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 5월 30일
하동驛 어둠 끝에 깊숙히 몰려온 잠
새벽 달빛 젖어 떠는 저자 앞에 몰려온 잠
피곤한
가슴 안으며
바람 철렁 꽂히는 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우리들의 땅그늘에
절망의 생애 저 편 이미 죽어 우는 잠
젖어라,
거꾸로 내리는 빗방울
그 內面의 갈등의 잠.
말하라, 허리에 찬 匕首되어 빛나는 잠
웃어봐도 출혈하는 선명한 순수의 잠
세상은
사랑이 몰아치듯
침잠할 수 없는 잠.
- 이재창 「내면(內面)의 끝」 전문, (동서문학, 1987, 12월호)
“인간이란 격렬한 불안감 속에서가 아니면 권태로운 혼수상태 속에서 살기위해 세상에 태어난 것이지요.” “세상엔 언제나 지독한 고통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러나 일단 견뎌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차게 되네.“ -볼테르(1778년 오늘 세상떠난 프랑스 계몽주의사상가) 『깡디드』
*앵귈라 데이: 앵귈라
*카나리아 제도의 날 (Día de las Canarias): 카나리아 제도
*어머니날: 니카라과
*로드 공항 사건 희생자 추모일(Lod Massacre Remembrance Day): 푸에르토리코
*의회의 날: 크로아티아
1394년 [음]태조 3년, 정도전이 《조선경국전》·《불씨잡변》을 지음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 조선(朝鮮) 개국의 기본 강령(綱領)을 논한 규범 체계서(規範體系書). 내용은 정보위(正寶位)·국호(國號)·안국본(安國本)·세계(世系)·교서(敎書) 등으로 나누어 국가 형성의 기본을 논했고, 뒤이어 동양의 전통적인 관제(官制)를 따라서 육전(六典)의 관할 사무를 규정하였음.
1403년 [음]태종 3년, 군사 수가 29만 3,600명으로 집계됨
1422년 조선 3대 국왕 태종 작고
1463년 [음]세조 9년, 신숙주와 양성지에게 본국 지도를 편찬하게 함
1489년 [음]성종 20년, 《신찬 구급 간이방(新撰救急簡易方)》을 편찬함
1517년 [음]중종 12년, 문성 부원군 유순(柳洵) 죽음
1518년 [음]중종 13년, 경기에 지진이 일어남
1541년 [음]중종 36년, 유관(柳灌)이 좌찬성, 양연(梁淵)이 우찬성이 됨
1553년 [음]명종 8년, 제주에 왜변(倭變)이 일어남
1555년 을묘왜변이 발생
1608년 [음]광해 즉위년, 종묘(宗廟)를 중건함
1613년 [음]광해 5년,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서인(庶人)으로 만듦
1614년 [음]광해 6년, 해서 지방의 해적 출몰에 대한 방어책을 세움
1617년 [음]광해 9년, 왜의 수호(修好) 요청에 회답사(回答使)를 보냄
--【대마도(對馬島)의 왜(倭) 귤지정(橘智正)이 관백(關白)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수호(修好)를 요청하고 또 사신을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오윤겸(吳允謙) 등을 회답사로 보내었으며, 인하여 천조(天朝)에 주문(奏聞)하였다. 그 자문(咨文)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왕은 왜정(倭情)에 관계된 일로 삼가 주문합니다.
올 정월 22일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동래진 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 황여일(黃汝一)이 정문(呈文)을 보내었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왜(對馬島倭) 귤지정이 일본국왕(日本國王) 원수충(源秀忠)의 차견(差遣)을 인하여 장차 서계(書契)를 싸가지고 배를 타고 나올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모두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 치계를 받고서 원수충의 서계가 도착하였기에 펼쳐보니, 거기에 쓰기를 ‘일본 국왕 원수충은 조선 국왕 전하께 글을 올립니다. 해마다 대마 도주 평의성(平義成)에게 명하여 귀국의 사신을 맞이하여 오도록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다른 일이 아니라 두 나라 사이의 인호(鄰好)가 도탑고 인의(仁義)가 중함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평의성이 고하기를 「조선의 신사(信使)가 바다를 건너서 다시금 인호의 도타움과 인의의 중함을 보게 되었으니, 몹시 다행스럽고도 다행스럽다.」고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다 대마 도주 평의성의 서신 안에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대마 도주 평의성이 예조에 글을 보내었습니다. 평의성은 바로 평의지(平義智)의 아들로 본명이 정광(貞光)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그 서계(書契)에 쓰기를 ‘신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고 우리 전하께 이미 보고하였습니다. 해마다 저희 대마도에 조서를 내려주신 것을 생각하시어, 예전에는 잘못 되었고 지금은 올바르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되도록 속히 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신사를 맞이해 오기 위하여 귤지정을 차견하여 대기하게 하는 외에 다른 일은 없습니다. 나머지 사항은 귤지정이 모두 말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글을 받고서 의정부가 장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부터 대마 도주 평의지 등이 와서 성의를 보이면서 서계를 바쳤습니다. 그러면서 매번 가강(家康)의 지시를 받고서 통호(通好)하기를 요청한다고 말하였는데, 전후로 간절하게 요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자 해조 및 변방의 신하들이 번번이 「해상(海上)의 크고 작은 일들을 으레 날마다 중국 조정에 보고하여 왔는바, 이번의 이 신사에 대한 한 조항은 더욱더 가볍게 의논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를 핑계로 늦추어 온 지 이미 몇해가 지났습니다. 이번에 원수충이 가강의 뒤를 이어 그의 여세를 빙자해서, 반드시 우리 나라의 사신을 맞아오고자 하여, 이 일을 전적으로 대마도에 책임지웠습니다. 평의성은 입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아이로서 대마 도주의 직임을 승급받았는바, 오로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서 일본에서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대개 만력(萬曆)을묘년037) 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정성을 보이고 귤지정이 와서 간청함이 더욱더 간절합니다. 그리고 왜인들이 각자 말하기를 「대판(大坡)에 근거를 둔 평수뢰(平秀賴)가 역모의 뜻을 품어 일본 전역을 차지하고자 하였다. 