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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4월 25일

by 귤담 2023. 3. 23.

오늘의 역사 4월 25일

 

 

언제 우리 다시 흙이 되어 만날지라도

그해 봄날 산만큼의 물빛되어 흐르는 강

저택의 고요한 흔들림보다 더 잔잔히 비가 온다.

 

세상의 겨드랑이 관통하는 화살처럼

언젠가 우리가 우리일 수 없는 별빛처럼

공화국 뒤편 동강난 산맥에도 비는 내리는지.

 

다가오는 봄날 아침 광주는 해빙 되고

꽁꽁 언 나뭇잎 위 무딘 세상 켜켜이 쌓이듯

세월은 침잠한 새순처럼 돋아나도 비가 온다.

                             -이재창 시인의 「年代記的 몽타주․4 – 봄비」 전문

 

 

*오늘은 법의 날, 1963년에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법의 지배를 통한 세계평화대회’에서 모든 나라들에 법의 날 제정을 권고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우리나라도 1964년부터 시행

*오늘은 DNA의 날 1953년 오늘 과학저널 ‘네이처’에 제임스 왓슨 등이 밝혀낸 DNA 구조가 실린 것을 기념해 2003년 제정

*오늘은 세계말라리아의 날

*세계펭귄의 날

*앤잭 데이(Anzac Day):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자유의 날: 포르투갈

 

 

1355년 [음]공민왕(恭愍王) 4년, 왜구가 전라도 조운선을 약탈함

1404년 [음]태종 4년, 의정부에서 각 도의 전답과 호구 수를 보고함

1417년 [음]태종 17년, 완산 부원군(完山府院君) 이천우(李天祐) 죽음

1431년 [음]세종 13년, 《태조실록》·《정종실록》·《태종실록》을 충주 사고에 봉안함

1447년 안견, 몽유도원도 완성

ㅡ1447년(세종29년) 4월20일,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이 박팽년과 함께 도원(桃源)을 거닐었다는 간밤의 꿈을 안견(安堅)에게 전한다. 안견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고, 안평대군은 그의 자질을 진정으로 이해해 준 후원자였다.

사흘 뒤 안견은 가로 106.6cm, 세로 38.7cm 크기의 비단위에 먹과 채색으로 꿈을 담아 안평대군에게 바쳤다.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였다. 조용하고 온화한 평지와 구름허리를 뚫고 솟은 웅장한 기암절벽이 꼼꼼한 필치로 묻어나왔다. 당대의 명필 안평대군이 제서(題書)ㆍ발문(跋文)ㆍ시1편을 그림에 싣자 성삼문ㆍ정인지 등 21명의 대학자들도 앞다퉈 친필로 23편의 찬양시를 그림에 올렸다.

하지만 안평대군을 포함해 이들 중 상당수는 수양대군(세조)이 권력을 잡고나서 줄줄이 처단되는 바람에 그림에 오른 이름들은 결과적으로 ‘살생부’가 되고 말았다. 정작 안견은 목숨은 부지했지만 그가 언제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나 또 언제 세상을 떠 어디에 묻혔는지는 일체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1893년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가 현재 일본 텐리대(天理大)에 소장돼 있는 몽유도원도가 한국으로 돌아올 기회가 한번 있었다. 전 중앙박물관장 최순우의 기록에 의하면 1952년에 80만엔으로 구입할 수 있었지만 당시 정부의 예산부족으로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다.

1489년 [음]성종 20년, 10가(家)로 1통(統)을 만들어 도둑 방비에 힘쓰게 함

1501년 [음]연산 7년, 평안도 가산(嘉山)·삭주(朔州) 등 지역에 흙비가 내림

1507년 [음]중종 2년, 대신들이 연산군의 존호(尊號) 개정을 청함

1511년 [음]중종 6년, 약학도감(樂學都監)을 혁파함

1520년 [음]중종 15년, 육진(六鎭)에 순변사(巡邊使)를 보내게 함

1537년 [음]중종 32년, 희릉(禧陵, 중종 비 장경 왕후 능)을 옮기도록 함

1568년 [음]선조 1년, 공무역은 5년간 중지하고 사무역을 금함

1613년 [음]광해 5년, 반역을 모의한 박응서(朴應犀)가 체포됨

1623년 [음]인조 1년, 호패법 실시 여부를 논의함

1647년 [음]인조 25년,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 관련 저주 사건이 발각됨

1675년 [음]숙종 1년, 평안도에 순안 등지에 흙비가 내리고 자산 등지에는 눈이 내림

1676년 [음]숙종 2년, 대흥 산성(大興山城) 축성을 완료함

1697년 [음]숙종 23년, 태학(太學)에서 합격 순이 아닌 나이 순으로 앉게 함

1741년 [음]영조 17년, 한림원의 관리를 뽑는 소시법(召試法) 8조목을 제정함

1758년 [음]영조 34년, 선정신(先正臣) 박세채(朴世采)가 편찬한 《육례의집(六禮疑輯)》을 간행하게 함

1777년 [음]정조 1년, 화재 피해를 입은 함흥부의 3백여 호에 대해 진휼하고 민역을 감해 줌

1779년 [음]정조 3년, 음과(蔭窠) 10과를 문과(文窠)로 만들어 관리들이 적체되지 않게 함

1782년 [음]정조 6년, 표류해 온 왜선을 원하는 수로(水路)를 따라 환송하게 함

1783년 [음]정조 7년, 제주 목사는 의정부에서 추천하여 임명하게 함

1786년 [음]정조 10년, 역대 왕의 업적을 기록한 《갱장록(羹墻錄)》을 편찬함

1788년 [음]정조 12년, 내시(內侍)들의 재판에 관한 격식을 정

1809년 [음]순조 9년, 장악원 제조가 경모궁 악장을 바로잡을 것을 청함

1815년 조선 후기의 정치가, 외교관, 통역관, 실학자 박제가 작고

1845년 [음]헌종 11년, 김숙자(金叔滋)에게 이조 판서를 증직함

1868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권병덕 출생

1871년 (조선 고종8)대원군 200여곳에 척화비 세움

ㅡ(길이4자5치 너비1자5치 두께8치5푼 화강석), 1915년 종로 보신각 옮겨 세울 때 1882.8.15에 보신각 부근에 파묻은 척화비 발견됨, 강화 동래 함양 부산진 경주 등지에도 서울과 똑같은 것들이 1925년경까지 있었음

