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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5월 8일

by 귤담 2023. 5. 4.

오늘의 역사 5월 8일

 

 

당신은

미치도록 적요한 강물이었네

그 강물 흘러 보내며

가슴에 품은 바다였네

그 깊고 푸른 생애 이룬

이 시대의 죽비였네.

 

어느새

가슴에 출렁이는 아우라였네

우리네 남루한 삶들이 신새벽을 찾아 나서는

저만치 비워둔 50년 성찰

영혼 빛의 어머니였네.

 

커다란 무소유의

꿈의 바다 채워가며

삶의 통로를 찾는 잊고 싶지 않은 언어들

생명의 감탄사였네

그 이승의

도원(桃源)이었네.

                  -이재창 시인의 「어머니의 강ㆍ1」 전문, (서정과현실 2007년 상반기호)

 

 

 

*오늘은 어버이날 ; 1910년 한 미국여성이 돌아가신 어머니 잊지못해 교회에서 흰 카네이션 나눠준 걸 계기로 1914년 윌슨 대통령이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날로 정함, 우리나라는 1956년에 오늘을 어머니날로 정했다가 1973년 어버이날로 바꿈

*오늘은 세계적십자의 날 ; 1946년에 앙리 뒤낭이 태어난 오늘(1828년)을 적십자의 날로 함, 중립적 구호조직의 필요성 주장한 뒤낭은 1895년에 인도주의 평등주의 중립성 독립 보편성 등을 기본원칙으로 적십자 창설 1901년 노벨평화상 받음

*유럽 전승 기념일: 유럽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를 위한 기억과 화해의 시간

*트루먼의 날: 미주리주

 

 

“5월 초여드레, 고향으로 돌아왔다.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난듯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다시 처자를 마주 대하니 온 집안이 슬픔과 기쁨으로 그동안 지내온 일을 이야기하랴. 또 이야기하다 보면 슬프고 기쁜 나머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아아, 슬프구나. 나와 함께 바다를 표류하던 사람은 스물여덟명이었는데, 살아돌아온 사람은 겨우 일곱에 불과하다.”-장한철 『표해록』 조선 영조때 서울로 과거보러 떠난 장한철이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낙방하고 제주도로 돌아온 뒤 그간의 여정을 기록한 한국최초의 해양문학이자 설화집

 

 

1022년 [음]현종(顯宗) 13년, 한조가 송 황제의 하사품을 가지고 돌아옴

1111년 (고려 예종6)여진 정벌한 윤관 장군 세상떠남

1301년 [음]충렬왕(忠烈王) 27년, 관직 정원을 조정하고 명칭을 바꿈

1369년 [음]공민왕(恭愍王) 18년, 원 지정 연호의 사용을 중지함

1400년 [음]정종 2년, 세자의 생일에 경범자를 풀어 줌

1407년 [음]태종 7년, 금주령을 내림

ㅡ금주령(禁酒令)을 내리고 곧 약주(藥酒)를 정지하였으니, 가뭄 때문이었다. 제향(祭享) 및 태상왕(太上王)·상왕(上王)의 양전(兩殿)의 공상(供上)과 조정 사신(朝廷使臣)·이웃 나라 객인(客人)의 접대 외에는 일체 금하였다.

1434년 [음]세종 16년, 곡산 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이 죽음

1434년 [음]세종 16년, 함길도 영북진(寧北鎭)에 군인들을 편제함

1440년 [음]세종 22년, 경상·전라도에 공법(貢法)을 실시함

1442년 [음]세종 24년, 우량(雨量) 측정하는 제도를 정함. 측우제도 실시

ㅡ호조에서 아뢰기를,

"우량(雨量)을 측정(測定)하는 일에 대하여는 일찍이 벌써 명령을 받았사오나, 그러나, 아직 다하지 못한 곳이 있으므로 다시 갖추어 조목별로 열기(列記)합니다.

