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에 떠나보낸다
-이제 윤강원, 그를 놓아 보내리
유금호(소설가)
잉카의 눈물
1997년 2월 나는 페루 안데스 산맥 한 자락에 숨어 있는 마추픽추 정상에서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에 젖고 있었다.
잉카의 마지막 황제 투팍 아마루가 스페인에 대한 마지막 저항이 실패로 돌아간 후, 쿠스코 광장에서 네 마리 말에 찢겨죽으면서도 끝내 마추픽추의 비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는 해발 2,280미터의 공중 도시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같이 오기로 했던 친구, 윤강원의 부재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헤어짐이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 헤어짐이 다시는 재회가 불가능한 사별이라 해도, 예견하고 준비해 온 사별과 전혀 준비 없는 사별의 충격은 다르다.
내 생애, 단 한 분, 내 존경과 의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면 나는 그 순간 어떻게 하든 견딜 수 있었을 거였다. 아버지는 노환 중이었고, 80이 넘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하루 전, 겨울 휴가 때 만년설 쌓인 잉카의 유적지와 몽골의 초원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제멋대로 앞서 여행을 떠나버렸던 것이다.
죽어서 나는 돌아오리라
프로메티우스의 독수리가 되어
돌아와서 나를 만나리라
이제는 巨木이 된 분노의 심장을
쪼아서 남김없이 찢으리라
인간에게 또 다른 불을 가져온 자들의
肝마다 할퀴어 그들을 영광케 하리라
찢어서 그들을 尊貴케 하리라
(윤강원 -나무심기 일부-)
친구는 그의 시 속에서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그 해 겨울방학 때 같이 안데스 산맥 깊은 골짜기에 감추어진 마추픽추 정상과 몽골의 드넓은 초원을 여행하기로 약속했던 친구는 나보다 훨씬 빨리 이곳을 다녀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911년 하이람 빙검에 의해 발견되어 잃어버린 도시로 명명된 엉뚱한 공간에 서서 나는 그를 불러 보았다.
같이 서 있기로 한 장소에 그가 앞서 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무게 1백 톤에서 3백 톤에 이르는 거석들을 맞은 편 산에서 잘라다 세운 작은 도시의 석벽과 수로, 태양신전, 왕녀의 궁전을 지나 나는 오두막 곁의 고인돌 크기의 다듬어진 넓은 돌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의석(葬儀石)이라고 했다.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그 돌 위에서 잉카인들이 사자(死者)와의 마지막 결별 의식을 진행했으리라는 추측이었다.
그 돌 한쪽에 손 하나가 드나들 만큼의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제물로 썼던 라마를 묶어 놓은 곳이었을 것이라는 짐작이었고,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 맞은 편 언덕에 150구의 여성들을 포함해서 173구의 미라가 누워 있었다고 한다.
고도가 높아 술을 마시면 큰 일이 난다는 안내인의 설명을 들었지만 나는 장의석 위에 종이컵을 올려놓고 서울에서 가져간 팩 소주를 몰래 따랐다.
영혼이란 것이 있는 것이라면 앞서간 친구는 아마 거기 150명이나 되는 잉카의 태양의 처녀들 사이에 끼워 유쾌히 소주를 마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소주잔 안으로 안데스 산맥의 정령들이, 잉카의 혼령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환영을 보며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잔을 채워 놓았다. 잔 속으로 부슬비 방울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어디선가 친구의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듯 했다. 그래, 나쁜 자식아, 이제 네 맘대로 훨훨 날아다녀라. 그래, 맘대로..... 혼자 잔을 비우고, 또다시 한 잔을 따라놓고.....
많이 알려진 친구는 아니었어도 너무 갑자기 이승을 버린 시인 윤강원(1943-199x)을 기억하는 문우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화내는 얼굴을 본적이 없는, 너무 어처구니없이 가버린 그를 떠올리면 같이 어울려 다니던 소설 쓰는 유모를 같이 떠올리리라고 생각한다.
