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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5월 29일

by 귤담 2023. 5. 13.

오늘의 역사 5월 29일

 

 

 

매일 아침 일어서는 인간들의 풍경 앞에

나는 또 혼자인가, 볓 번씩을 확인하는

세상은

공허한 바다,

순 선홍빛 처녀막.

 

생각의 올 기워봐도 신경통은 도져올까

없는 것들 풍족하게 가지런히 추스려도

온 산천

우는 진달래

내겐 너무 잔인하다.

 

신뢰하는 별과 달, 꽃, 사람의 아들 없고

선한 이 가슴 뜨거운 인간의 잔이 빌 때

삔 발목

딛고 설 자리

늘 우짖는 나의 바다.

                         - 이재창 시인의 「무의미론(無意味論)」 전문, (전남문단 14집, 1986)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풀이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발목까지/발밑까지 풀이 눕는다/바람보다 늦게 누워도/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바람보다 늦게 울어도/바람보다 먼저 웃는다/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 ‘풀’(1968년 오늘 씀)

 

 

*유엔 평화유지군의 날

*수단의 오늘은 ‘한국의 날’, 대우그룹이 세운 수단 최대규모의 타이어공장이 1980년 오늘 성공적으로 가동된 것을 기념함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가톨릭(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날: 나이지리아

*오크 애플 데이; 영국

*바하올라(Bahaullah)의 승천: 바하이 신앙

*연방편입일: 로드아일랜드주, 위스콘신주

 

 

 

943년 [음]태조(太祖) 26년, 왕이 훙서함

1109년 [음]예종(睿宗) 4년, 사자를 보내 동계의 군사를 격려함

1124년 [음]금의 완안홀랄고 등이 고려에 물개와 해동청 등을 잡으러 왔다가 격퇴됨

--〈천회(天會) 2년(1124) 5월 을사일에〉 갈라로(曷懶路) 군수(軍帥) 완안홀랄고(完顔忽剌古) 등이 말하기를, “이전에는 해마다 물개[海狗]·해동청(海東靑)·숫새매[鴉鶻]를 고려 땅에서 잡았습니다. 얼마 전에 배 두 척으로 〈잡으로〉 갔는데 그들이 전함 14척으로 요격하여 두 척에 타고 있던 사람을 전부 죽이고 병장기를 탈취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작은 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심하게 마땅한 것이 아니다. 이후로는 명을 받든 것이 아니면 쉽게 가지 말라.”라고 하였다.

1232년 [음]고종(高宗) 19년, 몽고 다루가치 4명이 북계(北界)로 옴

1257년 [음]고종(高宗) 44년, 강도에 계엄령을 내림

1294년 [음]원이 탐라를 고려에 반환함

1310년 [음]충선왕(忠宣王) 2년, 왕이 세자(世子) 왕감(王鑑)과 그 수행원인 김중의(金重義) 등을 죽였다.

1415년 [음]태종 15년, 왜구가 제주도에 침입함

--왜선(倭船) 23척이 제주(濟州)에 입구(入寇)하였다. 집을 불지르고 백성과 물건을 노략질했다는 말을 임금이 듣고 제주 사람 송전(宋全)을 보내어 큰 병선(兵船) 3척과 화통(火㷁)·병기(兵器)를 가지고 가게 하고, 송전에게 옷 한 벌을 하사하였다.

1436년 [음]세종 18년, 사수색(司水色)을 수성전선색(修城典船色)이라 고치고, 성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함

1451년 [음]문종 1년, 《양계지도(兩界地圖)》를 편찬함

1454년 [음]단종 2년, 함길도 삼수(三水)에서 야인들을 물리침

1481년 [음]성종 12년, 자연 재해로 금주령을 내림

1502년 [음]연산 8년, 거창 부원군 신승선(愼承善) 죽음

1520년 [음]중종 15년, 김식(金湜)과 동행했던 노비가 김식의 자살에 대해 공초함

--"김식(金湜)이 달아날 때에 신과 김덕수(金德粹)·김덕순(金德純) 및 박연중(朴連中)이 따라갔습니다. 금산(金山) 땅의 초가 암자에 가서 유숙하고 바로 오희안(吳希顔)의 집에 가서 묵다가 영산(靈山)의 이중(李中)의 집으로 옮겨갔고, 또 밤에 칠원(漆原)에 이르렀는데 하정(河珽)이 이미 제 종[奴]을 시켜 중도에서 기다렸다가 맞이하여 읍아(邑衙)에 이르렀습니다. 또 하정의 아비의 집에 가서 묵고 산음(山陰) 땅에 이르러 오희안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는 계책이 궁하여 지리산(智異山)에 숨기로 꾀하고, 가다가 바위 밑에 이르러 잠시 자고 산으로 올라가 서쪽으로 가니 돌집[广] 같은 바위가 있는데 비바람을 가릴 만하므로 19일 동안 묵으면서 김식과 움산이 늘 솔잎을 먹고 요기하였습니다. 또 길 가는 사람에게서 들으니, 김식이 전에 가르친 자가 김식의 비밀한 일을 고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선전관(宣傳官)을 나누어 보내어 매우 엄하게 찾아 잡는다 하므로, 신이 김식에게 알렸더니 김식이 ‘나는 면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낫겠다.’ 하였습니다. 이어 바위 밑으로 내려가 자고 이틀 밤을 지내고서 거창 땅의 산골짜기로 갔는데, 김식이 마실 것을 찾기에 신이 곧 땅을 파서 물을 얻어 먹이니, 김식이 ‘며래(萊)406) 를 꺾어 오라.’ 하기에 신이 동구(洞口)까지 가서 찾았으나 캐지 못하고 돌아와 보니, 김식이 이미 버드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신이 놀라고 두려워 허둥지둥 곧 풀어 놓고 한참 안고 울었으나 끝내 살릴 길이 없으므로, 드디어 산 아래에 있는 김효례(金孝禮)의 집에 와서 그 연유를 알렸습니다. 덕순·연중은 개령(開寧)에서 서로 이별한 뒤로 소식을 듣지 못하였으며, 덕수는 희안의 집에서 서울로 올라온 뒤로 다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1544년 [음]중종 39년, 성균관 생원들이 상소하여 조광조의 신원(伸寃)을 요청함

1555년 [음]명종 10년, 영암에서 왜적을 물리침(을묘왜변)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윤경(李潤慶)이 우도 방어사(右道防禦使) 김경석(金景錫)과 함께 왜적(倭賊)을 쳐부수어 1백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었다.

당초에 관찰사 김주(金澍)가 이윤경을 가장(假將)으로 삼아 영암(靈巖)을 지키게 하자, 이윤경이 사수하려는 계책을 하여 군졸들을 무마하고 병기(兵器)를 갖추기에 힘과 마음을 다하여, 막아낼 방법을 지극하게 하지 않는 것이 없으므로 성 안의 사람들이 의지하며 믿게 되었다.

그런데 김경석이 내려 와서는 적이 매우 번성한 것을 보고서 사체(四體)가 힘이 없어지며 어찌할 계책을 내지 못했었다. 5월 24일에 왜적들이 동서로 나뉘어 진(陣)을 짜고 몰려와 성을 포위하였다. 25일에 전주(全州) 군사 약간 명이 나가 싸우기를 청해도 김경석이 허락하지 않다가 굳이 청하자 그제야 허락했었다. 김경석이 성의 동쪽 문루(門樓) 위에 앉아 날래고 용맹스러운 군사를 뽑아내어 나가 싸우게 한 지 한참만에 왜적들이 북쪽으로 도망하여 사방으로 흩어지며 더러는 향교(鄕校)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공격하여 향교 안으로 들어가 적의 머리 1백 4급(級)을 베고, 또 북쪽으로 도망하는 왜적을 추격하여 6급을 베었는데 나머지는 모두 도망가 버렸다.

이때 남치근(南致勤)은 남평현(南平縣)에 있다가 영암이 포위된 것을 듣고 구원하러 가다가 길에서 왜적을 만나 11급을 베었다. 그 이튿날 조안국(趙安國)과 남치근이 영암에 이르렀고, 또 그 다음날 왜적들을 추격했지만 미치지 못했다.