1. 서울에서는 쇠를 주조(鑄造)하여 기구(器具)를 만들어 명칭을 측우기(測雨器)라 하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고 직경(直徑)이 7촌입니다.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고 매양 비가 온 후에는 본관(本觀)021) 의 관원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촌·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즉시 계문(啓聞)하고 기록해 둘 것이며,

1. 외방(外方)에서는 쇠로써 주조(鑄造)한 측우기(測雨器)와 주척(周尺) 매 1건(件)을 각도(各道)에 보내어, 각 고을로 하여금 한결같이 상항(上項)의 측우기의 체제(體制)에 의거하여 혹은 자기(磁器)든지 혹은 와기(瓦器)든지 적당한 데에 따라 구워 만들고, 객사(客舍)의 뜰 가운데에 대(臺)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臺) 위에 두도록 하며, 주척(周尺)도 또한 상항(上項)의 체제(體制)에 의거하여 혹은 대나무로 하든지 혹은 나무로 하든지 미리 먼저 만들어 두었다가, 매양 비가 온 후에는 수령(守令)이 친히 비가 내린 상황을 살펴보고는 주척(周尺)으로써 물의 깊고 얕은 것을 측량(測量)하여 비가 내린 것과 비오고 갠 일시(日時)와 물 깊이의 척·촌·분(尺寸分)의 수(數)를 상세히 써서 뒤따라 계문(啓聞)하고 기록해 두어서, 후일의 참고에 전거(典據)로 삼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66년 [음]세조 12년, 정2품 이하의 문관에게 치르는 발영시(拔英試)를 보아 34명을 뽑음

1478년 [음]성종 9년, 임사홍(任士洪)을 의주(義州)에, 유자광(柳子光)을 동래(東萊)에 유배함

ㅡ임사홍(任士洪)을 의주(義州)에, 유자광(柳子光)을 동래(東萊)에, 박효원(朴孝元)을 부령(富寧)에, 김언신(金彦辛)을 강계(江界)에 유배(流配)하고, 김맹성(金孟性)을 고령(高靈)에, 김괴(金塊)를 강진(康津)에 도배(徒配)하였으며, 박효원과 김언신은 결장(決杖)하고, 나머지는 모두 속(贖)하였다.

1493년 [음]성종 24년, 《대전속록(大典續錄)》의 새로운 조항을 시행함

1503년 [음]연산 9년한, 양에 온 명나라 사신에게 사람을 보내 중국어를 익히게 함

1592년 (조선 선조 25년)이순신, 적진포에서 왜 수군 섬멸

1600년 [음]선조 33년, 함경도 관찰사가 여진족과의 전투 결과를 보고함

1620년 [음]광해 12년, 각 궁궐과 함춘원(含春苑)에 주인 대신 하인이 복무하는 것을 금지함

1649년 [음]효종 즉위년, 인조가 승하함(55세)

1665년 [음]현종 6년, 불랑기(佛狼機)와 정철 자포(正鐵子砲) 등 무기를 강화도에 보냄

ㅡ통제사 정부현(鄭傅賢)으로 하여금 불랑기(佛狼機) 4, 5호 5십 위(位)와 정철자포(正鐵子砲) 2백 문, 잠철(箴鐵) 1백 개 및 매 위(位)마다 족철(足鐵) 1개씩을 만들어 강화도로 보내게 하였다.

1682년 [음]숙종 8년, 통신사(通信使) 윤지완(尹趾完)·부사(副使) 이언강(李彦綱)·종사관(從事官) 박경후(朴慶後)를 일본에 보냄

1713년 [윤]숙종 39년, 서인(庶人)의 장례 때 대나무 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함

1732년 [음]영조 8년, 청에 갔던 사신이 《명사(明史)》의 조선열전(朝鮮列傳)을 가지고 돌아옴

1761년 [음]영조 37년, 대사성(大司成) 서명응(徐命膺)이 왕세자의 비행을 부추긴 자들의 처벌을 청함

1775년 [음]영조 51년, 영조가 민진후(閔鎭厚)의 문집(文集) 서문을 지어 줌

1781년 [음]정조 5년, 초계문신(抄啓文臣)의 과강(課講)을 왕이 직접 시험 보임

1814년 [음]순조 14년, 경기·호서·영남·관동의 진제(賑濟)를 마침

ㅡ경기는 통진(通津)·풍덕(豊德) 두 고을의 기민 4만 7백 15구에게 곡물 3천 7백 8석을 진휼하였고, 호서는 공주(公州) 등 53읍·진의 기민 16만 8천 1백 79구에게 곡물 2만 8천 9백 4석을 진휼하였고, 영남은 대구(大邱) 등 71읍·진의 기민 56만 6천 88구에게 곡물 4만 3천 4백 62석을 진휼하였고, 관동은 고성(高城) 등 14읍의 기민 2만 구에게 곡물 1만 3천 7백 64석을 진휼하였다.