어설픈 내 인연의 끝
그곳 페루의 수도 리마는 5월이 되어야 두어 차례 새벽녘 안개 같은 습기가 잠시 대지를 적시는 일 뿐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아 그 새벽 안개를 잉카의 눈물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잠깐이었지만 그 2월 초순 리마 시가지에는 먼지를 잠재울 만큼의 보슬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자 환성을 내지르며 거리로 뛰어나가던 그 잉카 후예들 사이에서 언뜻 친구 윤의 모습을 본 듯 했다.
면도날도 안 들어간다는 정교한 거석들로 쌓아 올린 쿠스코의 아르마스 광장, 로레토 골목 석벽 곁을 역시 친구가 어깨에 비스듬히 판초를 두르고 지나가는 듯한 모습을 본 듯도 했다. 길이가 360m나 이어진다는 커다란 거석의 성곽 사크사이와만 석조 성곽아래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라마 곁을 그가 스치고 지나는 모습 역시.
- 6월 24일이면 태양의 축제가 열립니다. 그 날 하루는 모두가 옛날의 잉카로 돌아가지요. 황금 왕관도, 태양의 처녀들도 모두 다시 살아나서 제일 좋은 옥수수 코클로로 빚은 술이 황금 잔에 따라 바쳐지고, 제일 잘 생긴 라마의 심장을 잉카의 칼 투미로 도려내어 코리칸차 신전에 바칩니다. 잉카인들이 죽은 것이 아니지요. 이 숲 속에 정령으로 살아 있다가 그 날은 다시 현신을 합니다.
그 날 밤, 신성한 강물 우르밤바 강가에서 하루 밤을 묵으며 거기 강가에 노랗게 핀 야생 키니네 꽃 사이에서도 나는 그의 그림자를 느꼈다.
윤강원.
시인이었고, 영문학 박사였고, 교수였다.
- 형도 흰머리 늘었네.
제 머리칼 희어지는 건 거울에 안 보이더냐고 같이 웃다가, 그해 겨울방학 여행 약속을 다시 하고, 윤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왜 하필 그 날 아침 나눈 윤과의 마지막 화제가 '죽음'에 관한 것이었을까. 왜 하필 쉽게 갈 수 없는 안데스와 몽골로의 여행 약속이었을까.
참 이상하게도 우리는 30여 년을 늘 가깝게 있으면서도 조금씩 비켜서서 긴 세월동안 한번도 다투어 본적 없이 늘 많은 걸 공유했었던 사이였다.
4,19와 5,16의 외연적 충격과 20대라는 격정기의 대학생활을 같이 하면서 문학과 학문의 치열성 속에 우린 동료였고, 친구였으며, 때로는 형제였다.
문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 속에 때때로 밤새워 격론을 벌리기도 했고, 나의 20대, 앞서 세상을 떠난 손아래 동생의 죽음 앞에 휘청거리던 나를 그가 지탱해 주기도 했다.
- 형, 부활은 죽음이 전제되어서만 가능한 거 알잖아?
신춘문예 당선 소식을 들었던 새벽, 내 동생의 무덤 앞에서 이를 갈며 울고 있던 내게 그는 나를 그렇게 위로했다.
- 그래, 쓸 거다. 내 동생, 다 살지 못한 이승의 세월, 내가 더 살아준다.
- 글을 쓰는 건 생명의 창조적 전환일 수도 있어.....
그가 웅얼거렸다.
그렇게 30여년이었다.
‘한국소설에 나타난 죽음의 분석'으로 문학박사 학위 논문을 끝내었을 때 뒤이어 그 역시 늦은 나이에 로버트 프루스트의 시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문득 서로의 머리칼에 백발이 섞여 가는 걸 확인하면서, 그 일요일 아침 우리는 겨울방학이 되면, 남미 잉카의 유적지나, 몽골의 초원, 아니면 아프리카로 훌쩍 떠나자는 약속을 했다.
늘 어울려 지났지만 문우들끼리 저녁에 만나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가족들과 함께 아침 해장국을 먹는 모임으로 바꾸어 한 반년쯤 지났을 터였다.
‘똠방각하'의 최기인, '남사당'의 김용우, 시인 황청원. 늘 그래왔듯 그 일요일 아침도 우리들은 부부가 같이 모여 해장국을 먹었다.