사신은 논한다. 왜구들이 감히 멋대로 돌격하게 된 것은 장사(將士)들이 두려워하여 물러나 움츠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구들은 공격하면 무너지고 쫓아가면 도망하여 조금만 군사의 위엄을 보여도 도망하여 숨기에 바빴다. 이러므로 영암에서의 승전도 또한 효용군(驍勇軍) 10여 명이 먼저 싸운 데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때 조안국은 영산진(靈山津)에 있었고 남치근은 남평현에 있었으니 진실로 김경석과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였다면 그 하찮은 도적들을 거의 하나도 남김없이 섬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에 모든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 김경석은 성 안에서 떨고만 있고 감히 머리를 내놓지 못하였고 남치근과 조안국은 모두 먼 지경에 군사를 주둔하고 나아가 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왜적이 이미 패한 뒤에 쫓아가기는 했지만 또 때에 맞추어 추격하지 않아 왜적들이 무사하게 배에 오르게 했으니 통분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1558년 [음]명종 13년, 상진(尙震)이 영의정이 됨

1592년 임진왜란중 옥포대첩 거북선 완성, 첫 참전

1613년 [음]광해 5년, 지진이 일어나 가옥이 많이 무너짐

1617년 [음]광해 9년, 선수도감(繕修都監)을 영건도감(營建都監)으로 고침

1710년 [음]숙종 36년, 이이명이 병조와 금위영을 둘로 나눌 것을 건의함

1717년 [음]숙종 43년,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의 관작이 추탈됨

1725년 [음]영조 1년, 전라도에서 홍수로 사람과 가옥이 물에 잠김

1730년 [음]영조 6년, 성균관 유생들의 게으름을 책망하자 유생들이 권당(捲堂, 성균관을 비워 버리는 시위)함

1750년 [음]영조 26년, 영조가 하루종일 양역(良役)에 대해 강구함

1762년 [음]영조 38년, 영의정 홍봉한이 왕세자(사도세자)가 대죄하고 있음을 아룀

1763년 [음]영조 39년, 기근이 든 제주에 호남의 곡식을 운반해 진휼하게 함

1773년 [음]영조 49년, 관서의 소미(小米)를 청계천 준설 비용으로 쓰게 함

--임금이 집경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이번에 청계천(淸溪川)을 준설(浚渫)하고 석축(石築)할 물력(物力)을 제때에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즉 비국에서 행회(行會)한 관서(關西)의 무역(貿易) 보관중인 소미(小米) 1만 석을 3군문에 나누어 주어 청계천을 준설하고 석축을 끝낸 뒤에 준천사에서 주관하여 조적(糶糴)하고 있는 소미 3천 석을 해마다 모조(耗條)까지 합하여 차차로 이번에 나누어 준 1만 석의 수량을 채워 주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1776년 [음]정조 즉위년, 영조의 어제(御製)와 어필(御筆)을 편찬함

1776년 [음]정조 즉위년, 이조 낭관의 통청(通淸)하는 제도를 복구함

1779년 [음]정조 3년, 경기·관동·영남·관북·호서에서 진휼을 마침

--경기(京畿)·관동(關東)·영남(嶺南)·관북(關北)·관서(關西)·호서(湖西)에 진구(賑救)를 설행하였는데, 정월부터 진구를 시작하여 이때에 이르러 진구를 끝마쳤다. 【경기는 여주(驪州)·이천(利川)·죽산(竹山)·안성(安城)·음죽(陰竹) 등 고을의 기민(饑民)의 총수가 3만 9천 3백 64구(口)이고, 진곡(賑穀)은 3천 1백 6석(石)이다. 강원도는 영월(寧越)·강릉(江陵)·양양(襄陽)·이천(伊川)·회양(淮陽)·삼척(三陟)·정선(旌善)·간성(杆城)·평창(平昌)·고성(高城)·울진(蔚珍)·금성(金城)·횡성(橫城)·평강(平康)·홍천(洪川) 등 고을의 기민의 총수는 1만 8백 47구(口)이고, 진곡은 6천 5백 48석이다. 경상도는 공진(公賑)은 상주(尙州)·함창(咸昌)·봉화(奉化)·용궁(龍宮)·연일(延日)·장기(長鬐)·흥해(興海)·영해(寧海)·영덕(盈德)·금산(金山)·청하(淸河)·영양(英陽)·진보(眞寶)·안동(安東)·지례(知禮)·예안(禮安)·의성(義城)·의흥(義興)·신녕(新寧)·군위(軍威)·비안(比安)·풍기(豊基)·순흥(順興)·영천(榮川)·예천(醴泉)·선산(善山)·대구(大邱)·칠곡(漆谷)·양산(梁山)·현풍(玄風)·김해(金海)·밀양(密陽)·창녕(昌寧)·영산(靈山)·경주(慶州)·영천(永川)·진주(晋州)·성주(星州)·합천(陜川)·단성(丹城)·고령(高靈)·인동(仁同)·거창(居昌)·초계(草溪)·의령(宜寧)·개령(開寧)·칠원(漆原)·창원(昌原)·함안(咸安)·울산(蔚山)·하양(河陽)·경산(慶山)·자인(慈仁)·문경(聞慶)·청송(靑松)·동래(東萊)·진해(鎭海)·언양(彦陽) 등 고을과 좌병영(左兵營)·우병영(右兵營)·좌수영(左水營)·장수(長水)와 송라(松羅)·김천(金泉)·황산(黃山)·안기(安奇)·창락(昌樂)·유곡(幽谷) 등역과, 부산(釜山)·가덕(加德)·서평(西平)·서생(西生)·귀산(龜山)·적량(赤梁)·신문(新門)·사량(蛇梁)·옥포(玉浦)·조라(助羅)·천성(天城)·안골(安骨)·포항(浦項)·금오(金烏)·조령(鳥嶺)·독용(禿用) 등의 진(鎭)과, 진주(晉州)·울산(蔚山) 등의 목(牧)이고 구급(救急)은 함양(咸陽)·하동(河東)·고성(固城)·웅천(熊川)·청도(淸道)·거제(巨濟)·남해(南海)·삼가(三嘉) 등 고을과, 사근(沙斤)·소촌(召村)·자여(自如) 등 역(驛)과 다대포(多大浦)·개운(開雲)·두모(豆毛)·포이(包伊)·영등(永登)·율포(栗浦)·가배량(加背梁)·청천(晴川)·제포(薺浦)·삼천(三千)·당포(唐浦)·미조항(彌助項)·평산포(平山浦)·장수(長水)·지세(知世) 등 진(鎭)인데 기민(饑民)의 총수는 74만 1천 5백 58구(口)이고, 진곡(賑穀)은 13만 5천 87석(石)이다. 함경도는 남관(南關)은 안변(安邊)·갑산(甲山)·삼수(三水) 등 고을인데 기민의 총수는 4만 8천 14구(口)이고 진곡(賑穀)은 3천 7백 26석(石)이며, 북관(北關)은 부령(富寧)·무산(茂山)·온성(穩城)·경원(慶源)·경흥(慶興) 등 고을인데 기민의 총수는 3만 5천 8백 38구(口)이고 진곡은 3천 8백 69석이다. 평안도는 양덕(陽德)·영원(寧遠)·맹산(孟山)·철산(鐵山) 등 고을과 영성(寧城)·토성(免城)·신광(神光) 등 진(鎭)인데 기민의 총수는 5천 5백 20구(口)이고, 진곡은 6천 2백 79석이다. 홍충도는 단양(丹陽)·충주(忠州)·청산(靑山)·영동(永同)·평택(平澤)·청풍(淸風)·영춘(永春)·황간(黃澗)·보은(報恩)·제천(堤川)·청안(淸安)·옥천(沃川)·회인(懷仁)·음성(陰城)·서원(西原)·정풍(廷豊)·괴산(槐山)·회덕(懷德) 등 고을과 율봉(栗峯)·연원(連源) 등 역(驛)인데 기민의 총수는 1만 2천 38구(口)이고 진곡(賑穀)은 8천 9백 30석(石)이다.】

1801년 [음]순조 1년, 유배 중인 은언군 이인(李䄄)과 홍낙임(洪樂任)을 사사(賜死)함

1812년 (조선 순조12)평안도농민전쟁 일으킨 홍경래 세상떠남

1818년 [음]순조 18년, 비변사에서 과장 구폐 절목(科場捄弊節目)을 제정함

--비국에서 과장(科場)의 구폐 절목(捄弊節目)을 아뢰었다.