1864년 한국 근대불교의 개혁운동가, 독립운동가 백용성 스님 출생

1876년 [음]수신사 김기수 일행, 일본 명치 천황 접견

1889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겸 언론인 고하 송진우 출생

1894년 [음]동학농민군, 〈전주 화약〉 후 전주성 철수

 

 

1902년 독립관에서 경의선(서울-개성) 철도 기공식

1906년 명진학교 설립

1910년 광양만 염전, 처음으로 소금 산출

1922년 김수환 추기경 출생

1925년 조선치안유지법 제정

1927년 신간회 동경지회(지회장 조헌영) 창립대회 개최

1930년 대한민국의 작곡가 박춘석 출생

1948년 미 군정, 5·10 총선거에 대비 미군에 특별 경계령

1948년 동아일보사, 좌익 분자의 방화로 편집국 인쇄 공장 소실

1951년 국회 정-부의장 개선 (의장 신익희)

1951년 트루먼 미 대통령, 6·25 전쟁 확전을 주장한 맥아더 장군의 견해 반박

1952년 미국 국무성, 일본에 대 한국 재산청구권 무효 각서 전달

1952년 국회의장에 신익희, 부의장에 김동성 보선

1954년 이승만, 대처승은 절에서 물러나라는 담화를 발표(당시 사찰의 70% 이상 대처승이 장악).

1955년 어버이날 제정-어머니날을 어버이날로

1962년 국가재건 최고회의, 〈주민등록법〉 공포 의결

1967년 서민호 대중당 대통령후보 선거유세중 구속, ‘국민에게 큰 부담인 국방비 절약 위해 감군해야 한다’는 연설이 반공법 위반혐의

1972년 해방후 처음으로 일본인 학교, 유치원 서울에 개설

1973년 새로 제정한 첫 어버이날

1974년 농수산부, 전국적으로 2인 1조의 304개 단속반을 총동원하여 쌀값 단속

1976년 도시 근로자 가계 수지, 가구당 월평균 소득 80,090원·지출 73,820원

1979년 미 의회, 토우 대전차 미사일 1,800기 등 한국 판매 승인

1980년 자원개발연구소, 충북 옥천서 우라늄광 발견 발표

1980년 중국, 한일 대륙붕 시추를 주권 침해라고 항의

1981년 노 외무부장관, 중·소 와 수교할 용의 있다고 국회에서 언급

1981년 정부, 의료보험 대상 대폭확대 개정안을 의결

1981년 한국-일본 의원연맹 재구성

1984년 소련,LA올림픽 불참선언-모스크바 올림필 불참 보복

1985년 한-미 안보회의 개최. 서방의 군장비 북한유출 방지책 등을 협의(워싱턴)

1985년 카프(KAPF)의 실질적 지도자인 팔봉 김기진 사망

1985년 재일교포 이상호, 지문재취 거부로 일본 경찰에 구속

1986년 노태우 민정당 대표이민우 신민당 총재이만섭 국민당 총재등 3당대표 개헌문제. 5.3인천사태 논의

1986년 전국 목회자 정의평화실천협의회, 전국목자 회의 민주쟁취 선언

1987년 이기백 국방장관, 미국으로부터 F16기 36대를 도입중이며 전투기의 공동생산도 추진중 이라고 밝혀

1987년 미국 하원, 주한 미군감축안 부결

1987년 화가 등 미술인 202명, 시국 성명

1989년 건설부, 신도시 건설예정지인 성남 분당지구 등 전국 22개 지구를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 고시

1989년 치안본부, 극렬시위·노사분규 주동 대학생·재야 90명 검거령

1989년 국방부, 방위산업체 파업 땐 군인력 투입, 가담자 병역특혜 취소

1990년 문화방송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PD수첩 첫방송.

1990년 부동산투기억제 대책 발표-49개 재벌 비업무용 땅, 6개월내 매각 의무화. 청와대에 특별 점검반 설치

1990년 평민당 과 민주당의 야권통합 대표 공식회담, 3개항에 합의.

1990년 전국 17개 도시 192개소에서 대학생 8만 여명, 민주자유당 해체 주장하며 시위

1991년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 ‘노태우정권 퇴진’ 요구 분신 스스로 목숨끊음, 검찰의 유서대필조작으로 강기훈 전민련 총무부장 자살방조혐의로 징역3년 복역, 24년만의 재심에서 무죄 확정판결받음

ㅡ1991년 5월 8일 오전8시 7분경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26세)씨가 서강대 본관 옥상에서 "폭력살인 만행 자행하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김씨가 자살한 것은 그해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시위진압경찰의 구타로 사망한 후 운동권 학생들이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는 의미로 분신자살하던 와중의 일이었다.

