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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5월 16일

by 귤담 2023. 5. 8.

오늘의 역사 5월 16일

 

 

 

인간답게 사는 법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산길 오르며 마주치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언제나 탐하지 않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

이젠 가슴 따뜻한 사람들과 살고 싶다.

등을 치지도

간을 빼주지도 못하는

가진 것,

먹을 것 없어도 가슴 풍족한 우리.

펜대 굴리며 살아온 한시대의 질곡 속에

쉰내 겨운

사무실 끝

교정지를 펴든 세상

또 하루 뭉그러진 오탈자

뼈만 남아 반짝인다.

                 - 이재창 시인의 「1998년 혹은 자화상-年代記的 몽타주․20」 전문, (열린시조, 1998 가을호)

 

 

“시민이 단 한 순간이라도, 그리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양심을 입법자에게 내맡길 수 있을까. 도대체 왜 인간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가?”-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오늘은 성년의 날

 

 

682년 (신라 신문왕2)만파식적 제작

928년 [음]태조(太祖) 11년, 견훤이 강주를 기습하여 격파함

ㅡ강주(康州)의 원보(元甫) 진경(珍景) 등이 고자군(古子郡)으로 양곡을 옮기러 떠나자, 견훤(甄萱)이 몰래 군사를 보내 강주를 습격하였다. 진경 등이 돌아와 싸웠으나 패배하여 죽은 자가 300여 인이었고, 장군 유문(有文)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1109년 [음]예종(睿宗) 4년, 오연총이 여진군과 싸워 크게 패함

1398년 [윤]태조 7년, 만호(萬戶)·천호(千戶)·백호(百戶) 등 수군의 품계를 정함

ㅡ수군(水軍)의 관직을 설치하되 만호(萬戶)는 3품 이상을, 천호(千戶)는 4품 이상을, 백호(百戶)는 6품 이상을 모두 무관(武官)의 관자(官資)로써 임명하였다. 국가에서 배 타는 군관(軍官)이 물위에서 생명을 의탁하여 종신토록 고생하는 이유로써 특별히 이를 설치하게 하였다.

1401년 [음]태종 1년, 흰색 의복 착용을 금함

1413년 [음]태종 13년, 궁궐 주위에 행랑(行廊) 건물 1,360칸이 완공됨

ㅡ장행랑(長行廊)이 모두 이루어지니, 종루(鍾樓)로부터 서북은 경복궁(景福宮)에 이르고, 동북은 창덕궁(昌德宮)과 종묘(宗廟) 앞 누문(樓門)에 이르며, 남쪽은 숭례문(崇禮門) 전후(前後)에 이르니, 이루어진 좌우의 행랑이 합계하여 1천 3백 60간이며, 역도(役徒)는 모두 대장(隊長)·대부(隊副), 군기감(軍器監) 별군(別軍), 각사(各司) 하전(下典)과 중[僧人]을 합계하여 2천 6백 41명이었다.

1429년 [음]세종 11년,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함

1463년 [음]세조 9년,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歌詞)를 번역하게 함

ㅡ중추원 사(中樞院使) 최항(崔恒)·예문 제학(藝文提學) 이승소(李承召)·직예문관(直藝文館) 이영은(李永垠)·성균 박사(成均博士) 박시형(朴始亨) 등에게 명하여 《명황계감(明皇誡鑑)》의 가사(歌詞)를 번역하게 하였다.

1467년 [음]세조 13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남

ㅡ함길도(咸吉道) 길주(吉州) 사람인 전 회령 절제사(會寧節制使) 이시애(李施愛)가 그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더불어 반역[不軌]을 모의하고, 먼저 절도사(節度使) 강효문(康孝文)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마침 강효문이 진영(鎭營)을 순찰하여 본주(本州)에 이르니, 이시애가 반적(反賊)이라 성언(聲言)하고, 밤중에 몰래 강효문이 사통하는 기생 산비(山非)로 하여금 내응(內應)하게 하여, 강효문이 깊이 잠이 든 것을 엿보아 문을 열게 하고, 정병(正兵) 최자지(崔自池)로 하여금 돌입하여 찔러 죽이게 하였는데, 강효문이 몸을 빠져 뛰쳐나오므로 곧 추격하여 때려 죽이고, 그 머리를 뜰의 나무에 매달았더니, 얼마 아니 되어 그 나무가 말라 죽었다. 그리고 적이 또 평사(評事) 권징(權徵)과 목사(牧使) 설정신(薛丁新)·판관(判官) 박순달(朴順達)·부령 부사(富寧府使) 김익수(金益壽), 군관(軍官) 성이건(成以乾)·강석효(康碩孝)·이제(李堤)·최식(崔湜)·김수동(金壽同)·한희(韓熙)·김계남(金繼南)·강흥손(康興孫) 등을 모두 죽이고, 지인(知印) 이극지(李克枝)를 보내어 치계(馳啓)하기를,

