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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5월 5일

by 귤담 2023. 3. 27.

오늘의 역사 5월 5일

 

 

社稷의 뜰 純白으로 낮술 취해 울고 있다

무너지는 노을 몇 坪, 빈 들판이 울고 있다

무력한

王朝의 바다

선화공주 울고 있다.

 

배꽃 쌓인 과수밭에 한 세상이 누워 있다

거리 곳곳 응시의 눈, 아이들이 누워 있다

어두운

薯童의 눈빛

먹물처럼 누워 있다.

 

하늘의 푸른 자유, 한 시인이 웃고 있다

술 한 잔의 공통분모, 공화국의 허리춤에

帝王이

깔깔거리며

실눈 뜨고 웃고 있다.

                        -이재창 시인의 「年代記的 몽타주 · 11」 전문 (시조시학, 1996 하반기호)

 

 

 

*오늘은 어린이날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고 행복을 도모하기 위해 정한 기념일. 매년 5월 5일이다. 1922년 방정환이 이끄는 천도교 서울지부 소년회에서 ‘어린이날’을 선포하고, 이듬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한 것이 효시이다. 일제강점기 말에 중단되었다가 해방 후인 1946년 기념일이 다시 거행되면서 5월 5일로 변경되었다.

< 대한민국 어린이헌장 >

어린이는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이어 나갈 새 사람이므로 그들의 몸과 마음을 귀하게 여겨 옳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힘써야 한다.

1. 어린이는 인간으로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야 한다.

2. 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3.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4.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에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5. 어린이는 위험한 때에 제일 먼저 구출하여야 한다.

6.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7.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하며,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 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주어야 한다. 불량아는 교화하여야 하고 고아와 불량아는 구호하여야 한다.

8.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탐구하며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9. 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문화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1294년 [음]충렬왕(忠烈王) 20년, 왕이 탐라의 반환 등 4가지 일을 원 황제에게 건의함

ㅡ왕이 4가지 일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첫째, 탐라를 돌려줄 것, 둘째, 잡혀간 백성을 돌려줄 것, 셋째, 공주를 책봉해줄 것, 넷째, 왕에게 작위(爵位)를 더해줄 것 이었다. 황제가 명령하기를, “탐라는 고려에 다시 예속케 할 것이다. 기미년(1259, 고종46) 이후 포로로 잡혀왔거나 유민(流民)으로 옮겨온 사람들은 사신을 파견하여 요양행성(遼陽行省)과 함께 가려서 돌려보낼 것이다. 공주를 책봉하는 것은 〈유사(有司)가〉 의논하여 보고하라. 국왕의 작명(爵命)은 이미 여러 번 내려주었으니 내년까지 기다리라.”라고 하였다.

1398년 [음]태조 7년, 궁궐 안에 요물고(料物庫)를 설치함

1403년 [음]태종 3년, 경상도 조운선(漕運船) 34척이 침몰함

1410년 [음]태종 10년, 단오에 행하는 ‘돌 던지는 놀이[石擲之戲]’를 금함

1436년 [음]세종 18년, 한성·경기·충청·경상·전라·황해·평안도에 지진 발생

1493년 [음]성종 24년, 성균관의 권학 절목(勸學節目)을 제정함

ㅡ성균관(成均館)의 생원(生員)·진사(進士)·유학(幼學) 10여인의 전강(殿講)에서 약(略) 또는 조(粗)를 받은 자가 두어 사람이고 나머지는 다 불통(不通)이었으므로, 그 뒤에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한 자가 유생(儒生)이 배움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을 아뢰니, 성균관의 당상(堂上)에게 명하여 예조(禮曹)와 함께 권학 절목(勸學節目)을 의논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의논하여 아뢰기를,

"1. 생원·진사 등이 일과(日課)를 규피(規避)하여 저녁에 모였다가 아침에 흩어지고, 혹 학교에 있더라도 청강(聽講)하려 하지 않으며, 또 제술(製述)하지 않는 자가 자못 많으니, 이제부터는 한 달에 10일 이상 청강한 자와 3순(旬)에 한 번 제술하여 차등(次等) 이상으로 입격(入格)한 자는 착명(著名)한 일수(日數)대로 원점(圓點) 을 주고, 이 격례(格例)에 미치지 못한 자는 원점을 반으로 줄일 것.

1. 별시(別試) 때마다 원점은 임시하여 점수를 정하되, 석점(夕點)을 계산하지 말고 조점(朝點)만을 계산할 것.

1. 《대전(大典)》에 전년 가을에 초시(初試)하고 봄에 복시(覆試) 하게 되어 있는 것은 그 뜻이 대개 삼동(三冬)에 학문을 쌓게 하려는 것인데, 지금 유생은 초시에 입격(入格)하면 본디 공(功)을 쌓는 것이 없고 네다섯 달 동안 외는 데에만 애써서 입격되기를 바라므로, 여느 때에는 전혀 글을 읽는 데에 마음 쓰지 않으니, 초시(初試)·복시(覆試)를 우선 고례(古例)대로 모두 초봄에 시험하여 뽑을 것.

1. 생원(生員)·진사(進士)의 양친(兩親)과 계후(繼後)한 부모의 노병(老病)으로 진성(陳省)하면 으레 원점을 계산하지 않아야 하겠으나, 수양(收養) ·시양(侍養) 이라면 간사하게 속이는 것을 가리기 어려우니 모두 쓰지 말 것.

1. 《주역(周易)》은 이학(理學)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근래 《주역》을 배우는 유생(儒生)이 적어서 역학(易學)이 이에 따라 폐기되어 없어질 듯하니, 이제부터 강시(講試)는 삼경(三經) 중에서 《주역》을 먼저 강(講)하여 불통(不通)한 자는 시험하지 말 것.