김기설씨가 분신자살한 직후 박홍 당시 서강대 총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죽음을 선동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주장, 파문을 일으켰다.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씨를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필해 주었다는 혐의로 자살방조죄 등으로 기소했다. 유서의 진위를 놓고 정권과 검찰에 의한 사건 조작이라는 재야 단체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기훈씨는 재판 끝에 실형을 선고받고 3년 2개월간 복역했다.

1991년 강경대군 치사사건과 관련, 서울대 교수 55명, 서강대 교수 20명과 대한변호사회는 시국선언

1991년 일본 고고학자 에가미 나미오박사, 아사히 6월호에 `기마민족설은 실증됐다'는 논문을 발표.

1992년 대학집회서 인공기 게양, 광주 전남대 부산 동아대에서 “인공기 게양, 북한과의 서신교류, 북한영화 상영등으로 국가보안법을 어김으로써 법을 사문화시키겠다”며 태극기 만국기와 함께 인공기 게양, 철거하려는 경찰과 충돌

1993년 상공부, 남한의 설탕과 북한의 소주를 교환 하는 30만달러어치의 첫 직교역을 승인

1993년 서울지검, 공사와 관련, 건설업체로부터 9억 여원의 뇌물을 받은 명선식 축협 중앙회장 구속

1993년 교육부 부정입학·편입생 명단공개, 1987학년도-1993학년도까지 전국 75개 4년제대학 입시감사로 부정입학·편입학했거나 채점착오로 부당하게 합격한 1,412명 적발, 신원확인된 학생855명 학부모451명 명단공개

1993년 북한의 극작가 조명암 작고.

1994년 가키누마 센신 스님, 안중근 의사 유품 기증

ㅡ안중근 의사의 친필 유묵 3점과 관련사진 원본 7점, 한일 강제병합 직전 한국 관련사진 61점이 한국에 기증됐다. 1994년 5월 8일 방한한 일본 가키누마 센신 스님(62. 한-일불교복지협의회 회장)이 이날 조선일보사를 방문, “이들을 소장한 쓰다 고도 스님이 한국정부가 원할 경우 안의사 유묵과 관련 사진, 한국 관계자료 등 총 71점을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했다.

쓰다 스님이 소장한 안의사 관련품은 안의사가 러시아에 있는 독립운동가 이강에게 보낸 편지, 여순형무소에서 찍은 정면사진, 안의사 시신을 태우고 형장에서 묘지로 가는 마차, 처형직전 여순형무소에서 홍석구신부 등과 면회하는 모습, 총탄을 맞은 이토 히로부미, 안의사의 재판 광경, 저격에 사용한 권총사진 등 7점과 ‘민이호학불치하문, 불인자불가이구처약, 계신호기소불도’라고 쓰여진 친필유묵 3점이다.

이들 소장품은 쓰다 스님의 작은 할아버지 쓰다 가이준 스님이 1909년쯤 중국 여순형무소에서 직접 입수한 것으로 사진 원본은 유리건판 상태로 보존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쓰다 가이준 스님은 안의사가 복역하고 있을 당시 여순형무소의 포교사로 활동했다

1995년 제175회 임시국회 개회(민주당 단독으로 개회, 민자당 불참으로 공전)

1996년 신한국당, 대표 이홍구씨 선출

1996년 탈북자 이정국(30.북한군장교). 서병림(34)씨, 제3국체류중 귀순 입국

1996년 팔라우공화국 쿠니오 나카무라 대통령 방한

1997년 세계보건기구, 한국에 국제백신연구소(IVI) 설립협정 비준동의안 가결

2000년 환경운동연합, 새만금 간척사업 중단 요구

2000년 매향리사태 발생, 미7공군 전폭기가 경기 화성 매향리에서 폭탄 잘못 투하

2003년 한국 농구의 ‘별’ 전규삼씨 별세

ㅡ“늘 검소하셨고 농구를 하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

이충희 고려대 감독은 9일 한국농구의 ‘별’ 전규삼(전 송도중고 농구코치·사진)옹의 빈소(인천의료원)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지난 8일 저녁 전 옹의 타계소식을 듣고 곧바로 빈소로 달려와 밤을 지킨 강동희(LG)는 “고인의 농구에 대한 사랑은 아무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라고 애도했다.