"올량합(兀良哈) 등이 여러 번 적선(賊船)이 후라토도(厚羅土島)에 정박하였다고 고하였는데도 강효문이 묻지 아니하고, 적이 경원(慶源)과 종성(鍾城)의 공사(公私) 여사(廬舍)를 불살랐는데도 강효문은 경원 절제사(慶源節制使) 이종현(李宗顯)의 가노(家奴)를 시켜 이를 아뢰지 않았으며, 충청도 연산(連山)에 사는 전 현감(縣監) 원맹손(元孟孫)의 가노(家奴) 고읍동(古邑同)이 수영(水營) 진무(鎭撫) 하수장(河水長) 등 40인과 함께 배에다 미곡(米穀)과 말안장[馬鞍]·쟁고(錚鼓) 등의 물건을 많이 싣고 길주(吉州)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잡히어 이르기를, ‘올적합(兀狄哈)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 도(道)의 인물(人物)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였는데도, 강효문은 목사(牧使)와 판관(判官)과 함께 고읍동만 잡아다가 문초하여, 혹은 달래고 혹은 위협해서 육로(陸路)로 경유하여 온 자처럼 하고, 또 지금 한창 농사철인데도 제진(諸鎭)의 정병(精兵)을 많이 거느리고 길주(吉州)에 이르렀으며, 정병을 뽑아 이르기를, ‘너희들이 이때를 당하여 협력하면 경중(京中)의 대신(大臣)과 내응(內應)하여 대사(大事)를 이룰 수 있다’ 하고, 설정신(薛丁新)·박순달(朴順達)·김익수(金益壽)와 사하북 만호(舍下北萬戶) 김정안(金正安) 등을 시켜 각각 진병(鎭兵)을 거느리고 서울로 향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군관(軍官) 현득리(玄得利)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세 차례나 상경(上京)한 것은, 절도사 강효문이 후라토도(厚羅土島)의 적과 도내(道內)의 군사(軍士)들을 거느리고 상경하고자 하여, 한명회(韓明澮)와 신숙주(申叔舟)·김국광(金國光)·노사신(盧思愼)·한계희(韓繼禧) 등에게 통서(通書)하여 약속을 정하려고 함이었는데, 글을 이들에게 다 주어서 모두 응낙(應諾)하여, 이내 돌아와서 강효문과 우후(虞候) 정육을(鄭六乙)에게 밀보(密報)하였다.’ 하고, 또 공사(供辭)하여 이르기를, ‘강효문이 이달 초 7일에 정육을을 5진(鎭)에 보내어 제장(諸將)에게 군사를 더 뽑아 오도록 약속하고, 강효문은 바로 부절도사(副節度使) 황기곤(黃起崐)과 상응(相應)하여 경성부(鏡城府)를 출발해서 이달 초10일에 길주(吉州)에 도착하였기 때문에, 신이 군중(軍中)에서 회의(會議)하여 이미 강효문 등을 잡아 죽이고, 사직(司直) 이시합(李施合)으로 하여금 길주(吉州) 군사 20인을 거느리고 그의 무리 정육을과 경성(鏡城) 이북의 여러 진장(鎭將)을 포살(捕殺)하게 하고, 현득리(玄得利)와 고읍동(古邑同) 등을 가두어서 놓고, 친문(親問)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보고, 곧 이극지(李克枝)를 불러서 이시애의 반역한 상황을 묻고, 능성군(綾城君) 구치관(具致寬)과 좌찬성(左贊成) 조석문(曹錫文)·도승지(都承旨)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다시 국문하게 하니, 이극지가 이시애를 몰래 돕고도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으므로, 의금부(義禁府)의 옥에 가두었다.

1525년 [음]중종 20년, 갓의 모양을 고쳐 확정하게 함

1548년 [음]명종 3년, 평안도에서 전염병으로 438명이 죽음

1555년 [음]명종 10년, 전라도 달량포(達梁浦)에 왜선 70척이 침략함(을묘왜변)

1615년 [음]광해 7년, 각 섬의 굵고 큰 나무에 대해 벌목을 금함

1735년 [음]영조 11년, 충청도 웅천(熊川)에서 뿔이 다섯 개 달린 송아지가 태어남

1746년 [음]영조 22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가운데 불에 타 없어진 부분을 수정하게 함

1764년 [음]영조 40년, 의주에서 북경으로 들어가 밀무역한 상인을 잡아 처벌함

ㅡ의주(義州)에서 북경(北京)으로 들어가는 잠상(潛商)을 핵실하여 한홍철(韓弘喆)이란 자를 잡아 계문(啓聞)하니, 임금이 감사(減死)하여 육진(六鎭)에 귀양보내고 여타 간범(干犯)들은 해도(海島)에 분산 정배하라 명하였다. 잠상은 으레 일률(一律)을 적용(適用)하였으나 물주(物主)와 수종(隨從)으로 경중을 분별하여 감죄(勘罪)한 것이다.

1770년 [윤]영조 46년, 《문헌비고(文獻備考)》의 상위고(象緯考)가 완성됨

1777년 [음]정조 1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慈慶堂)을 지음

1777년 [음]정조 1년, 병조 판서부터 장신(將臣)에 이르기까지 옛 복제를 준수하게 함

1781년 [음]정조 5년, 전란·화재 등으로 흩어진 서적을 수색하여 환수하게 함

1834년 [음]순조 34년, 비변사에서 조정 관리의 옷에 관한 절목(節目)을 올림

ㅡ비국에서 조정 관원의 의장(衣章)을 변통한 절목(節目)을 아뢰었다. 【1. 문·음·무(文蔭武) 당상 3품 이하의 장복(章服)은 견(絹)·저(苧)·주(紬)·면(綿) 외에 지금부터는 사(紗)·나(羅)·초(綃)를 하나같이 모두 금할 것. 1. 무신(武臣)의 편복(便服)·철릭[帖裏]은 일찍이 곤수(閫帥) 이상을 거친 자만 비로소 사단(紗緞) 잡색(雜色)을 착용하도록 허락하고, 방어사(防禦使) 이하는 일체로 금단하며 별군직(別軍職)은 논하지 말 것. 1. 각영(各營)에 편교(褊校)의 군복(軍服)은 주(紬)·면(綿). 포(布)·저(苧) 외에 사단(紗緞)은 일체로 금하며 어가(御駕) 앞뒤의 별대(別隊)는 논하지 말 것. 1. 거둥할 때에 영군 대장(領軍大將)의 복색은 성내와 성외의 다름이 있어서 결국 둘죽날죽하니, 지금부터는 서울에서 거동할 때에도 일체로 군복으로 할 것. 1. 능에 거둥할 때 문관·음관·무관의 당하관은 붉은 철릭도 홍포(紅袍)로 변통(變通)하는 예(例)에 의하여 지금부터는 청저(靑苧)의 철릭으로 개용(改用)하되, 경직(京職)과 외직(外職)을 논하지 말고 홍색(紅色) 철릭은 하나같이 모두 금지할 것. 1. 주립(朱笠)에 말갈기 털을 맺어 만드는 것을 지금부터는 일체로 금할 것. 혹 싸거나 대[竹]를 붙여서 다만 주색(朱色)만을 취할 것. 1. 작우(雀羽)·방우(傍羽)·영우(嶺羽)를 지금부터 일체 금할 것.】