1890년 언론인 천리구 김동성 출생

1893년 [음]동학교도 2만여 명, 충청도 보은 집회 ‘척왜 척양’ 기치

 

1902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이관술 출생

1909년 해인사 석탑 부서짐

1912년 근대 불교의 위대한 선승 경허 스님 입적

ㅡ9세의 어린 나이로 과천의 청계사에서 출가한 경허는 계룡산 동학사에서 강사로 있던 30세 때 스승을 만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다 마침 삼남 지방을 덮친 콜레라의 참상 속에서 교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는 그 즉시 발심하여 선(禪)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학사로 다시 돌아간 경허는 제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방문을 걸어 잠근 후 참선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칼을 갈아 턱에 들이대면서 화두에 몰두하던 그는 3개월 만에 의문을 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경허는 깨달음 이후를 굳게 다지는 수행인 `보임(保任)`을 위해 천장암을 찾았다. 한평 남짓한 골방에서 1년 넘게 장좌불와를 한 경허는 한 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지냈으며 모기와 빈대, 이로 몸이 헐어도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구렁이가 방에 들어와 어깨를 타고 올라가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구렁이가 스스로 기어나갔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는 생애를 통해 선의 생활화와 일상화를 모색했으며 대중 속에서 선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무던히도 애쓴 고승이었다. 근대 선의 물결이 그를 통하여 다시 일어나고 진작되었다는 점에서 그를 가리켜 한국의 마조(중국 당나라의 선사)로 일컫는다.

1916년 세브란스의학전문 개교.

1919년 한인사회당 대표자 대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개최

1921년 조선군, 군법회의 설치

1921년 대한민국의 작가 장용학 출생

1923년 조덕진을 비롯한 임정 의정원 의원이 대통령 이승만 탄핵안 제출.

1923년 진주에서 백정들의 인권운동단체 형평사 결성,

ㅡ이학찬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장지필 등이 1922년 일본 관서지방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조선형평사 창립, 전국에 지사(支社) 11개소 분사(分社) 67개소 회원40만명의 대규모 운동조직으로 성장

- 창립 목적을 계급타파, 공평한 사회 건설,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의 균등과 지위향상, 사회참여 의의의 앙양, 동지의 화목·협력·상조 등에 두고 백정이라는 기록을 호적에서 삭제할 것을 조선총독부에 요구하는 등 활동, 일제압력으로 1937년5월1일 해체

ㅡ1923년 4월25일, 경남 진주에서 형평사(衡平社)가 발족됐다. 이 땅의 마지막 차별적 존재 백정(白丁)들이 그들의 권익을 스스로 확보하려는 자구노력의 일환이었다. 창립식의 참석자는 80여명이었지만 열광적인 호응 속에서 진행됐다.

백정은 1894년 갑오경장의 신분제 철폐에 따라 법제상으로는 분명 해방된 존재였지만 사회적인 차별로부터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장가를 가도 상투를 틀 수 없었고, 이름에 인의예지(仁義禮智) 같은 고상한 한자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일반인과 혼인은 물론 같은 마을에서 함께 살지도 못했다. 더구나 호적에 도살업자를 의미하는 ‘도한(屠漢)’이나 붉은 점이 표시돼 자식에게까지 차별이 세습됐다.

5월 13일 발기식을 가진 형평운동은 진주 백정 이학찬과 일본 메이지대학을 유학하고 온 장지필이 주도했다. 이학찬은 상당한 자산가였지만 자녀들이 차별당하자 형평운동에 뜻을 두었고, 장지필은 총독부에 취직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다 자신의 등본에 '도한'이라는 출신성분을 발견하고 형평운동에 뛰어들었다.

진보적인 사회단체와 여론은 호의적이었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백정들의 행동이 못마땅했는지 5월 24일 진주에서는 수백명의 농민들이 형평사 해산을 요구하며 이들이 판매하는 고기에 대해 불매·불식(不食)운동을 벌였다. 8월 14일에는 1만여 명의 농민들이 형평사를 지지한 청년회와 교육회 건물을 3일 동안 파괴해 전시상태를 방불케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창립 1년 만에 조직이 12개 지사, 67개 분사로 늘어나고 5년 뒤에 회원수가 9,600여명으로 불어날 정도로 세력이 급성장했다.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전성기 때 회원이 3만 4,000명(형평사 측 추산 40만명)이 될 정도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조직 내 급진파와 온건파의 내분으로 1931년 제 9회 정기대회에서 해소 건의안이 제출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

ㅡ국내 공산주의 단체인 화요회와 일본유학생계의 북풍회, 그리고 민중사계 및 신생활사계 구성원 19명이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다. 이튿날에는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해 국제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 조직은 책임비서에 김재봉, 조직부장 조동우, 선전부장 김참 등이었다.

조선공산당은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발생에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고 신간회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사건으로 알려진 제1차 검거사건을 시발로 1926년 6월, 1928년 2월과 7월 등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 제3인터내셔널이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함으로써 제1차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로 그 막을 내렸다. 이후 조선공산당은 해방 뒤인 1945년 9월 12일 재건됐다.

1926년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 승하

ㅡ조선 27대 임금 순종(純宗)이 1926년 4월 25일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 53세로 승하했다. 이름은 척(拓), 능은 유릉(裕陵)이다.

조선왕조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순종은 1874년 고종(高宗) 황제(1852~1919)와 명성황후 민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 순종은 1875년 2월 세자에 책봉되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1907년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본의 강압에 의해 양위하면서 황제로 즉위해 연호를 융희(隆熙)로 삼았다.

즉위 직후부터 일본의 압력에 의해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한국군을 해산했으며 1908년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설립 허가해 경제침탈의 길을 열어주게 되었다.

