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다산 글방

조선학운동의 역사성과 공공성 - 이지원

by 귤담 2025. 10. 5.

 

 

> 다산글방 > 실학산책

조선학운동의 역사성과 공공성

글쓴이 이지원 / 등록일 2025-10-04

‘조선학운동’은 1934년 9월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년과 이듬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여유당전서》 간행 사업을 추진하면서 촉발되었다. 조선을 연구하는 학문, 즉 ‘조선학’을 사회운동으로 전개한 것이다. 그것은 일제의 식민주의 문화에 대응하는 학술운동, 문화운동이었다.

 

황민화·파시즘 강화에 대응한 학술·문화운동

 

일제는 식민통치기 내내 조선인을 일본 국민이 되게 하는 문화정책을 일관했다. 이른바 ‘동화주의’ 문화정책이다. 조선인을 문명화시켜 일본 국민으로 동화시킨다는 명분 아래 과거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열등하게 또는 일본 국가의 하부 문화로 왜곡한 ‘전통’을 ‘발명(invention)’했다.

 

영국의 역사학자는 에릭 홉스봄은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에서 ‘전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사회에 들어 의도적으로 구성되고 제도화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사회적 통합을 다지는 정체성을 강화하고 제도나 권위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한 발명이었다.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에서도 그러했다. 식민지민을 제국의 국민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과거를 소재로 ‘전통’을 창출했다. 일제가 사용한 ‘일시동인’, ‘일선동조’, ‘내선일체’ 등은 그러한 만들어진 전통을 합리화하는 구호였다. 그만큼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동화시키는 문화적 정신적 지배에 공을 들였다.

 

특히 3·1운동으로 조선 독립의식의 실체를 목격한 이후 더욱 그러했다. 민중의 의식을 ‘교화’시키는 민중교화정책을 도입했고, 일본사의 일부로서 조선사 교육과 연구가 본격 추진되었다.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관학자들을 대거 동원한 《조선사》간행 작업을 시작했다. 조선의 풍습, 마을축제 등은 “조선의 문화를 규명하고 민중의 정신적 생활을 요해(了解)하는 좋은 자료”로 연구되었다.

그리하여 1932년부터 ‘일본사의 일환으로서 조선사’가 편찬되기 시작했고, 청구학회, 경성제대 조선경제연구소 등 일제 관학자의 조선 연구 조직도 체계화되었다. 만주사변, 상해사변 이후 일제가 침략전쟁을 확대하는 가운데 정신작흥운동, 심전개발정책 등 문화적 정신적 동원이 추진되었다. 1930년대는 식민주의의 ‘만들어진 전통’으로서 《조선사》간행과 황민화·파시즘 문화정책이 강화되는 시기였다.

조선학운동은 이러한 때에 제창되었다. ‘조선학’을 운동으로 제창한 안재홍은 신간회가 해소되고 일제의 침략전쟁과 파시즘체제 강화로 조선인들의 합법적 정치 운동이 불리해지는 상황에서 ‘최선한 차선책’으로 문화운동을 제안했다. 그것은 조선인의 문화적 정진을 도모하는 ‘조선문화운동’이었고, 일제의 식민주의 조선 연구에 대응하는 ‘조선학’ 수립 운동이었다.

다산을 호명한 까닭, 민권국가의 전통을 주목

조선학운동은 다산 정약용을 주목하고 호명했다. 왜 다산이었을까? 당시 조선학운동을 주도하고 《여유당전서》 책임교열을 했던 안재홍과 정인보의 글에서 그 의도를 살필 수 있다.

안재홍은 사회과학을 전공한 언론인이자 비타협 민족운동가로 신간회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그는 다산을 ‘변법자강(變法自疆)’의 진보주의자이자 ‘민(民)’ 중심의 개혁론자로 호명했다. 변법은 급진적인 국가 정치제제의 개혁을 의미하는 용어인데, 안재홍은 다산을 “변법으로 스스로 강해져서 낡은 나라를 새롭게 하자(變法自疆-新我舊邦)”는 ‘근세 국민주의의 선구’로 평가했다. 다산의 근세 국민주의 사상은 루소의 『민약론民約論』과 유사하고 황종희의 『명이대방록』과 같이 입헌적인 정치 경륜을 보여준다고 비교했다. 또한 다산이 「전론田論」에서 여전제를 제기하고 공동경작의 농민중심 토지개혁을 제시한 것은 국가적 사회민주주의 사상이라고 했다.

정인보는 강화 양명학자 난곡 이건방(李建芳)의 제자로 국권상실 후에는 만주와 상해를 다니면서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등과 동제사를 결성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학문이란 한 민족 단위의 주체적인 학문체계를 세움으로써 세상의 가치를 바로 세우고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학문관에 입각하여 ‘조선학’의 개념을 도출했다. 그리고 조선학의 학문적 계통성을 조선 후기 ‘실학’에서 찾았다.

그는 실학자들의 저서와 학문을 설명하면서 ‘조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조선학은 조선을 중심으로 한 모든 실용적 고찰로서 민중에 자극받아 나타난 진실의 학문이며, 타국 중심의 학문에 대응하여 조선을 중심으로 조선에 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했다.

특히 학자가 민중의 바라는 바를 따르면 학자가 지향하는 것이 곧 전체 민중이 지향하는 것이라 하고, 이러한 근세 조선학은 성호 이익으로부터 시작되어 다산 정약용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고 보았다. 다산은 이러한 자국의 민중 중심의 실용적인 학문인 근세 조선학의 집대성한 인물로 호명했다.