1846년 [음]헌종 12년, 청나라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행위를 단속하게 함

1867년 [음]육전 조례 편찬소, 『육전조례』 간행

 

 

1900년 영국인 허치슨, 은산 금광 채굴권 획득

1905년 일본 선박, 연해안 자유 항행 승인

1908년 홍범도 의병 500여 명, 상평리 남산고개서 일본군과 교전

1910년 이완용 내각, 국고에서 〈폭도 소진비〉 2만원 지출

1917년 YMCA, 실내경기장을세움(최초의 실내 경기장)

1919년 김규식 임정대표, 파리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1920년 함경선 개통

1920년 조선체육회 첫 전조선체육대회 개최

1922년 조선일보, 신활자를 주조하여 신문활자를 개선

1926년 조선공산당 만주 총국(책임비서 조봉암) 설치

1929년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1931년 좌우파 내분과 일제탄압으로 신간회 해산

ㅡ신간회(新幹會)는 일제 강점기 비타협적인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대립과 갈등을 지양하고 힘을 합쳐 공개적으로 일제에 대항한 국내 최대의 민족운동단체였다.

1927년 2월 15일에 열린 창립식에서 이상재 조선일보 사장이 초대 회장에 선출되고, 간부·발기인 51명 가운데 신석우·안재홍 등 조선일보 출신이 12명이나 이름을 올려 총독부는 조선일보를 사실상 신간회 기관지로 생각할 정도였다.

한때 전국 140여곳에 지회가 설치되고 회원수도 4만여명에 달할 만큼 활발한 활동을 보이던 신간회가 내리막을 걸은 것은 1929년 12월의 민중대회 사건 때부터였다.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민중대회를 강행하려다 일제의 탄압으로 관련자 수십명이 연행·구속된 것이다. 민족주의 진영에 비해 열세였던 좌익 진영도 내분을 부추겼다. 신간회를 계급적 투쟁목표가 선명한 조직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해소론(解消論)’을 내세우며 전체대회를 요구한 것이다. 1931년 5월 15∼16일, 이틀간 신간회 전체대회가 열렸다. 창립 4년4개월 만에 처음 열린 대회였다.

민족주의 진영은 ‘해소론’을 비판하고 신간회를 계속 존속시킬 생각으로 대회에 임했고 결과도 낙관했다. 하지만 16일의 투표결과는 찬성 43, 반대 3, 기권 30. 해소안이 가결된 것이다. 일제는 “해소는 해체와 같다”며 신간회 활동을 금지시켰다.

1933년 홍난파 작곡 이은상 작사 『조선가요작곡집』 간행

1947년 조선 올림픽 위원회 결성

1951년 국회, 제2대 부통령에 김성수 선출

1954년 미국 『한국전쟁백서』 발간

1956년 조봉암 진보당 당수 북진통일론 배격하고 평화통일론 제시

1956년 첫 TV 방송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일어남, 군사혁명위원회 구성(의장 장도영 부의장 박정희)

ㅡ5ㆍ16 군사정변은 당시의 정치ㆍ사회적 문제와 군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ㆍ구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군 내부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부패와 승진의 적체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1961년 5월 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8기생 주도세력은 장교 250여명 및 사병 3,500여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중앙청과 국방부, 중앙방송국, 중앙전신국 등 주요기관을 점령했다. 이것이 그 뒤 32년 간에 걸쳐 군인이 지배하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혁명 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이 군부 정권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육군 참모총장인 장도영을 앉히고 박정희는 부의장으로 머물렀다. 3일 뒤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했다. 7월 3일에는 장도영을 중심으로 한 44명의 군인들이 반혁명의 죄목으로 제거되고, 박정희 부의장이 의장에 취임했다. 이로써 3년 간의 군정통치가 시작됐다.

이 군사정변은 초기에 미8군사령관 C.B.매그루더, 야전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쳤지만, 미국 정부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 내각의 총사퇴, 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해 성공했다.

1961년 군사혁명위원회, 전국에 비상계엄령 선포. 전각료의 체포령, 의회해산

1961년 그린 미국 대리대사·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 합헌정부(장면 내각)지지 공동성명

1963년 해군최초 구축함인 충무함 인수

ㅡ충무함은 1943년 미국 Bath Iron Works 조선소에서 건조된 전투함으로, 1963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해군으로 인도되었다. 충무함은 해군의 주력 전투함으로 활동하였으며, 활동 기간 동안 6차례의 간첩선을 격침·나포하는 등의 혁혁한 전과를 올린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충무함의 활동 기록을 살펴보면, 1965년 3월에 거진 근해에 침투한 간첩선을 나포하고 간첩 8명을 생포하였으며, 1966년 10월에 울릉도 근해의 간첩선을 격침시켰다. 또한, 1968년 8월 서귀포 근해에 접근한 간첩선을 격침하는 과정에서 간첩 3명을 생포하고 11명을 사살하였으며, 1969년 6월 어청도 근해의 간첩선 1척을 나포하고 간첩 11명을 사살하였다. 1969년 10월에는 소흑산도 근해의 70톤급 간첩선을 격침시켰고, 1974년 7월에 어청도 근해의 간첩선을 격침하며 간첩 10명을 사살하는 등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이후의 과정에서 한국형 구축함들이 자체 건조되는 경향에 따라 충무함은 1993년 3월에 퇴역하게 되었다. 충무함이 퇴역한 후, 충무함의 활동 기간 동안 대한민국 해군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 충실히 전공을 세운 역사적인 사실을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전쟁기념관 해군실에 충무함을 복원시켜 놓았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첫 미국방문(5월17일 한ㆍ미정상 회담, 19일 2차회담 후 공동성명 발표)