88세를 일기로 작고한 전 옹은 1961년부터 인천 송도고 코치로 농구지도에 전념, 유희형(한양대 겸임교수) 김동광(삼성 감독) 이충희 정태균(국민은행 감독) 홍사붕(SBS) 등을 길러냈다. 김승현(동양)도 그의 지도로 성장했다. 개성에서 태어나 일본 호세이(法政)대를 졸업, 개성 송도고 교사를 거쳤다.

‘송도고 할아버지’로 잘 알려진 전 옹은 당장의 승부를 떠나 기본기와 창의성을 중시하는 ‘생각하는 농구’를 철학으로 삼았다. 대회 때라도 시험 3~4일을 앞두고는 훈련을 시키지 않았으며, 성적이 떨어지면 훈련에서도 제외시킬 정도였다. 96년 코치직을 그만둔 뒤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했던 고인은 최근까지도 거의 매주 학교를 찾아 손자뻘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고 가르쳤다.

2005년 노무현대통령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순방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 저지 교육 공동 대책 위원회, 한미 자유무역협정 주제 이슈 수업 실시 발표

2007년 종합 소득세 신고 대상자, 사상 처음으로 3백만 명 돌파

2009년 '조훈현 스승' 후지사와 타계

ㅡ조훈현의 실질적 스승으로 유명한 '괴물기사'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84) 九단이 2009년 5월 8일 오전 도쿄 성로가(聖路加) 국제병원서 타계했다.

천부적 감각의 소유자인 후지사와씨는 한국출신 유학생이던 조훈현 九단의 기재에 반해 수백 판을 직접 지도하는 등 실전적인 스승 노릇을 한 기사로 한국에도 많은 팬들을 갖고 있다. 그는 또 술과 도박,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암 극복 등과 관련해 숱한 일화를 남겼다.

2011년 한국프로야구에서 KIA 타이거즈 대 SK와이번스의 경기에서 최초로 11회말에 연장 끝내기 삼중살이 나왔다.

2014년 지하철 1호선 역주행

ㅡ오후 2시35분께 서울 용산역을 출발해 동인천역으로 가던 코레일 급행 전철이 300m 역주행했다.

역주행 사고 원인은 송내역과 부개역 사이 수도권 전철 경인선 신호기 고장인 것으로 파악됐다.

코레일에 따르면 이 전동차는 경기 부천 송내역을 지나 인천 부평 부개역 방향으로 향하던 중 신호기의 '정지' 신호를 받고 전기공급이 끊기는 오르막 절연구간에 멈춰섰다.

이 때문에 전동차는 가속력을 얻기 위해 300m 뒤로 역주행한 뒤 다시 출발했던 것.

사고 당시 열차 안에 350여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열차는 19분만에 정상 운영됐다.

2017년 북-미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1.5트랙(반관반민) 대화(-5.9)

2021년 이한동 전 국무총리 세상떠남(87세)

2021년 손흥민(29세) 유럽 무대 시즌 최다골(22골) 기록

2022년 조기반환 용산기지 9월 임시 개방

2022년 코로나19 4만64명 확진, 어제보다 464명 늘어...사망 71명.위중증 423명

2022년 대한민국의 시인 김지하 작고.

 

 

 

535년 56대 로마 교황 교황 요한 2세 작고.

615년 67대 로마 교황 교황 보니파시오 4세 작고.

685년 81대 로마 교황 교황 베네딕토 2세 작고.

1660년 영국 왕정복고

1653년 프랑스의 루이 14세시대 유명한 장군 빌라르 출생.

1721년 교황 인노첸시오 13세, 244대 로마 교황 취임.

1788년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흥망사` 전6권 완간

1794년 ‘산소’와 ‘수소’ 이름 지은 프랑스화학자 라부아지에(51세) 세상떠남

1800년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가 러벳 출생 - 선거개혁을 요구하는 `인민헌장`(1838)의 초안 작성

1828년 국제적십자 창시자 앙리 뒤낭 출생

1828년 적십자운동의 시조인 스위스의 앙리 뒤낭 출생

ㅡ국제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이 1828년 5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본래 사업가였던 뒤낭은 1859년 이탈리아 북부 솔페리노 지역을 여행하다가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 전투에서 부상병들의 비참한 상황을 보고, ‘전쟁과 재해현장에서 헌신적이고 자격 있는 국제구호단체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1864년 12개국 대표가 제네바에 모여 ‘제네바 협약’을 채택ㆍ조인하면서 적십자운동이 시작됐다.

