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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5월 15일

by 귤담 2023. 5. 8.

오늘의 역사 5월 15일

 

 

큰 틀을 생각하면 민주주의는 자유롭고

좁게 보면 우리들은 꽉 막힌 대나무 속

조그만 일 하나로도 따져드는 빈 잔이다.

자유롭고 싶다면 훌훌 떠나가는 것

말 못할 그리움이 없다면 지울 수 있는 것

탈출을 꿈꾸는 섬이라면 배 한 척 준비하고.

그러나 우리는 믿음 속에 갇혀있다

사랑이 짙다보면 작은 일도 확대되고

이해심 더 커질수록 설 공간이 비좁다.

파도는 휩쓸려 쓰러져도 다시 선다

이제는 넉넉한 집을 한 채 짓고 싶다

폭풍우 닥쳐도 끄덕치 않는 자유의 집 짓고 싶다.

                          -이재창 시인의 「자유에 대하여 - 年代記的 몽타주․19」 전문

 

 

 

“산 너머 저쪽에는/누가 사나?//뻐꾸기 영 우에서/한나절 울음 운다.//산 너머 저쪽에는/누가 사나?//철나무 치는 소리만/서로 맞어 쩌 르 렁!//산 너머 저쪽에는/누가 사나?//늘 오던 바늘장수도/이 봄 들며 아니 뵈네.” -정지용(1902년 오늘 태어남) ‘산 너머 저쪽’

 

*스승의 날 ; 1958년 청소년적십자(RCY) 단원들이 세계적십자의 날(5월8일)에 아픈 선생님·퇴직교사 위문활동 시작, 1963년에 5월26일을 은사의 날로 함, 1965년에 세종임금 태어난 오늘로 옮김, 1973년 폐지 1982년 부활, 스승의 날을 졸업시즌인 2월로 옮기자는 주장 있음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 무기들기를 거부하거나 군사훈련과 군대복무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해 1980년 제정, 유엔은 병역거부권을 회원국들에 권고, 2011년3월 유엔 자유권위원회는 진정을 제기한 한국의 병역거부자100명의 사건 심사뒤 한국정부의 양심적 병역거부자 수감이 자유권규약 제18조위반이라 밝힘, 우리나라는 OECD 국가중 유일하게 병역거부 불인정, 2009년 세계병역거부자의 날 관심국가로 지정되어 10개국 병역거부자들이 서울에서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 국제대회와 국제컨퍼런스, 평화콘서트 '밀리터리 인더시티' 염, 2018.6.28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 규정하지않은 병역법에 헌법불합치 판결, 2018.11.1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여호와의 증인 신자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9대4로 무죄 선고, 2018.12.28 36개월의 교정시설 합숙 근무를 골자로 하는 정부안 확정

*국제 가정의 날 ; 가정의 역할과 책임의 중요성에 대한 정부와 민간의 인식 높이기 위해 유엔 제정

*피스 오피서 메모리얼 데이: 미국

*아오이마쓰리: 교토부

*독립기념일: 파라과이

*나크바 데이: 팔레스타인 지역

*육군의날: 슬로베니아

 

 

1271년 [음]원종(元宗) 12년, 진도에서 대패한 삼별초 잔당이 김통정의 지휘 하에 탐라로 들어감

ㅡ김방경(金方慶)과 흔도(忻都, 힌두), 홍차구(洪茶丘), 왕희(王熙), 왕옹(王雍) 등이 3군을 거느리고 진도(珍島)를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고, 가짜왕[僞王]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죽였다. 적장(賊將) 김통정(金通精)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탐라(耽羅)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1373년 [음]공민왕(恭愍王) 22년, 도총도감(都摠都監)을 설치해 방리군(坊里軍)을 점검함

1397년 조선의 제4대 임금 세종대왕 출생. (율리우스력 5월 7일)

1410년 [음]태종 10년, 추포(麤布) 대신 저화(楮貨)를 화폐로 사용할 것을 권장하게 함

ㅡ다시 저화(楮貨)를 쓸 것을 의논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호조(戶曹) 첩정(牒呈)에 의거하면, 화폐(貨幣)를 쓰는 법이 대(代)마다 각각 같지 않습니다. 양한(兩漢) 때에는 동(銅)을 부어 전(錢)을 만들고, 가죽[皮]을 제조하여 폐(幣)를 만들었으며, 당(唐)나라의 저권(楮券)과 송(宋)나라의 교자(交子)079) 는 그 쓰인 바가 비록 다르나, 백성을 이롭게 한 뜻은 한가지였습니다. 전조(前朝) 때에 능(綾)·나(羅)·병(甁)으로 화(貨)를 삼았는데, 후세(後世)에 포화(布貨)로 대신하였으니, 이것은 예전에 어긋날 뿐 아니라, 길쌈[紡續]의 공력(功力)과 운반[轉輸]의 무거움을 어찌 생각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물며, 지금 상국(上國)에서는 바야흐로 초법(鈔法)을 행하고 있는데, 오직 우리 나라에서만 전조(前朝) 말류(末流)의 폐단에 구애되어 그대로 추포(麤布)를 사용하고 있으니, 매우 미편(未便)합니다. 마땅히 상고(上古)를 모방하고 상국(上國)의 제도에 따라서 저화(楮貨)의 법을 통행(通行)하소서.’ 하였습니다. 이에 본부(本府)에서 의득(議得)하기를, 임오년에 비로소 사섬서(司贍署)를 세우고 저화(楮貨)의 법을 맡게 하여, 안팎[中外]이 거의 성행(盛行)할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습속(習俗)이 이미 오래 되어, 민심(民心)이 처음에 해괴(駭怪)하게 여기므로, 마침내 중지하고 행하지 못하였으니, 빌건대, 호조(戶曹)의 첩정(牒呈) 내용에 의하여 다시 거행(擧行)해,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426년 [음]세종 8년, 전 좌의정 유정현(柳廷顯) 죽음

1427년 [음]세종 9년, 박연(朴堧)이 석경(石磬)이라는 악기를 새로 만듦

ㅡ악학 별좌(樂學別坐) 봉상 판관(奉常判官) 박연(朴堧)이 1틀에 12개 달린 석경(石磬)을 새로 만들어 올렸다. 처음에 중국의 황종(黃鍾)의 경쇠로써 위주하였는데, 삼분(三分)으로 덜고 더하여 12율관(律管)을 만들고, 겸하여 옹진(甕津)에서 생산되는 검은 기장[秬黍]으로 교정(校正)하고 남양(南陽)에서 나는 돌을 가지고 만들어 보니, 소리와 가락이 잘 조화되는지라, 그것으로 종묘와 조회 때의 음악을 삼은 것이다.