결국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 이완용이 한일 합병 조약에 서명하면서 국권이 피탈돼 조선왕조는 27대 519년만에 막을 내렸다. 이후 순종은 일제에 의해 창덕궁에 머물게 됐으며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이왕(李王)이라 불렸다.

순종의 비는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 계비(繼妃)는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가 있었으며 슬하에 자녀는 없어서 이복동생인 영친왕(英親王) 은(垠·1897~1970)을 황태자로 삼았다.

일본 내각은 순종이 승하하자 궁중상을 선포했으며 장례 절차는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순종의 인산일인 6월 10일에는 6.10만세운동이 일어나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6.10만세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힌 학생들은 서울에서만 210여명이었고, 전국적으로 1000여명에 달했다. 순종의 승하로 인해 촉발된 6.10만세운동은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궤적을 남겼다.

1935년 조선마약취체령 공포

1938년 조선과 일본·대만·사할린·남양군도 및 관동주간에 〈우편 규칙〉 공포 (5.1. 시행)

1943년 경의선 준공

1943년 소설가 현진건 세상떠남(44세)

ㅡ‘백조’ 동인 ‘빈처’ ‘운수좋은 날’, “자배기만큼 검은 얼굴을 내놓은 땅바닥엔 김이 무럭무럭 떠오른다. 겨울을 태우는 봄의 연기다. 두께두께 얼은 청계천에서도 그윽한 소리 들려온다. 이따금 그 소리는 숨이 막힌다. 험한 고개를 휘어 넘는 듯이 헐떡인다. 그럴 때면 얼음도 운다. 찡하며 부서지는 제 몸의 비명을 친다. 봄은 왔다. 눈길, 얼음 고개를 넘어 서울의 봄은 순식간에 오고만 것이다.”-『적도』(현진건의 첫 장편소설 1934년 동아일보 연재)

1943년 시인 이상화 세상떠남

ㅡ시인 이상화가 1943년 4월 25일 42세의 나이로 위암을 지병으로 앓다 세상을 떠났다.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학생 시위를 이끌었다. 1922년 `백조`의 동인이 되어 창간호에 대표작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1923년에 동경으로 유학을 간 이상화는 외국어 학교 불어과를 졸업한 후 귀국해 교남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26년에는 문학 잡지 `개벽`에 또 하나의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금강송가` `역천` `이별` 등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시를 썼다. 그는 처음에는 백조파 동인으로 `나의 침실로`와 같은 낭만적 상징주의 시와 상징주의적 심미의식을 드러내는 `말세의 희탄`과 같은 시를 썼다.

그러나 후기에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같은 자연을 소재로 한 민족주의적인 시, 빈궁한 삶에 대한 공감과 연대감을 표출한 시를 써 당대의 대표적인 민족적 저항시인으로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1945년 독립운동가·신학자 김교신 세상떠남

ㅡ한국 기독교의 선각자인 김교신이 1945년 4월 25일 발진 티푸스에 걸려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김교신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1919년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동경고등사범 이과를 나왔다. 일본 유학시절 우치무라의 성서강의를 청강하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다.

함흥 영생여고보, 서울 양정고보, 경기고보, 개성 송도고보 교사를 역임했다. 교사시절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무교회주의` 운동을 벌였고 `성서조선` 간행에도 참여했다. 무교회주의란 교회와 성직자로 대표되는 기성 기독교의 조직과 제도를 비판-거부하고, 원시 기독교의 순수한 복음 신앙과 성서 공부를 강조하는 기독교의 한 분파이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44년 흥남 일본질소비료회사에 입사, 한국노무자들의 처우개선을 위해 헌신하기도 했다. 함석헌과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길을 걸었지만 함석헌을 아는 사람이 많은 것에 비해 김교신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1946년 조선민주청년동맹 결성

1946년 민족박물관 개관

1949년 국회 본회의, 농지 개혁 법안 관련 지주 보상액, 주산물 평년작 생산량의 150% 가결

1952년 서울대 국내 최초의 박사학위 수여

1952년 첫 지방선거 실시, 초대 시․읍․면의회 의원 선거

ㅡ최초로 민선 지방의원선거가 실시된 1952년 4월 25일은 정부가 임시 수도인 부산에 피난 중일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지지해줄 정치적 기반을 확보해야 했기에 지방의회를 구성하고자 했다.

아직 전시중인 까닭에 한강 이북의 미수복 지구와 지리산 주변의 치안이 불안한 일부지역이 유예 또는 제외된 채 이날 17시-72읍-1308면에서 시읍명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됐고, 5월 10일에는 서울-경기-강원이 제외된 7개도의 도의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지방자치제도는 권력분립주의를 원칙으로 하면서 의원내각제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지방의회에 자치단체의장에 대한 불신임권을 부여하는 한편, 자치단체의장에게는 의회 해산권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도지사와 서울특별시장은 대통령이 이를 임명하는 임명제였으나 시읍면장에 대해서는 간선제를 취하여 당해 시읍면의회에서 선거하도록 되어 있어서, 시읍면의 경우 지방의회 우위의 일면이 없지 않았다.

1958년 멘데레스 터키수상 내한

1959년 아시아 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 우승

1960년 서울에서 대학교수단 시국수습선언문 발표후 데모 (대통령, 국회의원, 대법관 사퇴 요구)

1963년 동아방송 개국, 1980년 신군부가 언론통폐합을 강제 추진하면서 11월 30일 ‘DBS 뉴스쇼’ 고별방송을 마지막으로 12월 1일자로 KBS로 강제 통폐합됨

1965년 한국-볼리비아, 국교 수립

1966년 대한민국의 바둑 기사 유창혁 출생

1969년 한국감정원 발족

1970년 거물 자수간첩 강대진 사건

1971년 박정희 대통령 후보, 서울 유세에서 이번이 마지막 출마라고 재차 언명

1972년 대법원, `사상계`의 등록 취소소송에 승소 판결

1975년 미국 메리놀회 소속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과 관련하여 기자 회견

1978년 한국 FM방송 개국

1979년 평양에서 제35회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 개막.

