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녀를 통해 열행(烈行)의 종족적 규범화를 꾀한다.

 

그가 전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총 8장으로 구성된 시에 집약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부인을 ‘부부 의리의 중함을 알아 죽음을 택한 여성’, ‘송죽같은 지조와 난초같은 자품을 갖춘 모범적 규방인’, ‘혹독한 시병의 시련 속에서도 시부모의 마음을 헤아린 효부’, ‘어린 자녀에 대한 정마저도 단호히 끊었던 정열’, ‘사대부에게도 본보기가 될 살신의 결단’, ‘연리지와 비익조를 연상케 하는 부부애’로 묘사하며 애틋하게 기렸다. 

 

화순은 인에서 나오고                   和順由仁

정렬은 의에서 나오거늘                貞烈由義

인에서 말미암고 의를 행하였으니   由仁義行

하늘과 사람에 부끄럽지 않네         俯仰無愧

훗날 누가 역사를 쓰면서               誰編彤管

이 아름다운 자취를 기릴거나         以彰令聞

집안의 늙은이가 시를 지어             宗老作誦

후세에 일러주며 종훈으로 삼노라    詔後爲訓

     

이렇듯 안정복은 ‘여흥이씨’라는 한 개인의 열행을 사회적 가치로 확장시키며 종문(宗門)의 윤리 규범으로 정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순암이 살았던 시대의 이념적 분위기를 모르지 않고, 그가 추구했던 주자학적 가치가 무엇인지를 또한 모르지 않으며, 서학의 침윤으로 유교국가의 시스템이 붕괴될 수도 있다는 우환의식에 밤잠을 설친 그 고뇌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저 하향(遐鄕)의 범유(凡儒)에게서나 들을 소리를 순암의 필설(筆舌)에서 확인하는 것은 왠지 실망스럽다. 

 

어린 자녀의 애원마저도 단호히 끊어버렸던 매정함을 의(義)의 실현인 ‘정열(貞烈)’로 평가한 대목은 더욱 그렇다. 부부의 의리만 중하고 취학할 나이도 안된 아들과 비녀 꽂기에도 이른 딸의 혈소(血訴)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비슷한 또래로 얼마 전 지병으로 어머니를 여읜 자신의 딸에 대한 비통함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보다 남자[君子]들 또한 이 부인의 의리를 본받아야 하고, 경향을 막론하고 광주안문의 모든 이들은 이 여인을 기릴 것을 역설하는 대목에서는 뜨악해지기까지 한다. 

 

글쓴이 : 김학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학 전공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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