1430년 [음]세종 12년, 나무 신과 가죽신 신는 규정을 정함

ㅡ예조에서 아뢰기를, 목화[靴]와 가죽신[鞋]을 신는 규정을 본조에서 의정부 및 제조와 더불어 상의하여, 투(套)와 혜(鞋)는 시산(時散)으로서 동서반(東西班) 7품 이하는 신지 못하게 하고, 목화는 대소 승려(大小僧侶)와 서울의 별군(別軍) 내의 대장(隊仗) 이하 및 근장(近仗)·대장(隊仗)·대부(隊副)·보충군·조례(皂隸)·장수(杖首)·소유(所有)·갈도(喝道)·나장(螺匠)·도부외(都府外)·서인(庶人)과 공·상인(工商人), 공사 천인(公私賤人) 등은 신지 못하게 하며, 무공(武工)과 악공(樂工)·도청(道廳) 안의 7품 이하는 풍악을 연주할 때 외에는 신지 못하게 하며, 각전 별감(各殿別監)·소친시(小親侍) 등은 입번(入番)하는 때 외에는 신지 못하게 하며, 남녀 피초혜(皮草鞋)도 아울러 금하게 하였습니다

1430년 [음]세종 12년, 《대명률(大明律)》에 따라 유배지에 대한 규정을 정함

ㅡ형조에서 아뢰기를,

"죄를 범하여 유배(流配)시키는 곳을 일찍이 자세히 작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안팎 관리들이 임시로 요량하여 정하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것이 적당하지 못한 실수를 이루게 됩니다. 삼가 우리 나라에서 번역한 《대명률(大明律)》을 상고 하옵건대, ‘도류천사(徒流遷徙)하는 지방을, 직례부주(直隸府州)는 경성(京城)에 직속(直屬)하여, 경기 좌·우도와 경성에서는 먼 곳은 경상도, 중간은 전라도·양광도(楊廣道)104) , 가까운 곳은 서해도(西海道)105) ·교주도(交州道)106) 이며, 서해도에서는 경상도의 염소(鹽素)·초철소(炒鐵所)에 부처(付處)하고, 교주도와 강릉도(江陵道)107) 에서는 전라도의 염소·초철소에 부처하며, 양광도에서는 평양·삭방도(朔方道)108) 의 염소·초철소에 부처한다. 유(流) 3등은 지리의 멀고 가까운 것을 참조하여 각처의 황무지와 바닷가의 고을에 정해 보내서 안치(安置)하되, 직례부와 경성에서는 경상도에 안치하며, 중간은 전라도에 안치하며, 서해도에서는 경상도에 안치하고, 교주·강릉도에서는 전라도에 안치하며, 양광도에서는 평양·삭방도에 안치한다. 먼 변방의 충군[邊遠充軍]은 경성에서는 경상도에 충군하고, 중간은 전라도에 충군하며, 서해도에서는 경상도에 충군하고, 교주·강릉도에서는 전라도에 충군한다. 양광도에서는 평양·삭방도에 충군한다. ’고 하였으니, 이 법이 비록 이미 상정(詳定)되었으나, 3등 유죄(流罪)의 배소(配所)의 멀고 가까운 데에는 시행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다시 마련하여 아뢰옵나이다. 경성·경기 좌우도·유후사(留後司)에서 3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경상·전라·함길·평안도 바닷가 각 고을에 정배(定配)하고, 2천 5백 리 유형을 받은 자는 경상·전라·평안·함길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강원도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며, 2천리 유형을 받은 자는 경상·전라·평안·함길도시면(始面)109) 에 있는 각 고을과 강원도 중앙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한다. 황해도에서 3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경상도·전라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평안도·강계도(江界道)·의주 등 각 고을에 정배하고, 2천 5백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전라·경상·평안·함길도 시면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고, 2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충청도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과 강원도 중앙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한다.

평안도에서 3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충청도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과 함길도 중앙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고, 2천 5백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충청도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강원·함길도 시면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며, 2천 5백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충청도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강원·함길도 시면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며, 2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충청도 시면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한다.

충청도에서 3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평안도와 함길도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경상·전라도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고, 2천 5백 리 유형을 받은 자는 평안도와 함길도 시면에 있는 각 고을과 강원도와 황해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며, 2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황해·함길도 시면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한다.

전라도에는 3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경상 좌도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과 함길도와 평안도 중앙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고, 2천 5백 리 유형을 받은 자는 황해도의 시면에 있는 각 고을과 강원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경상 좌도 중앙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며, 2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강원도의 시면 각 고을과 충청도 상면(上面)의 각 고을과 경상 우도의 각 고을에 정배한다.

경상도에서 3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전라 우도 바닷가의 각 고을과 함길도와 평안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고, 2천 5백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충청도·강원도·전라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며, 2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충청도 시면에 있는 각 고을과 전라 좌도의 각 고을에 정배한다.

함길도에서 3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전라도와 충청도와 경상도의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고, 2천 5백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황해도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며, 2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충청도와 황해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전라도와 경상도 시면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한다.

강원도에서 3천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전라도와 경상우도의 각 고을과 황해도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고, 2천 5백 리 유형을 받은 자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충청도·황해도의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과 평안도의 시면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하며, 2천리 유형을 받은 자는 충청도와 황해도는 중앙에 있는 각 고을과 평안도의 시면에 있는 각 고을과 경상도와 전라 좌도의 바닷가에 있는 각 고을에 정배한다.

윗 항의 유배 죄수의 배소(配所)의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은 각각 범인(犯人)이 사는 곳에 따라 적당하게 정할 것이며, 국가의 일에 관계되는 죄수는 평안도 의주·삭주·강계와 함길도의 길주 등 고을에는 정배를 보내지 말게 하소서."

하니, 이 문제를 상정소에 내렸다.

1444년 [음]세종 26년, 훈련도감·사복시·군기감 등은 영구히 무과(武科) 출신으로 삼는 문제를 논의하게 함

1474년 [음]성종 5년, 한명회(韓明澮)가 좌의정이 됨

ㅡ한명회(韓明澮)를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으로, 한언(韓堰)을 통정 대부(通政大夫)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신부(申溥)를 절충 장군(折衝將軍) 행 사과(行司果)로 삼았다.