많은 양은 아니었지만 몇 순배 반주로 소주를 나누고, 다시 우리 집으로 모여 차를 마셨다.
한쪽에서 아내들이 남편들의 현실 감각 없는 무능력을 실컷 흉보면서 스트레스를 풀어 가는 동안 남자들은 흰 머리칼이 늘어가는 나이들은 또 다 잊은 채 소년들로 돌아가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침 하필이면 왜 '죽음'이 우리들의 화제에 중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신문에 장지 면적에 관한 기사가 실렸던 것도 같고, 아니면 가십난에 어느 외국배우의 사망 소식과 그의 남겨진 젊은 아내와 어린아이 기사 때문이었던 것도 같다.
우리의 매장(埋葬)문화가 화장(火葬)으로 바뀌어야한다는 주장에, 티베트의 조장(鳥葬) 풍습, 시베리아 북단의 몽골리안 계열의 축치족의, 시신을 조각 내어 짐승들이 쉽게 먹도록 들판에 뿌려주는 특수한 장례의식, 거기다가 이집트와 잉카의 미라, 장자(莊子)의 생사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소설 속에 드러나 있는 죽음의 형태까지가 화제가 되었다.
- 근대 한국 소설의 주인공은 거의가 물에 빠져 죽어. 물이 가지고 있는 소멸과 재생의 상징성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거지. 심청이 물을 통해 왕비로 변신하듯 그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거든.
결국 내 학위 논문까지 화제에 끼워들어 그 날 아침은 계속, 죽음의 의미, 그 본질에 대한 결론 없는 의견의 해일이었다. 결국 아내들이 아침부터 왜 하필 그런 화제냐고 끼워들면서 우리는 다음 주말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월요일인 이튿날 나는 늘 해왔듯 직장이 있는 목포에 버스로 내려갔고, 버스에서 내리자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화를 아내에게 했다.
전화 속의 아내가 이상하다고 느낄 사이 없이 아내는 목이 잠긴 채, 놀라지 말아요....놀라지 말아요.....그렇게 떨고 있었다.
순간 나는 병석에 계시던 80이 넘은 시골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참으로 불효스러운 이야기지만, 그리고 이제는 그 분 역시 이승에 계시지 않지만 그 순간 나는 아내가, 시골 아버님이.....그렇게 다음 말을 이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잠시 하늘이 빙그르르 돌았고, 견뎌야된다고 생각하며 어금니를 앙 다물었다.
"말해. 괜찮아."
".........."
"......괜찮다니까...."
"..... 윤 교수가.... 윤 교수가 조금 전.... 심장마비....."
바로 전날 아침 겨울 휴가 때 몽골의 초원이나, 만년설 쌓인 잉카의 유적지에 같이 가기로 한 친구가 제멋대로 앞서 여행을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밤 기차로 서울에 되돌아 와 새벽에 병원에 도착한 나는 전날 같이 해장국을 먹었던 친구들과 시체실로 내려가 설합 속에 들어 있는 친구를 꺼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얼굴빛도 피부색도 그대로인 친구는 우리를 놀리듯 체온만 없을 뿐, 얌전하게 누워 있었다.
그때 다섯 살이었나, 뒤늦게 둔 그의 외아들이 나를 발견하자 뛰어와 안겼다.
늘 제 아빠랑 같이 있던 아저씨였으므로. 하루 전부터 안 보이는 제 아빠도 우리와 같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 우리 아빠는 어디 있고요?
- 응, 곧 올 거야.
내 손에 매달리는 아이와 눈을 안 마주치려 안간힘을 해가다가 결국 우리 몇 친구들은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관상동맥협착증. 의사가 무어라고 설명해 주어도 도무지 나는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이 자식아, 내가 죽은 자리에 늬가 와야지. 내가 널 문상 와? 이놈아......
은사였던 시인 조운제 교수가 꺼이 꺼이 울고 있었다.
- 여기는 순서도 없는 거야?
반백의 김윤성 시인이 주먹으로 땅바닥을 때리는 모습이 보였다.