【1. 대비과(大比科)065) 는 반드시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겸하는 바, 강경에는 경공(經工)을 시험하고 제술은 사화(詞華)를 취하는 것으로서, 마치 두 바퀴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 가지라도 폐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근래로 오면서 강경의 규칙이 점차 해이해져서 거의 유명 무실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선조 때에는 거듭 대조 확인하는 규칙을 엄격히 하여 권과(勸課)의 뜻을 살렸던 바, 수종들이 함부로 따라 들어가는 근심이 또한 그에 따라 차츰 제거되었습니다. 이것은 실로 오늘에 있어서 당연히 공경하여 따라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과제에 시한을 둠에 있어서는, 그 짓고 쓰는 데 드는 소요 시간을 헤아려서 적정한 시한을 정하여, 빠른 자나 늦은 자나 모두 자기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한 다음, 시한 내에 제출된 시권만 취하여 그 우열을 정밀하게 살펴서 취사(取捨)하는 것이 고시(考試)의 기본 원리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즈음은 주시(主試)하는 자가 항상 빨리 내는 것을 취하는 일이 많음으로써 결국 거자(擧子)들이 마구 다투면서 빨리 내도록 만들어서, 문을 막고 먼저 접수시키려는 폐단으로 인한 소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짓고 쓰고 한 것이 초라하여 볼만한 것이 없고, 기상(氣象)이 바쁘고 급박하여져서 일이 매우 아름답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옛날 선조 때에도 호명하여 바치게 하는 제도를 시행하여 앞다투어 내려는 풍조를 금했습니다. 이제 다시 이 취지를 따라 2개 조의 정식(定式)을 만들고, 다시 다음과 같이 조건(條件)을 열기(列記)하여 밝혀야 합니다. 1. 거자(擧子)를 녹명(錄名)하여 오부관(五部官)이 책으로 만들어 한성부에 보내면, 한성부에서 수합하여 4관소(四館所)에 보내되, 반드시 6월 그믐 전까지 도착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講)을 받을 때에 낙강(落講)한 자가 많으면 당부(當部)의 녹명이 외잡(猥雜)하여 정밀하지 못함을 알 수 있으므로, 《대전》의 ‘거자의 녹명에 대하여 의심스러운 자가 발견되면 당부(當部)의 관원을 파출(罷黜)한다.’는 조문에 의거하여 초기(草記)하여 감죄를 논해야 합니다. 1. 향유(鄕儒)는 각각 그 지방관이 녹명하여 감영에 보내고, 감사(監司)는 그 남잡(濫雜) 여부를 고찰한 다음, 그 녹명에 따라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강을 받아서 급첩(給帖)한 후, 책자를 만들어 감영에 보고토록 하고, 감영이 이를 받아서 시소(試所)로 올려보내도록 해야 합니다. 1. 경기의 유생은 경시(京試)에 응시하게 하되, 각각 그 고을에서 강을 받은 후에 공문(公文)만을 만들어 주고 급첩하지는 말 것입니다. 월강(越講)한 것으로 책자를 만들어 감영에 보내면, 감영에서는 이를 수합하여 4관소(四館所)에 보내고, 유생들이 올라온 뒤에 4관소에서는 공문에 의거하여 책자와 대조하여 곧바로 강첩(講帖)을 만들어 출급(出給)합니다. 만약 장내(場內)에서 범과(犯科)하여 그 남월(濫越)한 실상이 드러나면, 해당 고을의 수령을 논죄(論罪)해야 합니다. 1. 경기도 이외의 향유(鄕儒)가 경시(京試)를 보려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자는 사유를 갖추어 거주하는 당부(當部)에 올려서, 경유(京儒)들이 녹명할 때 별도로 책자를 만들어 4관소로 보내고, 시골에서 올라오는 자는 본읍(本邑)의 공문을 받아와서 곧장 4관소에 제출하여 응강(應講)하도록 해야 합니다. 1. 조흘(照訖)의 날짜는 개강(開講)하기 전에 정하되 성균관에서 초기를 올린 다음에 이조에서 별도로 시관(試官)을 일소(一所), 이소(二所)에 각각 5명씩 단부(單付)066) 하여 계하(啓下)토록 합니다. 그리고 조흘소(照訖所)에서 각부(各部)의 녹명인(錄名人) 수효의 다과를 감안하여 일자(日子)를 배정하되, ‘모일(某日)부터 개강하여 선강(先講)은 모부(某部)로 모일에 끝나고, 계강(繼講)은 모부로 모일에 끝나며, 경유(京儒)의 강이 끝난 다음 향유(鄕儒)의 강은 모일에 시작하여 모일에 끝난다.’는 식으로 소상하게 알려서 각자 응강(應講)토록 하고, 각 부의 시한 안에 응강하지 않은 자는 모두 추강(追講)을 허락하지 않아야 합니다. 1. 강규(講規)는 면강(面講)에 따라서 하되, 구두만을 요구 하지 말고 전적으로 문의를 위주로 합니다. 그리고 간혹 문의와 관련하여 다른 경사(經史) 중에서 남들이 상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간접적으로 인용하여 응시자의 능문(能文) 여부를 시험하여, 한잡(閒雜)한 사람들이 마구 들어오는 폐단을 방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1. 두 시소에서 낙강(落講)한 명단을 별도로 작축(作軸)하여 서로 대조해서, 만약 이름을 바꾸어 첩강(疊講)한 자가 있으면, 《대전》의 ‘조흘강에서 대강(代講)한 사람은 자신에 한하여 충군(充軍)한다.’는 조문에 따라 감죄(勘罪)해야 합니다. 1. 월강한 자에게는 조흘 첩문(照訖帖文)을 만들어 주되, 시관 중에 한 사람이 주관하여 서명하고 날인합니다. 공첩(空帖)을 훔쳐서 도장 찍는 폐단은 별도로 조찰(照察)합니다. 회시(會試) 때의 학례강(學禮講)도 이 규칙에 따라 거듭 엄중히 하되, 만약 형편없는 상태로 낙강(落講)하는 자가 있으면, 초시(初試)의 조흘(照訖)이 남월(濫越)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그를 월강시킨 해당 조흘 시관(照訖試官)을 현고(現告)를 받아 추리(追理)하여 엄중히 감죄(勘罪)하고, 향방 유생(鄕榜儒生)일 경우에는 강을 받은 해당 고을의 수령을 감죄를 논해야 합니다. 1. 시관은 낙점을 받은 다음 나누어 시소로 나가서, 개장(開場)하는 전날 저녁에 문을 열어 다음날 아침을 한정하고 문을 닫기 전에 유생들이 편리한 대로 입장하게 하되, 이미 들어온 자는 다시 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금란소(禁亂所)에서 엄격히 찰금(察禁)하여 위범(違犯)한 자는 곧장 법사(法司)로 이송합니다. 유생들에 대하여 입문할 때와 입장한 뒤에 그들의 조흘첩을 검열하고, 시권을 제출하러 출문(出門)할 때에 더욱 철저히 검열하여, 혹시라도 위첩(僞帖)을 가졌거나 조흘첩이 없이 들어온 자는 모두 과장을 난입(闌入)한 형률에 따라 법사로 이송하여 충군(充軍)하게 해야 합니다. 1. 금란관(禁亂官)은 반드시 잘 가려 뽑아서 선임하여 보내되, 나장(羅將) 중에 근실한 자를 많이 데리고 가서 과장의 안팎을 규찰(糾察)하게 합니다. 그리고 만약 하례(下隷)들을 제대로 조속(操束)하지 못하여 농간을 부린 자가 염탐(廉探)에서 발견될 때는 그 하례를 형배(刑配)하는 외에 당해 금란관은 《대전》의 ‘수검(搜檢)에 마음을 쓰지 않은 율(律)’에 따라 감죄(勘罪)해야 합니다. 1. 형조의 낭청(郞廳)은 조례(曹隷)를 많이 데리고 형구(刑具)를 준비하여 시문(試門) 근처에서 대령하다가, 시소로부터 범과(犯科)한 자를 보내어 넘겨주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옥(典獄)으로 이송하되, 한 사람이라도 놓치면 당해 낭청을 감죄를 논해야 합니다. 1. 제술(製述)하는 시한(時限)은 시제(試題)를 내건 이후부터 3시간으로 한정합니다. 예를 들면, 묘시(卯時)에 시제를 내어 걸었다면 진시(辰時) 초부터 계산하여 오시(午時)말에 가서 3시간이 되므로 미시(未時)초에 마감합니다. 만약 진시나 사시(巳時)에 시제를 내어 걸었다면, 미시나 신시(申時) 말이 3시간이 되므로 신시나 유시(酉時) 초에 마감하게 됩니다. 3시간 동안이라면 아무리 민재(敏才)가 아니더라도 시권 하나쯤은 충분히 실력대로 짓고 쓸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1시간이 경과할 때마다 장내(場內)에 호고(呼告)하여 유생들로 하여금 각자 주의하여 챙기게 해서 마감 시간 안에 시권을 내도록 하고, 미쳐 못하는 염려가 없도록 해야합니다. 1. 시제를 내어 건 뒤 마감 전에 제출하는 시권은 군사(軍士)가 직접 손으로 받지 말고 제출하는 자에게 맡겨서 대(臺) 위에 던져서 쌓이게 하되, 미리 대 위의 사방에 나무를 심고 망삭(網索)을 얽어서 던져 넣는 시권이 굴러 떨어질 폐단을 방지합니다. 시관 한 사람이 윤회(輪回)하면서 감찰(監察)하는 수권관(收券官)과 함께 직접 살펴보고, 군사들은 접근하지 못하도록 멀리 물리쳐서 시권 하나라도 손실되는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1. 마감 시간이 지나면 장내에 호고하여 시권을 제출하지 못하도록 하고, 미리 포장(布帳) 하나를 준비하여 제출된 시권 더미를 덮을 것입니다. 더러 포장 위에 억지로 시권을 던지는 유생이 있으면 던지는 즉시 주워서 곧장 ‘마감 이후[限後]’라는 두 글자를 써서 낙축(落軸)으로 처리한다. 모든 처리를 정한 규칙대로 처리해야 합니다. 1. 이미 마감 시간을 정하여 전연 융통성이 없도록 하려면, 마감 이후에는 유생을 모조리 과장 바깥으로 내쫓고, 만약 법을 무시하고 어기는 자가 있으면 그것도 난입(闌入)의 율을 준용하여 법사(法司)로 옮겨 보내서 엄중히 다스려야 합니다. 1. 마감 안에 제출되어 포장 밑에 쌓여 있는 시권은, 제출 시간의 선후를 불문하고 한데 뒤섞어서, 여러 시관과 감찰 및 수권관이 모두 출좌(出坐)하여 직접 보는 가운데 군사들을 시켜 일제히 작축(作軸)한다. 이들 작축한 군사가 직접 전자관(塡字官)에게 갖다 주지 못하게 하고 시관과 감찰이 있는 앞에 모두 쌓아 놓게 한 뒤, 시관이 다른 군사를 시켜 차례대로 전자관에게 가져다 주게 하고 전자관은 익숙한 솜씨로 글자에 따라 순서대로 옮겨 써넣도록 합니다. 전자관은 물량을 참작하여 적절한 인원을 추가로 차하(差下)할 수 있습니다. 1. 시관이 시권을 상고할 때, 마감 안에 제출된 시권은 성의를 다하여 자세히 열람하되, 자축(字軸)의 선후에 관계 없이 오로지 선발에 적합한 작품을 고를 일이요, 또 출방(出榜) 시간의 빠르고 늦음에 구애됨이 없이 오로지 인재를 빠뜨렸다는 한탄이 없도록 할 일입니다. 1. 시권을 상고한 입락(立落)의 결과가 먼저 새어 나가서 폐단이 생기는 것은 오로지 응판소(應辦所)와 내외(內外) 공방(貢房)의 하속(下屬)들이 위군(衛軍) 및 시관의 수솔(隨率)과 감찰(監察)의 하인(下人)들과 부동(符同)하여 따로 놓아 둔 것과 낙축(落軸)을 사사로이 엿본 데에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전적으로 시관·감찰·응판관(應辦官)이 잘 방지하고 조처하지 못한 소치이니, 만약 이런 폐단이 생겨서 낭자한 소문이 난다면 당해 시관·감찰·응판관을 모두 엄중히 감죄를 논하여 익직(溺職)의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1. 위소(衛所)의 고군(雇軍)을 대신 세웠을 경우 당해 위장(衛將)을 파면한다는 것은 《통편》에 기재되어있는 것으로, 이 법을 거듭 엄중히 신칙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인(貢人)이 세운 군사가 만약 대신 들어온 자가 있으면 당해 공인은 형배(刑配)의 처벌을 내리고, 대신 들어온자와 처음에 이를 주장한 유생도 형률에 따라 조처할 것입니다. 1. 지금 이 두 개 항(項)의 여러 조목은 모두 과거의 규정을 거듭 밝힌 것인 바, 계하(啓下)한 절목은 사체(事體)가 더욱 중대하니, 녹명(錄名)하는 부관(部官)이나 강을 받고 시험을 치르는 시관이 지난날의 잘못된 버릇에 젖어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모두 제서(制書)를 어긴 율로 논죄해야 합니다. 1. 이밖에 법전에 기록되어 있어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금지 조항은 여기에 다시 조목별로 열거하지 않으니, 시소(試所)에서 법을 살펴 철저히 금지하고 범한 자는 형률에 따라 조처할 일입니다.】