1484년 [음]성종 15년, 대사헌 노공필(盧公弼) 등이 사사전(寺社田) 혁파를 주장함

1486년 [음]성종 17년, 삼포(三浦)에 거주하는 왜인이 1,000여 호에 이름

1518년 [음]중종 13년, 지진이 세 차례 연속 발생하여 담장과 성첩이 무너짐

ㅡ유시(酉時)에 세 차례 크게 지진(地震)이 있었다. 그 소리가 마치 성난 우레 소리처럼 커서 인마(人馬)가 모두 피하고, 담장과 성첩(城堞)이 무너지고 떨어져서, 도성 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 당황하여 어쩔줄을 모르고, 밤새도록 노숙하며 제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니, 고로(故老)들이 모두 옛날에는 없던 일이라 하였다. 팔도(八道)가 다 마찬가지였다.

1530년 [음]중종 25년, 성균관 유생들이 소격서(昭格署) 혁파를 상소함

1534년 [음]중종 29년, 경상도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1,000여 명 발생

1542년 [음]중종 37년, 이언적(李彦迪)이 우참찬이 됨

1550년 [음]명종 5년, 구수담(具壽聃)과 허자(許磁)의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 출송하게 함

1650년 [음]효종 1년, 수차(水車)를 제조하기로 함

1675년 [윤]숙종 1년,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됨

ㅡ옛 정승 송시열(宋時烈)을 남변(南邊)에 안치(安置)하고, 전(前) 판서(判書) 민정중(閔鼎重)과 전 참판(參判) 이단하(李端夏)는 관직을 삭탈(削奪)하여 성문 밖으로 내쫓았다. 대사헌(大司憲) 윤휴(尹鑴), 장령(掌令) 조사기(趙嗣基), 지평(持平) 유하익(兪夏益)·이항(李沆) 등이 말하기를,

"송시열(宋時烈)은 혼미(昏迷)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고쳐서 뉘우치는 마음이 없고, 북로(北路)는 인심이 순후하고 풍속이 소박(素朴)한 데다가 송시열이 여기에 있게 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유혹하여 순박한 풍속을 의란(疑亂)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정중(閔鼎重) 등은 죄인의 괴수를 높이 받들고 바른 의논을 저지하여 억눌렀습니다. 아울러 죄주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즉시 그대로 따랐다. 처음에 송시열이 귀양을 가고 나서 시의(時議)는 형률(刑律)을 더하여 사형(死刑)으로 처치하려 하였으나, 마침 이정(李楨)과 이연(李㮒)의 일510) 이 발각됨으로 인해 정지되었다. 송시열이 덕원(德源)에 이르매 문생(門生)들이 따라간 자가 많았으며, 북쪽 땅의 선비들도 또한 모여와서 배우는 자가 많았다. 송시열은 이러한 자들을 거절하여 보내지 아니하고 강론(講論)하기를 옛날처럼 하였으며, 가던 날 철령(鐵嶺)에 올라 시(詩)를 지었으니,

‘가고 가다 철령(鐵嶺) 위에 오르니,

내 마음도 굳기가 쇠[鐵]와 같구나.

비록 그릇을 이룰 정성은 모자라지만,

그러나 서산(西山)511) 의 피는 견디겠지.’

하니, 사림(士林)이 서로 전하면서 외니, 당시의 무리들이 듣고는 더욱 미워하였다. 허목(許穆)과 홍우원(洪宇遠) 등이 오래 전부터 죄를 더 주려는 뜻이 있었지만 미처 발론(發論)하지 못하였다가, 유필명(柳弼明)의 상소를 계기로 반드시 죽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허적(許積)이 ‘아니된다.’ 하여, 드디어 말감(末減)하여 안치(安置)하자는 논계(論啓)를 내었으니, 이는 곧 윤휴(尹鑴)가 기초(起草)한 것이다. 처음에 장선징(張善澂)이 판의금부사[判金吾]로 있을 적에 덕원(德源)은 장기(瘴氣)가 없는 곳이라 하여 〈송시열의〉 배소(配所)로 정한 바, 당시의 무리들이 이를 크게 한(恨)하고 다시 남쪽으로 옮기기를 청하여 웅천(熊川)으로 귀양을 보냈으니, 웅천은 장기가 가장 심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논계(論啓)에 이른 바 ‘순박한 풍속을 의란(疑亂)케 하였다.’ 한 것은 곧 장뇌수(張牢修)가 이응(李膺)에게 고한 말이다. 이때에 홍우원(洪宇遠)의 ‘예의(禮義)가 말미암아 나오는 이를 어진이[賢]라 이른다.’ 한 것은 암암리에 장창(臧倉)의 한 말에 부합하고 윤휴(尹鑴) 등의 ‘순박한 풍속을 의란(疑亂)케 하였다.’는 말은 장뇌수의 한 말과 흡사하다 하여 대어(對語)로 삼았던 것이다.

1696년 [음]숙종 22년, 숙종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책빈례(冊嬪禮)를 행함

1707년 [음]숙종 33년, 남한산성 한봉(汗峰)의 축성 문제를 논의함

1712년 (조선 숙종38)청나라와의 경계를 표시한 백두산 정계비 세움

1734년 [음]영조 10년, 화재로 소실된 백목전(白木廛, 무명을 파는 가게)을 개축하게 함

1750년 [음]영조 26년, 각 사 관리들이 묘시(卯時, 5∼7시)에 출근하고 유시(酉時, 17∼19시)에 퇴근하는 법을 잘 지키라고 명함. 묘유법(卯酉法). 묘사 유파(卯仕酉罷).

1812년 [음]순조 12년, 역적들이 살았던 안주·정주·가산·곽산을 현으로 강등함

ㅡ안주(安州)·정주(定州)·가산(嘉山)·곽산(郭山)을 강등시켜 현(縣)으로 삼았다. 안주는 양시위(楊時緯)가, 정주는 김이대(金履大)와 최이륜(崔爾崙)이, 가산은 우군칙(禹君則)과 윤언섭(尹彦涉)이, 곽산은 홍총각(洪總角)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었다. 또 개천(价川)·용강(龍岡)을 강호(降號)하여 현감(縣監)으로 삼고, 태천(泰川)은 여러 현의 끝에 끼이게 하였는데, 죄인 이제초(李齊初)·홍경래(洪景來)·김사용(金士用) 등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었다.

1864년 [음]김홍순·최수학, 러시아인과의 모의한 죄로 효수형에 처해짐

1881년 [음]전국에 〈척사 윤음〉 반포, 척사 상소 종식

1882년 [음]〈조독 수호 조규〉 조인

 

 

1901년 모펫, 한성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 설립

1902년 시인 정지용 탄생

ㅡ5월 15일 한국 근대 시사에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새로운 시적 경지를 열어 보인 시인으로 평가받는 정지용 시인이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난 그는 재학시절 성적이 매우 우수했고, 교지를 만들며 일찍이 뛰어난 문학적 재질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귀국후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가 됐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해방공간에 접어들어 격렬한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인해 집필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연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지만 6·25전쟁 이후 ‘북으로 간 시인’이라는 누명 때문에 1988년 해금되기까지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기도 했다.