그는 결국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파산했고, 그 뒤 1867년 제네바를 떠나 가난하게 살았으나 계속해서 전쟁 포로에 대한 대우, 노예제도 폐지, 국제적 중재, 무장해제, 유대인 국가수립을 위해 힘썼다.

뒤낭은 1901년 스웨덴 스톡홀름 개최된 제1회 노벨상 시상식에서 적십자 운동의 공로로 ‘제1호’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노벨상의 수상 시비는 첫 해부터 계속돼, 뒤낭의 노벨평화상 수상 역시 노벨의 유언 취지와 어긋난다는 비난을 받았다. 뒤낭이 한 일은 ‘평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전쟁의 공포를 어루만지면서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오히려 전쟁을 인간화했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국제적십자운동은 평상시 재난구호와 취약계층 지원을 주 임무로 하는 국제적십자연맹(IFRC)과 무장충돌지역의 희생자 보호지원을 하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그리고 IFRC의 179개 회원국이 3대 축을 이뤄 사업을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05년 고종황제 칙령 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제정하면서 대한적십자사가 탄생했으며, 1949년 대한적십자사조직법이 공포되면서 오늘의 조직에 이르고 있다.

1838년 영국 의회정치의 계기가 된 인민헌장 공포

1842년 파리시에서 열차 충돌 사고 발생. 59명 사망.

1871년 미국 영국 워싱턴조약 체결

1880년 프랑스소설가 플로베르 세상떠남 『보바리 부인』

ㅡ“네 생애중 가장 빛나는 날은 이른바 성공의 날이 아니라 비탄과 절망속에서 생에의 도전과 한번 부딪치겠다는 느낌이 솟아오르는 때이다(The most glorious moment in your life are not the so-called days of success, but rather those days when out of dejection and despair you feel rise in you a challenge to life, and the promise of future accomplishments).”

1884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출생

1886년 코카콜라 시판

ㅡ5월 8일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시의 약국에서 한 시럽이 판매되기 시작했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물 코카콜라의 탄생이었다.

코카콜라의 원래 이름은 코카와인(cocawine)으로 애틀랜타시의 존 펨버튼 박사가 1886년 우연히 발명한 시럽 덕분에 탄생했다. 당시 시럽에 탄산을 섞어 친구들에게 권하자 새롭고 상쾌한 맛이라는 반응이 쏟아졌고 이에 고무된 펨버튼이 얼마 뒤 약국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곧이어 경리사원의 권유에 따라 시럽의 이름은 코카콜라(Coca-Cola)로 개칭됐다.

5월 29일자 '애틀랜타 저널'에는 코카콜라의 첫 광고가 실렸다. "코카콜라 맛있다! 상쾌하다! 활기를 준다! 기운을 북돋운다!"는 문구였다. 이후 펼쳐진 코카콜라 마케팅의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코카콜라는 옥외광고의 원조이기도 하다.

시골 약국의 음료수였던 코카콜라를 본격적으로 상품화한 사람은 캔들러였다. 1887년 펨버튼이 죽자 2,300달러에 일체의 권리를 사들인 캔들러는 오늘의 코카콜라를 만든 장본인이다.

캔들러는 시럽 개선 실험에 착수해 '7X'라는 첨가물을 만들어냈다. 7X는 지금까지도 제조방법을 비밀에 붙이고 있는 첨가물이다. 독특한 곡선미로 여체를 연상시키는 코카콜라 컨투어(등고선)병은 1915년에 디자인됐다. 당시 백과사전에 수록된 코코넛의 일러스트에서 힌트를 얻어 밋밋하고 직선적이던 병에 세로 선을 넣어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날의 '빨간 옷을 입은 뚱뚱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이미지도 코카콜라가 만들어낸 것이다. 음료수 비수기인 겨울철만 되면 고전을 면치 못하던 코카콜라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창조한 광고모델이 바로 빨간 옷의 뚱뚱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였다. 그전까지 산타는 굴뚝을 드나들 수 있는 작고 귀여운 요정처럼 묘사됐었다 .

한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단어로 'OK!'에 이어 '코카콜라'가 2위에 랭크됐다고 한다.

1892년 영국의 예술사회학자 아르놀트 하우저 출생.

ㅡ헝가리의 역사학자로 오랜 기간 동안 영국에서 살면서 미술사, 정신분석학, 예술 이론, 미학, 사회사, 문화사, 미술심리학 등의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든 미술사학자이다.