선후배 문인들이, 제자 아이들이, 모여들고 있었는데 나는 비칠거리며 영안실 뒷마당 고목 그루에 기대어 울지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를 묻던 날 충청도식으로 관에서 시신을 꺼내 맨 땅으로 돌려보내면서 관을 태우던 잔디밭 한쪽 불길 위에로 싸락눈이 계속해 내렸다.
다섯 살짜리 아들은 제 아비가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 있는데도 불 피우는 재미에 강아지처럼 눈 속을 뛰어다니며 즐거워했다.
그가 떠나고 나서 몇 년 동안 방학 때마다 나는 허깨비처럼 지구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내가 대학 2학년이었을 때, 1학년으로 입학했던 그를 만나 온 것이 30년, 내가 소설을 썼을 때 그는 시를 썼고, 내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자 그는 성경을 파고들었다.
내가 오스카 와일드에 흥미를 가지자, 그는 청산별곡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논문을 썼다. 자기 보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 온 친구의 급작스러운 사별을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의 부재(不在). 그가 지상에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아프리카 초원에도 갔고, 아마존 밀림에도, 남태평양의 작은 섬에도 갔다.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갔던 몽골 초원에서도 이곳 저곳에서 나는 그의 모습을 찾으려고 허둥대었다.
120마리의 표범 가죽으로 덮었다는 황제의 겔을 중심으로 수백 수천의 질서 정연한 겔들이 늘어서 있었을 몽골의 왕년의 수도 카라코름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 뿐,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친키스칸은 무덤이 없어요. 알려진 무덤이 없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제 고장에 칸의 무덤이 있다고들 주장하지요.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던 가이드가 그 텅 빈 공간 위에 땅바닥으로 깔린 무지개를 바라보며 그렇게 내게 설명해 주었다.
무덤이 없으므로 해서 수십, 수백의 칸의 무덤이 존재하는 거라고.....
혈관마다 아열대의 큰 뱀들과
능구렁이와 살모사와
돗바늘 같은 새끼 뱀들이라도
放牧하고 싶다
들개처럼 달을 향해 짖으며
덧없는 불꽃뿐인 우리들의 젊음과
다만 흘레일 뿐인 꿈과
箴言들을 물어뜯고 싶다
어느 날 거리에서
바람 쏘는 먼지에 눈멀고
햇빛의 번쩍이는 칼날에 귀 잘리었을 때
뇌리 속 모든 등불도
亡命해버리고
빈 포켓들만 甲?처럼 비워 있을 때
(윤강원의 술노래 일부)
젊음의 한때 너무 뜨겁던 시인의 열정이 그를 한 곳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게 했을지 모른다.
끝도 없이 펼쳐져 간 바양고비 푸른 구릉 위로 지천으로 보라 빛 지츠 꽃이 깔려 있었고, 한가하게 흰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나는 친구의 음성과 웃음소리를 거기서 들은 듯 했다.
손아래 동생을 보내면서 시작된 내 사별은 강의실에서 공부하던 제자들이 광주 금남로 거리에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도 했고, 아침 출근길에 교문 앞에서 혼자 침묵 시위를 하던 학생이 점심 시간 스스로 뿌린 시너 불꽃에 산화하던 모습을 지켜보게 하기도 했다.
나는 드디어 사랑하던 사람들을 자유롭게 놓아 보내주기로 한다.
'죽음'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부활의 개념이 오는 것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완벽한 자유란 인연의 끈을 놓아주는 것에서 올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내 동생과 아버지와 어머니, 불 속에서 소신공양(燒身供養), 떠나버린 사람들을 현실의 공간, 이 지구 어디에서도 다시 만날 수 없음을 더 이상 어떻게 하랴.
그들이 불과 물과 공기와 대지의 원소로 환원하여 자유롭게 부유할 수 있도록 진정으로 놓아주는 일이 이제 사랑이리라.
그리고 언젠가 우리 역시 그 원소들 속에 환원하여 우주를 그들과 더불어 함께 유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친구는 이제 거기 카라코름 초원 위 지츠 꽃 사이에, 마추픽추 새벽 하늘 별 언저리에, 우르밤바의 야생 키니네 숲 속에, 시공을 넘어서 그렇게 늘 자유롭게 있을 것이다.
이제 친구를 놓아보내 주기로 한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확신이 왔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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