1902년 일본 제일은행, 한국에서 은행권을 발행, 9월 통용금지령, 1903년 2월 철회

1911년 잡지 「소년」 25호로 폐간

1915년 경춘도로 준공

1918년 3대와 6대 국회의원 지낸 국회오물투척사건(1966년)의 주인공 김두한 태어남

1920년 〈문관 임용령〉 개정

1922년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철승 출생.

1923년 평양 전차 시운전

1925년 백남훈·백관수·안재홍·김준연 등, 조선 사정 연구회 조직

1931년 신간회 해소.

1934년 신건설사 사건(제2차 카프 사건) : 이기영·백철· 박영희를 비롯 60여 명이 검거됨.

194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 〈국내외 동지 동포서〉 발표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의 복군에 편입됨.

1943년 경의선(서울-신의주) 복선 철도개통

1945년 일제, 경성부에 종합 배급제 실시

1945년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 이장호 출생.

1946년 미군정 공보국, 조선공산당의 조선정판사 위조 지폐사건 진상 발표

1946년 윤봉길 등 7의사 유해 봉환

1948년 항공부대 창설

1950년 중앙 선거 위원회, 반민족 행위자의 입후보 등록 취소 시달

1950년 북한 김일성 수상, 중국 마오쩌둥 주석과 회담

1951년 국회 김성수 부통령 선출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대통령 이승만(자유당) 부통령 장면(민주당) 당선

ㅡ이승만의 3차 집권을 겨냥하고 이기붕의 부통령 당선을 목표로 한 제3대 대통령선거가 1956년 5월 15일 전국적으로 실시됐다.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통령에는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됐다. 대통령 후보에는 이승만, 신익희, 조봉암 등 3명이, 부통령에는 이기붕, 장면, 박기출, 이윤영, 백성욱, 이종태 등 8명이 출마했다.

선거 10일전에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는 바람에 위기를 모면한 이승만의 득표수는 전체 유효표 720만표의 70%에 달하는 504만여 표였고, 신익희 지지표를 일부 흡수한 조봉암도 선전해 유효표의 30%인 216만여표를 얻었다.

선거 전에 사망했음에도 유권자들이 신익희에게 던진 185만표는 무효처리됐다. 부통령 후보들의 득표결과는 장면이 유효표의 46%인 401만여표를 얻은데 비해 이기붕은 44%인 380만표를 얻어 패배했다. 민주당은 신익희 대통령후보의 급서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기회는 놓쳤지만 자유당이 당력과 권력을 총동원하여 추구한 이기붕 부통령 당선을 저지함으로써 자유당의 독주를 막아낼수 있게 됐다.

1957년 제25회 임시국회 야당만으로 개회식

1958년 한강인도교 보수 개통

ㅡ한강 인도교의 복구공사 준공식 및 개통식이 1958년 5월 15일 오전11시 이승만 대통령 참석하에 거행됐다. 행사는 국무위원 전원과 내외귀빈 및 시민들로 가득찬 백사장에서 경찰악대의 주악으로 시작됐고, 이 대통령은 개막 테이프를 끊은 후 새로 단장한 인도교를 도보로 건너기도 했다.

복구공사를 직접 담당한 현대건설 사장 정주영씨와 홍화공작소 사장 양춘선씨는 표창장을 수여받았다.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한강 인도교는 6·25가 발발하자 작전상의 이유로 일부를 폭파했다가 그후 개수하여 가교로써 사용하던 것을 1957년 9월부터 복구 공사를 개시, 8개월 만인 이날 개통됐다. 다리가 끊어진지 만 8년만이었다.

1962년 한강357척, 뚝섬196척으로 한강 보트놀이 시작

1963년 도쿄올림픽 남북한단일팀 협상 열림(홍콩)

1967년 경북 월성 앞바다에서 신라 문무왕 해중왕릉 확인

ㅡ5월 15일 경북 경주시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약2백m 앞바다에 있는 대왕바위에서 바닷물 속에 지어진 문무대왕릉이 발견됐다.

둘레 약 2백m의 대왕바위에 정확한 동서와 남북으로 십자수로를 깎아내고 그 중앙에 패진 4평 가령의 해중못에 해중릉이 조영되어 있다. 유골은 그 못안 석함속에 안치된 것으로 보이며, 그 위에 길이 3.59m, 두께 0.9m의 큰거북 모양의 화강암 개석이 덮여졌다.

이런 릉의 조영방식은 사문을 배치하고 그 중에 사리를 안치한 기원전 2세기의 `산치`탑을 위시해 5, 6세기 중국육조시대의 목탑 그리고 신라의 봉황사탑, 백제의 미륵석탑 등의 양식과 비슷하다. 문무대왕은 "내가 죽으면 서국(인도) 식으로 화장을 하여 동해에 장사를 하라. 그러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으리라."는 뜻의 유언을 했었다.

1969, 5. 15 미군부대 병력 피습, 미군 병력이 철책선 점검중 공비의 사격을 받고, 응사하자 도주하였음.피해(부상 2명)

1970년 서울대교(현 마포대교) 준공(개통 5. 16)

1971년 한국기자협회, 〈언론자유수호 행동강령〉 채택

1971년 제2차 세계대전 때 징용돼 남양 티니언섬에서 전사한 유해 5천여 구, 3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안장

1973년 가정의례준칙 의결

1973년 여의도 국회의사당 상량식

ㅡ여의도 국회의사당 3개 건물 중 본관 상량식이 1973년 5월 15일 열렸다. 국회의사당은 1969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기공식을 가진후 6년동안의 공사기간을 거쳐 1975년 9월 1일에 준공됐다. 3개 건물로 구성되어 있는 국회의사당은 여의도공원에서 바라보아 정면에 의사당 본관이 있고 오른쪽에는 국회도서관, 왼쪽에는 의원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의사당 본관은 화강석으로 된 너비 50m의 대계단과 기단 위에 세워진 높이 32.5m의 대열주(大列柱) 24개, 대열주가 받쳐주는 처마와 밑지름 64m의 돔으로이루어진 지붕으로 구성되어있다. 열주는 경회루의 석주를 본뜬 것으로, 24절기를 상징하는 동시에 국민들의 다양한 의견을 상징하는 것이며 돔은 원만한 결론을 지향하는 의회정치의본질을 상징하는 것이다. 총 대지면적은 33만평방미터제곱(10만평)이고, 지하2층 지상6층의건물로 지반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69.19m, 연건평은 8만1444평방미터제곱(2만4680평)이다.