1979년 한국-소련 직통국제전화 개설

1982년 부시 미국 부통령 내한, 26일 임시국회서 연설

1983년 미성년자 유흥업소 출입 금지, 20세 미만에서 18세 미만으로 조정

1984년 유장순 한적 총재, 중공 거주 한국인의 상호 방문을 위해 적십자회담을 열자고 중에 제의

1985년 대우자동차 노사, 임금 인상에 합의.

1986년 출판계 인사 80여명, 출판자유 수호와 외국인 저작권 보호 저지 대책위원회 결성, 〈출판인의 자유와 권리 쟁취를 위한 선언〉 채택

1987년 상공부, 대미 무역마찰 회피책으로 26억달러 상당의 미국물품 특별구입하기로 결정

1988년 제주 MBC, TV화면조정시간에 제주시 개표 결과를 사전 방송.

1988년 문공부, 「한겨레 신문」 등 신규 등록 신청한 8개 일간신문에 등록필증 교부

1989년 일,다케시타 내각 붕괴-리크르트 스캔들 관련

1989년 건설부, 투지조짐이 보이는 직할시 편입지역등 전국 7구10시20군 3330㎢를 토지거래허가지역 고시.

1989년 삼성전자 세계2번째로 16MD램 개발

1989년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1심에서 사형선고

ㅡ대한항공 858기 폭파범 김현희 피고인에게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서울형사지법은 1989년 4월 25일 선고공판에서 김피고인에 대해 국가보안법 항공법 항공기운항안전 죄목을 인정, 검찰의 구형대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이로써 1백15명의 생명을 앗아간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사건발생 1년5개월, 김피고인이 기소된지 81일 만에 1심 절차가 마무리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범행은 국제협약이 범죄로 규정해 엄벌하고 있는 `운항중인 민간항공기에 대한 폭발물 테러`를 자행했다는 점에서 지극히 잔인하고 악랄한 소행으로 엄히 처벌해야 마땅하다"고 사형이유를 밝혔다. 재판부가 판결문을 읽는 동안 김피고인은 고개를 떨군채 듣고 있다가 사형이 선고되자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1990년 현대중공업 최장기 파업-128일간,크레인 위서 10여일 농성

1990년 정부, 소련과의 수교교섭에서 KAL기 격추사건에 대한 소련측의 사과문제를 거론하기로.

1990년 민자당 김영삼 최고위원, 내각제 추진합의 각서 설에 언급, 밀약설을 정면 부인.

1990년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등 민자당 수뇌부는 단일지도체제로 한다는 데 합의.

1990년 증권시장, 최악의 주가 붕락사태를 빚으며 종합 주가지수 738.25를 기록- 740선 붕괴

1995년 서울시립대, 구한말고종이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러ㆍ일전쟁 협력 약속 비밀친서 3통 발견

1996년 나웅배 부총리, 6월부터 여신관리규제 재벌 범위를 30대그룹에서 10대재벌로 축소, 내부거래 공시

1996년 경주 감은사 터 삼층석탑 동탑서 국보급 금동 사리함 발견

1997년 청주불교방송 개국.

1997년 국회 한보특위 김현철씨 청문회 개최

ㅡ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하여 온 국민의 눈과 귀는 하루종일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金賢哲)씨의 ‘입’으로 쏠렸다. 김 씨가 한보특혜대출의 배후, 이른바 ‘몸통’으로 지목되고 있고, 광범위한 국정 개입의 의혹을 한몸에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청문회는 3개 지상파 방송과 24시간 뉴스전문채널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됐고, 청문회장에는 수많은 내외신 취재진이 몰려 열띤 취재경쟁을 벌였다.

김 씨는 이날 오전 9시 48분께 검정색 30 다 4155호쏘나타 II 승용차를 타고 국회 의사당 본청 후문 출입구에 도착했다.

김 씨는 A4 용지 여러 장 분량으로 미리 준비한 답변참고자료를 탁자위에 놓고 자신의 행적을 놓고 구체적 시간과 장소를 대야하는 질문 등에 대해서는 간간히 자료를 훑어보면서 답변했다. 김 씨는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해명할 때는 담담한 어조를 유지했으나 현재 심경을 묻는 질문 등에 대해서는 “나의 처신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자책하고 있다” “반성하고 자숙하며 용서를 빌 뿐”이라며 착 가라앉고 다소 잠긴 목소리로 답변했다.

사상 초유의 청문회를 직접 현장에서 지켜보기 위해 시민 30여명 가량이 방청권을 얻어 청문회를 방청했다.

이인구 의원(자민련)이 “아버지를 도와주려한 행동이 오히려 아버지에게 큰 누를 끼쳤다”며 김 씨의 행동을 훈계조로 준엄하게 꾸짖자 김 씨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해 안경을 벗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김 씨는 이후에도 아버지인 김영삼 대통령과 관련 답변을 해야 하는 대목에서는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간간히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규정 의원(민주당)은 김 씨가 눈물을 보이자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눈물에 진실이 담겨 있다면 자주 흘려도 좋다”고 말했다.

2000년 삼성자동차 채권단, 프랑스 르노사의 삼성차 매각안 수용, 삼성차 매각 확정

2001년 병역비리 주범 박노항 원사 도피 3년만에 검거

ㅡ병역비리 주범으로 3년 동안 도피생활을 해왔던 박노항(50) 원사가 2001년4월25일 오전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H아파트에서 잠복근무 중이던 국방부 검찰단 수사관들에게 붙잡혔다.

국방부 검찰단의 박노항 특별검거본부(본부장 서영득 국방부 검찰단장)는 박 원사를 검거 직후 국방부 영내 검찰단으로 압송, 그동안의 도피경위와 비호세력 등에 대해 밤샘 조사하는 한편, 박 원사의 누나 박복순(57)씨와 형 박노득(63)씨 등 참고인들의 신병도 확보했다. 군 검찰은 그동안 박 원사가 군 수사기관이나 고위 관계자의 도움이 없이는 장기 도피생활이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고 집중 추궁했다.