이에 전하께서 이를 말미암아서 서쪽으로 토벌을 나가 일본 전역을 태산(泰山)같은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조선은 일본과 잘 지내고 있는데 어찌 신사를 차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신사가 만약 오지 않으면 대마도가 끝내 화를 당할 것이다.」고 하였으며, 또 「의홍(義弘)과 장정(長政)이 때를 틈타 동요하여서 우리 섬을 빼앗아 점거한다면 귀국에도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고, 또 「본도의 존망은 신사가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에서 만약 신사에 대한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면 화가 장차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보고해 온 바를 근거하고 정적(情迹)으로 참작해 볼 때, 지금 만약 한결같이 물리치면서 끝까지 거절하는 뜻을 보이면, 저들은 어쩔 방도가 없어서 반드시 점점 더 원한을 품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지 않아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지난 만력 30년038) 에 대마도 왜가 재차 포로로 잡아갔던 남녀들을 돌려보내면서 와서 말하기를 「가강(家康)이 화친을 빨리 성사시키라고 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절차를 갖추어서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예부와 병부 및 경략군문(經略軍門)에 자문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인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왜인들의 사정에 익숙한 자인 전계신(全繼信) 등을 차임하여 앞서서 본도(本島)에 들여보내어 저들의 사정을 엿보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2년에는 대마도에서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화친에 대해 말하였는데 오랫동안 분명하게 통보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가강이 화를 내어서 각 주(州)로 하여금 군장을 꾸리게 해 장차 출동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또 포로로 잡혀갔던 자인 김광(金光)이 구두로 보고하기를 「가강이 이미 삼위(三衛)의 왜장(倭將)을 확정하고 군사를 출동시켜 나오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보고받고는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자문을 보내어 전보(轉報)해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어 생각해보니 섬오랑캐의 실정을 탐지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에 승인(僧人) 송운(松雲)을 보내어 그로 하여금 귤지정과 함께 일본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사정을 상세하게 탐지하게 하였습니다. 또 만력 34년에는 가강이 서신을 보내고 또 사신을 보내었습니다. 저들의 속사정이야 비록 헤아릴 수 없지만 이미 그의 편지가 왔으니 회답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여우길(呂祐吉) 등을 차임해 보내어서 가강에게 회답하였습니다. 현재의 입장에서는 전항(前項)의 사례에 의거해서 별도로 원역(員役)을 차임해 일본 사신과 함께 일본으로 들여보내어, 원수충이 포로로 잡아갔던 사람들을 보내준 데 대해 보답해 주고 이어 그들의 사정을 기찰하는 한편, 중국 조정에 주문하여 상응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상의 내용으로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장계를 받고 신이 지난 만력 42년 11월에 의정부가 장계한 것을 조사해보니, 거기에 ‘경상도 관찰사 장만(張晩)이 정문(呈文)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 왜인 귤지정이 배를 타고 부산항(釜山港)에 도착해서 서계(書契)를 바쳤는데, 그 서계 안에 『대마도 태수 평의지는 삼가 예조에 아룁니다. 이번에 귀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는 일로 귤지정을 파견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성사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몹시 다행이겠습니다. 본도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으면서 걱정을 금할 수 없는 것은, 조선과 일본간의 일에 있습니다. 일이 만약 성사되지 못할 경우 끝내 본도의 화가 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받고는 해진관사(海鎭官司)로 하여금 본왜(本倭)에게 칙유하고, 이어 해조로 하여금 의리에 입각하여 회답 서신을 보내게 하는 외에, 진강유부(鎭江遊府)에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만력 43년 9월에 경상도 관찰사 권반(權盼)이 치계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마도 왜(對馬島倭)가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예조에 바치는 서계를 싸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이번에 귤지정을 파견한 것은 다른 일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귤지정과 함께 우리 전하를 만나보니, 변치 않고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신사가 만약 나오지 않을 경우, 저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바, 일이 성사되지 않으면 끝내는 화가 미칠 것입니다. 귀국에서는 단지 신사만을 보내 주시어 저에게 덕을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는 등의 말이 있었습니다. 이 글을 받고 이어 역관(譯官)을 시켜서 귤지정과 문답하게 하였습니다. 역관이 「이번의 이 서계 안에서 말한 바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가강이 국내의 분란을 평정하고 원수충이 국사를 전담하면서 귀국과 통호(通好)하여 신사를 맞이해 와서 그 덕을 볼 계획을 하였다. 도주는 아비의 직책을 승습받았으므로 가강의 뜻을 그대로 떠맡은 것이다. 내가 이번에 나온 것은 오로지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러 온 것이다. 귀국에서 만약 허락하지 않으면 나로서는 그대로 돌아가기가 곤란하다.」고 하였습니다. 