1974년 한국-네팔, 국교수립

1979년 대한민국의 소설가 오영수 출생.

1980년 ‘서울의 봄’ 맞은 시민 학생 20만명 서울역 광장에서 민주화 요구

1980년 전국 60여개 대학 수십만명의 대학생, 계엄 철폐 요구 가두 시위

1982년 제1회 스승의 날(부활, 1973년 중단)

1983년 지카르 인도 하원의장 내한

1984년 고려 백자 가마터 발굴-삼성재단, 경기 용인 이동면

1984년 가짜 박사학위 남발-미 하베스트신학 서울분교

1984년 중공 경제개혁 바람거세-제6기 전국인민 대표회의

1987년 정부, 물가안정대책 발표

1987년 허문도 통일원장관, 민주당의 정강정책은 반공 이념의 무력화가 우려된다는 내용의 정부견해 발표

1988년 조성만 서울대생, 서울 명동성당 교육관4층 옥상에서 양심수석방 등 구호를 외치며 할복.투신자살

1988년 한겨레신문창간, 총36면 50만부발행. 매일 8면

1989년 고르바초프 북경방문-30년만의 중소 화해

1989년 한진그룹이 조선공사와 4개계열사를 인수

1990년 정부, 日王이 일본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 이므로 일왕이 직접 사과표명을 해야한다는 입장 관철키로

1990년 이문옥 감사관 구속, 재벌의 땅투기를 청와대의 압력으로 눈감아 준 감사원의 비리 폭로.

1991년 국가안전기획부,김현희 일본인 개인교사였던 「은혜」의 신원이 동경에 살았던 田口八重子(36)로 발표.

1991년 상공부, 원산지 표시제도를 도입, 단계적으로 250개 품목 3232개 상품부터 시행키로.

1991년 진양수산 소속 오징어채낚기 어선 진양 103호 (선장 정현래.선원28명) 아르헨티나 해군에 나포.

1992년 통일국민당, 임시 전당대회를 열고 단독출마 한 정주영 당대표를 제14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선출.

1993년 슬롯머신 관련, 검찰의 내사를 받아오던 광주지검 사건과장 최인주씨가 주암호에 투신자살.

1993년 한학계 원로 우전 신호열 별세

ㅡ우전은 고전 국역에 큰 공적을 남겼으며 한학 분야에서 마지막 남은 대학자로 불려왔다. 전남 함평 태생인 우전은 3살 때 조부의 무릎 아래서 천자문을 배우고 6세 때 이병수 선생에게 통감절요를 배움으로써 본격적으로 한학에 입문했다.

열 살 때 이미 한시를 지어 동네 노인들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으며 17세 결혼할 때까지 사서삼경을 비롯, 사기 당송팔대가의 글과 6경 제자백가들을 뗐다. 1960년 `한중시사`를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그가 지금까지 번역한 한문 고전들은 20여종, 수십 책에 이르고 있다. 우전은 한문고전 중에서도 특히 시문 번역에 독보적 경제였다. 난해한 것으로 유명한 퇴계의 시나 완당집을 번역한 것은 그만이 할 수 있었던 업적으로 평가된다. 지난 1985년 제1회 고전 국역상 본상을 수상했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 IPI 44차총회에서 북한에 곡물 물자원조 제공용의 표명

1996년 판소리 대가 강도근 명창 별세

ㅡ강 명창은 동편제 판소리의 마지막 대가로 평생 고향을 지키며 향토의 예맥을 이어온 고집스런 예술인이었다.

조선조 말 명창으로 추앙되던 송만갑의 판소리 전통을 이어받아 동편제 소리를 고수해오던 강 명창은 환갑을 넘겨 60대 중반에서야 판소리계에 이름을 내기 시작한 은둔의 예술인이기도 했다.

강 명창은 생전에 “인간문화재가 좋다지만 서울 올라가 인간문화재 되고 무대에서만 소리하게 되면 동편제소리는 버리게 된다”며 중앙무대 진출을 거절했다. 명예나 출세보다 오직 판소리 하나만을 벗삼아 농사지으며 일생을 살아온 강 명창은 이 같은 고집 때문에 지난 1988년 70세의 나이에서야 비로소 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로 예능보유자 지정을 받았다.

1918년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16세되던 해에 김정문 문하에 들어가 1년을 사사하고 20세 때 상경, 조선성악연구회에서 당대 최고명창의 한사람인 송만갑 선생에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배웠다. 그 후 지리산 쌍계사일대에서 7년여 동안 독공한 끝에 득음의 경지에 들었다

1996년 10개 여성단체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추진특별위원회 구성

2000년 지리산 외공 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 경남 산청서 학살유해 200구 발굴

2001년 주한미군, 한강 독극물 방류는 공무수행 행위라는 증명서를 한국 검찰에 제출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미국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

ㅡ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간 정상회담은 14일 오후 6시(한국시각 15일 오전 7시)에 백악관 오벌오피스에서 30분 가량의 단독회담, 배석자를 물리친 5분간의 ‘양자대화’ 순으로 진행됐고 이어 오후 8시까지 만찬 겸 확대정상회담이 열렸다. 두 정상은 회담 후 만찬장인 2층 올드 패밀리 다이닝룸으로 가면서 이동로인 로즈가든에 마련된 포토라인서 기념촬영을 한 뒤, 기자들에게 회담결과를 ‘공동발표’했다. 부시 대통령은 5분, 노 대통령은 4분 가량 회담 결과를 직접 브리핑했으나 질문은 받지 않았다.

가장 큰 관심을 모은 대목은 두 대통령의 ‘5분 단독대좌’였다. 오후 6시 단독 정상회담 시작 후 30분 가량 지난 뒤 두 정상은 배석자를 모두 물리친 뒤 5분간 ‘독대(獨對)’를 했다. 통역만 배석한 독대 회담은 이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부시 대통령은 또 정상회담과 공동 브리핑 후 노 대통령을 10분간 백악관 내 관저의 ‘대통령 방’과 ‘링컨침실’을 안내했다. 이해성 홍보수석은 “이 시간에도 두분이 적지않은 얘기를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2003년 국립 공주박물관서 국보 1점등 4점 분실

ㅡ국보 19점, 보물 4점 등 문화재 1만여점을 전시·보관 중인 국립공주박물관의 야간 근무자는 3명이었고, 비상사태 시 서로 연락할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전시실에는 폐쇄회로TV(CCTV)와 적외선 감지기가 설치돼 있었지만 가동되지 않거나 제 구실을 못했다.