1. 달마다 전강(殿講)하여 강획(講畫) 한 뒤에 식년(式年) 에 통계(通計)하여 3통(通) 이상인 자는 회시(會試)에 직부(直赴)시키고, 2통(通) 이하인 자는 초시 때에 분수(分數)를 아울러 계산하되 조(粗)와 약(略)은 쓰지 말 것."

하니, 영돈녕(領敦寧) 이상과 정부(政府)에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1515년 [음]중종 10년, 이조·예조·대제학 등이 같이 의논하여 문신 김안로(金安老)·김정(金淨)·소세양(蘇世讓)·유옥(柳沃)·유돈(柳墩)·정사룡(鄭士龍)·신광한(申光漢)·표빙(表憑)·박세희(朴世熹)·김구(金絿)·윤계(尹溪)·황효헌(黃孝獻)·정응(鄭譍)·손수(孫洙)·유성춘(柳成春)·기준(奇遵) 등에게 사가 독서(賜暇讀書)할 것을 초계(抄啓)하였다.

1526년 [음]중종 21년, 원각사 터에 거처하는 잡인들에게 십가 작통법(十家作統法)을 시행하게 함

ㅡ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 성종(成宗) 16년(1485) 일본에 흉년이 들어 칡뿌리와 솔방울로 죽을 쑤어 먹음으로써 기아(饑餓)에 대비하는 것을 보고 한명회(韓明澮)가 주장하여 5가(家)를 1통(統)으로 조직, 동네 어른이 음식의 상태를 살펴 대책을 수립하도록 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里)·방(房) 밑에 통을 조직, 서울에서는 5호(戶)를 1통으로 하여 통주(統主)를 두었고, 지방은 5통을 이(里)로 하고 몇 개의 이(里)로 면(面)을 형성, 면마다 권농관(勸農官)을 두며 서울에는 방(坊)마다 관령(管領)을 두었다.

1589년 [음]선조 22년, 조헌(趙憲)을 길주(吉州) 영동역(嶺東驛)에 유배시킴

1597년 [음]선조 30년, 고양·김포·양천 등에 우박 피해 발생

1600년 [음]선조 33년, 중강(中江)의 관시(關市) 혁파 문제로 명에 자문을 보냄

1624년 [음]인조 2년, 춘추관이 실록 편찬 자료를 수집함

1673년 (조선 현종14)실학자 유형원(52세) 세상떠남 『반계수록』,

ㅡ나라 장래가 튼튼해지려면 먼저 농민들이 잘살아야 하므로 토지제도를 토대로 세금 과거 군사 등 전면개혁과 농민이 자기땅 갖게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주장

1675년 [윤]숙종 1년, 일본 대마주(對馬州) 태수가 숙종의 즉위를 하례함

ㅡ일본(日本) 대마주 태수(對馬州太守) 평의진(平義眞)이 표(表)를 올려 즉위(卽位)를 하례하였다. 그 표(表)에 말하기를,

"엎드려 받자오니, 신왕 전하(新王殿下)께서 경건하게 보도(寶圖)를 받들어 대위(大位)에 빛나게 오르셨으니, 무릇 군생(群生)들이 뉘라서 기뻐 경하(慶賀)하지 않겠습니까? 평의진(平義眞)은 들었습니다. 삼계(三階)가 평평하면 음(陰)과 양(陽)이 화(和)해지고 일인(一人)이 경사스러우면 억조 창생(億兆蒼生)이 이를 힘입는다 합니다. 공손히 생각하오니, 신왕 전하(新王殿下)께서는 이름이 해와 달에 가지런하고 의리는 사람과 신(神)을 감동케 하였습니다. 광명(光明)하심은 문왕(文王)의 덕을 본받으셔서 휴상(休祥)이 거듭해 이르렀고, 큰 국기(國基)는 기자(箕子)의 어짊을 이어서 헌장(憲章)을 완전하게 갖추었습니다. 이는 억만년(億萬年)의 경운(景運)을 누리실 뿐 아니라, 더욱이 삼대(三代)460) 의 순풍(淳風)을 이으실 것입니다. 은택(恩澤)이 모든 백성에게 흡족하매 편안한 자가 오고 움직이는 자는 화하며, 덕화(德化)가 사표(四表)461) 에 넘치니 가까운 데 있는 자는 기뻐하고 먼 곳에 있는 자는 회유(懷柔)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니다. 어진이를 친하시고 이웃과 잘 지내셔서 옛 우호(友好)를 더욱 돈독하게 하시와, 가는 자를 보내고 오는 자를 맞이하는데 옛 제도를 어기지 마소서."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조정의 뜻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선의(善意)에 답(答)하였다.

1680년 [음]숙종 6년, 허적(許積)에게 죽음을 내림(경신대출척)

1717년 [음]숙종 43년, 황해도 장연부(長淵府)에서 난파된 청국인 선원 17명을 돌려보냄

1721년 [음]경종 1년, 부교리(副校理) 조문명(趙文命)이 붕당정치의 해로움에 대한 상소를 올림

1727년 [음]영조 3년, 전라도에 기근이 심하여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일어남