역관이 다시 힐문하기를 「본국의 기무(機務)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일체를 중국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이것은 실로 너희 섬에서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니, 귤지정이 답하기를 「평의지(平義智)는 이미 죽었고 평정광(平貞光)은 나이가 어리다. 전에는 평의지가 양쪽 사이에서 잘 주선하여서 스스로 미봉한 것이 많았다. 현재의 상황은 지난날과 달라서 귀국에서 반드시 잘 참작해서 조처해 주어야만 뒷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보고에 근거하여 귤지정이 가강을 빙자하여 한 말을 조사해 보니, 말뜻이 몹시 교활하여 자못 공갈하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에 그 사이의 정적이 몹시 불측하다는 등의 내용으로 진강유부에게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成晉善)이 치계하기를 ‘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대마도에서 쇄환한 우리 나라의 포로인 신경난(辛景鸞) 등을 풀어보낸 연유에 대해 사유를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근거해서 의정부의 여러 배신(陪臣)들이 회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심문하였는데, 본인이 공초(供招)하기를 ‘일명 신경란(辛景鸞)이라 하고 나이는 40세이며, 경상도 양산군(梁山郡) 사람이다. 이어 일본의 정세에 대해 물어보니, 신경란이 말하기를 ‘내가 일본에 있을 때 들은 사실입니다. 평수뢰(平秀賴)가 총애하는 장수의 이름이 편동시정(片桐市正)이라고 하는데 가강이 몰래 그와 결탁해서 평수뢰를 독살하고자 모의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발각되어서 편동시정은 그의 형제 세 사람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가강에게 귀의해서는 큰 군사를 끌어모아서 평수뢰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가강측이 패배하여서 정병(精兵) 3만 명이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멸당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은 힘이 부족해서 항복을 하고는 손가락을 잘라서 부처께 맹세하고 하늘에 사죄하였으며, 맹세하는 글을 지어 배반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66주를 모두 들어 수뢰에게 바치고 식읍(食邑)을 보전하고 모자(母子)의 생명을 보전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그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가강은 문득 한 가지 계책을 내어 평수뢰에게 고하기를 「내가 늙어서 잘못 헤아리고 이번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다. 지금 비록 목숨은 보전하였으나 앞으로 무슨 얼굴로 사람들을 보겠는가. 만약 대판(大坡)의 성곽을 대략 무너뜨려서 마치 내가 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린 것처럼 꾸민다면 내가 사람들에게 핑계를 대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성이 무너진 곳은 내가 그날 즉시 공사를 벌려 수축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평수뢰가 승리한 기분에 도취되어 그가 말한 바를 믿고서 본성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리고는 가강이 평수뢰의 외숙(外叔)임을 인연하여 그대로 풀어주어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다음해 3월에 수뢰가 한 여자를 가강에게 보내어서 축성하는 역사를 무슨 이유로 지연시키는가에 대해 캐물으니, 가강이 거짓으로 응답하기를 「내가 듣기에 수뢰가 이미 스스로 성참(城塹)을 다 수축하고서 다시 싸우고자 한다는데,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답하기를 「그 말은 헛된 말이다. 대판의 성참은 아직까지 수축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강이 말하기를 「내가 전에 맹약한 것이 참으로 잘못된 것이었다. 현재 평수뢰가 싸우고자 하고 있으니, 내가 어떻게 응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일검(一劍)으로 사생(死生)을 결판짓겠다.」고 하고는, 이어 여러 곳의 군사를 불러모았는데, 먼저 헛말을 퍼뜨려서 아무아무 고을 아무아무 장수는 8월에 군사를 이끌고 모이기 바란다고 두루 고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비밀 장소에서 심복의 여러 장수들을 모이도록 하고, 군사를 일으킬 기일을 앞당겨서, 4월에 군사들을 통합하고 5월 1일에 수뢰와 전쟁을 벌렸습니다. 그 뒤 2일·3일·4일·5일·6일에 잇달아서 크게 싸웠습니다. 마침 평수뢰의 성 안에 간첩이 있어 안에서 호응하여서 먼저 화약을 쌓아둔 곳에 가서 그 곳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신호를 삼았습니다. 이에 평수뢰가 드디어 패하여서 그의 휘하 장수들과 함께 모두 자살하였습니다. 이러한 때 대마 도주 평정광(平貞光)이 마침 일본에 갔다가 그 전쟁에 참여하였습니다. 가강이 일본을 평정하고는 조선의 신사를 맞아오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평정광을 대마도로 돌려보내고 또 귤지정을 불러서 조선에 신사를 힘껏 요청하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보건대 본국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일본에 머물러 있는 채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자가 몹시 많은데, 모두들 말하기를 「신사가 들어오면 우리들이 살아서 돌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고 하였습니다. 또 부산에 왕래하는 관역(官譯)들이 물은 데 대해 각 왜인들이 말한 일본 내의 사정도 역시 신경란이 공초한 것과 대략 같았다고 사유를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또 만력 44년 3월에 경상도 관찰사 성진선이 치계한 데 의거해 보건대, 거기에 ‘동래진 병마첨절제사 황여일(黃汝一)이 정문을 보내었는데, 거기에 「대마도왜 귤지정이 항구에 도착해서 역학(譯學) 형언길(邢彦吉)을 마주 대하여 말하기를 『일본국에서 신사를 보내주기를 요청하면서 본대마도에다 모든 책임을 맡겼다. 그런데 귀국에서 허락하지 않고 있으므로 도주가 몹시 걱정하고 있다. 귀국에서 만약 한결같이 굳게 거절한다면 나 역시 돌아가서 그대로 일본에 보고하겠다.』고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유를 갖추어 아룁니다.’ 하였습니다.