15일 밤 10시쯤 공주박물관 당직근무자 박모(35·학예연구사)씨는 바람을 쐬러 당직실 옆 현관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때 셔터와 현관문을 잠그지 않았다. 10시 25분쯤 검은 복장을 한 30대 남자 2명이 뛰어들어왔다. 순간 건물에서 20m 떨어진 경비초소 청원경찰(2명)에게 알리려고 박씨는 소리를 질렀지만 곧 제압을 당했다. 범인들은 각각 전기 충격기와 칼로 박씨의 목에 전기충격을 가하고 위협, 박씨의 팔과 다리를 뒤로 묶고, 눈과 입을 테이프로 가렸다. 범인 중 한 명은 박씨를 감시하고 나머지 한 명은 안으로 들어가 전시실 유리창을 깼다. 몇 분 후 인기척이 없어 박씨가 결박된 손을 풀고 가려진 눈을 떠 보니 범인들이 도주한 뒤였다. 경찰에 신고가 들어온 시각은 10시 44분. 범행은 불과 10여분 만에 이루어졌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공주박물관에는 보안방범시설로 CCTV 4대, 적외선 감지기 6대, 당직실에서 경비초소와 파출소로 연결된 비상벨 1개가 있다. 하지만 CCTV는 2층에만 설치돼 있고, 야간에는 작동을 중지시켜 사실상 야간 침입자에 대한 감시기능을 하지 못했다. 1층 전시실과 1~2층 사이 계단에 설치된 적외선 감지기는 당직자가 야간에만 작동하도록 되어 있지만, 사건 당일 벨은 울리지 않았다. 경찰은 “박씨가 감지기를 작동시키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고 말했다. 또 당직실과 연결된 출입문 안쪽에 셔터가 있지만 당직자들은 이를 거의 내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작년 4월 공주박물관으로 발령받은 이후 당직 때 출입문 셔터를 내린 적이 한 번도 없다” 고 말했다.

문화재청과 충남지방경찰청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도난 당한 문화재 4점의 회수를 위해 16일 이례적으로 20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도난 문화재 사진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기각·직무 복귀 후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 발표

2004년 아동문학가 어효선 세상떠남 ‘파란 마음 하얀 마음’ ‘과꽃’ ‘꽃밭에서’

2005년 서해 입파도 일가족 보트 참사

ㅡ서해 섬에서 휴일을 보내고 돌아오던 한 가족이 탄 보트가 침몰해 7명이 숨지는 참사가 발생했다. 숨진 이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으나 찬 바닷물에서 14시간 이상을 버티지 못했다.

구자훈(39·회사원·경기 안산시)씨 형제·자매(2남3녀)와 가족 등 14명은 휴일인 15일 서해상의 섬 입파도(경기도 화성시 우정면)로 야유회를 갔다가 오후 4시쯤 경기도 화성시 전곡항으로 귀갓길에 올랐다. 구씨는 먼저 자신의 아내와 딸, 동생인 자희(여·30)·자영(28)씨, 자희씨 남편인 김심환(33·서울 서대문구)씨 등 모두 8명을 구씨 소유의 0.7t짜리 레저용 보트(7~8인승)에 태우고 전곡항으로 향했다. 마침 파도도 없는 데다 보트도 최고 시속 30노트(54㎞)로 달릴 수 있어 평소 같으면 1시간 남짓이면 갔다 올 거리(약 13㎞)였다.

그러나 보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섬에 남아 발을 동동 구르던 자훈씨의 동생 자경(여·28)씨 등 가족 6명은 자훈씨와 휴대전화 통화를 시도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다. 이들은 4시간 뒤인 오후 8시 20분쯤 해경에 신고했다. 해경은 신고한 지 1시간 만인 이날 오후 9시 24분 출동, 2시간 만에 현장에 도착해 경비정 8척과 헬기 2대로 밤새 수색을 벌여 이튿날인 16일 오전 6시 20분쯤 자희씨를 구조했다. 자희씨는 김 양식장 부표를 붙잡고 상반신을 물 밖으로 내놓은 채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고 해경은 전했다. 그러나 나머지 가족 7명은 모두 인근 해역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2007년 소말리아 인근해상 조업중 한국인선원4명 무장해적들에 납치됨, 174일만에 풀려남

ㅡ마부노 1호와 2호는 부산 선적의 새우잡이 어선으로, 한국인 4명을 비롯하여 중국인, 인도인, 베트남인 등의 총 24명의 선원을 태우고 케냐 몸바사 항을 떠나 예멘으로 가던 도중 소말리아 근해에서 피랍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주가 해적들과 협상하여 석방금을 대략적으로 합의해 냈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범과는 협상 없다”며 피랍사건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정부대책반이 현지에 도착한 것은 피랍 사건 후 1개월이 지나서였다. 해적들은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8월 들어 선원들을 폭행, 감금하고 총을 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선원들 중에는 폭행으로 쇠약해져 말라리아에 전염된 사람도 있었다.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오히려 해적들이 전에 납치했던 동원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할 정도였다.

이후인 한국 시간으로 11월 4일에 선원들은 석방되어, 미국 해군의 호위를 받으며 13일에 아덴으로 입항하였다.

2007년 김성은 전 국방장관 세상떠남, 한국전쟁때 통영상륙작전 감행, ‘귀신잡는 해병’ 칭호

2007년 대하소설 혼불 배경 종갓집 불

ㅡ작가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무대가 된 전북 남원의 삭녕(朔寧) 최씨 종가에서 불이나 종가의 대를 이어온 할머니가 숨졌다.

2007년 5월 15일 오전 1시10분쯤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노봉마을 삭녕 최씨 종가 안채에 불이나 1시간30분 만에 목조한옥 25평이 모두 탔으며, 안방에서 잠자던 종부(宗婦) 할머니 박증순(93)씨가 사망했다.

이 집은 소설 ‘혼불’에서 최씨 종가 며느리 3대 일가가 일제 강점에서 6.25전쟁 때까지 수난과 애환을 겪어온 곳이었다.