1733년 [음]영조 9년, 공홍도(公洪道)에서 유민(流民) 7,580여 명이 죽음

1781년 [윤]정조 5년, 관예(觀刈, 추수하는 광경을 관람함) 때 쓸 악장을 짓게 함

1804년 [음]순조 4년, 왕실 족보인 《선원보략(璿源譜略)》을 증수함

1807년 [음]순조 7년, 서울 보민사(保民司) 화재로 민가 32호가 연소됨

1812년 [음]순조 12년, 이미 죽은 홍경래(洪景來) 등에게 법을 갖추어 다시 처벌하게 함

1862년 [음]철종 13년, 익산에서 난을 일으킨 죄인 등을 효수(梟首)하게 함

ㅡ비변사(備邊司)에서 익산 안핵사의 사계(査啓)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임치수(林致洙)·이의식(李義植)·소성홍(蘇聖鴻) 이 세 사람은 난민들의 거괴(巨魁)이고, 천영기(千永基)·문희백(文希白)·장순복(張順福)·오덕순(吳德順) 이 네 사람은 난민의 동악(同惡)입니다. 임종호(林宗鎬)·임덕호(林德鎬)는 한 사람은 이방(吏房)이고 한 사람은 호장(戶長)인데, 은밀히 서로 표리(表裏)의 관계를 맺고 앉아서 그 성패(成敗)를 살폈으며, 최학초(崔學抄)는 좌수(座首)로서 그 기미를 알고서는 기일에 앞서 집으로 돌아갔다가 변란의 소식을 듣고서는 밤을 틈타 고을로 들어갔습니다. 이러한 전에 없던 변란을 당하여 화응(和應)한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원통하더라도 사형에 해당되고 죄를 졌어도 사형에 해당이 되는 것이니, 이상의 10인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민인(民人)들을 영하(營下)에 대대적으로 모아 모두 부대시(不待時)034) 로 효수(梟首)하는 형벌을 시행하게 하소서. 전 군수(郡守) 박희순(朴希淳)은 도결(都結)이 이미 법 밖에 관계되는 것인데도 그런 정사를 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많이 받아서 이민(吏民)이 함께 거사하도록 만들었으며, 드디어 위협받아 쫓겨나는 패욕(悖辱)을 당하였으니, 우선 먼저 찬배(竄配)시키소서. 그리고 받아들인 결잉전(結剩錢)은 일일이 환급(還給)하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1869년 [음]연해 지역에 포병대 설치

1885년 독립운동가 이규선 출생

1891년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출생

 

1901년 경부선 철도회사 설립

1905년 보성전문학교 설립

1908년 이강년 의병 250여 명, 인제군 창암점 부근서 일본군과 교전

1909년 통감부, 『월남망국사』·『유년필독』·『동국사략』·『금수회의록』·『우슨소리』 등 발매·배포 금지

1911년 독립운동가 안규홍 순국

ㅡ전라도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벌인 머슴 출신 의병장 담산 안규홍 선생이 1911년 5월 5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1879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난 선생은 열 살 때부터 20년간 머슴생활을 하다가 나라를 지키고 농민을 살리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전남 순천의 강용언 의병부대에 투신, 활동하던중 의병장이 민폐를 끼치자 그를 제거하고 의병부대를 장악한 뒤 1908년 전남 보성군 동소산에서 토착농민과 관동 의병, 해산 군인 등으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켰다.

일제와 친일세력, 탐관오리를 제거하겠다는 기치를 내건 선생의 의병부대는 보성과 순천 등 전남 지역 일대에서 활동하며 세금 징수원을 공격하거나 탐욕스러운 토호의 소작료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또 의병을 일으킨 이후 1909년 10월까지 1년 6개월 동안 일본수비대-토벌대-순사대와 26차례나 교전, 파청대첩과 진산대첩 등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9년 전남지역 의병을 상대로 한-일제의 대토벌 작전이 거세지자 선생은 훗날을 기약하며 의병부대를 해산,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광주감옥에 수감됐다가 대구감옥으로 옮겨져 1911년 5월 5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정부는 1963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2001년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로 선정했다.

1918년 시인 오장환 태어남, 해방후 월북했다가 1951년 결핵으로 세상떠났으나 정확한 날짜는 알려지지않음

1920년 제주도 해녀조합 창립

1921년 대한민국의 목회자 문동환 출생

1923년 감옥 명칭을 형무소로 바꿈

1928년 어린이날 행사, 5월 5일로 변경 전국에서 거행

1929년 조선비행학교 개교

1934년 일제 어용 고고학자 하라다, 발해유적 도굴

1936년 조국광복회 만주에서 창립

1938년 국가총동원법 시행

1939년 공주의 선화당 청사, 백제 박물관으로 개관

1939년 금매상ㆍ철제품회수 시작

1946년 `어린이날` 제정

1946년 『초등 중등 공민』 편찬

1946년 국사관(현 국사 편찬 위원회) 신설

1948년 1급경찰서(서장:총경), 2급경찰서(서장:경감) 으로 분류 등급제 실시 (1972년 폐지)

1948년 경기도 수색 소재 조선경비대 제1여단 내에 항공부대를 창설, 한국 공군의 첫걸음

1949년 개성지역 38선 충돌, 개성시내 학교는 휴교하고 상가는 철시

1949년 경기도 학무국, 국기 배례(國旗拜禮) 거부한 파주 봉일천국민학교생 42명 퇴학 처분

1949년 미 육군참모총장 오마 브래들리 장군, 미국의 방위전선은 일본과 필리핀이라고 발언

1949년 해병대 발족

ㅡ한반도는 삼면이 바다이며 동북아시아의 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예부터 열국분쟁의 초점이 되어 왔다. 이러한 조건과 더불어 분단이라는 정치적·군사적 환경 때문에 대한민국 국방은 수륙양면작전을 전개시킬 수 있는 전략 기동부대로서의 해병대 창설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은 정치·경제·사회적 어려움 때문에 이를 추진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반란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륙양면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해병대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됨에 따라 해군총참모장을 비롯한 군 수뇌들은 해병대 창설을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1949년 4월 15일 해군에서 편입한 380명(장교 26명, 하사관 54명, 병 300명)으로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해병대 창설식을 거행했으며,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이 공포됨에 따라 법적인 승인을 얻게 되었다.