안재홍과 정인보가 조선학운동에서 다산을 호명한 것은 조선후기 국가 중심의 개혁사상, ‘민’ 중심의 현실 개혁 전통을 복원하려는 관점과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그것은 독립된 근대 국가가 ‘민’을 중심에 놓는 근대 민권국가를 지향하는 개혁사상이었다. 다산으로 상징되는 전통은 제국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된 근대 민권국가의 전통을 만드는 것이었다. 조선이 독립국가를 운영했던 경험으로부터 식민주의가 왜곡한 조선문화를 넘어선 민권국가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조선학이었다. 그것은 식민주의 조선학, 식민지 지역학으로서 조선학과는 다른 조선학이었다.

식민주의를 거부한 진정성의 학문

제국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조선의 토속, 관습, 언어, 역사, 문화 연구도 조선학으로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고유성’ ‘전통’을 강조해도 일본식 국가주의·국민의식의 하부요소로 연구된다면 그것은 식민주의 조선학, 식민지 지역학으로서 조선학이다. 조선의 토착문화(native culture)는 조선의 민족문화(ethnic culture)이지만 일본 국민문화(national culture)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조선-만주를 엔(円)블록경제의 문화기획으로 일본 조선 만주의 문화 계통이 같다고 하거나(일선만문화동계관 日鮮滿文化同系觀), 대동아공영권의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얘기하며 조선을 강조하는 학문은 지역학으로서 조선학, 식민주의 조선학이다. 그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의 ‘다민족 국가체제’와 상충하지 않는 조선학이다.

조선학, 민족문화의 독자성을 논한다고 해도 그 주체가 독립된 국가인지 식민지인지에 따라 학문의 진정성에 차이가 있다. 제국의 지역학으로서 ‘조선학’, 식민주의 ‘조선학’은 겉으로 대단히 조선적이고 민족적인 표상을 하지만, 학문의 진정성은 없다. ‘민족’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가장 반민족적인 실천으로 귀결될 수 있다.

1920년대 ‘조선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여 조선연구의 대가로 평가받던 최남선이 일제가 세운 만주 건국대학의 유일한 조선인 교수가 되어 제국의 지역학으로서 ‘조선학’, 식민주의 ‘조선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것은 그러한 사례이다.

다산을 호명하며 조선문화운동으로서 조선학운동을 추진한 지식인들은 현실 기득권이 아닌 ‘민’ 중심의 개혁을 강조한 과거 한국 지성의 고민을 20세기 식민지 현실 타개를 위한 사상으로 호명하고 재현했다. 그것은 조선후기 이래 한국의 지성이 국가개혁을 통해 ‘민’의 살림을 살피는 공공성을 조선의 ‘전통’으로 호명한 것이다. 학문의 진정성을 생각했던 것이다.

세계로 통하는 ‘열린 정체성’ 문화를 지향

또한 연구의 관점과 방법도 새롭게 모색하였다. 즉 옛것을 박제화하는 복고적이고 폐쇄적인 연구가 아닌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연구였다. 당시 ‘조선학’은 안재홍, 정인보, 문일평 등을 비롯하여 사회주의 계열인 백남운, 김태준, 신남철 등의 관심 영역이 되었는데, 공히 ‘진보적 견지’와 ‘과학적’ 조사 연구의 방법론을 거론했다. 당시 일제가 실증주의 방법론으로 식민주의 조선학의 ‘민족성론’과 ‘정체성론(停滯性論)’을 창출하는 것에 대응하는 ‘진보적 견지’와 ‘과학적’ 연구가 제기되었다.

과학적 조선 연구는 ‘배타적인 편소(偏小)한 민족적 주아관(主我觀)’에 빠지지 않고 세계문화에 채용되는 ‘자아창건(自我創建)’을 위한 학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자아창건을 안재홍은 배타·고립적이고 봉건적인 구시대의 문화적 잔재가 아닌 개방된 세계적 자아관에 입각하고, 세계문화에 조선의 색깔과 조선의 요소를 확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문화정체성이 아닌, 세계적 보편성으로 확장되는 ‘열린 정체성’ 문화를 지향했다 하겠다.

그것은 문화의 주체인 ‘민’이 존중되며 민족과 세계가 서로 공존하는 공공성이 발휘되는 조선학이었다. 이는 오늘날 K-culture, K-studies의 지향과도 맞닿아 있다.

1930년대 ‘조선학운동’은 식민지 민족운동의 한 방략이자 일제의 식민주의 문화정책에 대한 대응이라는 실천성을 갖는다. 다산기념사업과 여유당전서 간행을 이슈로 삼아 조선후기 이래 ‘민’ 중심의 개혁사상과 학문을 소환하고 실학 연구를 촉발하는 성과를 낳았다. 또한 연구의 과학적 방법과 진보적 관점의 모색도 실천되었다. ‘조선학운동’은 21세기 오늘날 과거의 학문과 사상을 호명하며 ‘민’ 중심의 공공성과 새로운 한국학을 모색할 때 유효한 역사적 경험으로 여전히 현재적이다.

 

글쓴이 : 이 지 원 (대림대학교 명예교수,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상임공동대표)

- 대림대학교 명예교수

- 아시아평화와역사교육연대 상임공동대표

- 한국 근대 문화사상, 문화운동, 독립운동을 연구하고, 동아시아역사연대를 위한 시민운동에 함께하고 있음

[주요 저서]

『한국 근대 문화사상사 연구』, 『일제의 동화주의 문화정책과 박물관』 『한국의 여성 독립운동가 1~5』(공저), 『미래세대의 동아시아 읽기』, 『한국학 학술용어』(공저), 『3·1운동 100주년 총서 1,5』 (공저) 등

☞ 이 글은 2025 신(新) 경세유표 연구 및 교육 지원사업 의 하나로 발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