박 할머니는 조선 성종의 스승이던 폄재공 최온의 12대 종부로, 먼 친척인 작가 최명희에게 집안 내력과 듣고 겪은 일들을 구술해 주었고, 그 자신 소설 속 종부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2009년 북한 개성공단계약 무효 선언

ㅡ북한이 2009년 5월 15일 개성공단 임금·임대료·세금 등의 조건을 자기들이 다시 정할 것이며 남한이 이를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단에서 철수해도 좋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무책임한 처사"라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북한의 개성공단 관할 기구인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은 이날 남측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를 통해 보낸 통지문에서 "개성공단에서 6·15 공동선언(2000년)의 정신에 따라 남측에 특혜적으로 적용했던 토지 임대값과 사용료, 노임, 각종 세금 등 관련 법규와 계약들의 무효를 선포한다"고 말했다. 이어 "변화된 정세에 맞게 개정된 법과 규정을 시행하기 위한 절차에 착수할 것"이라며 "남측 기업들은 우리가 통지한 사항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며 이를 집행할 의사가 없다면 개성공단에서 나가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남측 기업이 철수해도 좋다는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9년 중요무형문화재 김유감 별세

ㅡ중요무형문화재 제104호 '서울새남굿' 보유자인 김유감(金有感·85)씨가 2009년 5월 15일 오전 별세했다. 고인은 서울새남굿의 온전한 전승을 위해 평생토록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됐다.

서울새남굿은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고 좋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서울지역의 독자적인 '망자천도굿'이다.

2013년 검찰 '4대강의혹' 본격수사 30여 건설사 압수수색

2015년 ‘노래하는 신부(神父)’ 반예문 별세

ㅡ‘노래하는 신부(神父)’로 알려진 미국인 반예문(89·레이먼드 설리번) 신부가 지난 15일 미국 뉴욕 메리놀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선종(善終)했다.

뉴욕에서 태어나 하버드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된 반 신부는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955년 한국에 왔다. 청주교구에서 15년간 활동했고 이후 서울에서 가톨릭 매스컴위원회 총무로 일했다.

고인은 1982년 ‘가톨릭 가요대상’을 제정했고, ‘바보처럼 살았군요’ ‘잊혀진 계절’ 등 좋은 가요를 영역(英譯)해 외국에 알리는 일에 앞장서면서 ‘노래하는 신부’로 잘 알려졌다.

1989년 한국을 떠나 뉴욕 메리놀회 본부에서 생활해 왔다

2019년 광주광역시 33.3℃ 폭염주의보, 폭염특보제도도입(2008.6.1) 이후 가장 이른 특보

2022년 대한민국의 정치인 고귀남 작고.

2022년 대한민국의 지질학자 정창희 작고.

2022년 대한민국의 법조인 윤일영 작고.

2022년 文 전대통령 귀향 후 첫 휴일...평산마을에 방문객 발길 이어져

2022년 北, 신규발열자 30만 육박.누적 42명 사망...치료법 몰라 늘어

2022년 한미정상회담 3대 의제...“北도발 대응.경제안보.국제기여”

 

 

 

221년 유비가 한나라의 계승국이라 자칭한 촉한을 건립,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

1174년 제2차 십자군~제3차 십자군 원정시 이슬람의 지도자 누르 앗 딘 작고.

1567년 이탈리아의 작곡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출생.

1633년 프랑스의 유명한 공병장교이자 건축가 세바스티앙 르 프레스트르 드 보방 출생.

1644년 명 末王 숭정제의 자살로 홍광제가 남명(南明) 초대황제 즉위

ㅡ홍광제가 1644년 5월 15일 남명(南明)의 초대 황제로 남경에서 즉위했다. 남명 정권은 명나라 수도 북경이 청나라에 함락되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남경에 이주해 있던 황족들을 중심으로 세운 왕조였다.

황족들은 숭정제가 죽은 후 황태자의 생사여부를 알 수 없어 황족가운데 한 사람인 복왕을 감국(황제를 대신하여 국사를 담당)으로서 국사를 담당케 했다. 이것이 이른바 남명 정권으로 복왕은 그후 제위에 올라 홍광제라 칭했다.

홍광제의 남명 정권은 부패와 무능으로, 즉위 1년만인 1645년 5월15일 청군에 의해 남경이 점령됨으로 막을 내렸다. 융무제, 영력제가 뒤를 이어 황제에 올랐으나 청군의 공격과 관료들의 무능, 부패로 결국 18년동안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지막 황제 영력제는 청의 군사들을 피해 멀리 미얀마까지 도주했으나 뒤쫒은 오삼계에 의해 처형됐다.

1773년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출생.

1845년 러시아의 생물학자, 세균학자 엘리 메치니코프 출생.

1859년 플로늄과 라듐 발견해 부부가 함께 노벨상 받은 프랑스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 태어남

1886년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 출생.

ㅡ미국의 시인이다.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의 앰허스트(Amherst)에서 태어났다. 디킨슨은 거의 2000편에 달하는 시를 썼는데 주로 사랑, 죽음, 이별, 영혼, 천국 등을 소재로 한 명상시가 대부분이다. 미국에서 가장 천재적인 시인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시는 당시의 다른 시들과는 많이 달라 생전에는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했고 겨우 4편의 시만이 시집에 쓰였다. 에밀리 디킨슨은 생전에는 재능을 알아본 소수의 시인과 지식인과 꾸준히 서신으로 시를 주고받았다. 그녀의 천재성이 널리 인정받은 것은 사후, 여동생 라비니아 노크로스 디킨슨 (Lavinia Nocross Dickinson)이 에밀리의 시를 모아 시집을 낸 후의 일이다.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고 은거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어릴 때는 매일 들판으로 외출하고 동네 아이들을 불러 놀기도 하던 활기찬 성격이었다.

마운트 홀리요크 대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시를 쓰다가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05년 미국 네바다 주에 라스베이거스가 세워지다

1911년 첫 동시상영 영화 ‘The Lost Chord’와 ‘The Fall of Troy’상영.

1915년 - 미국의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 출생.

1928년 미키 마우스와 미니 마우스가 처음으로 등장한 <Plane Crazy>가 상영되다.

1932년 일본 이누카이 총리 피살

1935년 러시아화가 말레비치 세상떠남

ㅡ“나는 푸른색의 관계와 색깔의 한계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동지들이여, 내 곁에서 순백함속에 몸을 담아 이 무한함속에서 헤엄쳐 보십시오. 나는 채색된 하늘의 경계들을 짓밟아버렸고, 그것들을 뿌리째 뽑아서는 주머니들을 만들어 그속에 색깔들을 던졌습니다. 헤엄치십시오! 자유로운 백색의 이 바다, 무한함이 여러분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1940년 나일론 스타킹 미국 전역에서 판매 시작

1948년 제1차 중동전쟁 발발

ㅡ5월 15일 아랍제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는 순간이었다. 5월 14일 이스라엘의 지도자 벤 구리온이 이날 소집된 제4회 전국평의회 석상에서 전세계를 향해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했고, 이틀 후인 5월 16일 미국 소련 일본 등이 이스라엘을 승인했다.