창설 당시 380명의 병력과 일본식 장비를 가지고 탄생한 해병대는 비행장 격납고를 병사로 사용하는 등 열악한 시설과 여의치 못한 군수 지원 등의 악조건 속에서 시작한 해병대는 1949년 8월 15일 서울에서 거행된 조국광복 제4주년 기념식에 참가해 창설을 처음으로 알렸다.

1950년 한국은행법 법률 제138호로 공포

1951년 미 육군부, 6·25 전쟁 당시 미군 사상자 6만 2,799명 발표

1955년 일본 패전 모른 채 10년동안 동굴생활한 한국인, 미 해군에 귀순

1956년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 호남 유세 중 세상 떠남

ㅡ한강 백사장에서 대통령 선거 유세를 마치고 자택에 돌아와 찍은 신익희 선생의 최후 사진. 이 사진을 촬영한 지 세시간 후에 호남선 열차 안에서 사망했다.

제3대 대통령후보로 나선 신익희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1956년 5월 5일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했다. 연일 강행군한 강연과 유세 등이 그 원인이었다.

해공 신익희는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중국으로 망명해 1945년 광복 때까지 일관되게 임시정부를 지킨 독립운동가였다. 1945년 12월 임정요인의 2차 환국 때 귀국해 초기에는 김구와 함께 반탁운동을 선도했지만 곧 임시정부세력의 `남북협상론`보다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단정(單政) 불가피론`을 수용해 이승만 쪽으로 기울었다.

이후 이승만과 제휴해 대한민국 건국에 힘을 쏟은 신익희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2대 의장에 오르면서 임정계가 주축을 이룬 한국독립당 동지들과는 더욱 멀어졌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 때는 경기 광주에서 무투표 당선됐으며 이승만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돼 대통령 이승만과 호흡을 맞춰나갔다.

이후 1948년의 5·10총선을 거부한 임시정부세력과 한독당 인사의 기용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승만과도 멀어졌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나선 신익희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선풍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의 한강백사장 연설에는 30만명이 운집하는 등 신익희는 이승만 독재정권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의 희망이었다.

신익희의 유해가 경무대 근처 효자동 자택으로 운구되던 중 흥분한 시민들이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무대로 돌진하면서 경찰과 충돌해 7백여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대통령선거 결과 이승만이 재집권했지만 신익희의 추모표가 전국적으로 185만 8,200표(전체 투표자수900만명)나 나왔으며, 서울에서는 이승만의 지지표 20만표보다 많은 28만여표나 나왔다

1956년 경무대 어귀서 시위군중과 경찰 충돌

1956년 어린이날 제정-방정환선생과 색동회가 5.1로 정해, 56년 정식 법령으로 5월 5일을 어린이날 제정

1957년 어린이헌장 제정 공포, 제1회 소파상 시상

ㅡ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상. 1957년에 새싹회에서 제정하여, 매년 어린이를 위한 일에 공로가 큰 사람에게 수여한다.

1961년 대한민국 정부가 1923년부터 치러졌던 어린이날을 이날로 공식 제정

1961년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남북학생의 판문점 회담을 5월내 열기로 결의

1961년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 전국 19개 대학 참가

-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공동선언문 = 세계사적 현 단계의 특징은 민족해방투쟁의 승리 / 파쇼통치를 타도한 대중은 다시 목전의 빈곤 탈출 위해 통일을 갈망하며 외세 의존적 매판세력의 타도에 집중 / 남북한 학생의 자유 교류

1969년 국세청, 처음 실시되는 종합소득세 대상 4,079건으로 집계

1973년 어린이대공원 개원

1973년 완도 금당도 침투간첩 사살사건

ㅡ완도 거주 주민 4명이 괴한 2명을 발견하고 검거하려다 권총에 맞고 부상,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 1명 사살, 1명 행방불명

1975년 을지 훈련(한국), 포커스렌스 훈련(한·미) 통합

1978년 화국봉 중국 공산당주석 북한 방문, 주한미군철수와 외세개입 없는 한반도 조기통일 주장

1983년 한국-오만, 항공협정 체결

1983년 중국 민항기 춘천에 불시착, 납치한 탁장인 외 5명 정치망명 요청

ㅡ승무원과 승객 1백5명을 태운 중공민항총국 소속 트라이던트 여객기 1대가 심양을 떠나 상해로 향하던 중 권총으로 무장한 중공인 6명에게 1983년 5월 5일 오후 1시55분경 납치돼 춘천 부근 미군기지에 불시착했다. 범인들은 대만으로의 망명을 요구하며 오후 9시경 투항,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풀려났다.

그동안 외교관계가 없었던 한국과 중국은 이 하이재킹사건 처리를 위해 직접교섭하기로 결정, 중국은 심도 민항총국장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특별기편으로 보내, 피랍 기체 및 승객의 송환에 합의했다. 양국은 기존의 호칭 `중공` `남조선` 대신 `중화인민공화국` `대한민국`이라는 정식호칭을 처음 사용했다.

납치자 6명은 검찰에 의해 우리법원에 구속 기소됐다.