이상의 치계에 근거해서 시행하던 사이에, 또 11월에 대마도에서 차임해 보낸 귤지정이 서계를 싸가지고서 왔는데, 그 서계에 ‘평의성은 삼가 예조에 글을 올립니다. 저는 여름이 끝나갈 때 강호(江戶)에서 물러나와 늦가을인 9월에 본도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 귤지정을 차임해 보내는 것입니다. 다음해 봄에 신사를 차임해 보내주신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습니까. 삼가 정문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변방의 신하로 하여금 전과 같이 유시하도록 보내는 한편 절차를 갖추어서 진강유부(鎭江遊府)에 보고하였습니다.
그 뒤에 또 대마 도주가 예조에 서계(書契)를 보내었는데, 그 안에 말하기를 ‘지금 빠른 배를 태워 귤지정을 다시금 차임해 보내면서 이처럼 급급해 하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대개 본도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있어서 선조(先祖)의 유훈(遺訓)을 준수하면서 번리(藩籬)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의 아버님이 불행스럽게도 명이 짧아서 죽었는데, 저는 지금 나이가 어려서 아마도 우리 전하께서 보전해 주기를 도모하지 않을 듯합니다. 지금 지난해에 신사가 나온 영광을 잊지 못하여서 전부터 강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조(貴曹)에서는 비단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하는 뜻을 보이기까지 하면서 「일이 상례(常例)가 아니어서 아마도 가볍게 의논하기 어려울 듯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세한 내용이 만약 우리 전하에게 전달된다면 반드시 주위에서 헐뜯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전례를 생각하건대, 귀국에서 송운대사(松雲大師)를 보냈었는데 이로부터 두 나라 사이가 평안하였습니다. 또 기유년039) 에는 일본 국왕의 사신이 바다를 건너갔었는데 지금 8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뒤로 귀국에서는 이와 같이 보답하는 예가 없으니, 이것은 예의가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지금 신사를 보내주기를 청하는 것은 인의(仁義)의 예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사세를 굽어살피시어 특별히 신사를 보내도록 허락하여 포로들을 쇄환해 가 생령(生靈)들을 안정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 역시 양쪽을 보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이렇게 급함을 알리는 것은 저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다시금 덕음(德音)을 내려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전례대로 출발시켰는데, 그 뒤에 또 부호군 정신도(鄭信道)가 아뢰었습니다. 그 대략에 ‘저의 친척인 전이생(全以生)과 박괘동(朴卦同) 등이 일찍이 왜적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었는데, 지난번에 대마도 왜인 편을 통하여 글을 보내 왔습니다. 거기에 쓰여 있기를 「저희들은 고향을 떠나고 부모와 헤어진 채 지금까지 죽지 않고 있으면서 날마다 고국에서 좋은 소식이 있기만을 기다려 왔습니다. 제가 살마주(薩摩州)에 가서 보니, 그 주에는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총 3만 7백여 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조총(鳥銃)과 창검을 쓰는 재주를 잘 익혔으며, 모두 본국으로 쇄환되어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갖추어 아룁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사실에 의거해서 지금 전의 사항들에 대해서 이미 정부에서 상의해 확정지워 모두 아뢰었습니다. 신이 삼가 상세히 따져보건대, 지난해에 가강이 소방(小邦)에 먼저 성의를 보일 때 일찍이 말하기를 ‘풍신 수길이 귀국을 침범할 때 나는 관동(關東) 지방에 있어서 나의 군사는 한 사람도 바다를 건너 귀국으로 간 자가 없었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나는 풍신 수길이 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이미 포로로 잡아간 남녀들을 쇄환하였고, 계속해서 선왕(先王)들의 묘(墓)를 파헤친 도적들을 잡아보내면서 성의를 보였습니다. 지난번에 소방에서는 이상의 사실들에 대해 천조에다 사유를 갖추어 주문하였으며, 이어 원역(員役)을 차임해 보내었습니다. 얼마 전에 가강이 대판을 병탄하고 수충(秀忠)이 여러 섬들을 평정하여 형세를 키우고 점차 강성해져 스스로 소방의 원수를 죽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몇년 사이에 신사를 청하는 사신이 날마다 오고 있는데, 대개 그의 본심은 신사의 위세를 빌려 과시하고자 하는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교활한 정상은 아마도 헤아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일에는 법도대로 할 것과 임시방편으로 할 것이 있고, 때에는 편리할 경우와 그렇지 않을 경우가 있는 법으로, 전에 원역(員役)들을 차임해 보낸 전례에 의거해서 그 편에 보답해 주어 기미(羈糜)하는 뜻을 보이고, 겸하여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을 쇄환해 오고, 이어 다시금 저들의 실정을 탐지하고자 하는 바,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합니다. 이를 위하여 다시금 정부의 배신들을 신칙해서 좋은 쪽으로 별도로 시행하는 외에, 왜정(倭情)의 사리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삼가 사유를 갖추어 주문합니다. 삼가 상주합니다."
1698년 [음]숙종 24년, 도적 떼 중 자수하는 자는 죄를 면하여 줌
1741년 [음]영조 17년, 관서 지방에서 전염병으로 1,000명이 죽음
1775년 [음]영조 51년, 충청도 진잠(鎭岑)의 대동미(大同米)를 포(布)로 내게 함
1775년 [음]영조 51년, 이조 판서 조엄(趙曮)을 불러도 오지 않자 영종에 유배함
--이조 판서 조엄(趙曮)이 패초(牌招)를 어기니,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처음에는 영종(永宗)에 외직(外職)으로 보임(補任)하도록 명했다가, 곧 영종에 귀양보내게 하였다. 특별히 정상순(鄭尙淳)을 제수하여 이조 판서로 삼았다.