[註 065]대비과(大比科) : 식년시(式年試).

[註 066]단부(單付) : 단망(單望)으로 관직에 임명함.

1825년 [음]순조 25년, 무신(武臣)이 가마 타는 것을 금지함

1829년 [음]순조 29년, 관북·영남·호서·호남의 진휼을 마침

--북관(北關)·영남(嶺南)·호서(湖西)·호남(湖南) 지방의 진휼(賑恤)을 마쳤다. 【북관(北關)의 경원(慶源) 등 4읍(邑)의 기민(飢民) 합계 5만 8천 6백 66구(口)에 대한 구호 물자로 절미(折米) 1천 9백 14석(石) 영(零), 호서(湖西)의 홍주(洪州) 등 47개 읍(邑)·진(鎭)·역(驛)의 기민 합계 33만 7천 5백 37명에 대한 구호 물자로 각종의 곡식 2만 9천 4백 98석(石) 영(零), 영남(嶺南)의 창녕(昌寧) 등 74개 읍·진·역의 기민 합계 1백 52만 6백 63명에 대한 구호 물자로 각종의 곡식 12만 3천 2백 74석 영(零), 호남(湖南)의 옥구(沃溝) 등 60개 읍·진·역의 기민 합계 67만 8천 3백 28명에 대한 구호 물자로 각종의 곡식 5만 3백 76석 영(零)이었다.】

1863년 [음]철종 14년, 대신들이 철종의 존호를 올릴 것을 청함

1875년 대한제국 첫 주일(駐日)사절 횡빈 도착

1888년 (고종25)군제 개편, 통위영·장위영·총어영의 3영을 둠

1895년 소설가 이기영 출생 『고향』 『두만강』

1898년 (고종35)`언덕 위의 뾰족집 종현성당(명동성당) 6년 만에 준공

--5월 29일, 한국 천주교의 상징 명동성당이 착공 6년 만에 준공됐다.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붉은 벽돌을 사용한 고딕양식의 건물, 더구나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높은 곳에 있어 사람들은 ‘언덕 위의 뾰족집’이라 불렀다.

건축을 처음 계획한 사람은 1882년 천주교 조선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블랑 주교였다. 블랑은 이승훈·정약전 등이 종교집회를 가졌던 조선 최초의 순교자 김범우의 생가터를 매입, 조정에 공사허가를 신청했다. 그러나 조정은 근처에 역대 조선왕조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이 있어 풍수를 침해할 수 있고 또 대궐이 보여 안 된다는 이유를 내세워 허가하지 않았다.

차일피일 늦어지다 착공에 들어간 것은 10년이 지난 1892년이었다. 이번에는 기술자가 말썽이었다. 양옥 건축가가 전무한 탓에 벽돌공과 미장공·목수 등을 중국에서 데려와 공사를 시작했지만 청일전쟁이 일어나 기술자들이 귀국하는 바람에 또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자금은 프랑스 신자들이 보내온 성금 5만프랑으로 충당했다.

준공 당시에는 이곳의 지명인 종현(鐘峴)을 따 ‘종현본당’으로 부르다가 광복 후부터 명동성당으로 불러오고 있다.

 

 

1902년 한성~개성 전화 설치건 공포(5.31. 일반 업무 개시)

1905년 형법대전 공포

1907년 헤이그 밀사가 평화 회의 참석을 거부당함.

1909년 무주에서 의병과 일본군 교전

1910년 장로교 새문안교회당 준공

1910년 시인 피천득 출생

1912년 손기정 마라톤 선수 출생

1923년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김영욱 출생

1926년 강신철·유기동 등, 조선 에스페란토 연구회 발회식 거행

1941년 허천강 수력 발전소, 흥남·청진에 송전 개시

1942년 일본 신임 총독에 고이소 구니테루 임명됨 (∼1944. 7).

1946년 의무교육 실시계획 발표

1946년 미군정청 신문 및 정기간행물 허가제 실시

1948년 민주 의원 해산

1949년 제1회 총인구 조사결과, 서울시 인구 140만명

1952년 김성수 부통령 사임, 이대통령 탄핵하고 국회사표 제출

1956년 한국전 참전국,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 결정, 31일 공산측에 통고

1957년 이효정 여사 한국 최초로 `나이팅게일` 기장 받음

1957년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 석탑에서 금동불상 15구 찾음

1960년 이승만 전 대통령 하와이로 망명

1960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신성모 작고

1961년 미 국무부, 한국의 새로운 군사정부에 협조 발표

1962년 항공창 준공

1962년 파주에서 미군의 한국인 린치사건

1966년 KAL기, 서울-오사카간 운항시작

1968년 김수환 주교,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

1968년 향토예비군법 법률 제2017호로 전문개정

1969년 천주교 안동교구 설립

1972년 박성철 북한 제2부수상 서울 몰래 방문 박정희 대통령·이후락과 회담

1972년 프랑스 파리서 세계 최고의 고려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 발견

1973년 통일혁명당 목소리방송 영어방송 신설

1974년 남북적 제7차실무대표자회의개최(판문점 중립국 감독위 회의실), 첫실무회의 7/10 열기로 합의

1974년 박정희 대통령, 「기업공개와 건전한 기업풍토 조성을 위한 특별지시」시달

1974년 북한, 만국우편연합(UPU)에 정식가입

1976년 커피에 담배가루·계란껍질 섞어 끓여 판 다방 4곳 폐쇄, 5명 구속

1977년 카터 미국 대통령, 한국피침 땐 핵사용 언명

1979년 카터 미국 대통령 주한미군 철수 동결 결정

1979년 한국인으로 에베레스트 처음 오른 고상돈 미국 매킨리봉 오르다 조난 세상떠남

1981년 〈중앙일보〉 연재 소설 「욕망의 거리」 작가 한수산 등 7명,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

1982년 한국원정대의 허영호, 세계 5위 고봉 히말라야의 마칼루봉(해발 8481m) 정복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발족

1984년 정주영 KOC 위원장, 제4차 남북한체육회담을 북한에 제의, 6월1일 북측 이를 거부

1984년 정부·여당, 농민 부담을 대폭 경감한 농지세제 개선안을 마련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저자 황석영, 서울 중부경찰서에 연행

1986년 제11차 유엔식량농업기구 아시아.태평양지역 농업통계회의 개막(∼6월3일, 서울)

1987년 대검찰청, 박종철 고문치사 조작사건 수사 결과 발표(치안본부 5차장 등 간부 3명이 범인은폐 조작 구속)

1987년 제30회 전국 역사학대회 참석교수 등 350여 명, 〈『한국민중사』 사건에 대한 우리의 견해〉 성명 발표

1988년 헝가리 통상사절단(40명), 공산권국가로는 처음으로 공식방한

1988년 모스크바 미소 정상회담-INF 폐기 비준서 교환

1988년 노태우 대통령과 3김 총재의 4자 회담 개최

1988년 서울지역노조협의회 창립(초대의장 배일도)

1988년 인권변호사 단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정식 발족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약칭 민변)이 1988년 5월 29일 결성됐다. 시국사건 변론을 도맡아 해온 한승헌 변호사 등 중진변호사 30명과 소장 변호사 16명은 인권상황의 개선과 실질적 민주화 조치에 기여할 수 있는 변론 조사 연구활동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기본 목적으로 민변을 결성했다.