1984년 교황청 매년 9월 20일을 한국성인의 날로 결정 밝힘

1984년 방수원(해태 타이거즈) 삼미 전에서 프로야구 사상 첫 노히트노런

1984년 서울대공원 개장

1985년 황석영 소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초판 전량 압수

1985년 한국, 스칸디나비아 오픈청소년탁구대회서 남녀 전종목 우승

1985년 전국에 개기월식

1987년 제19차 한ㆍ미군사위(워싱턴), 88년1월1부터 조기경보체제시행 합의

1989년 동의대 학생 76명, 동의대의 경찰관 참사사건 관련 구속

1990년 정부, 부동산 매각대상 기업을 30대 재벌에서 은행빚 1500억원 이상을 쓰고있는 49개 업체까지 확대

1990년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기업인들이 총3600억 원을 전액 출자, TV및 라디오 방송사를 설립계획 발표

1991년 남북탁구단일팀 코리아, 제41회 세계탁구 선수권대회(일본)에서 종합3위

1991년 진양군 진성면 상촌리 남해고속도로 하행선, 시외버스가 5m 아래로 굴러 5명 사망, 60여명 중경상.

1992년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개최(서울), 연형묵 북한 총리등 대표단 90명 서울 도착

1992년 모스크바대학 박사과정 북한 유학생 김명세(31) 씨가 한국인 이철수 목사집 은신- 러시아에 망명 요청.

1992년 북한 연형묵총리 등 대표단 90명,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 참석차 판문점 거쳐 서울 도착

1998년 리틀엔젤스 예술단,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순수 민간단체 최초로 공연

 

2000년 조선일보 국내 일간지중 최초로 ABC 인증마크 게재

2001년 한국영화인협회, 대종상 시상결과를 둘러싼 편파시비와 관련하여 집행부 총사퇴 결의

2003년 건교부는 국내 승용차 등록대수를 1,001만 5,790대로 집계

2004년 산악인 엄홍길, 히말라야 8000m급 15좌 정복에 성공

ㅡ산악인 엄홍길씨(한국외대 중국어과3)가 2004년 5월 5일 해발 8505m인 얄룽캉봉 등반에 성공,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5좌 정복의 쾌거를 이뤘다. 한국 외국어대는 이날 개교 50주년을 기념, 세계 5위의 고봉인 얄룽캉 정복에 도전했던 ‘2004 한국 얄룽캉 원정대’(등반대장 엄홍길)가 이날 오후 6시23분(한국시각) 정상에 올랐다고 밝혔다.

엄씨는 이날 오전 6시30분쯤 7800m 지점을 출발, 12시간에 걸친 산행 끝에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얄룽캉봉은 히말라야 14좌 중 하나인 캉첸중가봉의 서쪽 위성봉. 그동안 14좌의 주변 봉우리로 여겨졌으나 최근 세계 산악계에서 점차 독립된 봉우리로 인정하는 추세다.

2005년 여의도서 180평 규모 지하벙커 발견

ㅡ서울 여의도에서 180여평 규모의 지하벙커가 발견됐다. 이 벙커는 1976년쯤 대통령 경호 및 비상시 대피 목적으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시가 여의도에 버스환승센터를 세우려고 2005년 4월 측량작업을 하다가 굿모닝신한증권 앞 도로 밑에서 벙커를 발견했다. 발견당시 벙커에는 분산된 3개의 출입구와 2개의 화장실, 샤워실, 소파 등이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출입구의 존재는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었으나 이를 단순한 공동구(통신용케이블이 지나가도록 돼 있는 작은 터널)로 생각해 시에서도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1976년 당시 공사를 맡았던 건설사의 전 임원은 “1976년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지하차도 공사를 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경호용 비밀벙커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청와대의 요청에 의해 관련 기록을 모두 삭제해 문서화된 공사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여의도에서 국군의 날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열릴 때 현재의 굿모닝신한증권 빌딩 앞쪽에 대통령을 비롯한 요인들이 이용하는 단상(壇上)이 놓여졌는데, 그 아래 유사시 대피할 수 있는 벙커를 만들었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도 “D건설사 직원이라면서 1976년 무렵 벙커공사에 참여했던 기억이 있다는 이메일 제보가 3건 접수된 것으로 미뤄 사실로 보인다”며 “영등포구청에 근무했던 직원 중 1980년대 초 이 비밀벙커를 청소했던 기억이 있다는 사람도 나왔다”고 밝혔다. 여의도에서 국군의 날 행사가 열린것은 1972년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십여년 동안이었다.

지하벙커가 경호용 벙커라는 점은 이 벙커가 국방부가 관리하는 군용벙커 명단에 들어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서울시는 벙커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기관이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곳에 환승센터를 만들면서 벙커에는 교통카드 판매소와 매점 등을 만들어 환승센터 이용 시민들의 편의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2006년 에어쇼 하던 블랙이글 전투기 추락

ㅡ오전 11시50분쯤 경기도 수원시 공군 10전투비행단 수원비행장. 어린이날을 맞아 에어쇼를 하던 공군 블랙이글팀 소속 전투기 6대 중 2대가 급강하를 한 뒤 ‘X자’ 형태로 교차 비행을 했다. 교차 후 전투기들이 동체를 한 바퀴 돌리자 관람석에 있던 어린이 등이 “와”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에어쇼 중에서도 고난도로 꼽히는 ‘나이프 에지(Knife Edge)’ 기술이었다.