ㅡ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1965년 5월 16일 존슨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존슨 대통령의 특별전용기인 보잉708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 미국을 공식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2박3일간 워싱턴에 머무는 동안 존슨대통령과 두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박대통령과 존슨대통령은 17일 오후 5시5분부터 1시간40분 동안 제1차 회담을 한데 이어 18일 오후 5시부터 40분동안 제2차회담을 한 후, 합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공동성명에서 월남 공화국 지원과 관련해 긴밀한 협조체제를 갖추는 한편, 미국이 한국내에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미국과 제휴, 한국군의 전력을 증강할 것을 밝혔다. 이밖에도 한국군 월남파병에 대한 보상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대통령 내외 일행은 10일간의 방미일정을 마치고 27일 존슨대통령의 전용기편으로 귀국했다

1966년 국세청, 녹색 신고제 실시

1966년 서울 동대문 시장 큰불(150여 점포 전소)

1966년 농협대학을 개교하고 초대학장에 임익두씨 임명

1967년 처음으로 한국법정에서 외국인 공판

1967년 한-일 항공협정 조인

1970년 서울대교 개통

ㅡ한강과 여의도를 가로질러 마포와 영등포를 직결하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서울대교가 착공 2년2개월16일 만인 1970년 5월 16일 개통됐다.

총공사비 15억9천8백만원과 연인원 23만5천명이 동원된 이 다리의 길이는 1천3백90m, 폭 25m의 6차선으로 다리양가에는 각 2m의 보도를 갖췄으며 4백W짜리 수은등 72개가 가설됐다. 이로써 한강엔 광진교, 제 1ㆍ2ㆍ3 한강교에 이어 다섯 번째 다리가 놓였다.

이 다리가 개통됨에 따라 서대문-당인리-용산방면을 거쳤던 약1만5천대의 차량이 매일 이 다리를 통해 지나갔으며 도심지에서 강남까지 30분 걸리던 것이 10분 단축됐다. 또, 서울대교의 마포쪽 입구엔 7억원을 들인 입체교차로가 세워져 서대문, 당인리, 용산방면의 교통량을 논스톱시스템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됐다.

1970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미망인 프란체스카 귀국

1973년 수재의연금 횡령사건으로 대한일보 폐간

1973년 대한항공 미주노선 첫 취항

1973년 시내버스, 열차와 충돌 참사(포항시내버스 열차와 충돌, 23명 사망, 26명 중상

1973년 장발족 집중 단속, 이틀 만에 985명 즉결 심판 회부

1975년 한국-미얀마, 국교수립

1975년 금가 완전 자유화·금 가격 지지제 실시, 금 공매 가제 폐지

1977년 가계수표제도 서울에서 첫 실시

1977년 최규하 총리, 지스카르 프랑스 대통령과 회담코 경협강화 논의(파리)

1980년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 시위 중단과 시국 관망을 결정.

1983년 경북 울진군 평해면 해변에서 대규모 신석기 시대 유적지 발굴

1984년 채권자 사해 암장- 관악경찰, 3명 검거

1984년 북한 김일성, 소련 및 동구권을 방문하기 위해 평양 출발

1984년 북, 준전시 상태를 해제하는 인민군 최고 사령부의 명령 하달.

1985년 전국서 대학생 격렬 시위-광주사태 해명 요구-경찰과 충돌

1985년 노신영, 제18대 국무총리 취임

1987년 선동열선수가 사직구장에서 한경기 최다투구(232)개를 기록

1987년 조계종 승려 751명 시국선언

1987년 검찰, 범양사건 수사결과 발표(비자금 사용처 등 밝히지 못함)

1988년 부산·대구·광주·대전 등 4개 지방생명보험 회사 설립 정식 허가

1989년 유공, 중국산 원유의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하루 1만3000배럴)

1989년 민정 평민 민주 공화 4당 중진회담 첫 회의 . 의제 및 운영방법 논의

1989년 정명훈,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총감독 겸 상임 지휘자 취임

ㅡ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씨가 1989년 5월 16일 파리 국립바스티유오페라단 음악 총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정씨는 같은 해 2월부터 이 오페라단의 음악감독 취임 교섭을 받고 그동안 관계자들과의 협의를 거쳐 이날 5년 임기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것이다.

프랑스정부가 혁명 2백주년 기념 문화사업의 본보기로 추진한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은 프랑스는 물론 세계최고수준의 오페라극장을 목표로 총4억3천만달러를 들여 건립됐다.

세계 음악계에서 한국출신 음악가로는 가장 중요한 직책에 임명된 정씨는 정명화 정경화 등 두 누나와 함께 세계무대에 알려진 음악가족의 막내로, 1974년 세계최고의 권위를 지닌 소련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 피아노 부문 2위를 차지함으로써 화제가 된 바 있다.

최근까지 이탈리아 플로렌스 오페라단 수석 객원지휘자이며 서독 자르브뤼켄방송 교향악단 음악감독 겸 상임지휘자를 맡아 왔다

1990년 평양방송, 북한은 금강산개발 등 현대그룹과 추진키로 한 사업계획을 무효화한다고 밝혀

1992년 블릭스 IAEA사무총장, 북한이 영변에 건설중인 방사능화학실험실은 핵재처리공장으로 전용 가능

1992년 산업은행, 러시아 대외 결제은행이 한국 이 제공한 은행차관 10억 달러에 대한 이자지급 유예 통보.

1993년 민자당 김종필대표, 「5·16민족상」 수상 식에 참석, 5·16의 정당성을 역설.

1993년 교육부, 고교에서 실시돼온 군사훈련, 24년 만에 폐지키로 결정.