1777년 [음]정조 1년, 매년 세입이 증가하는 데에도 비용이 부족함
1781년 [음]정조 5년, 각 도 모환(牟還)의 4분의 1을 창고에 남기도록 함
1809년 [음]순조 9년, 평안 감사가 강계부의 방군 둔전 절목(防軍屯田節目)을 아룀
--평안 감사 서영보(徐榮輔)가 강계부(江界府)의 방군 둔전(防軍屯田)의 절목(節目)을 아뢰었다. 【1. 동쪽의 대라신동(大羅信洞)에서부터 서쪽의 자성동(慈城洞) 종파(終把)까지 둔전(屯田)을 창설하게 하되, 강(江) 가의 평평하고 넓은 지역과 적로(賊路)의 요해처(要害處)에다 개간(開墾)할 것을 허락한다. 위로 대라신동에서 아래로 자성동 동구(洞口)에 이르기까지가 이른바 강가의 평평하고 넓은 지역인데, 강변(江邊)에서 산밑까지 거리가 거개 2, 3리(里), 또는 3,4리가 되니 아울러 산밑의 평야(平野)까지 개간(開墾)하게 한다. 그리고 산밑의 동구(洞口)에는 표(標)를 세워 경계(境界)를 정하고 이 표를 범하는 일이 없게 함으로써 삼장(蔘場)을 보호하게 하며, 만일 이 표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범변율(犯邊律)로 논한다. 그리고 당해(當該) 차지(次知)와 감관(監官)도 아울러 엄히 다스린다. 1. 본부(本府)의 방졸(防卒) 1천 4백 53명 가운데 7백 명까지를 한정하여 건장하고 근착(根著)이 있는 군졸을 모집하되 한결같이 경군문(京軍門)의 예(例)에 의거 매달 6두(斗)의 요미(料米)를 설치하여 입방(入防)함에 있어 순요(巡瞭)에 전념하고 돌려가면서 농사를 짓게 하여 한편으로는 적을 막는 대비책으로 삼고 한편으로는 둔전(屯田)에 힘쓸 수 있는 방안으로 삼는다. 1. 대라신동에서 자성동 종파(終把)까지 거의 6백 리가 되는데, 이를 60파(把)로 배정(排定)하면 10리마다 1파를 설치하는 것이 된다. 1파 안에는 장교가 한 사람에 군졸 6명을 배정한다. 대라신동에서 추하구비(楸下仇非)까지는 곧 수상(水上)의 배파지(排把地)이고 하장항(下獐項)에서 자성동에 이르기까지는 곧수(水下)의 배파지이다. 수상의 3백 리 안에는 도방(都防) 10개소를 설치하고 수하 3백 리 안에도 또한 도방 10개소를 설치하는데, 1소(所)에 도방장(都防將) 1인, 차방장(次防將) 1인, 군졸 8명을 두어 30리 안에 배열한 파장(把將) 3인과 파졸(把卒) 18명을 통령(統領)하게 한다. 수상·수하의 도방장 가운데 각기 근간(勤幹)한 자 1인을 가려서 수상·수하의 둔전 도감관(屯田都監官)으로 차출(差出)한다. 수상·수하의 차방장은 아울러 둔전 감관(屯田監官)에 차임하여 각각 자신의 신지(信地)에서 농작(農作)을 권면하고 적의 방어에 대비하게 한다. 수상·수하 각파(各把)의 부량군(負粮軍)이 각각 85명으로 도합 1백 70명과 파로(把路)의 전발군(傳撥軍)이 17명인데, 이들도 부량하고 전발하는 여가에 들어가서 농작을 하게 한다. 수상·수하의 둔전에 관한 일은 오로지 둔전 도감관에게 책임을 지운다. 1. 강(江)가 각파(各把)는 본부(本府)와의 거리가 거의 6백여 리가 되는데, 혹 5백여 리가 되는 곳도 있다. 본부(本府)의 백성과 다른 고을 백성을 막론하고 방졸(防卒) 이외의 사람들을 허접(許接)케 하여 간사한 폐단을 생출(生出)시킬 경우에는 실로 선후책(善後策)이 없다. 따라서 수졸(戍卒)의 정액(定額) 이외에는 평민(平民)은 일체 입경(入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평민 가운데 스스로 군졸이 되기를 원할 경우에는 생김새를 적은 기록을 만든 다음 입송(入送)시켜 개간하게 한다. 그리고 방졸(防卒)은 매명(每名)에 본디 보인(保人) 2명이 있어 입방(入防)할 적마다 이른바 보인(保人)이 방졸의 행구(行具)를 도와주어 보내게 되어 있는데, 근래의 보인들은 거개 허액(虛額)으로 된 것이 이미 오랜 세월이 되었다. 평민(平民)들 가운데 만일 보인이 되어 둔전(屯田)에 들어가서 농사짓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보인안(保人案)에 그 이름을 기재하고 즉시 입송(入送)시켜 힘을 합쳐 농사를 짓도록 권면한다. 1. 방량(防粮)의 원수(元數)는 본래 부족하기 때문에 입방(入防)하는 숫자를 7백 명으로 한정하였으나 이 7백 명을 6백 리(里)의 땅에 배파(排把)하면 매10리마다 1파(把)가 되는 것을 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마치 대열에서 떨어진 기러기와 듬성듬성한 별과 같아 더없이 중한 변경(邊境)의 일이 매우 허술하게 된다. 이번에 이 둔전을 설치한 뒤 추방군(秋防軍) 가운데 스스로 예부(預赴)하기를 원하는 사람과 평민으로서 군졸이 되어 들어가 농사짓기를 원하는 자와 보인이 되어 농사짓는 것을 돕기를 원하는 자의 경우는 그들이 스스로 농량(農粮)을 판비(辦備)하여 가지고 가기 때문에 또 방량을 지급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실로 많을수록 좋은 계책이 된다. 이들의 들어가는 숫자를 계산하여 각파(各把)에 첨부(添付)시켜 총총히 열거(列居)하게 함으로써 전처럼 듬성듬성한 폐단이 없게 해야 한다. 1. 추파(楸坡)·종포(從浦)·화괴(花怪) 3진(鎭)의 만호(萬戶)와 마마해(馬馬海)의 권관(權管)은 이들을 인솔하고 각기 둔소(屯所)로 들어가서 절제(節制)를 신명(申明)시킨 뒤에 본진(本鎭)으로 돌아간다. 6월 초에는 전례에 의거 들어가서 추방(秋防)과 농수(農戍)의 절차에 대해 각별히 살펴 신칙시킴으로써 털끝만큼도 허술한 점이 없게 한다. 