박 원사는 검거 후 한때 함구했으나 이날 오후 늦게부터 안정을 찾으며 도피행적 등에 대해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영득 본부장은 “지금까지 드러난 박 원사의 병역비리는 100여건에 수뢰액수가 수십억원에 달한다” 며 “박 원사에 대한 수사는 국방부에서 맡고 서울지검 검사 1~2명을 파견받는 형식으로 군·검 합동수사반을 재가동할 것” 이라고 밝혔다.

군 검찰은 지난 2월부터 박 원사의 가족들을 집중 감시하던 중 지난 15일 누나 박복순씨의 수상한 행적을 감지하고 밀착 감시한 끝에 박 원사가 은신하던 아파트를 발견, 이날 오전 검거했다. 박 원사는 지난해 2월 이모씨를 통해 아파트 전세계약을 맺었으며, 평소 아파트에 머물며 실내 불을 모두 끈 채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은신해 왔다고 군검찰은 밝혔다.

그는 검찰과 군이 지난 98년 5월 병역비리에 대한 1차 합동수사에 착수한 뒤 종적을 감췄었다.

박 원사는 지난 70년 1월 하사로 임관한 헌병 수사관 출신으로, 육군본부 범죄수사단 등 핵심 요직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했으며, 검거 당시 현역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탈영한 상태로 간주돼 98년 6월 1일자로 급여지급이 중지되었다

2001년 우리나라 성공회 역사 111년 만에 여성 신부(민병옥) 탄생

ㅡ대한성공회는 부산교구의 민병옥(55·카타리나) 부제가 4월 25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고 밝혔다. 민 신부는 전주 한일신학교와 성 미카엘신학원(성공회대 전신)을 졸업한 후 부산교구 파송전도사 등을 역임했으며 지난해 부제로 서품됐다.

성공회는 1862년 영국 성공회가 여성을 부제로 서품한 이후 여성의 사제 서품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였으며 1969년 각국 성공회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 한국성공회는 지난해 5월 여성의 사제 서품이 가능토록 교회법을 개정했다.

2003년 북한, 사스(SARS)로 금강산 관광 중단 통보

ㅡ금강산 관광을 주관하는 현대아산은 “북한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확산을 우려해 금강산 관광을 당분간 중단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26일 강원도 속초항에서 금강산으로 떠나려던 유람선 운항이 취소됐고, 5월초 열릴 예정이던 평양 정주영체육관 개관행사도 무기한 연기됐다.

북한은 사스를 이유로 4월 30일부터 5월 2일까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북한의 직업총동맹이 평양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남북노동자대회도 연기를 요청했다.

이밖에 대북지원단체인 ‘굿네이버스’ 관계자 10명도 베이징이 아닌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방북하려 했으나, 북한의 연기 요청으로 25일 귀국했고,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본부 관계자들도 지난 22일 방북 연기 요청을 받았다.

2003년 국산기(KT-1B 훈련기), 인도네시아에 첫 수출

ㅡ국산 항공기가 사상 처음 해외에 수출됐다.

한국항공우주산업㈜은 2003년4월25일 경남 사천2공장에서 수출 1호기인 KT-1B 훈련기의 인도네시아 출하 행사를 가졌다.

KT-1B 훈련기는 현재 한국 공군에서 보유한 KT-1의 파생 기종으로, 최대 비행시간이 5시간이다. 경(輕)무장을 하면, 전시에 지상 공격용으로 사용이 가능하며, 순수 국내 독자기술로 발됐다.

한국항공우주는 2001년 2월 인도네시아 공군과 KT-1B 훈련기 7대를 포함, 수리 부품과 조종사·정비사 교육 등 6000만달러에 이르는 일괄 수주계약을 맺었으며, 올 연말까지 수출 물량 전체를 인도네시아에 인도할 예정이다.

한국항공우주는 KT-1B 훈련기에 대해 현재 싱가포르와 수출협상을 준비 중이고, 콜롬비아·필리핀·터키 등 20여개국으로부터 문의가 계속 들어오고 있어 2012년까지 150여대, 금액으로는 5억달러 이상을 수출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004년 교육인적자원부, ‘출석 정지제’ 부활 담은 ‘학교 폭력 예방 및 대책에 관한 법률’ 시행령 입법 예고

ㅡ초·중·고교에서 일어나는 학교 폭력에 적극 대처하기 위해 예전의 유기·무기 정학과 비슷한 징계인 ‘출석정지제’ 가 오는 2학기부터 일선 학교에 도입된다. 유기·무기 정학은 1997년 학생생활 지도가 선도 위주로 바뀌면서 폐지됐다. 또 고교생의 경우 학교 폭력을 이유로 퇴학을 시킬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됐다.

시행령은 학교 안팎에서 학생이 개인 또는 집단으로 다른 학생에게 폭행·협박·따돌림·공갈·상해·감금·약취·유인·추행·모욕·명예훼손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을 학교 폭력으로 규정했다.

2005년 만화가 고우영 대장암으로 세상떠남 『만화 삼국지』

2006년 노무현 대통령, 한·일 관계 특별 담화, 독도 문제 대응 방침 전면 재검토 선언

2007년 병역특례 비리 사건이 일어남

2009년 돼지인플루엔자(SI) 공포 확산

ㅡ멕시코 정부가 2009년 4월 25일(현지시간) 현재 돼지 인플루엔자에 감염돼 모두 81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하면서 멕시코발(發) 돼지 인플루엔자(swine influenza·SI)로 전 세계에 방역 비상이 걸렸다.