이때 예기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비행 공연을 하던 전투기 2대 중 1대는 곧바로 급상승해 정상 궤도를 찾았지만 나머지 전투기는 고도를 올리지 못했다. 지상 330m 공중에서 요동을 치던 전투기는 비틀대며 인근 잔디밭으로 추락했다. 1300여 명이 앉아 있던 관람석에서 불과 1.8㎞ 떨어진 지점이었다. 당시 추락한 전투기 조종석에는 고(故) 김도현 중령이 타고 있었다. 김 중령은 당시 항공기 기체 고장으로 추락해 산화했다

2008년 소설가 박경리 세상 떠남 『토지』=1969년 「현대문학」에 집필시작, 매체 옮겨가며 25년간 쓴 대하소설(원고지 4만장 분량)

ㅡ한국 문단의 큰 별이 떨어졌다. 우리 현대문학의 금자탑으로 평가받는 대하소설 ‘토지’를 쓴 원로 소설가 박경리(朴景利·82)씨가 5일 오후 서울 아산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박경리씨는 지난달 4일 뇌졸중으로 오른쪽 반신 마비 증세를 보여 병원에 입원한 뒤 중환자실과 집중치료실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했다. 박경리씨는 지난해 7월 폐에서 종양이 발견됐고, 고령을 이유로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요양을 해왔다.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문예월간 현대문학에 단편 ‘계산(計算)’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장편 ‘김약국의 딸들’(1962) 등 수십 편의 장·단편을 발표했다. 박경리씨는 1969년 현대문학에 대하소설 ‘토지’를 연재하기 시작해 여러 매체로 지면을 옮겨가며 1994년 탈고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로 했다.

2010년 전영록 어머니 '원로가수' 백설희씨 별세

ㅡ그녀는 연기파 배우인 고(故) 황해씨의 부인이자, 80년대 스타 가수 전영록의 어머니이자, 인기 그룹 '티아라' 멤버인 전보람의 할머니였으며 무엇보다 전후(戰後) 한국인의 마음에 꽃을 던져준 타고난 예인(藝人)이었다.

1943년 일본강점기 최고의 예인 집단이었던 조선악극단에 입단하면서 연예인의 길에 들어선 백씨는 1949년 KPK악단이 만든 악극 '카르멘 환상곡'에서 주인공 카르멘 역을 맡으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예명 '백설희'를 얻은 것도 그때다. KPK 단장이던 유명 작곡가 김해송씨는 "에베레스트의 눈이 밤낮없이, 여름 겨울 없이 녹지 않고 눈부신 자태를 드러내듯 연예인으로서 높은 곳에서 식지 않는 열정으로 빛나라"는 뜻을 담아 이름을 지어줬다. 이후 6·25 전쟁 직전 새별악극단에 들어간 그녀는 배우 고(故) 황해(본명 전홍구·2005년 작고)씨를 만나 결혼, 평생을 함께했다.

1953년 최고의 작곡가 고(故) 박시춘씨를 만나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는다. '카르멘 야곡', '물새 우는 강 언덕', '청포도 피는 밤', '코리아 룸바' 등 수많은 히트곡이 두 사람의 조화 속에 탄생했다. 하지만 시대를 뛰어넘어 아직도 생생한 현재적 의미를 지닌 최고의 노래는 '봄날은 간다'이다. 1953년 대구 유니버샬 레코드를 통해 발표된 이 노래는 한국전쟁 이후 남편과 가족을 위한 희생에 심신(心身)을 던져야 했던 당시 여성들의 애상(哀想)을 담담하게 풀어냈다. 이 노래의 생명력은 후배 가수들이 앞다퉈 증명했다. 이미자·조용필·나훈아·하춘화·최헌·이은하·이동원·심수봉·장사익·한영애 등이 리메이크했다. 허진호 감독은 동명(同名)의 영화를 만들었다.

2020년 대한민국의 법조인 송언종 작고

2021년 직계약 화이자 백신 43만6천회분 도착...총 243만6천회분 반입 완료

2022년 어린이 ‘놀 권리’ 법으로 보장한다...정부, 아동기본법 추진

2022년 북 매체, 어제 탄도미사일 발사 보도 한해 이례적

 

 

 

1705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 작고

174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2세 출생

1789년 프랑스, 성직자·귀족·평민의 3부로 구성된 국회인 삼부회 열림

1813년 덴마크 철학자 키에르케고르 출생

1818년 독일 사상가 마르크스 출생

1821년 나폴레옹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세상 떠남

1846년 폴란드 작가 셍케비치 출생

1852년 이탈리아의 추기경 가스파리 출생 - `교회법전`을 편찬

1859년 독일의 수학자 페터 구스타프 르죈 디리클레 작고

1862년 미국 남북전쟁 요크타운 북방 8마일 지점, 윌리암스버그에서 남북군 전투. 이 전투에서 북군이 패배하다

1882년 미국의 해군 제독 존 로저스 작고

1904년 일본군 요동반도 상륙개시

1904년 사이 영, 메이저리그 최초의 퍼펙트 경기

ㅡ보스턴 레드삭스 투수 사이 영이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경기를 달성했다.

사이 영은 1904년 5월 5일 대 필라델피아 아틀랙티스전에 등판해 무사사구, 무안타의 피칭으로 전 이닝을 3자범퇴로 처리, 연27명의 타자중 한 사람도 진루하지 못하게 했다.

사이 영은 완벽한 투구와 타자심리를 꿰뚫는 데 정평이 나있고 1892년에는 36승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는 44세에 은퇴할 때까지 22년간에 걸쳐 906경기에 등판 511승을 기록했다.

1912년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 창간

ㅡ소련 공산당의 전신인 볼셰비키 기관지 `프라우다`가 1912년 5월 5일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창간됐다. 러시아는 이 날을 기념해 5월 5일을 `신문의 날`로 지정했다.

논설 집필은 스탈린이 담당했다. 러시아어로 `진리`를 의미하는 `프라우다`는 1914년 제1차 대전의 발발로 정간되었다가 러시아 2월 혁명후인 1917년 5월 복간된 바 있다. 1991년에도 정간되었다 얼마뒤 기관지가 아닌 일반신문으로 복간했다.

이처럼 `프라우다`는 정치적 격변과 맞물려 부침을 거듭했다. 혁명 후에는 당과 함께 모스크바로 이주해 그곳에서 급속히 성장,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서 부수를 늘려나갔다. 또 기사와 논설중 많은 부분이 모스크바 방송과 타스통신을 통해 소련내외로 광범위하게 전달됐다.