그리고 각파(各把)에서 철방(撤防)할 적에 또한 철환(撤還)토록 한다. 1. 매년 입방(入防)하는 기한은 곡우일(穀雨日)로 정하고 철방하는 기한은 한로일(寒露日)로 정한 것은 옛날부터 정해진 준례이다. 그런데 만근 이래 부방(赴防)이 너무 늦고 철수(撤戍)는 또 너무 일렀다. 변정(邊政)이 이미 중하고 농무(農務)는 시기가 있는 것이니, 이제부터 시작하여 고규(古規)를 신명(申明)시켜 입방일(入防日)은 곡우일로 정하고 철방일은 한로일로 정하여 영구히 어기지 말게 한다. 1. 수졸(戍卒)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생김새를 적은 기록을 만든 다음 경작(耕作)할 것을 허락하고 보인(保人)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원액(元額)에 기입하고 경작 할 것을 허락한다면 들어가서 경작하는 사람이 모두 군졸이 되고 개간한 토지는 모두 군전(軍田)이 되게 된다. 이미 군전이 되었으니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을 일체 금단시켜야 한다. 이렇게 법식을 정한 뒤에 만일 무릅쓰고 범법(犯法)하여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당사자를 율(律)에 의거 엄히 처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해당 감관(監官)과 도감관(都監官)도 아울러 무겁게 다스린다. 1. 금년에는 농사를 짓는 것이 이미 철이 늦은 뒤에 있었으며 방군(防軍)과 보인(保人)의 숫자도 많지 않다. 그러나 내년 이후에는 의당 농사철 이전에 입거(入去)시켜야 한다. 방수(防守)를 배정하는 숫자의 체당(替當)과 잉번(仍番) 등의 절차에 대해서는 다시 더 상량(商量)하여 법식을 정한다. 1. 방졸 7백 명에 대한 매달 매명당(每名當) 6두료(六斗料)씩으로 통계(通計)하면 1년치가 3천 3백 60석(石)이 된다. 금년에는 3월서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6개월의 요미(料米)를 합치고 아울러 여곤파(閭閫把)의 요미까지 계산하면 이에 1천 8백 45석(石)이 된다. 그런데 순영(巡營)에서 획급(劃給)하는 것은 단지 1천 70석(石) 뿐이니, 부족한 숫자가 7백 75석(石)이나 된다. 지금이 7백 75석은 전혀 다른 데서 조처할 수 있는 방도가 없으니, 본부(本府)의 창고에 유치되어 있는 것을 대하(貸下)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내년 가을 수졸(戍卒)들의 농곡(農穀) 가운데서 봉납(捧納) 수쇄(收殺)토록 한정한다. 금년은 절서(節序)가 이미 늦었으니 매파(每把)에 6명의 군졸이 마음을 오로지하여 요망(瞭望)하고 순라(巡邏)하면서 교대로 나무도 베고 땅을 일구는 즈음에 이미 힘이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아서 시기를 놓친 탄식이 있으니, 금년의 둔농(屯農)은 반드시 뜻대로 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금년 9월부터 내년 2월까지 매달 지급할 요미(料米)의 자본을 사세(事勢)에 의거 헤아려 보건대 봉치(捧置)할 곡식이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이번 9월에서부터 2월까지의 방료(防料)는 우선 임시로 정지시켰다가 내년에 제때에 농사를 지어 농곡(農穀)에 여유가 있은 뒤에 비로소 매달 요미를 지급하게 한다. 1. 이번의 이 둔전(屯田)은 모두 나무를 베어내고 일구어 놓은 땅이니, 도끼 하나 호미 하나면 모두 농기(農器)가 되기에 충분하다. 금년과 명년 안에는 농우(農牛)를 세운다고 해도 애당초 쓸 데가 없으니, 우선 재명년(再明年)을 기다려 수상(水上)·수하(水下)에 둔우(屯牛)를 각각 20척(隻)씩을 사세상 설치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드는 우가(牛價)는 우선 민고(民庫)에서 대하(貸下)한 뒤 농곡(農穀)으로 차차 충보(充報)하게 한다. 우척(牛隻)의 수효에 대해서는 미리 정할 수 없고 임시(臨時)하여 헤아려서 가감(加減)하는 것이 마땅하다. 1. 강가 6백 리(里)는 모두 사람이 거처하지 않는 곳이므로 추수(秋收)한 뒤에는 방졸(防卒)을 으레 철환(撤還)시켜야 하는데, 곡물(穀物)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금년에는 제반 일들이 이미 초창(草創)에 관계되어 농곡(農穀)의 다소(多少)를 헤아릴 수가 없으니, 우선 편의한 대로 구처하게 한다. 수상은 후주(厚州)의 지경(地境)에 곡식을 가져다 두고수하는 자성(慈城)의 지경에 가져다 두게 하되, 내년 이후 농작의 선성(善成) 여부를 살펴서 곡물이매우 많을 경우에는 운수(運輸)하든지 창고(倉庫)를 설치하든지간에 다시 상량(商量)토록 한다.】
1861년 [음]철종 12년, 정원용(鄭元容)이 다시 영의정이 됨
1876년 (고종13)수신사 김기수 일행 일본 에도(지금의 도쿄) 도착
1894년 [음]주한 일본 공사 오오또리(大鳥圭介), 조선 내정 개혁안을 정부에 제출
1901년 서울-충주, 부산-창원 전선 개통
1907년 각 지방에 금융조합 설립
1908년 신채호, 『을지문덕』 발행.