1995년 한국-카자흐스탄, 과학기술협력협정-문화협력협정 체결

1997년 김영삼 대통령, 라피크 하리리 레바논 총리와의 회담(서울)

1997년 한석봉 친필서첩 발견

ㅡ조선시대 명필인 한석봉과 그의 아들 민정이 쓴 글을 합본한 서첩이 발견됐다. 일본 긴키대학의 이원식교수에 의해 1997년 5월 16일 한석봉과 그의 아들 민정의 작품이 담긴 한씨양세묵묘서첩이 공개됐다.

석봉 한호는 1543년 개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열심이어서 집밖에서는 다리 난간에 글씨연습을 하고 산속에 들어가서는 나뭇잎에 글씨를 썼다는 기록도 있다. 석봉은 왕희지로부터 직접 글씨를 받은 꿈을 두번이나 꾸었을 정도로 그의 정묘한 필법을 익히는 것을 필생의 목표로 삼았다. 석봉은 15세 때 향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25세에 진사에 합격할 때까지 이곳에서 공부했다. 진사 합격 후 곧 승문원 사자관에 임명됐다. 조선시대 최초의 공식 사자관이었다. 그 후 57세가 돼 가평군수를 맡을 때까지 내직을 돌면서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공신교서 등 수많은 국가문서를 써냈다. 선조는 늘 그를 곁에 두고 붓과 벼루는 물론 때때로 좋은 술과 비단을 하사해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석봉은 당시 대표급 문인인 차천로·최립·허균 등과 교류할만큼 문학적 소양도 상당했다. 특히 도연명과 이백의 시를 좋아했다. 흡곡 현령을 끝으로 고향에 돌아간 석봉은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다 1605년 세상을 떠났다.

1998년 대통령선거 ‘북풍공작’ 관련 국가안전기획부 전직 간부 4명 구속기소·정치인 3명 불구속 기소

2001년 산악인 엄홍길, 히말라야 로체봉 등정에 성공.

ㅡ‘작은 탱크’로 불리는 산악인 엄홍길씨가 2001년 5월 16일 히말라야 로체봉 (8516m) 등정에 성공, 세계 8번째이자 동양인 최초로 8000m급 14좌를 모두 등정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엄씨는 이날 새벽 3시30분 7500m 최종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5시간 45분 만인 9시 15분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

엄씨는 2000년 7월 31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K2 정상에 올라 세계에서 7번째로 14좌 모두를 정복했으나 그동안 국제산악연맹으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해왔다. 1995년 로체봉 등정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은 1986년 오스트리아의 라인홀트 매스너가 처음으로 성공한 뒤, 이제까지 7명밖에 이루지 못했던 전세계 등반인의 꿈이었다.

1960년 경기도 의정부시 도봉산 골짜기에서 태어난 엄홍길은 어려서부터 도봉산을 오르내리며 산악인의 꿈을 키웠다. 1m68cm, 60kg의 작은 체구지만 최정예 부대인 해군 수중파괴대(UDT)에서도 잠수실력을 인정받을 정도로 엄청난 폐활량과 지구력의 소유자였다. 25세때인 1985년 에베레스트 첫 원정과 1986년 두번째 원정에서 정상정복에 실패했으나, 1988년 비로소 세계 최고봉에 오르면서 그의 히말라야 도전 성공사가 시작됐다. 1998년 안나푸르나 등정 때는 추락하는 셸파를 구하려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고 낭가파르바트 원정 때는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잘라내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긴급 의료지원단 발대식, 요르단 암만으로 출발

2005년 남북 차관급 회담(2005.5.16-19 개성)

2007년 에베레스트 박영석팀 등반대 대원 2명 사망

ㅡ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등반에 나섰던 박영석 대장팀의 오희준(吳熙俊·36·제주 영천산악회), 이현조(李鉉祚·33·전남대산악부 OB) 대원이 16일 등반사고로 숨졌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는 실버원정대가 이날 위성전화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두 대원은 제5캠프 박스텐트(가파른 벽에 로프로 고정 설치하는 텐트) 안에 있다가 눈사태로 추정되는 충격에 의해 텐트가 해발 8100m에서 6500m의 제2캠프까지 1600m를 굴러떨어지면서 사망했다.

밤중에 눈이 쌓이자 이날 밤 1시쯤 불안감을 느낀 오희준 대원이 베이스캠프의 박영석 대장에게 “어떻게든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 같다” 며 무전 교신을 하다가 갑자기 교신이 끊어졌다. 이에 곧바로 수색에 나선 한국 산악인들은 이날 오후 3시쯤 제2캠프 근처에서 두 대원의 시신을 발견했다.

사망한 두 대원은 박영석 대장과 트리오를 이루었다고 할 만큼 항상 등반에 동행했던 베테랑 산악인. 오희준 대원은 박 대장과 더불어 이미 8천 미터 거봉 9개를 등정했고, 이현조 대원 역시 8천 미터 봉의 난벽 중 하나인 낭가파르바트 루팔 벽을 비롯해 8천 미터급 4개 봉 등정, 남극점 도보 탐험 등 풍부한 경력의 소유자다.

2010년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 사건이 발생하여 프로게이머 11명이 구속·기소 되었다.

2011년 중견배우 박주아, 69세 나이로 별세

2015년 단독 ‘3무(無) 요트’ 세계일주 성공한 프리랜서 PD 김승진씨

ㅡ프리랜서 PD 겸 모험가인 김승진(53) 선장이 세계에서 6번째로 단독 3무(無) 요트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3무’는 무동력(動力), 무기항(寄港), 무원조(援助)를 말한다. 오직 바람의 힘으로, 항구에 정박하지 않고, 식량 보급 등 아무 지원 없이 홀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인정되는 대기록이다. 1969년 영국의 로빈 녹스 존스톤에 이어 반세기 가까이 일본·호주·중국·인도 등 5개국 출신만 성공했다.