전쟁 초기에는 아랍제국이 우세했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아랍제국은 패배를 거듭했다. 조정에 나선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이듬해인 1949년 7월 21일 휴전이 성립됐지만, 휴전은 잠시뿐 지금까지도 중동의 화약고로 수많은 사상자가 속출하고 있다. 전쟁 패배로 100만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생겼으며 아랍게릴라가 조직됐다

1955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오스트리아 주권회복조약 조인

1957년 남태평양 키리티마티섬(영어로 크리스마스섬)에서 영국 첫 수폭실험 성공(세계에서 3번째 수폭 보유국)

ㅡ5월 15일 영국이 중부 태평양상에 있는 크리스마스섬에서 수소폭탄개발 실험에 성공했다. 이날 4발 제트기폭격기인 바리안트는 고도 9.100m에서 영국 최초의 수소폭탄을 투하했고, 폭탄은 3,000m의 고도에서 폭발했다. 실험지역에는 해군함정이 배치됐고 일반선박은 출입이 금지됐다.

미국과 소련의 핵실험으로 세계의 방사능 수치가 상승하고 있는 것을 우려한 일본의 물리학자들은 2월 영국의 실험이 예고됐을 때 반대를 표명했다. 일본 정부도 특사를 파견해 맥밀런 수상에게 중지를 요청했으나 결국 영국은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의 수소폭탄 보유국이 됐다

1964년 라오스내전 격화

1967년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 작고.

1972년 류큐 제도, 다시 일본 영토로 편입(미국, 27년만에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

ㅡ5월15일 0시, 사이렌과 기적소리가 일본 오키나와(沖繩) 전역에 울려퍼졌다. 27년간의 미국 통치에서 벗어나 ‘오키나와현(縣)’이라는 새로운 출발을 자축하기 위해서였다. 오키나와현 지사는 “오키나와라는 영원한 새 생명의 탄생”이라며 감격해했지만 진보진영은 핵과 미군기지없는 전면반환을 요구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럼에도 반환은 예정대로 진행돼 국제선은 국내선이 됐고 우측에서 달리던 차량은 좌측으로 달렸다.

류큐(琉球) 왕국이라는 독립국가로 한국ㆍ중국ㆍ일본ㆍ동남아를 연결해 온 해상무역 중심지 오키나와가 일본령이 된 것은 1609년 가고시마(鹿兒) 영주가 이곳을 복속한 뒤부터였다. 1879년에는 오키나와현으로 정식 편입됐지만 일본 본토로부터는 언제나 버려진 섬이었다.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부터 석달간 미군ㆍ일본군 간에 벌어진 오키나와전투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이 전투로 미군 1만5000명과 일본군 6만 5000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주민들도 12만명이나 희생됐다. 본토방어를 위해 시간을 벌기위한 ‘옥쇄작전’ 때문이었다. 일본의 총알받이였던 것이다. 패전 후에도 오키나와는 미국과 일본의 흥정대상이었다. 군사요충지로 오키나와를 필요로 했던 미국에게 일본은 오키나와를 바치고 그 대가로 미ㆍ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27년의 세월이 흘렀다.

1982년 영국 특공대 포클랜드 상륙

1986년 미국 네바다사막 지하 핵실험장에서 방사능 유출 2000만$ 장비 피해

1988년 소련 아프가니스탄 철군 시작

1990년 일본제지사업자 료에이 사이토 빈센트 반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 8,250만$(낙찰가 7,500만$ 중개료 10%)에 삼,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

1991년 에디트 크레송 프랑스 첫 여성총리 됨, 사회주의국가건설 위해 애썼으나 1992년4월 지방선거 사회당참패로 1년도 안돼 물러남

1993년 일본 프로축구리그 `J리그` 출범

2005년 명왕성의 위성 닉스와 히드라가 허블우주망원경에 의해 발견됨.

2007년 마크 로스코의 '화이트 센터' 현대미술 최고가 낙찰

2007년 마부노호 소말리아 피랍 사건이 발생

2012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의 디아블로 3 전세계 출시

2014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남쪽으로 50km 떨어진 메그나 강에서 250여 명을 태운 여객선이 침몰

2019년 미국의 건축가 I. M. 페이 작고.

ㅡ이니셜인 I. M. Pei로 잘 알려져 있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로, 모더니즘 건축의 마지막 건축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돌, 콘크리트, 유리, 강철등을 이용해 추상적인 형태를 즐겨 만들어낸다.

페이는 1917년 4월 26일 중국 광저우에서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가로, 이후 중국은행 은행장과 중국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그의 가족은 이후 상하이 인근에 있는 쑤저우로 이주했다. 그는 홍콩의 세인트 폴스 칼리지(St. Paul's College)와 상하이의 세인트 존스 대학에 진학했다.

이후 18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하였고, 1940년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교에서 건축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후 하버드 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 진학하여 잠시 공부한 뒤에, 프리스턴에 있는 국방 연구 위원회에 들어갔다. 1944년 그는 하버드로 돌아와서 한때 바우하우스에서 교편을 잡았던 발터 그로피우스 아래에서 수학하여, 1946년 건축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버드 대학교의 조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는 1951년 휠라이트 여행장학금을 받았고, 1954년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48년 부동산 개발업자인 윌리엄 제켄도프에게 고용되어 Webb and Knapp에서 근무하였다. 이 회사에서 페이는 많은 대규모의 건축설계과 도시계획을 담당하였고,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양식에 따라 건물을 설계하였다. 페이는 1955년 자신의 설계 사무소인 I. M. Pei & Partners를 개업하였다. 1989년 제임스 잉고 프리드와 헨리 콥의 이름을 따와 사무소의 이름을 Pei Cobb Freed & Partners로 바꾸었다. 1983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였다.

1990년 페이는 공식적으로 은퇴하였으나 이후에도 설계 작업을 하거나 회사에 자문을 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나갔다. 은퇴 후 일본 시가현 미호박물관과 카타르 도하 이슬람예술박물관 등을 설계하였다.

2019년 5월 15일 10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19년 미국화가 제프 쿤스의 조형 작품 ‘토끼’ 9,107만5천$(약1,085억원)에 팔림, 생존작가 최고액,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

2021년 칠레, 새 헌법 기초할 기초회의 선거, 세계최초로 신자유주의 끝내자는 정치세력 의석 과반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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