1910년 독립운동가 양진여 선생 순국
--전남지역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서암 양진여 선생이 1910년 5월 30일 순국했다. 전남 광산군 서창면에서 태어난 선생은 1907년 30여명의 동지를 규합, 전남 담양군 대치산을 근거지로 의병을 일으킨 뒤 1909년 8월 일본군에 체포되기까지 수십~수백명의 의병을 이끌고 광주, 담양, 장성 등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일본군에 체포된 뒤 1910년 5월 30일 대구 형무소에서 “이 한 목숨은 아깝지 않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유감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정부에선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10년 일본육군대장 데라우찌 마사다께(寺內正毅) 3대 통감 취임
1921년 대한민국의 화가 임직순 출생.
1924년 노백린 임시정부 참모총장 취임
1930년 5.30사건 발생, 김근 등 간도의 공산당원 5백여명 반일폭동 60여명 피살당함
--5월30일,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 공산당원들이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류사오치의 지휘 하에 5년 전의 상하이 총파업을 기념한 대대적인 무장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폭동을 주도하고서도 중국 공산당의 이름을 빌린 것은 `한 나라에 공산당은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이른바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방침 때문이었다. 간도에는 1926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이 있었지만 코민테른의 결정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흡수됐다.
전날 밤부터 시작된 폭동은 전신ㆍ전화선을 절단하고 철도ㆍ교량 등을 파괴했으며 일본 영사관과 경찰서를 습격하고 반일독립의 선전전단을 뿌리면서 곳곳에 불을 지르고 물건을 약탈했다. 일본은 함경도 회령 주둔 75연대를 급파해 만주군벌군과 합동으로 진압에 나서 85명을 검거했지만 폭동은 단속적으로 1년간이나 계속돼 일본군을 괴롭혔다. 세칭 `간도 5ㆍ30폭동`이었다.
1939년 토월회, 단성사를 직영 극장으로 정함
1939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안공근 작고.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 무소속 126석 민주당 23석 한청 10석 국민회 10석
--제헌국회에서 새로이 제정한 ‘국회의원 선거법’ 에 의해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1950년 5월 30일 실시됐다.
제헌국회 선거가 한시적인 미군정 법령에 의해 실시된 데 반해 2대 국회의원 선거는 제헌 국회의원들이 제정한 우리의 법령에 의해 실시되었다는 점과 제헌국회 구성에 불참했던 중도파 정치세력도 참여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투표율은 91%였으며 선거결과 210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됐다. 무소속 126석,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이 각 24석, 국민회 14석, 대한청년단 10석, 대한노동총연맹 3석, 사회당 2석, 민족자주연맹이 1석을 확보했다.
이번 선거는 우익보수세력과 중도세력이 대결하는 양상을 보였다. 여당인 대한국민당과 거대 야당인 민주국민당이 유효투표의 10%도 얻지 못한데 비해 무소속의 득표율은 63%에 달했다. 이는 아직 정당정치가 뿌리내리지 못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1953년 에버레디 계획 확정, 유엔군정 수립, 이승만 제거
1954년 국문 해득자, 전 국민의 90%로 집계
1958년 이창훈 제3회 아시아경기대회 마라톤 우승
--5월 30일 제3회 동경아시안게임 마라톤경기에서 이창훈 선수가 2시간32분55초로 아시아대회 신기록을 수립하며 1위로 입상했다.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뒤 처음으로 일본인과 대등하게 그것도 그들의 수도인 도쿄에서 기량을 겨루는 한판 승부였기 때문에 국민들은 더욱 환호했다.
이창훈 선수는 임종우 선수와 계속 1.2위 순으로 달리다가 33km지점에서부터 막판 스퍼치를 올려 우승했다. 임종우 선수는 2시간46분13초로 4위를 차지했다. 국민들은 가정에서 혹은 거리에서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현지중계방송을 듣고 감격에 넘치는 만세를 부르며 이선수에게 감사와 축복을 보냈다.