김 선장은 작년 10월 19일 충남 당진 왜목항을 출발, 적도를 건너 ‘바다의 에베레스트’라는 남미 최남단 케이프 혼과 남아공 희망봉, 인도네시아 순다 해협을 거쳐 4만1900㎞를 항해했다. 지난 13일 오후 9시 20분 출발점인 당진 앞바다에 도착해, 16일 210일간 항해를 마치고 환영 행사가 열린 왜목항으로 입항했다.

한국크루저요트협회 박주용(60) 부회장 등 ‘육상 지원팀’ 6명이 24시간 교대하며 기상 정보를 실시간 제공했고, 당진시 부녀회가 고추장·된장·고구마·호박·호두·들기름 등을 미리 마련해줬다. 김 선장은 KBS ‘도전 지구탐험대’ ‘환경 스페셜’을 제작한 다큐멘터리 전문 프리랜서 PD다. TV조선의 ‘크로스미디어 WHY’와 ‘루트 사람사이’도 외주 제작했다. 청주 출신으로, 한성대와 일본 동경비주얼아트 방송예술과를 졸업하고 후지TV에서 방송 제작 경험을 쌓았다.

2016년 소설가 한강 『채식주의자』로 한국작가 최초로 맨부커상 받음

2019년 이상화 스케이트 국가대표 은퇴

ㅡ스피드스케이팅 여자 단거리의 살아있는 전설, 이상화는 서울 중구 더플라자 호텔에서 공식 은퇴식을 열고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휘경여중 재학 시절 성인 선수들을 제치며 태극마크를 처음 달았다. 이상화는 만 16세였던 2005년 3월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500m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며 가능성을 발견했다. 첫 올림픽 무대였던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여자 500m에선 5위에 오르며 한국 여자 빙속 최고 기록을 세웠다. 이상화는 두 번째 올림픽 무대인 2010년 밴쿠버 올림픽 여자 500m에서 깜짝 금메달을 차지하며 국내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는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을 획득했다. 이때까지 세계 스피드스케이팅은 체격 조건이 좋은 서양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이상화는 올림픽 금메달 획득 이후에도 훈련의 강도를 낮추지 않았다. 그는 각종 잔 부상을 이겨내며 월드컵 대회와 세계선수권 대회를 싹쓸이했다. 2012-2013시즌과 2013-2014시즌엔 4차례나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2013년 11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월드컵 2차 대회에서 세운 36초36의 세계신기록은 5년 6개월여가 지난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2014년 소치 동계올림픽에선 여자 500m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2연패를 차지했다. 아시아 선수 최초였다. 2018년 평창올림픽까지 여정은 험난했다. 이상화는 올림픽 직전까지 고질적인 왼쪽 무릎 부상과 오른쪽 종아리 부상으로 시름 했다.

하지만 이상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각종 악조건 속에서도 이를 악물며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리고 단거리 최강자로 떠오른 고다이라 나오(일본)와 감동적인 경쟁을 펼쳤다. 고다이라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이상화는 은퇴 시기를 놓고 긴 시간을 고민했다. 그리고 평창올림픽이 끝난 뒤 1년 여 만에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2019년 5.18전도사로 불린 서유진 전 아시아인권위원회 특별대사 세상떠남(77세) 5.18기록물의 유네스코기록유산 등재에 기여한 공로로 2018년 오월어머니상 받음

2022년 방탄소년단, 빌보드 뮤직 어워즈 3관왕...6년 연속 수상

 

 

 

218년 카라칼라의 어머니 율리아 돔나의 동생인 율리아 매사(Julia Maesa)가 마크리누스를 제거하고 엘라가발루스를 로마의 황제로 추대

290년 서진의 초대 황제 사마염 작고.

1375년 중국 명나라의 군사전략가, 정치가, 시인 유기 작고.

1605년 교황 바오로 5세가 233대 로마 교황에 취임.

1703년 프랑스의 작가 샤를 페로 작고.

1718년 수학자 마리아 아녜시 출생.

1782년 나폴레옹의 이집트원정군 프랑스 출발

1830년 프랑스의 수학자 장 바티스트 조제프 푸리에 작고.

1831년 탄소 마이크로폰을 발명한 미국의 휴스 출생

1858년 청-러시아간에 애혼(愛琿)조약. 흑룡강을 국경으로하고 연해주를 공유.

1875년 오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에 지진 사망16,000명

1923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머턴 밀러 출생.

1929년 할리우드에서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 최초의 발성영화 ‘재즈싱어’ 특별상, 1차대전 배경의 ‘날개’ 작품상, 시상식은 단 4분22초만에 끝났는데 3개월전에 수상자 발표했기 때문, 제2회부터 라디오중계 시작 1952년에 텔레비전중계 1969년부터 인공위성 통해 전세계 우주중계

-- 처음 12개부문이던 아카데미상은 현재 본상24개와 특별상, 과학기술상 등 5개 부문의 기타부문상 시상, 5천여명의 영화예술 아카데미 회원에 의해 선출되는 이 영화제는 극비리에 결선투표, 투표결과는 시상식장에서만 발표

-- 최다수상영화 ‘벤허’(1959, 12개부문 후보 11개부문 수상)와 ‘타이타닉’(1997, 14개부문 후보 11개부문 수상)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2003, 11개부문 수상) 최다수상자는 월트 디즈니(26개) 최다여성수상자는 셰일라 네빈스(9개) 최다감독상은 존 포드(4개) 최다주연상은 캐서린 헵번(4개 여우주연상)

-- 아카데미상을 오스카상이라고도 하는데 1931년 제3회 시상식 때 아카데미도서관 여성 사서가 트로피를 보고 “어머, 오스카 아저씨를 닮았네.”라는 말한 것이 계기, 그 사서는 아카데미협회에 특별채용되어 영화계에서 맹활약

-- 수상자 전원에게 주는 3kg의 트로피는 칼을 필름속에 찌르고 있는 도금된 남성나체상인데 필름통에 나 있는 다섯개의 구멍은 배우상 감독상 작가상 기술상 제작상 의미

1942년 사회인류학의 창시자인 말리노프스키 사망

ㅡ말리노프스키는 처음으로 현지언어에 숙달하여 장기적 참여관찰을 실천함으로써 전문적인 문화인류학의 현지조사(fieldwork) 방법을 `창출`했다.