민변의 모체는 정법회로, 정법회는 1985년 인권변호사 30여명이 모여 결성한 비공개단체로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아왔다.

1989년 광주 전남대·조선대 학생 5000여명 한밤까지 투석전 등 격렬시위. 학생·경찰 등 200여명 부상

1989년 수출입은행은 나이지리아의 철도차량 현대화를 지원, 원화 표시차관 80억5100만원을 제공

1989년 민영아파트 당첨권의 미등기전매를 금지 전매한 사람에겐 아파트 분양신청권을 제한

1989년 대우조선 기숙사 옥상에서 이 회사 노동자 이상모 씨가 노조탄압에 항의 분신 자살

1990년 국회, 민자당 단독으로 제149회 임시국회 개최, 의장에 박준규 의원, 부의장 김재광씨 선출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박무영 교수(64) 세계 최고의 경제성 식용 단백질 생산기술을 개발.

1991년 법무부, 무죄판결 받은 사람들에게 지급하는 형사보상금을 1일 3만2800원으로 인상, 92년 1월 시행

1992년 광주 전남지역 대학생 700여명,한양대 전대협 출범식 참석 위해 서울행 통일호열차 강제정차 탑승.

1993년 정부,북한의 특사교환제의와 관련해 6/5 통일각 에서 차관급 고위회담 대표접촉을 갖자고 수정제의

1993년 박종철 검찰총장, 슬롯머신사건과 관련 검찰 내 부인사비리에 대한 최종수사결과와 대국민사과문 발표

1993년 정부, 종합유선방송(CATV)의 방송구역으로 서울 21구역을 비롯 전국 116개 구역을 고시.

1995년 김영삼 대통령, APEC통신ㆍ정보장관회의 연설-고속정보통신사업에 600억달러를 투자 계획 밝혀

1995년 대법원, 아내의 정신병은 이혼사유가 안 된다고 판결

1996년 리처드슨 미국 하원의원, 북한 방문을 마치고 서울 도착, 방북결과 설명

1996년 북한 과학자 정갑렬, 소설가 장해성씨 귀순

1996년 제218차 일본군위안부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 여성을 위한 아시아국민기금 철회요구 항의서한 전달

1997년 공보처, 케이블TV 2차종합유선방송국(SO) 8개 도 23개 권역의 사업자를 선정발표

1998년 최기철․김상현․문국현․차준엽 유엔환경계획 글로벌500상 수상

1998년 현대석유화학(주), 용기의 내부검사를 위해 질소로 퍼지된 드럼에 입조 하다가 질식사고 발생, 3명 사망

1998년 김수환 추기경, 서울대교구장 사임

--서울 대교구장 취임 30돌을 맞은 김수환 추기경이 1998년 5월 29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기념미사를 끝으로 서울 대교구장을 사임하게 됐다. 김 추기경은 주교정년 75세였던 1997년부터 교황청에 사의를 표명했으며 로마 교황청은 이번에 이를 받아들였다.

1968년 5월 29일 46살의 젊은 나이로 제12대 서울대교구장이 된 뒤 숱한 현대사의 풍파를 직접 겪으면서 김 추기경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웃과 고통을 함께 나누고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명동성당을 핍박받는 사람들의 피신처이자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잡게 했다.

그는 특히 10월 유신, 광주 민주화운동 등 정치적-사회적으로 중요한 국면마다 권력을 비판하는 소신있는 발언으로 어둠 속의 한줄기 빛과 같은 구실을 해 왔다. 김 추기경이 서울 대교구장직을 떠났지만 정신적 지도자로서의 그의 위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추기경직도 계속 유지하고 있다.

2000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비공식 중국방문,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회담(29일)

2000년 이승만 전대통령의 정치고문 로버트 올리버 박사 타계

--한국의 독립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故이승만 대통령의 정치고문을 지냈던 로버트 올리버 박사가 2000년 5월 29일 타계했다. 91세였다. 올리버 박사는 메릴랜드주 체스터타운의 한 노인전용 주택에서 27일 뇌졸중을 일으킨 후 상태가 악화됐다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유해는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했다.

올리버 박사는 2차대전중인 1942년 미국 정부의 전시식량국 식량보관소장으로 근무하던 중에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 그는 일본이 한국에서 자행한 식민통치의 잔학상을 폭로, 미국 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도록 설득했다. 한국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지닌 그는 1943년부터 1993년까지 `잊혀진 나라` `한국 현대사` 등 모두 7권의 한국 관련 저서를 펴냈다.

2001년 올림픽대교 헬리콥터 추락 사고: 올림픽대교 중앙탑 상단 조형물 설치공사 중 육군 CH-47 치누크 헬리콥터의 로터가 조형물에 부딪혀 한강에 추락, 탑승자 3명 전원이 사망

2002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세계신문협회(WAN) 회장 선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이 2002년 5월29일 벨기에 브뤼헤에서 열린 세계신문협회(WAN) 55차 연례총회에서 임기 2년의 새 회장에 선출됐다. WAN 회장에 아시아 언론인이 선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홍 회장은 취임 연설에서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 지역의 언론자유 및 민주주의 발전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파리에 본부를 둔 WAN은 전세계 113개국 1만8000여 신문·통신사와 언론기관들을 회원으로 두고 있으며, 이번 총회에는 미국·영국·프랑스 신문협회 회장 등 900여명이 참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과 한국신문협회 회장인 한겨레신문 최학래 사장 등 14명이 참석했다

2003년 교육인적자원부, 대학정원 완전 자율화 방안 발표

2004년 경북 울진 80km 앞바다에서 진도5.0 지진

--5월29일 오후 7시 14분쯤 경북 울진 동쪽 바다 위 80㎞ 부근에서 리히터 규모 5.2 지진이 발생했다. 이어 30일 오전 4시 45분과 오후 9시 45분쯤에는 각각 울진 남동쪽 70㎞ 해상, 울진 북서쪽 10㎞ 지역에서 전날의 여진(餘震)으로 보이는 규모 2.0, 2.2 지진이 잇따라 일어났다.

이 지진은 관측을 시작한 1978년 이래 가장 큰 규모인 78년 9월 16일 속리산 지진(규모 5.2)과 비슷한 수준이며, 5.0 이상으로는 남북을 합쳐 다섯 번째다.

이 지진으로 울진·포항 등 경상도 일대에 건물이 흔들렸다는 신고가 들어왔고, 인천·서울 등 수도권에서도 “진동을 느꼈다” 는 제보가 접수됐다. 또 인근 울진원자력발전소에 비상이 걸렸고, 경북도가 지진에 따른 해일 발생을 우려해 경주·영덕·울릉 등 5개 시·군에 특별 경계 태세를 지시했으나 별다른 피해는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울진 지진’ 은 한반도가 유라시아판 경계에 있는 일본·대만 등과 달리 경계 안쪽에 있어 대규모 지진과 무관하다는 통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78년부터 2004년 5월까지 한반도 지진 발생 횟수는 621회. 이 중 주요 지진으로 분류되는 규모 4.0 이상은 34차례였으나 대부분 인적·물적 피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평균 10~20회에 머물던 연간 지진 발생 횟수가 90년대 중반 이후 30회를 넘어 2001년 43회, 2002년 49회, 2003년 38회 등으로 늘고 80년 이후 한 차례도 없던 규모 5.0 이상 지진이 지난해와 올해 연속 발생, 학계를 긴장시키고 있다. 한양대 지진연구소는 꾸준히 규모 5.5~6.0 지진이 수도권에 일어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상청 지진정보센터는 이에 대해 “97년 도입한 관측 장비가 예전보다 정밀, 미세한 지진도 잡아내기 때문에 빈도가 증가했다” 며 “향후 강진(强震) 발생 가능성에 대해 아직 확언하기 어려운 단계” 라고 설명했다.

2004년 재미동포 2세 강진씨 미 육군사관학교 수석 졸업

--재미동포 2세 강진(22·미국명 대니얼 강)씨가 지난달 29일(현지시각) 미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졸업했다.

미 육사 개교 이래 한인동포가 수석졸업의 영예를 안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어바인 출신의 강씨는 전체 졸업생 950명 가운데 정훈교육과 군사학, 체력 등의 종합 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아 이날 졸업식에서 럼즈펠드 국방장관으로부터 상장을 받았다.

1972년 이민한 강진복(59)·최경주(57)씨 사이에 2남인 강씨는 유니버시티고교에서 레슬링 선수와 배구 선수로 활약했고, 어려서부터 군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모친 최씨는 4일 “아들은 경희대 모국연수에 참가했고, 한글학교에 다니는 등 한국문화와 전통에도 관심이 많았다”며 “미 육사에서는 한국문화를 알리는 행사를 열기도 했다”고 전했다.

2005년 중견 사진작가 김영갑씨 루게릭병 악화로 별세

2005년 원폭피해2세로 원폭피해2세의 인권 위해 싸운 김형률(35세) 세상떠남

2005년 한국인 첫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고(故) 고상돈씨 동상 제막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던 산악인 고(故) 고상돈(高相敦)씨의 동상이 2005년 5월 29일 제막됐다.

고상돈기념사업회는 고씨의 26주기인 이날 제주도 한라산 1100고지 옆에 있는 고상돈 묘소 앞에서 동상 제막식과 함께 추모 제전을 가졌다. 대한산악연맹 제주도연맹과 제주도의 후원으로 마련된 이날 행사에는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을 비롯해 김영도 77에베레스트 원정대장과 대원, 도내 산악인 등이 참석했다.