멕시코에선 최소 81명이 사망했고, 1300여명의 감염자가 발생했다. 미국 뉴욕시 퀸스의 한 고교에서 8명의 학생이 SI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돼, 미국에서만도 총 19명이 감염됐다. 뉴질랜드에서는 25일 멕시코를 여행하고 돌아온 22명의 오클랜드주 대학생 중 일부가 감기 증세를 보이자 교사 3명을 포함한 그룹 전체를 격리했다. 프랑스와 이스라엘에서도 멕시코에서 돌아온 여행객 2명과 1명이 각각 SI 감염 증세를 보여 입원했다. 우리 정부도 26일 오전 세종로 중앙청사에서 긴급 관계 부처 회의를 열고 SI 대응책을 논의하고 비상 방역 체계를 가동했다.

2010년 '패션계 어머니' 최경자씨 별세

ㅡ1911년 함남 안변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본 도쿄 오차노미즈 양장전문학교에서 패션을 공부한 뒤 1937년 함흥에 양장점 '은좌옥'을 열었으며 1938년 함흥양재전문학원(現 국제패션디자인학원)을 설립해 체계적 패션교육을 시작했다. 195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국제패션쇼에 작품을 선보이기도 한 '패션계의 어머니'다. 유명 디자이너 박윤수, 안윤정, 앙드레 김, 트로아조, 이신우, 루비나, 이상봉 등을 배출했다.

1964년에는 국내 최초 패션모델 양성학원인 '차밍스쿨'을 세우고 4년 뒤 첫 패션월간지 '의상'을 창간했다. 1976년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의 전신인 한국여성실업인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맡은 고인은 '복식디자인', '한국패션 50년사', '날개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머니(자서전)' 등의 책을 쓰기도 했다. 또한, 한국여성경제인협회의 전신인 한국여성실업인회를 1976년에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

2011년 서울아산병원, 질병관리본부에 중증폐렴 임신부환자 입원증가 신고

2011년 '대추나무 사랑걸렸네' 원로배우 김인문씨 별세

ㅡ1967년 영화 ‘맨발의 영광’으로 데뷔한 그는 2007년 영화 ‘재클린의 눈물’에 출연했던 고인은 당시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극중 배역을 위해 아내 몰래 앞니와 어금니 8개를 뽑았다”고 밝혔다. 극중 배역이 틀니를 해야했기 때문에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스스로 생니를 뽑았다는 얘기다 1968년 TBC 특채 탤런트로 데뷔해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 ‘수탉’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 ‘바람난 가족’ ‘물보라’ ‘저 하늘에도 슬픔이’ 등. KBS 장수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는 그의 이름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대표작이다.

2014년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홍준)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 유우성 씨 간첩혐의 무죄선고

2014년 오바마 미대통령 미군이 훔쳐간 대한제국 옥새(황제지보, 수강태황제보) 등 대한제국·조선왕조 국새·어보 등 인장 9과(顆) 박근혜 대통령에게 반환

2015년 재일 사학자 고(故) 신기수 제작 다큐 ‘조선통신사’ 상영

ㅡ재일동포 사학자 고(故) 신기수(1931~2002)는 흩어진 통신사 사료를 모아 이들의 이야기를 일본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그 열정을 담아 1979년 제작한 다큐 영화 ‘에도시대의 조선통신사’가 25일부터 일주일간 부산 조선통신사역사관에서, 다음 달 3일엔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상영되었다. 제작 36년 만에 고국 극장에서의 첫 공식 상영이다.

일본 공개 당시의 반향은 컸다. 언론의 찬사가 이어지며 전국적으로 상영회가 열렸다. 조선통신사 유물 제보가 빗발치며 신기수는 140점의 귀한 사료를 수집했다. 이 사료가 2002년 개관한 오사카 역사박물관에 ‘신기수 컬렉션’이란 이름으로 전시·보관됐다

2019년 스웨덴의 공공예술프로젝트 ‘퓨처 라이브러리’ 올해의 작가에 한강 선정,

ㅡ2014년부터 1년에 한명씩 100명의 작품을 선정해 2114년에 오슬로 외곽숲에 100년간 심어둔 나무 1000그루를 사용해 출판 예정, 한강은 아시아작가로는 처음 선정됨

2020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대표 김병상 신부 선종 88세

2020년 노길남 코로나19로 세상떠남 76세

2020년 최장기 대통령비서실장 지낸 김정렴 박정희기념사업회회장 세상떠남 96세

2021년 배우 윤여정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한국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을 수상

2021년 대한민국의 언론인 이영희 작고

2022년 아이가 달려와 차에 ‘쿵’...전치 2주인데 “합의금 2천만원”

2022년 韓 vs 中 본격 배터리 전쟁...중국 CATL, 한국 3사 넘어

2022년 우크라 입국 시도 해병, 무단 출국 한달여만에 귀국 체포돼

2022년 대통령 관저로 외교장관 공관 확정

2022년 대한민국의 작가 이외수 작고

 

 

 

570년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 출생

1185년 일본의 제81대 천황 안토쿠 사망

1214년 프랑스의 왕 루이 9세 출생

1228년 독일의 왕 콘라트 4세 출생

1284년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2세 출생

1342년 197대 로마 교황 교황 베네딕토 12세 작고

1472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조각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작고

1599년 영국 정치가 올리버 크롬웰 출생

1714년 스위스의 법학자 바텔 출생 - 국제관계에 자연법이론을 적용한 `국제법`(1758)의 저자

1719년 다니엘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 초판이 출판

1744년 스웨덴의 물리학자·천문학자 안데르스 셀시우스 작고

1783년 프랑스 몽골피에 형제 최초로 기구실험 성공

1792년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이예즈` 탄생

1792년 프랑스 공병대위 루제드 릴 혁명가요 ‘라 마르세예즈’ 작곡, 1879년 프랑스 국가가 됨 “나가자. 조국의 아이들이여/영광의 날은 왔다/우리들 앞에/폭정의 피 묻은 깃발이 서 있다/저 흉포한 군사들의 사나운 소리가/벌판에서 들리지 않느냐/저 놈들은 우리에게 와/우리 아들의 목을 베고/우리 밭을 유린할 것이다/무기를 들어라 시민들이여/전열을 정비하라!/나아가자! 나아가자!/놈들의 더러운 피로/우리 밭고랑을 적시자.”-8절 중 1절