1884년 폴란드(당시는 오스트리아 영토)의 크라코프에서 태어난 말리노프스키는 야겔로니안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해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08년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겨 2년 간 심리학과 경제사를 공부했다. 인류학자로서 말리노프스키의 학문 인생은 1910년 폴란드 정부 장학금을 받고 영국 런던정경대(LSE)로 건너가면서 시작됐다. 그는 1920년 LSE에서 강의를 시작해 1927년 사회인류학 정교수가 됐다. 1937년 경쟁자인 래드클리프-브라운이 옥스포드대 교수가 될 때까지 영국 대학 유일의 사회인류학 교수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1948년 아랍해방군 예루살렘 침입 제1차 중동전쟁(팔레스타인전쟁) 일어남

1950년 독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요하네스 베드노르츠 출생.

1951년 볼리비아 군부쿠데타 발생

1956년 영국 몬테베로섬서 원폭실험

1960년 파리 동서수뇌회담 개최

1965년 월남의 미군기지 비엔호아에서 폭발사고, 94명사상, 비행기 41대 손실.

1966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시작됐다.

ㅡ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66년 5월 4일부터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북경확대회의에서 모택동 주석의 승인을 받은 `5ㆍ16 통지(通知)`를 발표했다. 이로써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이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하게 됐다.

이 통지는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의 깃발 아래 학술, 교육, 보도, 문화, 예술, 출판계의 브루조아 반동사상을 철저하게 비판해 지도권을 탈취하며 당과 정부, 군대내의 브루조아계급 대표자를 비판해 일소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발단은 1965년 11월10일 4인방중 한명인 요문원이 일간지 `문회보`에 신편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를 발표한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이것이 그후 10년을 진동시키는 문화대혁명의 봉화였다.

1968년 일본 도카치 해역에 진도7.9 지진 사망62명

1968년 영국 세계최초로 폐이식수술 성공

1975년 일본산악인 다베이 준코 여성최초로 에베레스트 오름

1980년 일본 중의원 대평내각 불신임안 가결

1982년 밀카 프라니노, 유고 첫 여자수상에 피선

1989년 카를로스 메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

1991년 중국-소련 국경협정 체결

1993년 스파이 볼프강 로츠 사망

ㅡ이집트의 군사기밀을 탐지, 지난 1967년의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두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전설적인 스파이 볼프강 로츠가 1993년 5월 16일 7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독일에서 출생한 로츠는 이스라엘의 비밀첩보기관인 모사드의 요원으로 지난 1961년 이집트에 침투한 뒤 돈 많은 플레이보이로 위장, 군 간부들에게 접근해 각종 기밀을 빼내는 공훈을 세웠다.

로츠는 극비 군사정보를 탐지하기 위해 자금을 마음껏 사용했었는데 이집트 경찰총수 딸의 코성형수술 비용을 대기도 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로츠는 1965년에 아내와 함께 이집트당국에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196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국의 포로교환으로 풀려났다.

1993년 술레이만 데미렐, 터키 대통령으로 선출

ㅡ술래이만 데미렐 총리가 1993년 5월 16일 터키의회 3차 투표에서 전체 4백50표 중 2백44표를 획득함으로써 대통령에 선출됐다. 데미렐 총리의 대통령 피선은 투르구트 외잘 전 터키 대통령이 사망한지 4주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술레이만 데미렐 총리는 7번이나 총리를 역임하면서 2차례 군부 쿠데타로 실각한 적이 있을 만큼 터키의 불안한 정치현실을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이었다.

아나톨리아주 서부 이슬람코이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이스탄불대학에서 공학을 전공, 미국에 유학한 뒤 돌아와 정부의 도시계획 업무에 관여하는 한편, 대학 강단에도 섰던 학자 출신의 정치인이다. 군부 쿠데타로 정부가 붕괴되는 등 정국이 어수선했던 지난 1960년 보수노선의 정도당에 입당,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다. 1964년에 당수자리에 올랐으며, 그 이듬해 선거에서 승리, 41세라는 젊은 나이에 총리에 오르는 행운을 누렸다.

1995년 옴 진리교 주교 아사하라 쇼코 체포

ㅡ일본 경찰은 1995년 5월 16일 오전 12명의 사망자와 5천여명의 피해자를 낸 동경 지하철 사린 독가스살인사건의 주범으로, 옴진리교의 아사하라 교주를 체포 구속했다. 경찰은 이날 새벽 5시30분쯤부터 전국 옴진리교 시설에 대한 일제 수색을 벌여, 약 4시간만인 오전 9시45분쯤 야마나시 가미쿠이시키 본부 제6사티안 건물에 은신 중이던 아사하라를 발견, 체포했다.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는 옴 진리교에 비판적인 인물들에게 테러를 가하고 교단에서 탈퇴하려는 신자들을 납치, 살해한 뒤 흔적도 없이 사체를 처리하는 등 악질적인 범죄를 자행하다 경찰의 손길이 뻗쳐오자 공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독극물 사린에 의한 무차별테러를 지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1997년 모부투 세세 세코가 콩고 민주 공화국의 대통령직에서 쫓겨났다.

2000년 40년동안 백악관을 출입한 UPI통신 헬렌 토머스 女기자 사직

ㅡ지난 40년동안 백악관을 출입, 산 증인이나 다름없었던 헬렌 토머스(79) 기자가 2000년 5월 16일 UPI통신을 떠나겠다고 밝혔다. 57년동안 몸담아왔던 UPI를 그가 떠나게 된 이유는 이 통신사를 문선명씨의 통일교재단 소유인 `뉴스 월드 케뮤니케이션`사가 사들이면서였다.