제주에서 태어난 고상돈 씨는 지난 1977년 9월15일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으나 1979년 5월29일 미국 알래스카 매킨리봉(6194m)을 정복하고 하산하다 웨스턴 리브 800m 빙벽에서 자일 사고로 추락해 숨졌다

2005년 산악인 엄홍길씨가 이끄는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고(故) 박무택씨 시신수습 후 안치

--2004년5월 계명대 산악회 동료 4명과 함께 에베레스트에 도전하다 해발 8750m지점에서 박무택씨와 백준호(당시 37), 장민(당시 26)씨가 사망했다

산악인 엄홍길(45)씨는 사투 끝에 깎아지른 절벽에서 ‘눈사람’ 이 돼버린 박씨를 어루만졌다. 엄씨는 작년에 절친했던 박씨가 사고를 당한 뒤 불귀(不歸)의 상태가 되자 “시신만은 꼭 수습하겠다” 고 말했었다. 그 약속을 1년 만에 지킨 셈이다. 그러나 백씨와 장씨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엄씨가 이끄는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일행 15명은 이날 새벽 4시 30분쯤 해발 8300m 지점의 임시 캠프를 출발했다.

5시간 넘는 행군 끝에 해발 8750m 지점에서 박씨의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은 절벽에 얼어붙어 있었다. 대원들은 박씨의 몸을 뒤덮고 있는 얼음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3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박씨의 시신이 수습됐다. 원정대는 시신을 들고 임시 캠프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떼기 시작했다. 박씨의 체중은 70㎏ 정도였지만 꽁꽁 언 탓에 무려 100㎏ 가까이 됐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눈폭풍까지 몰아쳤다. 100m를 전진하는 데 2시간이나 걸렸다. 대원들의 호흡이 가빠졌다.

50m가 넘는 깎아지른 절벽구간(‘세컨드스텝’) 통과를 앞두고 엄 대장은 결단을 내렸다. 그 곳에 박씨의 임시 돌무덤을 만들어 시신을 묻기로 했다. 원정대마저 목숨을 잃을지 모를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초 계획은 베이스 캠프까지 운반해 화장하는 것이었다.

2007년 소설가 김국태씨 별세

2007년 ‘에버랜드 CB(전환사채)’ 항소심도 유죄

--‘에버랜드 전환사채(CB) 저가발행 사건’ 으로 기소된 허태학·박노빈 전 사장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가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30억원씩을 선고했다.

항소심은 두 사람에게 89억여원의 손실을 회사측에 끼친 혐의를 인정하고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죄를 적용했다.

서울고법 형사5부는 29일 오전 11시, 에버랜드 CB 저가발행을 공모해 회사에 970억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에버랜드 전 사장 허씨와 박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두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영결식,

--“지켜주지못해 미안하다”는 500만 노란 물결이 마지막 가는 길 분향

고(故) 노무현(盧武鉉)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2009년 5월 29일 엄수됐다. 노 전 대통령의 유골은 30일 오전 1시20분쯤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정토원에 도착, 반혼제에 이어 정토원 수광전에 안치됐다.

이에 앞서 경복궁 앞뜰에서 영결식이 엄수됐으며, 이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노제(路祭)가 열렸다. 이날 오전 11시2분 시작된 영결식에는 이명박 대통령 부부,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등 정·관계 주요 인사와 주한 외교사절 등 2500명이 참석해 고인의 넋을 기리고 권양숙 여사와 건호(36)씨·정연(34)씨 등 유족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한승수 국무총리국민장과 한명숙 전 총리가 국민장 공동장의위원장을 맡았다.

앞서 이날 오전 5시쯤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발인제가 열렸다. 발인제는 노 전 대통령의 유해가 빈소 밖으로 운구된 뒤 상주인 아들 건호씨가 술을 올리고 절을 하는 것을 시작으로 약 10분간 진행됐다.

경복궁에서 영결식을 마친 노 전 대통령 운구 행렬은 오후 1시20분쯤 서울광장에 도착했다.

노제는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고인의 영혼을 부르는 초혼(招魂) 의식으로 시작됐다. 국립창극단의 ‘혼맞이 소리’, 국립무용단의 ‘진혼무’, 안도현·김진경 시인의 조시(弔詩) 낭독, 안숙선 명창의 조창(弔唱), 묵념, 고인의 유언 낭독 등이 이어졌다. 시민들은 진행자 선창에 맞춰 “노무현 대통령 사랑합니다”하고 함께 외쳤다. 노제는 오후 2시쯤 노 전 대통령 육성으로 녹음된 그룹 ‘해바라기’의 노래 ‘사랑으로’를 추모객들이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운구 행렬은 이어 서울역을 거쳐 화장장인 경기도 수원 연화장으로 이동했다. 운구 행렬은 당초 노제를 마친 후 서울역까지 약 30분간 걸어서 이동할 계획이었지만, 추모 인파가 몰려 서울광장에서 서울역까지 가는 데 약 1시간20분이 걸렸다. 이후 서울광장을 메웠던 수십만명의 인파 대부분은 귀가했지만, 일부 추모객(경찰 추산 3만5000여명)은 “노 대통령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운구차량 행렬을 따라 걸었다.

운구 행렬은 예정보다 3시간 늦은 오후 6시5분쯤 수원 연화장에 도착했다. 화장을 마친 노 전 대통령 유골은 유족들이 마련한 향나무 유골함에 담겨 오후 8시55분쯤 봉하마을을 향해 떠났다.

2009년 삼성특검 삼성그룹 경영권승계를 위해 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저가로 발행해 아들에게 증여한 혐의로 기소된 이건희 전 삼성그룹회장 무죄 확정

2011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대학생 수백명이 '반값등록금 공약이행' 촉구 기습시위

2013년 류현진이 LA 에인절스 상대로 메이저 리그 첫 완봉승을 기록

2015년 재직중 연금보험료 더 내고 퇴직후 덜 받는 내용의 공무원연금개혁안 국회통과

2018년 변희재 미디어워치 대표고문 태블릿피시 조작설로 JTBC와 손석희 사장의 명예훼손 혐의 구속됨

201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한국인 관광객 35명 태운 유람선 허블레아니호 다른 유람선과 충돌 침몰 사망27명 실종1명 구조7명, 13일만(6.11)에 인양

2020년 삼성해고노동자 김용희(60세) 삼성사옥 앞 철탑(25m) 고공농성 시작(2019.6.10) 355일만에 땅으로 내려옴

2021년 울산광역시 울주군 신고리 원전 4호기에서 화재가 발생해 터빈이 정지되는 사고가 발생

2022년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정동년 작고.

 

 

 

1439년 215대 로마 교황 교황 비오 3세 출생

1453년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 사망

1453년 비잔티움 제국 멸망

1453년 오스만 터키 콘스탄티노플 점령 동로마제국 멸망

1454년 동로마제국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세상떠남

1500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작고

1594년 30년 전쟁에서 활약한 가톨릭 진영의 장군 파펜하임 출생.

1724년 피에트로 프란체스코 오르시니가 245대 교황에 선출

1864년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이 처음 멕시코 땅을 밟다.

1868년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 압둘 메지드 2세 출생.

1877년 중국 신강지역 무슬림 정권 통치자 야쿱 벡 사망

--중국 신강지역을 10여년간 통치하던 야쿱 벡이 1877년 5월 29일 사망했다. 독살설, 자살설, 급사설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학자들은 급사설을 유력한 사인으로 꼽았다.

천산산맥 서쪽 코간드 칸국 출신의 야쿱 벡이 신강지역 카쉬가르로 넘어온 것은 1865년 초였다. 신강 전역에서 청조의 지배가 무너지고 무슬림들이 세력을 나누어 할거하며 다투고 있을때였다. 카쉬가르의 한 지배자가 이웃한 코간드에 군사요청을 한 것이 야쿱 벡으로 하여금 신강지역을 밟게 한 주요 이유였다. 당시 신강지역은 1864년 무슬림들이 쿠차에서 청조의 지배에 항거하며 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해 신강의 전지역으로 무슬림 혁명의 불길이 확산되고 있던 시기였다.

신강지역 출신도 아닌, 더구나 코간드 칸국에서 활약하던 한 무명의 군관이 불과 수십명의 인원과 함께 파미르를 넘어 우역곡절 끝에 카쉬가르를 점령하자 신강지역의 무슬림 지도자들은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야쿱 벡은 다시 1년 만에 천산 남쪽의 양기히사르 야르칸드 호탄 등에 있는 여러 무슬림 세력들들을 모두 평정하고 1870년에는 북쪽의 악수 쿠차 우룸치 투르판 등까지를 손에 넣어 이슬람을 표방하는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자 당시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물론 서구열강들도 이를 놀라와 했다.

그러나 무슬림 봉기로 그곳을 떠났던 청나라가 10여년 만에 다시 신강지역 공세를 강화해 오자 전쟁보다는 외교로 해결하려했던 야쿱 벡이 후퇴를 거듭하던 중 이날 돌연사함으로 신강지역은 다시 중국 영토로 편입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80년 독일의 철학자 슈펭글러 출생

1894년 미국의 영화감독 슈테른베르크 츨생

1897년 미국의 작곡가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출생

1904년 캐나다의 정치철학자 유진 포시 출생.