하우저는 예술의 형식적인 면에 가치를 두었으나, 사회역사적인 관점에 대해서도 예술사회학자로서 관심을 가졌다. 포괄적이고 상세한 예술에 대한 지식과 오랜 기간 동안의 영화산업에 있어서의 활동은 그가 예술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자율적으로, 다른 면으로는 사회 현상으로 보게 해 주었다. 냉전 시기의 서방(형태에 내재한 해석)과 동방(예술의 사회적 한계) 사이의 미술에 대한 논쟁 속에서 하우저는 중간에 있으려고 했다.

1899년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출생.

1900년 미국 텍사스주 캘버스틴에 허리케인, 6천명 죽고 도시전체 폐허가 됨

1902년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섬의 생피에르 시 부근 플레 화산 폭발 사망3만6천명

ㅡ주민들 대피시키라는 경고를 루이 무테 주지사가 무시하고 오히려 걱정없다는 전단지를 돌려 피난가지 않은 사람들과 다른 지역에서 생피에르로 피난온 사람들 모두 목숨잃음, 생존자는 지하실에 숨었던 제화공과 지하감옥의 죄수, 그리고 10살짜리 소녀 단 세 사람

1903년 프랑스화가 고갱, 태평양 타히티 섬에서 세상떠남

1911년 영국 청국 아편협정 체결

1914년 러시아 태생의 유태계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 출생.

1926년 영국의 방송인, 작가 애튼버러 출생 - 혁신적인 텔레비전 교육 프로그램으로 유명

1927년 헝가리의 추기경 퍼슈커이 라슬로 출생

1931년 세계최초의 TV 야외방송, 런던에서 시작

1936년 독일 역사학자 오스발트 슈펭글러 사망

ㅡ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18년 7월, 지극히 비관주의적인 관점에서 서구문명의 몰락을 예언한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andes)’ 제1권이 출간됐다. 2권은 1922년에 출간됐다.

세계사를 이집트·인도·중국·그리스·로마 등 9개의 유기적인 문화권의 흥망성쇠로 분석하면서 서유럽과 미국 문명도 결코 흥망성쇠의 사이클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리스·로마가 몰락할 때의 징후가 서구문명에서도 발견되므로 결국 서구의 몰락은 운명적이라는 내용이었다. 사람들이 열렬한 반응을 보였지만 정통학자들은 이를 외면했다. 슈펭글러가 고대, 중세, 근대라는 기존의 3단계 역사 구분방식을 단선적이고 근시안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못마땅한 데다 그의 사료 취급방식이 부정확하고 표면적인 정보에만 의지했다는 것이다.

1880년 독일에서 태어난 슈펭글러가 젊어서 철학, 역사학, 수학, 예술 등을 두루 섭렵하고 저술에만 전념하기 시작한 것이 1911년 그의 나이 31세 때였다. ‘서구의 몰락’ 이후 한때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기울어 1933년에 출간된 ‘결정의 시각’에서는 의회제·민주주의·사회주의·유색인종 등을 맹렬히 비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치가 그의 페시미즘(비관주의)을 인정하지 않고 그 역시 인종차별에 반대하면서 나치와 멀어져 말년에는 고독과 불우한 생활을 보내다 1936년 5월 8일 뮌헨에서 56세로 생을 마쳤다.

1937년 미국의 소설가 토머스 핀천 출생.

1939년 스페인 국제연맹 탈퇴

1945년 알제리아에서 반프랑스 폭동

1945년 트루먼 미국 대통령, 무조건항복을 권고하는 대일성명 발표

1945년 자렛 출생 - 20세기 후반의 가장 독창적이고 활동적인 재즈 음악가

1945년 독일 항복문서조인, 유럽에서의 2차대전 끝남,

ㅡ5월8-9일 양일은 세계대전 희생자를 위한 추모와 화해의 기간(Time of Remembrance and Reconciliation for Those Who Lost Their Lives during the Second World War)

1948년 국제적십자의 날 제정

ㅡ국제적십자사와 적신월사의 뿌리는 1859년 프랑스와 사르디니아 연합군 간 벌어진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스위스 제네바 출신의 앙리 뒤낭(Henri Dunant)에게서 시작되었다. 뒤낭은 그가 목격했던 전쟁의 참상을 기록해 1862년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전시에 발생하는 부상자를 위한, 평시에 만들어져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는 구호기구를 제안했는데, 이 제안이 후에 적십자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는 또한 강제력을 가지고 전쟁터의 부상자를 구호하도록 하는 국제적인 원칙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제네바 협약의 기원이 되었다.