옛 소련 시절에는 한때 최고 1,100만부까지 발행됐으나 소련이 해체된 후 `프라우다`의 역할도 감소해 최근에는 명맥만 유지해오다 1998년 11월 6일 제호를 ‘슬로보’(말, 단어)로 변경했다

1919년 그리스의 독재자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출생

1921년 손문 광동에서 대통령 취임(제2차 광동정부 수립)

1921년 오스트리아의 평화운동가 알프레트 헤르만 프리트 작고

1924년 샤넬 No.5 탄생

ㅡ그 ‘샤넬 No.5’가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게 1924년 5월 5일이었다. ‘샤넬 No.5’는 샤넬과 그의 파트너 조향사(調香師) 에르네스트 보가 80가지가 넘는 꽃향기에 합성한 화학물질을 섞어 만든 최초의 인공향수로 향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자랑이었다.

조향사가 번호 1∼5, 20∼24가 적힌 10개의 샘플을 내놓았을 때, 샤넬은 그중 ‘5’를 선택했고 그것은 곧 상품명 ‘샤넬 No.5’가 됐다. ‘5’는 샤넬이 평소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온 숫자. 5월 5일 발매를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샤넬 No.5의 디자인은 아무 장식 없는 투명한 크리스털병이었는데 단순한 형태에 이름까지 기계적인 느낌을 주다보니 너무 난폭하고 남성적이라는 악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1925년 러시아의 작곡가 블라디미르 바빌로프 출생

1930년 인도의 간디 체포 투옥됨

1932년 상해에서 중국 일본 정전협정 성립

1936년 이탈리아 에티오피아 합병선언

1945년 자유 러시아군단(러시아 해방군)과 체코슬로바키아 레지스탕스가 프라하 봉기를 일으키다.

1955년 미국, 영국, 프랑스 파리협정비준서 기탁-서독 주권 회복. 짜르 협정 발효

1956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수에즈 운하 국유화 선언하다.

1958년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자대회 수정주의와 투쟁 선언

1958년 중국 공산당 제8기 전국대회 제2차회의 개최, 대약진운동을 결정

1961년 미국 세퍼드 중령 태운 인간탄도로켓 머큐리호 발사 성공

1961년 미국 머큐리호 세계최초의 유인탄도비행에 성공. 15분간 비행

1962년 미국 나토(NATO)군에 핵무장폴라리스 잠수함 배치 발표

1977년 독일의 형법학자이자 법철학자 한스 벨첼(Hans Welzel) 작고

1979년 미국 테네시 강 유역의 브라운스 페리 원전서 방사능 누출

1981년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보비 샌즈 의원 옥중 단식 사망

1983년 중국의 민항기가 공중 납치돼, 당시 적성국이던 대한민국의 춘천에 불시착하여 외교적 파장

1995년 일본 신주쿠역에 사린 가스 사건이 발생

1995년 세계 최대의 광학망원경 `케크Ⅱ망원경` 준공

1996년 중국 시인 애청(아이칭) 사망

ㅡ1910년 절강성 금화현에서 출생한 애청은 원래 미술학도였다. 시인으로 전환한 것은 1929년 프랑스 유학 시절 시작연습을 하면서부터였다. 1932년 귀국한 그는 상해에서 좌익단체 미술가협회에 가입-활동하다 국민당 정권에 의해 3년여간 옥살이를 했다. 옥중에서 그는 ‘대언하-나의 유모’ 라는 시를 써 시인의 자리를 굳히게 됐다.

항일 전쟁시기 무한 연안등지를 옮겨다니며 항일선전활동과 시작(詩作)을 계속했던 그는 1949년 중국 성립 후 ‘인민문학’ 부주간과 작가협회 이사-부주석을 맡으며 평탄한 길을 달렸다. 그는 그러나 1957년 반우파투쟁에 휘말려 신강 등으로 쫓겨가 21년 간 잊혀졌다. 문혁때는 홍위병들에게 집을 습격당하기도 했다. 애청은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한 1978년 다시 등장할 수 있었다.

1985년 중국작가협회 제4대 주석 정협 위원, 전인대 상무위원도 지냈다. 그의 초기 시는 서구 상징파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우울하고 낭만적이었으나 1941년 이후 평이한 언어로 인민 대중에 다가가는 성향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주요 작품으로는 ‘북방’ ‘향태양’ 등이 있다. 1985년 프랑스문학예술의 최고훈장을 받았다.

1999년 윈도우 98에서 많은 문제가 해결되어 세컨 에디션(SE)으로 재출시되고, 빌드업이 이루어졌다.

1999년 인도네시아-포르투갈 동티모르 주민투표 협정 서명

2002년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재선

ㅡ5일 실시된 프랑스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자크 시라크(Chirac) 현 대통령이 압도적 표차로 재선을 달성했다.

우파 공화국연합(RPR) 후보로 나선 시라크는 이날 82%를 득표, 17.9%를 얻은 극우파 국민전선(FN) 당수 장 마리 르펜(LePen)을 압도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재선 확정 뒤 조각에 착수, 다음주 신임 총리와 각료진을 발표할 예정이다. 신임 내각은 우파인사들로 구성될 것으로 알려졌다. 리오넬 조스팽(Jospain) 총리의 좌파 내각은 6일 총사퇴한다.

재선 달성을 토대로 시라크 대통령은 이날부터 6월 총선을 겨냥한 정국 주도권 장악에 나섰다. 총선 1차 투표는 6월 9일, 결선 투표는 16일 치러진다

2004년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 ‘최장수 총리’ 기록 경신

ㅡ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2차대전 이후 이탈리아의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을 갖게 됐다. 지난 2001년 총선에서 보수 연합정당의 승리를 이끌어낸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이날로 집권 1060일을 기록, 그 전까지 최장수 기록을 가졌던 사회당의 베티노 크락시 총리(1983~86년)의 재임기간 1059일을 경신했다.

