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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증거력

by 귤담 2022.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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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증거력

글쓴이 심경호 / 등록일 2022-12-26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기록물에 접하고, 그 기록을 추론의 자료로 활용한다. 모든 기록이 진실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어떤 기록은 은폐나 왜곡을 의도한다. 고전 인문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나로서는 늘 문헌이나 금석문 등 수많은 기록물을 논거로 활용해 왔는데, 그때마다 기록의 증거력(증빙력, 증명력, power of evidence)을 가늠하는 일로 고투해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한국문학사와 시성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큰 도움이 된 기록물 가운데 하나가 정약용의 『아언각비』이다. 정약용은 이 저술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에서 사용되는 개념과 명칭의 의미를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1987년에 박사 논문을 작성하고 1999년에 출판하게 되었을 때, 그 한 장에서 조선시대 두보 시의 독자적인 해석 성과를 탐색하다가, 장서각(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관리)에 『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 7권 7책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 시집은 명나라 말 청나라 초 전겸익이라는 인물의 『전주두공부집(箋注杜工部集)』 가운데 시만 옮겨 적은 것이다. 장서각본은 한쪽 면마다 열줄로 적고 한 줄마다 스무 글자를 채웠다. 즉 10행 20자이다. 시의 대문(본문)은 좌우가 하나의 짝을 이루도록 하여 원앙대(鴛鴦隊)의 쌍행(雙行)으로 필사했다. ‘홍재(弘齋)’라든가 ‘만기(萬機)’라든가 하는 장서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정조대왕의 어람용이었을 듯하다.

 

나는 1975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1976년 2학기부터 국문학과에서 공부하게 되면서 최근까지 여러 답사 활동에 참여했다. 그때마다 곳곳에서 고서들과 고문서들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보관 상태가 좋지 않은 필사본들 가운데는 시집이거나 과시집이 많았다. 예전에는 별로 주목받지 않았지만, 이것들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뿌리를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주요한 자료들이다. 그런데 필사본 시집이나 과시집은 시의 한 연(聯)마다 원앙대의 쌍행으로 적어 둔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시를 적을 때 원앙대를 이루도록 한다는 관습에 대해 명시한 기록은, 내가 알기로는 『아언각비』가 유일하다. 즉, 그 사실은 『아언각비』의 ‘구(句)’ 조항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정약용은 ‘구(句)’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조선에서는 한 짝을 이루는 연(聯)을 ‘구’라고 말한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은 우리 문헌자료를 이해할 때 많은 의문들을 풀 수 있게 해 주는 열쇠와도 같다. 과거 시험에서 부과되는 과시(과체시, 동시, 행시, 공령시, 정시라고도 함)는 17개에서 19개의 운(韻)으로 작성했는데, 이를테면 18련의 구성을 18련이라고 부르지 않고 18구라고 불렀다. 구두점의 ‘구’도 하나의 의미단위를 이루는 문장이나 준-문장을 의미하지, 서양문법에서 말하는 구(phrase)가 아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첫머리에 있는 세종대왕 어제(御製)를 보면, 본래 구(句)마다 줄 오른쪽에 작은 흰 동그라미를 넣고, 두(讀)마다 글자 바로 아래(줄의 한 가운데)에 작은 흰 동그라미를 넣어서, 구와 두를 구분했다. 불행하게도 간송미술관의 국보는 이 부분이 원본이 아니다. 뒷날에 보완 필사한 분은 구와 두를 구분하지 못했다.

 

‘구’의 개념은 조선의 문화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향가와 관련하여 ‘삼구육명(三句六名)’이라는 형식요건이 운위되는데, 그 때의 ‘구’도 한국의 고유한 개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언각비』의 ‘구’ 조항은 엄청난 증거력을 지닌다. 젊은 시절 우연히 이 기록물을 읽고 그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던 일이, 근대 이전 인문학을 연구할 때 자료의 ‘물질’ 상태를 중시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지식이 지식으로서 성립하려면 그 사실이 참(true)이어야 하고 그 사실이 신뢰를 받아야 믿어하며(be believed) 그 사실이 입증되어 정당화되어야(justified) 한다. 정약용은 이 지식의 필요충분 조건에 대해 고민했기에 증거력 있는 기록을 남기고자 힘썼다. 학문은 위압적인 독단도, 근거를 알 수 없는 선언도, 애상에 찬 호소도 아니다. 그동안 내가 작성했던 적지 않은 논문들이 장래에 과연 증거력이 있다고 미래에 판정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두렵다.

 

글쓴이 : 심 경 호(고려대학교 특훈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