그는 새벽 5시30분 백악관에 제일 먼저 나오는 기자로도 유명했다. 1920년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레반논계 이민자의 딸로 태어난 그는 1942년 웨인주립대를 졸업했다. 이듬해 UPI의 전신인 UP에서 주급 24달러짜리 지방기자로 언론에 발을 디딘 그는 1960년 존 F.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플로리다주 팜비치에서 휴가중이던 당선자 가족을 취재한 것이 계기가 돼, 케네디 대통령 부인 재클린 여사를 전담하는 백악관 출입기자가 됐다.

그는 1976년 세계연감에서 `미국의 가장 영향력있는 25명의 여성`에 선정됐으며 수많은 상과 명예학위를 받았다. 회고록 `백악관 앞줄의 여기자`를 낸 바 있다.

2006년 1세대 맥북이 갑자기 공개

2007년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 취임식

ㅡ오전 11시 니콜라 사르코지(Sarkozy ·52)가 프랑스 역사상 23번째, 프랑스 제5공화국의 6번째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자크 시라크(Chirac·74) 대통령은 12년간의 재임 기간을 접고 ‘시민 시라크’로 돌아갔다.

오전 10시 57분 파리 시내 포부르 생토노레 거리.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검은 리무진이 엘리제궁 뜰로 들어섰다. 시라크 대통령이 현관까지 나와, 붉은 카펫 위로 내려서는 사르코지를 맞았다. 두 사람은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핵무기 코드를 넘겨주는 것이 대통령 권한 인수인계의 핵심이다. 30여분 걸렸다.

오전 11시 40분, 시라크를 떠나보낸 사르코지가 100여명의 귀빈이 기다리는 엘리제궁 홀에 나타났다. 장 루이 드브레(Debre) 헌법위원회 의장이 “사르코지가 프랑스 대통령으로 취임했다”고 선포하는 순간, 멀리 나폴레옹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에서 21발의 예포가 울려퍼졌다.

2009년 쿠웨이트, 최초 여성의원 당선

ㅡ쿠웨이트 헌정 사상 첫 선출직 여성의원이 탄생했다. 쿠웨이트 선관위는 2009년 5월 16일 치러진 총선 개표 결과, 4명의 여성후보가 당선됐다고 밝혔다.

여성후보 당선인은 쿠웨이트 첫 여성 장관인 마수마 알-무바라크, 대학교수인 아실 알-아와디, 여성인권 운동가 로라 다시티, 대학교수 살와 알-자사르 등 4명이다. 특히 무바라크 당선인은 자신의 선거구에서 다른 남성후보들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쿠웨이트 총선은 5개 선거구에서 10명씩 모두 50명을 선출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자신의 선거구에서 10위 안에만 들어도 의원에 당선된다. 이번 총선에는 남성 194명, 여성 16명 등 모두 210명이 출마했다.

여성의원의 당선은 1963년 쿠웨이트 의회 개원 이후 최초의 일이다. 2005년 알-무바라크가 기획ㆍ행정발전담당 장관에 임명되면서 당연직 의원으로 활동한 적은 있지만 국민투표에 의해 여성이 의원직을 차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쿠웨이트 의회는 직선제 의원 50명과 당연직 각료 15명으로 구성된다.

쿠웨이트 여성에게 참정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2005년이며 이후 2006년, 2008년 총선에 모두 54명의 여성 후보가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2010년 헤비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 로니 제임스 디오 별세

ㅡ헤비메탈 밴드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 보컬이었던 로니 제임스 디오(67)가 2010년 5월 16일 위암으로 별세했다.

딥 퍼플 출신의 유명 기타리스트 리치 블랙모어(Blackmore)가 이끄는 레인보우(Rainbow)를 통해 명성을 얻은 그는 1979년부터 1982년까지 오지 오스본이 떠난 블랙 사바스에 합류해 명반 '헤븐 앤드 헬(Heaven and Hell)'을 만들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밴드 '디오(Dio)'로도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갔으며 최근에는 '헤븐 앤드 헬'이라는 밴드를 결성, 활동을 지속해왔다.

음산하지만 역동적인 그의 마성(魔性)어린 목소리는 70~80년대 헤비메탈의 빼놓을 수 없는 상징 중 하나였다.

2011년 스트로스 칸 IMF총재 ‘성범죄’ 논란

ㅡ스트로스-칸 IMF 총재가 뉴욕 맨해튼의 호텔에서 여종업원을 성폭행하려한 혐의 등으로 체포돼 기소됐으며 법원에 의해 보석신청도 기각돼 뉴욕의 라이커스 아일랜드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프랑스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며 세계 경제계와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스트로스-칸 IMF 총재는 ‘성추행 스캔들’ 로 인해 결국 2011년 5월 19일 총재직을 사임했다.

2012년 로버트 케네디 2세의 부인 메리 리처드슨 별세

ㅡ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조카며느리인 메리 리처드슨 케네디(52)가 16일 뉴욕 자택에서 홀로 숨진 채 발견됐다.

숨진 메리는 케네디 전 대통령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 전 상원의원의 며느리로, 남편은 유명 환경전문 변호사인 로버트 케네디 2세다. 메리는 로버트 케네디 2세의 두 번째 부인이었으며, 1994년 결혼 후 자녀 4명을 뒀다.

그는 약물과 알코올 중독 등으로 치료를 받아 왔고, 음주운전으로 두 차례 체포된 전력도 있다. 현지 언론들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 메리가 자살했다고 단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2013년 스위스의 물리학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하인리히 로러 작고.

2019년 미국의 작사가 미크 미셸 작고.

2019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제23대 총리 밥 호크 작고.

2019년 미국 앨라배마 주 임신중지 완전금지, 시술의사 최고 99년형 또는 종신형

2021년 이스라엘군, 가자지구 외신 입주 건물 폭격...AP “충격과 공포”

2022년 핀란드.스웨덴, “나토 가입 신청”...74년 만에 군사중립국 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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