1911년 포르투칼 헌법제정 국회의원선거서 공화당 승리

1912년 러시아의 니진스키 안무·주연 ‘목신의 오후’ 프랑스 샤틀레극장에서 초연,

--발레사의 한 획을 그음, 니진스키는 이전의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완전히 독창적인 표현과 대담한 동작으로 춤을 추어 ‘춤의 신’이라 칭송받고 ‘지구상 여덟번째 불가사의’라 불리기도 함

1913년 스트라빈스키 발레음악 `봄의제전` 공연

--디 아길레프가 이끄는 러시아 발레단이 피에르 몽퇴 지휘, 니진스키 안무로 이날 초연 무대에 올린 작품은 러시아 태생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발레음악 `봄의 제전`. 스트라빈스키는 이날 광경을 `자서전`에 적었다.

`봄의 제전`은 개벽이었다. 특히 리듬은 혁명이었다. 스트라빈스키에 한 세대 앞섰던 드뷔시같은 인상파 계열도 화성이나 선율의 창의성에 비해 리듬쪽은 둔감했다. 음이 안맞는 악기를 겹친듯한 다조성 불협화음, 목-금관을 키운 관현악의 색채감각과 파괴적 에너지. 제1부 `대지 예찬`, 제2부 `희생물`로 짠 35분짜리 `봄의 제전`은 음악적 구질서를 뒤짚는 반란이었다. `이교 러시아의 풍경`이란 부제 그대로 `봄의 제전`은 이교적 주술, 낯선 자극이었다.

`봄의 제전`은 전통적 조성과 주조를 흔들었다. 다른 조성들을 동시에 사용했다. 르네상스 이래 원근법에 기대던 공간인식을 깨고, 공간을 보는 여러 시점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아낸 피카소 방식과도 닮았다.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은 인상주의까지 포함한 낭만주의적 잔영을 음악사에서 쓸어냈다. 이후 전통 조성마저 해체한 무조음악, 전자음악, 미니멀리즘 등 온갖 전위적 사조가 만개하면서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도 `고전`이 됐다.

1914년 영국 에이레여제호 세인트로렌스 강에서 충돌로 침몰 사망1,024명

1914년 캐나다 여객선 엔플레스호 침몰 1012명 사망

1914년 미국-멕시코 강화조약 체결

1914년 네팔의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출생

1917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출생

1933년 미국 스탠다드오일사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화학 60년 기한으로 획득

1934년 국제연맹 주최 제3회 군축회의 시작

1941년 가수 빙 크로스비 `화이트 크리스마스` 녹음

1942년 미국 연극배우 존 배리모어 사망

1952년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일본의 가입을 승인

1953년 셀파 텐진 노르게이와 뉴질랜드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 오름

1953년 힐러리 세계최초로 에베레스트 등정

--5월 29일 오전 11시 반, 전인미답의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에 인간이 첫 발을 내디뎠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산악인 에드먼드 힐러리와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그 주인공.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서로를 연결한 로프를 풀지도 않은 채 감격의 악수를 나누고 힘차게 껴안았다. 산소통을 확인해보니 정상에 머물수 있는 시간은 15분 뿐. 둘은 영국ㆍ네팔ㆍ인도ㆍ유엔의 국기를 피켈에 매달고 사진을 찍은 뒤 힐러리는 십자가를, 텐징은 초코렛과 비스켓 등을 눈에 묻고 하산을 서둘렀다.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의 대관식을 사흘 앞두고 전해진 낭보에 영국 전역은 열광과 환호의 물결로 넘쳐났다. 그도 그럴것이 영국은 그동안 대영제국을 자부하면서도 북극은 미국의 피어리에게, 남극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에게 ‘최초’ 자리를 빼앗겨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있었다. 1921년이래 16회나 정복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그래서 영국인에게는 더더욱 값진 순간이었다.

지금까지 50년간 1200여명의 사람들이 힐러리의 뒤를 이었다. 에베레스트는 1865년에 높이가 8848m임을 처음 측정한 측량기사 조지 에베레스트에서 딴 이름이지만 2개의 이름을 더 갖고 있다. ‘세계의 여신’ 이라는 뜻의 티베트 이름 ‘초모랑마’ 와 ‘하늘의 우두머리’ 라는 뜻의 네팔 이름 ‘사가르마타’ 가 그것이다.

1956년 일-중무역협정 조인

1963년 동파키스탄 태풍으로 1만여명 사망

1979년 아프간 반군, 정부군과 전투 3개주 점령

1981년 중국 손문 부인 송경령 세상떠남

1982년 서독의 축구영웅 베켄바우어 은퇴

1985년 벨기에 브뤼셀의 보두앵 경기장에서 열린 잉글랜드 리버풀과 이탈리아 유벤투스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양팀 서포터의 충돌로 39명이 사망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나다.

1986년 유엔(UN) 아프리카 전체에서 1790만인이 기아에 직면하고 있다고 발표

1990년 옐친, 소련내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에 당선

--칠레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이 1994년 5월 29일 지병인 간암으로 사망했다. 81세였다. 에리히 호네커는 1960년대 동서독을 가르는 베를린 장벽을 구축한 장본인으로 동서간의 냉전을 주도해 온 당사자 중 한사람이다. 그는 18년 간 구 동독을 통치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나 통독 이후에는 재판정에 서는 등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거나 이국에서 떠돌다 결국은 망명지에서 최후를 맞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1912년 서독 지역에서 태어난 호네커는 14세 때 공산당 청년단체에 가입,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 1935년 나치당국에 체포 돼 10년 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나 2차대전이 끝나면서 동독 공산당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8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그는 동독인들의 서독 행 탈출이 줄을 잇자 이를 막기 위해 1961년 8월부터 베를린장벽 구축에 나서 이를 총지휘하다시피 했다. 1971년 공산당 서기장이 된 호네커는 1989년까지 18년 간 막강한 권력으로 동독을 통치했으나 동독인들의 서독 탈출이 절정에 이르는 등 소요가 일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인 그 해 10월 축출됐다.

이후 그는 동독 당국에 반역 혐의 등으로 체포됐다 풀려나 1991년 3월 모스크바로 망명을 떠났다가 1992년 7월 독일 당국에 소환돼 베를린 장벽 탈출자들에게 총살을 명령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러나 1993년 1월 베를린 법정은 그가 간암을 앓고 있어 더 이상 재판을 진행시킬 수 없다고 재판 중단을 선언했으며 이에 따라 그는 부인 딸과 함께 칠레로 다시 망명길에 올랐었다.

1991년 유고 크로아티아공화국 독립선언

1994년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 사망

--칠레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이 1994년 5월 29일 지병인 간암으로 사망했다. 81세였다. 에리히 호네커는 1960년대 동서독을 가르는 베를린 장벽을 구축한 장본인으로 동서간의 냉전을 주도해 온 당사자 중 한사람이다. 그는 18년 간 구 동독을 통치하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나 통독 이후에는 재판정에 서는 등 말년을 감옥에서 보내거나 이국에서 떠돌다 결국은 망명지에서 최후를 맞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1912년 서독 지역에서 태어난 호네커는 14세 때 공산당 청년단체에 가입, 공산주의 활동을 벌이다 1935년 나치당국에 체포 돼 10년 간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나 2차대전이 끝나면서 동독 공산당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8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그는 동독인들의 서독 행 탈출이 줄을 잇자 이를 막기 위해 1961년 8월부터 베를린장벽 구축에 나서 이를 총지휘하다시피 했다. 1971년 공산당 서기장이 된 호네커는 1989년까지 18년 간 막강한 권력으로 동독을 통치했으나 동독인들의 서독 탈출이 절정에 이르는 등 소요가 일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직전인 그 해 10월 축출됐다.

이후 그는 동독 당국에 반역 혐의 등으로 체포됐다 풀려나 1991년 3월 모스크바로 망명을 떠났다가 1992년 7월 독일 당국에 소환돼 베를린 장벽 탈출자들에게 총살을 명령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그러나 1993년 1월 베를린 법정은 그가 간암을 앓고 있어 더 이상 재판을 진행시킬 수 없다고 재판 중단을 선언했으며 이에 따라 그는 부인 딸과 함께 칠레로 다시 망명길에 올랐었다.

1999년 나이지리아 군부통치15년만에 올루세군 오바산조 민선대통령 취임

2001년 ‘보브 호프의 날’ 선포

--미국의 코미디언 보브 호프가 29일 98세 생일을 맞아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조촐한 생일파티를 했다. LA카운티는 이날을 ‘호프의 날’ 로 공식 지정했다. 그는 가족이 마련한 생일 축하 케이크를 받고 부인 돌로레스와 함께 출연한 영화를 보는 시간을 가졌다.

호프는 지난 1903년 영국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1907년 미국 클리블랜드로 이주한 뒤 80년 인생을 희극계에 바쳤다. 그는 지난해 6월 복통으로 입원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건강한 상태라고 홍보담당자 워드 그랜트는 전했다.

호프는 과거 “생일 케이크보다 케이크에 꽂는 양초 값이 더 비싸면 늙었다는 증거” 라는 농담을 한 적이 있었으나, 이번 생일 케이크와 양초 가격은 알려지지 않았다.