2차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군소 정당들의 난립으로 만성적인 정국 불안을 겪어왔다. 정부가 너무 자주 바뀌는 바람에 유럽 내에서 ‘회전문 정치’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1946년 이래 정부가 59번 들어섰으며, 심지어 10일 만에 물러난 정부도 있다. 이탈리아 최대 갑부로 입지전적 인생 경력을 가진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1994년에도 총리직에 오른 바 있으나 파트너 정당이 연정을 탈퇴함에 따라 7개월 만에 물러났다.

1936년 9월생인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밀라노에서 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나 법학을 전공했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이재에 밝아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의 리포트를 대신 써주고 돈을 벌었다. 유람선에서 밴드 싱어로 일한 적도 있다. 1962년 건설회사를 세워 돈을 벌었고, 정부의 TV산업 규제완화에 편승해 1986년까지 이탈리아 민영TV 시장의 80%를 장악했다. 현재 3개의 민영 채널과 축구구단, 출판사 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수차례 부패 의혹에 연루됐고, 잦은 망언으로 국제적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쇼맨십과 카리스마로 이탈리아의 최장수 총리가 됐다

2004년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 역대 최고 경매가 낙찰

ㅡ20세기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1905)이 미술 경매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파이프를…’은 이날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인 9300만달러에 낙찰됐다. 여기에 수수료를 포함, 작품 가격은 1억416만8000달러(약 1200억원)에 달했다.

그간 최고 기록은 지난 199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 제지회사 회장에게 팔린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1890년작·8250만달러)이었다.

이날 경매서 ‘파이프를…’은 5500만달러에서 출발, 예상가 7000만달러를 훌쩍 뛰어넘었고 치열한 막판 경합 끝에 전화로 응찰한 익명의 인물에게 돌아갔다.

피카소가 스물네 살 때 그린 이 작품은 화가가 파리 몽마르트르에 있던 작업실 주위에서 만난 소년이 모델이다. 왼손에 파이프를 든 소년이 등장하는 이 그림은 피카소의 ‘장미 시대’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7년 카메룬 남부에 케냐 항공 소속 737-800기가 추락

2008년 캐나다계 미국인 사업가, 배스킨라빈스의 공동 설립자 어브 로빈스 작고

2010년 나이지리아의 대통령 우마루 야르아두아 작고

2010년 그리스 시민 긴축재정에 따른 복지예산삭감과 세금증가 반대하는 격렬한 시위 사망 3명 항공 선박 학교 병원 등 거의 모든 교통 및 공공서비스 마비

2011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극작가 로렌츠 별세

ㅡ라디오 작가로 출발한 로렌츠는 1957년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하고 제롬 로빈스가 연출한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의 극본을 써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을 재해석한 이 뮤지컬은 그의 손을 거치며 맨해튼의 우범 지역에 사는 가난한 백인 청년 토니와 푸에르토리코에서 갓 이민 온 마리아의 사랑 이야기가 됐다. 이 작품에서 작사가 스티븐 손드하임을 만난 로렌츠는 1959년 ‘집시’ 로 다시 의기투합했고, 1962년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가 출연한 뮤지컬 ‘당신께 떨이로 드릴게요‘ 로 연출에 데뷔했다.

로렌츠는 2009년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리바이벌 공연을 직접 연출할 정도로 말년까지 왕성하게 활동했다. 1968년 ‘할렐루야, 베이비!’, 1984년 ‘새장 속의 광인들’ 로 토니상을 받았다. 그가 쓴 영화 시나리오로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주연한 ‘추억’(1973), 앨프리드 히치콕이 연출한 ‘로프’(1948) 등이 있다.

2011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참전자 중 최후의 전투병과 생존자 클로드 출스 작고

2012년 일본 원전제로 상태

--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 안전점검 위해 원전 멈춰 세우기 시작, 마침내 모든 원전 가동중단, 두 달 뒤 후쿠이현의 오이원전 재가동, 중앙정부 아닌 지방의회가 주도

2013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세상 떠남

2016년 사디크(노동당) 무슬림 최초의 런던시장 당선

2017년 중국 상용항공기공사 코맥이 자체 제작한 여객기 C919가 첫 시험비행에 성

2019년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로 가려던 아에로플로트 1492편이 회항도중 벼락을 맞았다.

2021년 말리에서 9쌍둥이 출산

ㅡ아프리카 말리의 할리마 시세(25)가 모로코에서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아홉 명의 아이를 낳았다. 애초 시세는 자국 내 진단에서 일곱 쌍둥이를 임신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말리 당국은 일곱 쌍둥이의 출산 수술을 진행할 산부인과 시설이 없다고 판단해 시세를 모로코로 보냈다. 모로코 카사블랑카에 있는 아인 보르자 클리닉은 시세가 심한 산통을 느껴 제왕절개 수술을 진행하기로 했으며, 산모가 피를 많이 흘려 수혈까지 했다 아홉 쌍둥이는 임신 30주 만에 세상 빛을 봤으며, 몸무게가 각각 0.5∼1㎏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1971년 호주 시드니에서, 1999년 말레이시아에서 아홉 쌍둥이가 세상으로 나온 적 있다. 그러나 이때 태어난 아홉 쌍둥이들은 모두 살아남지 못했다.

기네스월드레코드에 따르면 최다 다둥이 기록을 지닌 사람은 200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여덟 쌍둥이를 무사히 낳은 나디아 술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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