그가 제안한 구호기구는 처음에 국제부상자구호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 for Relief to the Wounded)라는 이름으로 출범했으나 곧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로 이름을 바꾸었다. 1863년 10월 26일 ICRC 총회가 개최되어, 부상병을 위한 국가별 구호 단체의 설립을 결정했는데, 이것이 각국의 적십자사 및 적신월사 탄생의 기반이 되었다. 결의안 채택 후 뷔르템베르그, 올덴버그 대공국, 벨기에, 프러시아에 최초의 적십자사가 설립된 이래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 자국의 적십자사가 설립되었다.

1864년 8월에는 16개 국의 정부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최초의 제네바협약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최초의 근대적인 인도적 협약이었다. 이해 말까지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및 바덴 대공국이 협약을 비준했다. 적십자사가 주로 기독교 국가들에 의해 운영되자,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도 적십자사와 같은 활동을 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을 모티브로 한 적신월사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국제적십자및적신월연맹(IFRC, International Federation of Red Cross and Red Crescent Societies)이 설립되었는데, 이 연맹은 각국의 적십자사들과, 이슬람권에 있는 적신월사들의 활동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무국은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적십자사와 적신월사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에 존재하고 있으며, 약 190개의 국가 소위원회가 연맹의 정회원으로 인정되고 있다. 1948년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는 국제적십자운동의 창시자 장 앙리 뒤낭의 생일을 기념하고 적십자의 정신을 기리고자 매년 5월 8일을 ‘세계 적십자와 적신월사의 날’로 제정했다

1952년 헝가리 출신 미국의 영화 제작자 윌리엄 폭스 작고.

1954년 인도지나 문제를 토의하는 제네바회담 개막

1955년 나토 서독가입 승인

1972년 닉슨 미국 대통령, 북베트남 모든 항만에 대해 기뢰봉쇄 선언

1973년 레바논 군사정부 수립

1975년 미국의 사업가 5대 IOC 위원장, 에이버리 브런디지 작고.

1979년 미국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 사망

1980년 WHO, 천연두 완전 퇴치 선언

ㅡ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제33차 총회에서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완벽하게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1977년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환자를 끝으로, 단 한 건의 새 환자도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연두는 고대 로마에서 군대 내에 집단으로 창궐, 군인을 따라 수많은 도시를 황폐화시켰다. 1492년 신대륙 발견 후 아메리카 대륙에선 100만명 이상이 천연두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잉카제국과 아즈텍 문명의 종말을 앞당긴 것도 유럽인이 묻혀온 천연두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18세기 초 영국 사회에서 빼어난 미모와 지성으로 이름을 날리던 메리 몬태규 부인의 얼굴을 곰보로 만든 장본인도 바로 천연두였다. 20세기 들어와서도 지난 1967년 전세계에서 1000만명이 발병, 200만명 이상이 사망했고,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엔 1만여명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다.

천연두 치료 및 예방에 전기를 마련한 사람은 영국의 외과의사 에드워드 제너였다. 제너는 소의 질병인 우두에 걸렸던 여자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을 근거로 천연두 백신 실험을 했다. 제너의 실험은 성공이었다. 제너의 성공은 인류 의학이 세균 정복을 위한 첫 걸음을 내디뎠음을 의미했다. 균을 약하게 한 뒤, 사람의 면역성을 높이는 ‘백신’ 예방법의 시발이었다.

이후 백신연구는 프랑스의 파스퇴르에서 정교화-체계화됐고, 과학자들은 장티푸스 콜레라 페스트 결핵 등 각종 전염성 질병에 대한 예방백신들을 잇따라 개발해냈다.

1981년 독일의 법학자 볼프강 쿵켈 작고.

1984년 소련 LA올림픽 불참 선언

1985년 미국의 작가, 시어도어 스터전 작고.

1988년 프랑스대선 프랑수아 미테랑 결선투표서 자크 시라크 후보 누르고 재선

1995년 대만의 가수 등려군 작고.

2008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이탈리아의 80번째 총리직을 시작

2018년 영국의 영화 편집자 앤 V. 코츠 작고.

2020년 미국의 마술사 로이 혼 작고.

2021년 독일계 미국인 건축가 헬무트 얀 작고.

2021년 미국의 재즈 트롬본 연주자 커티스 풀러 작고.

2022년 WHO, 러 전쟁범죄 등거 수집...내주 대러제재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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