2002년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에 재선

--제프 블라터 FIFA(국제축구연맹) 회장이 극적으로 재선에 성공했다. 블라터 회장은 29일 서울 남산 힐튼호텔에서 벌어진 FIFA 회장선거에서 197개 참가회원국의 유효표 195표 중 139표를 얻어 이사 하야투 아프리카축구연맹 회장을 물리치고 1차 투표에서 승리했다.

이로써 재정 비리 의혹을 공개하는 등 반대파들의 호된 공격으로 위기를 맞았던 블라터 회장은 제9대 회장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 개막전까지 4년간 더 국제 축구계를 이끌 수 있게 됐다.

이후, 대회 개막에 앞서 가장 큰 행사인 회장 선거를 마친 2002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가 31일 오후 8시30분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프랑스―세네갈전을 시작으로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2003년 미국 희극배우 밥 호프의 1백번째 생일을 맞아 미국의 35개주 오늘을 ‘밥 호프의 날’로 선포

2003년 힐러리 경 에베레스트 정복 50주년 기념, 네팔서 축제

--세계 최고(最高)의 산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정복한 뉴질랜드 출신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Hillary) 경(卿)이 에베레스트 정복 50주년 기념 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팔순의 노구를 이끌고 네팔에 도착, 현지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힐러리 경은 1953년 5월 29일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와 함께 에베레스트에 올라, 모험가들의 오랜 꿈을 현실로 바꾸었다. 그 후 50년이 지나 83세가 된 힐러리 경은 수년간 준비해온 50주년 축제를 위해 지난 23일 건강한 모습으로 네팔에 도착, 국빈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노르가이는 1986년 세상을 떠나 이번 행사에 동행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번 50주년 축제에는 첫 여성 등정자인 일본인 다베이 준코와 산소통 없이 처음 정상에 선 오스트리안 페터 하벨러 등을 포함해 그동안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던 1300여명 중 400~500여명이 참석했다. 28일에는 에베레스트 등정길에 사고로 숨진 희생자를 기리는 묘목 식수 행사가 카트만두 서부 카카니에서 열렸다.

2003년 줄기세포로 심장·간·피부 만드는 ‘마스터 유전자’ 발견

--심장·간·피부 등 인체 모든 조직과 장기로 성장 가능한 줄기세포가 특정 장기로 분화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는 ‘마스터 유전자’를 영국과 일본 과학자들이 발견했다. 이에 따라 줄기세포 등을 이용한 심장·간 등 장기의 생산에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됐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배아줄기세포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영국 에든버러 대학 오스틴 스미스 교수팀과 일본 나라 과학기술연구소의 야마나카 신야 연구원은 29일 유전과학 전문지 ‘셀(Cell)’에 생쥐 실험을 통해 마스터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마스터 유전자란 일반 세포가 특정 장기나 조직으로 성장 발전하는 것을 조정·통제하는 일종의 사령탑에 해당하는 것으로, 스미스 교수에 의해 ‘나녹’으로 명명됐다. 워싱턴 포스트는 “이 유전자만 통제할 수 있다면 극단적인 경우 줄기세포가 아닌 일반세포로도 장기와 조직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유전학자들이 오랜 시간 동안 찾아 헤매던 ‘생물학의 성배(聖杯)’를 발견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논평했다.

2004년 ‘워터게이트 특별검사’ 콕스 사망

--1974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하야를 촉발한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특별검사로 활약했던 아치볼드 콕스가 2004년 5월 29일 새벽 미국 메인주 자택에서 사망했다.

하버드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 1973년 5월 워터게이트 담당 특별검사로 임명된 그는 백악관에 대해 닉슨 대통령의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하는 등 소신 있는 수사로 정평이 났다. 같은 해 10월 닉슨 대통령이 콕스 특별검사의 해임을 지시했으나 법무장관과 차관이 거부하고 한꺼번에 해임당하는 ‘토요일의 대학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는 한층 유명세를 탔다.

2007년 러시아, 미국 MD(미사일방어시스템) 뚫는 ICBM(대륙간탄도미사일) 성공

--러시아가 2007년5월29일, 핵탄두 6~10개를 실을 수 있는 사거리 1만㎞의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RS-24의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세르게이 이바노프(Ivanov) 제1부총리는 이날 “모스크바 북서쪽 플레세츠크 공군기지에서 RS-24 미사일을 발사, 탑재된 탄두들이 모두 동쪽으로 5500㎞ 떨어진 캄차카 반도의 목표물에 명중했다” 며 “이로써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어떠한 미사일 방어 체제도 극복할 수 있게 됐다” 고 말했다.

이바노프 부총리의 언급은 폴란드·체코에 미사일방어시스템(MD)을 구축하려는 미국을 겨냥한 것이다. 러시아는 미국이 동유럽 국가들에 MD를 구축하려는 것이 ‘러시아를 겨냥한 것이고 유럽의 안보 균형을 해치는 행위’ 라고 비난하며, 유럽 재래식무기감축협정(CFE)의 이행 중단 의사를 밝혀왔다.

러시아는 또 이날 “사거리를 늘린 전술 크루즈(순항) 미사일의 시험발사도 성공했다” 고 밝혔다. 러시아 언론들은 이 크루즈 미사일이 종전의 사거리 300㎞를 500㎞ 이상으로 늘려 고정 혹은 이동목표를 파괴할 수 있는 초음속 이스칸데르(Iskander) 공대지(空對地) 미사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러시아의 이번 미사일 시험발사 성공으로 미국과 러시아의 새로운 군비경쟁 시대가 도래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2009년 독일 여성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시신 90년 만에 발견

--로자 룩셈부르크(Luxemburg· 1871~1919)는 20세기 초반 공산주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폴란드 출신의 여성 사회사상가였다. 독일 공산당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설립한 핵심 인물인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 이래 최고의 두뇌’ ‘피에 굶주린 로자’ 라는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룩셈부르크는 1919년 독일 우파 민병대에 의해 총살됐고, 그의 시신은 베를린 운하 아래로 내던져졌다. 피살 5개월 뒤에 발견된 시신이 독일 프리드리히스펠데 공원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진짜 시신은 따로 있다는 주장이 줄곧 제기됐다.

그런 그의 시신이 90년 만에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발견됐다 이번에 그녀의 ‘진짜’ 시신을 발견했다는 주장은 독일 베를린의 샤리테병원 법의학과장인 미하엘 초코스(Tsokos)가 제기했다. 초코스는 최근 병원 부속 의학사박물관 지하에서 머리와 손발 없이 몸뚱이만 남은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그는 1919년부터 이 병원에 보관돼 온 이 시신의 육안적인 특징과 시신에 대한 부검 보고서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심을 품었다.

이후 엑스선 단층촬영을 실시한 결과, 이 시신이 소문으로만 떠돌던 룩셈부르크의 시신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생전의 룩셈부르크는 뚜렷한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150cm 단신이었고, 엉덩이뼈 이상으로 인해 양쪽 다리의 길이가 달라 평생 절뚝거렸다. 초코스가 발견한 시신은 룩셈부르크의 신체적 특징을 모두 보여주는 데다, 물에 잠겼던 흔적이 있었다. 또 키엘의 한 연구소가 시신에 대해 실시한 탄소연대측정도 룩셈부르크의 사망 시기와 일치했다.

2010년 열대성 폭풍 애거사 중남미 강타 홍수 산사태로 사망150여명 실종 수십만명

2010년 영원한 자유 찾아간 '이지 라이더', 데니스 호퍼 별세

--반항과 자유에 대한 갈망이 기치였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대표작인 '이지 라이더'의 감독이자 배우인 데니스 호퍼가 2010년 5월 29일 LA 인근 도시 베니스 자택에서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는 2009년 10월 전립선암을 진단받고 투병해왔다.

'이지 라이더(1969)'는 두 히피 청년의 여행을 기록한 로드 무비로 호퍼는 주연(빌리)·감독을 맡았고, 공동주연인 피터 폰다(웨트 역)와 시나리오까지 함께 썼다. 40만 달러가 채 안 되는 자비로 영화를 찍어 그 100배인 4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호퍼는 그 후 7편의 영화를 더 연출했지만 이전만 못했다.

제임스 딘과 '이유 없는 반항'(1955), '자이언트'(1956)에 출연했던 그는 이후 '지옥의 묵시록'(19 79), '블루 벨벳'(1986) 등 작가주의 영화와 '스피드'(1994) 등 상업 영화에 고르게 출연하며 성격파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다. 실제로도 괴팍한 성격으로 이름났으며, 연초에는 "나를 괴롭혀온 빅토리아(5번째 아내)의 남편으로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며 이혼 소송을 냈다. 하지만 결국 호퍼는 법적으로 '빅토리아의 남편'으로 세상을 떠났다.

2012년 '컨트리 음악의 전설' 덕 왓슨 별세

--'컨트리 음악의 전설'로 불리는 미국의 기타리스트 겸 싱어송라이터 덕 왓슨(89)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한 병원에서 결장 수술을 받은 뒤 후유증으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다.

왓슨은 태어난 지 1년 정도 지나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기타 연주 실력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왓슨은 그래미상을 7차례 받아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오르며 미국 컨트리 음악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렸다.

왓슨은 '딥 리버 블루스'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특히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은 1960년대 영국 그룹 '애니멀스'가 리메이크해 세계적으로 히트했으나 한국에서는 한때 "가사가 불건전하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이 곡은 한국에서도 김상국 등이 '해 뜨는 집'이라는 제목의 번안가요로 발표해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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