1823년 미국에서 첫 야구경기

ㅡ뉴욕타임즈 1823년 4월 25일자에 `야구`라는 이름의 경기가 열린 것으로 확인됨으로 현대적 의미의 야구가 시작됐다. 뉴욕대학의 한 사서가 당시 뉴욕에서 발행되던 `내셔널 애드버킷`과 `뉴욕 가제트 앤드 제너럴 애드버타이저` 등에서 확인한 기사에 의하면 야구팀이 구성돼 미국 맨해튼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경기를 가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의 신문기사는 `야구`라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경기방식에 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 기사가 발견되기 전까지 현재와 가까운 형태의 야구는 1839년 미 육군사관학교 사관생도인 애브너 더블데이가 뉴욕주 쿠퍼스타운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 야구계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여 쿠퍼스타운에 명예 전당까지 마련해 이를 기념하고 있다. 물론 야구 기원을 영국에서 발원한 크리켓으로 보면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야구계는 현대 야구 규칙이 등장한 시기를 뉴저지주 호보켄에서 뉴욕 은행원 출신의 알렉산더 카트라이트가 니커보커 야구클럽을 조직해 엘리시언 구장에서 첫 경기를 가진 1846년 이후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1827년 멕시코의 대통령(1872-1876) 레르도 데 테하다 출생

1938년 러시아의 비밀 경찰 야코프 페테르스 작고

1840년 러시아 제국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출생

1859년 수에즈 운하 기공식

1873년 캐나다의 프랑스계 미생물학자 데렐 출생 - 박테리오파지의 발견자

1874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라디오 전신체계(1896)의 발명가 구글리엘모 마르코니 출생

1881년 미국의 극작가 에드거 앨런 울프 출생

1900년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물리학자 파울리 출생 -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발견해 194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1915년 터키 독립의 아버지 케말 파샤 갈리폴리반도에 상륙한 영국군 무찌름

1919년 건축·디자인 혁신한 ‘바우하우스’ 개관

ㅡ20세기 건축ㆍ디자인ㆍ회화 등에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온 미술공예학교 ‘바우하우스’가 독일 바이마르시(市)에서 문을 열었다.

바우하우스의 교육이념을 체계화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주된 관심은 건축, 이른바 `바우(bau)`를 중심으로 모든 창조예술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제각기 고립돼 왔던 건축ㆍ회화ㆍ가구ㆍ조각 등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야 했고, `천재의 감각`에 의존해왔던 예술과 오랜 숙련을 필요로 하는 장인의 기술도 통합해야 했다. 중세 길드의 도제식 교육방식이 채택됐고, 교수와 학생간의 일방적인 위계도 무너뜨렸다. 칸딘스키ㆍ클레ㆍ파이닝거ㆍ야블렌스키 등 당대의 쟁쟁한 젊은 화가ㆍ건축가들도 교수진에 참여, 그로피우스의 교육이념을 뒷받침했다.

파격과 참신성으로 각지에서 찬사가 쏟아졌지만 전통을 옹호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은 늘 있게 마련이다. 바이마르 시민들도 바우하우스의 작품을 이해못한 데다 자유분방한 학생들의 모습도 눈에 거슬렸다. 결국 1925년 데나우시(市)로 학교를 옮겼으나 그곳도 나치에 의해 폐쇄(1932년)되는 바람에 1933년 베를린에서 문을 닫았다. 학교 폐쇄는 이곳의 교수와 학생들을 세계 도처로 분산시켜 오히려 국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계기가 됐다.

1920년 소련.폴란드 개전

1923년 미국의 블루스 음악가 알버트 킹 출생

1940년 미국의 배우 알 파치노 출생

1943년 러시아의 극작가 네미로비치 단첸코 사망

1945년 이탈리아 무솔리니 체포

194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UN 창립회의 열림

1945년 미군-소련군 엘베강 토르가우의 다리위에서 해후. 2차대전 종결

ㅡ미 제1군 69사단의 정찰대와 소련군 58사단 선발대가 1945년 4월 25일 독일 엘베강 중류 토르가우의 한 다리위에서 만났다. 노르망디 상륙에 성공, 서쪽으로부터 밀어붙인 미군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승리, 동쪽으로부터 밀어붙인 소련군의 극적인 만남이었지만 독일쪽에서 볼 때 이는 독일 분단의 시작이었다.

미군은 4월 20일에 이미 마그데부르크와 라이프치히까지 진출해 있었다. 영국군도 라우엔부르크에서 엘베강을 건너 메클렌부르크 지방의 서부를 거의 점령하고 있었다. 영국의 몽고메리 총사령관은 "소련인과의 악수는 가능한한 동쪽에서 하는 것이 좋다"는 처칠의 말대로 좀더 동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얄타회담의 뜻을 존중하려는 아이젠하워에 의해 동진을 중단했다.

엘베강에서 처음 만난 미소 병사들은 이튿날인 26일 토루가우의 엘베강가 잔디에서 독일군으로부터 몰수한 술로 건배하며 서로 끌어안고 승리를 환호했다. 5일뒤인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5월 7일 독일은 항복했다.

1946년 러시아의 정치가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 출생

1953년 크릭-왓슨, DNA구조 발견

ㅡ1953년 4월 25일자 발행 `네이처`지에 DNA(디옥시리보 핵산)의 이중나선 구조도가 실렸다. 본문은 1페이지밖에 안되는 짧은 분량이었지만, 20세기 최대 생물학적 성과로 아직도 남아있다. 인간복제를 눈앞에 두고 있는 20세기 `유전자 공학의 시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한 연구실에서 미국 출신 생화학자 제임스 왓슨(25)과 영국인 생물학자 프랜시스 크릭(36)의 1년 반만의 결실이었다. 생물학과 물리학을 바탕으로 둘은 각종 데이터를 모아 DNA분자 모형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염색체가 유전자라는 더 작은 단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1915년에 발견했고, 카네기연구소는 유전 비밀의 열쇠는 DNA에 있다는 것을 1952년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DNA의 분자구조였다. 왓슨과 크릭 콤비는 나중에 그들과 생리의학 부문 노벨상을 공동 수상한 모리스 윌킨스의 X선 결정해석에서 힌트를 얻었다. `사닥다리 구조`를 원용해 3차원적으로 연결시켜보자 긴 사슬 형태의 뉴클레오티드 사슬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중나선 모형은 DNA가 단백질 합성을 지배하고 지시하는 화학적 언어인 유전 탐구의 길을 열었다.

1958년 멘데레스 터키 수상 내한

1959년 미국 5대호와 대서양을 잇는 세인트 로렌스 운하 개통

1962년 미국, 태평양서 핵실험 재개

1965년 도미니카 군부 쿠데타

1974년 포르투갈 카네이션혁명 36년독재 살라자르 정권 붕괴, 스피놀라 정권 장악

1978년 남아공화국 나마비아 독립을 승인

1980년 미국, 이란대사관 인질구출작전 실패

ㅡ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1980년 4월 25일 연설을 통해 테헤란에 잡혀있는 인질 52명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해 인질 구출에 실패했다고 발표했다.

이란 시간 24일 오후 7시30분, 아라비아 해상에 있는 핵잠수함 미드웨이호로부터 이란에 억류되어 있는 인질 52명을 구출하기 위한 미군 특수부대가 대형 헬리콥터 8대에 분승, 테헤란 남동쪽 330Km 사막지역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6대였다.

다음날 25일 오전 2시 사막에서 테헤란으로 향하려던 헬기 가운데 1대에서 유압장치 고장이 발생했다. 보고를 받은 카터는 인질구출에 최소 6대의 헬기가 필요하므로 작전중지를 지시했다. 그러나 부대가 철수를 시작했을 때 새로운 사고가 발생했다. 헬기 1대가 수송기 C130과 충돌, 2대 모두 화염에 휩쌓인 것이다.이 사고로 양쪽 승무원 8명이 사망했다. 카터가 이같은 강경책을 취한 배경에는 대통령 예비선거를 의식해 강력한 결단력을 미국민에게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82년 이스라엘 14년10개월만에 시나이반도서 완전철수

1990년 다케시타 일본총리 부패사건인 리쿠르트사건 책임지고 사임 발표

1990년 미국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가 허블 우주망원경을 궤도에 올림, 우주망원경(Space Telescope)=지구대기권 바깥 우주공간에 올려져서 천문관측 수행하는 모든 과학 기기들

1995년 비동맹회의 인도네시아에서 열림, 르완다 인종학살 북반부 발전문제 등 다룸

1995년 아르헨티나 군 70년대 군부의 반체제인사 납치살해에 첫 공식사과

1996년 독일 반핵시위대 핵폐기물수송에 항의 철도차량 불 지르고 시위

1998년 마르틴 루터 킹 목사 암살범 제임스 얼 레이(70세) 복역(99년형 선고, 본인은 혐의 부인)중 세상떠남, 사건진상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음

2004년 화장품 브랜드 ‘에스티 로더’ 의 창업자 에스티 로더 사망

ㅡ체코계 아버지와 헝가리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로더가 뉴욕에서 ‘화장품 장사’ 를 처음 시작한 것은 화학자인 삼촌이 마구간에 차린 실험실에서 만든 미용 크림을 미장원 등에 팔러 다니면서부터였다. 그녀는 틈날 때마다 부엌에서 미용 재료를 혼합해 크림을 제조했고, 이를 미용실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무료로 나눠주며 고객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제품이 인기를 끌자 로더는 1946년 남편 조지프 로더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에스티 로더’ 를 창업했다.

그는 광고를 내는 대신 유명인사들에게 무료로 제품을 보내는 전략을 택했다. 이 같은 뛰어난 수완 덕에 ‘에스티 로더’ 는 1948년 뉴욕 색스 5번가(Saks fifth Avenue)백화점에 진입했고, 이후 유명 백화점에서만 살 수 있는 고급 브랜드라는 인식을 얻었다. 당시 업계 최초였던 ‘공짜 샘플’ 전략과 ‘고급 매장’ 전략은 훗날 천재적인 마케팅으로 평가받았다.

부엌에서 시작한 ‘에스티 로더’ 는 세계 130여개국에 10억달러 이상 수출하는 연간 매출 47억달러의 거대 브랜드가 됐다. 그는 1998년 시사주간지 타임이 발표한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천재 경영자 20명’ 에 여성으로서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했다.

2004년 안네 프랑크 탄생 75주년 맞아 희귀 사진 등 인터넷 공개

ㅡ안네 프랑크 하우스 재단은 25일(현지 시각) 재단 웹사이트(www.annefrank.org)를 통해 안네의 가족들이 암스테르담의 한 다락방에 은신하기 전인 1941년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이 흑백 사진은 안네 프랑크가 발코니에 기대어 한 이웃의 결혼식 준비 광경을 지켜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0대 소녀였던 안네는 독일 나치의 눈을 피해 암스테르담에서 숨어지낸 2년간을 생생한 일기로 남겨 전후(戰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오는 6월 12일 안네 프랑크 탄생 7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보강된 이 웹사이트는 또 안네 가족의 친구들과 이웃들의 사진들과 증언도 담고 있다. 그 중엔 이 가족을 숨겨준 네덜란드 여성의 것도 포함돼 있다.

2005년 일본에서 JR 후쿠치야마 선 탈선사고가 일어나다. 이로 인해 기관사 포함하여 107명이 사망.

2006년 미국의 도시사상가 제인 제이콥스 작고

2007년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의 장례식이 모스크바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에서 거행

2009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제이콥 주마가 남아공의 네 번째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

2012년 파키스탄 인도(4월19일 발사)에 맞서 신형 중거리미사일 실험발사 성공

2015년 네팔 수도 카트만두 인근 진도7.9 강진 사망8,857명 이재민800만명 카트만두의 건물 75% 파손 에베레스트산 2.5cm 낮아짐

2022년 미 국무.국방, 키이우 방문...첼렌스키와 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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