1961년 김병삼 내각 사무처장, 병역 기피 공무원 3천 명 적발·해면 조치 발표
1962년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증권거래소 운영자금으로 180억환 한도의 단기 융자 승인
1962년 정치정화위원회 정치활동적격판정자 1,336명 공고,
--정치활동정화법이 3.16 공포되자 윤보선 대통령이 불만표시하고 사임,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3.24 대통령 권한대행 됨, 4.15에 최고회의가 4,374명의 정치활동정화법 해당자 발표
1964년 서울대 문리대생 40여명 단식 시작
1966년 간척 농지 분배 - 한국 최초, 전남 장흥군에서 한 세대에 3000평씩 908세대.
1968년 김종필 공화당의장 의원직과 의장직 사직 정계은퇴선언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1968년 5월 30일 공화당을 탈당, 모든 공직을 떠나 정계 일선에서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씨는 이날 오전 당사에서 열린 당무회의에 출석, 회의가 끝날 무렵 일생에 관한 중대한 결정을 내릴 것을 밝히고 이날 오후 탈당하고 일체의 공직을 사퇴하는 중요한 절차를 밟았다.
자의반 타의반이라고 표현한 김종필씨의 두차례 외유파동, 사무국 개편과 당헌개정파동, 항명파동, 삼성 재벌밀수 사건, 김두한 의원의 오물투척사건 등 정치적 사건의 와중에서 당내 주류와 비주류간에 벌인 파쟁의 결과였다.
김 의장의 퇴진에 반발한 주류계의 일부가 구명을 위한 서명날인 운동을 벌였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이밖에도 영천, 안동, 대구서·북구, 광주, 대전 등지에서도 김 의장의 은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여의도에서 열림
1975년 전방 방위벽 구축 완료
1979년 신민당 전당대회 김영삼 총재 당선
1980년 서강대생 김의기, 기독교 회관에서 광주진압 규탄 유서배포 후 투신 자살
1985년 여의도 대한생명 63빌딩 준공
1985년 미 국무부, 한국정부에 미 문화원 농성 학생에 대한 배려 요구
1985년 신민당, 국회에 광주사태 진상조사위한 국정조사 결의안 제출
1985년 목장주 가족 납치강도-3억원요구 경기도 광주 지성사슴목장
1986년 이민우 신민당총재, 노태우 민정당대표와 회담. 국회내에 헌법특위를 구성키로 합의
1987년 상공부, 87년 수출입공고 발표(7월부터 170개 품목 수입자유화)
1987년 18개 여성단체 KBS시청료거부 범시민운동연합 결성
1988년 사마란치 IOC위원장, 북한의 서울올림픽공동주최 주장은 올림픽헌장에 위배-밝혀
1988년 재무부, 전국 규모의 생명보험회사 신설 허가 기준 확정 발표
1988년 김재순 국회의장 피선
1989년 정부는 국제수지 흑자관리를 위해 허용키로했던 개인의 해외부동산 투자를 보류할 방침
1990년 박준규 국회의장 피선
1990년 평화민주당, 10대 재벌이 자진매각 발표한 토지 1,570만평 대부분이 쓸모없는 땅이라는 조사결과 발표
1991년 리크루트, 91년 2월 대학(4년제) 졸업자 가운데 7만6500명이 취업, 사상 최고인 51.9% 기록 발표
1993년 남북한발해유적발굴조사단,러시아 연해주 발해 사원지에서 고구려 전통을 계승한 봉황등 발굴 성공
1993년 산업연구원, 석탄산업 합리화사업이 시작된 89~92년 사이 탄광 251곳 이 폐광했다고 밝힘.
1994년 한ㆍ슬로베니아, 양국의 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
1994년 국민.신정당 대표, 기자회견을 갖고 양당 통합을 선언
1994년 울진 핵폐기장 및 핵발전소 건설반대 울진군민 총궐기대회
1995년 국방부 제86우성호 북한경비정에 끌려갔다고 발표
1995년 아.태경제협력체(APEC) 통신장관회의, 정보 통신협력 강화등 `서울선언문'을 채택하고 폐막
1995년 남북한.중국.러시아ㆍ몽골, 두만강 경제 특구 개발을 위한 3개 협정에 가서명
1995년 국방부, 제86우성호 북한경비정에 끌려갔다고 발표
1996년 이성환 과천시장 수뢰, 구속
1997년 한신공영 법정관리 신청
1997년 국내 첫 소비자파산 선고
1997년 김영삼 대통령 1992년대선자금 관련담화 발표
1998년 제13대 서울대교구장과 제9대 평양교구장 서리에 정진석 주교 임명
--5월 30일 교황 요한 바오로2세가 제13대 서울대교구장과 제9대 평양교구장 서리로 청주교구장 정진석 주교를 임명했다. 정진석 대주교는 1931년 12월 7일 4대째 내려오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계성보통학교 중앙중학을 졸업했다. 서울대 공과대 1학년 때 6.25를 맞아 학업을 중단했다가 다시 1954년 4월 서울 가톨릭대학 신학부에 입학했다.
1961년 명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한 후 서울 중림동 성당 보좌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 39세 나이에 교황 바오로6세로부터 청주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돼 `한국 가톨릭교회 최연소 주교`라는 기록을 낳았다. 정진석 대주교는 직관력과 신념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최대 관심사는 북방선교와 가정성화(家庭聖化)이다.
1998년 탤런트 김혜자, 선명회 후원자 대표로 방북
--탤런트 김혜자(57)씨가 선명회 후원자 대표자격으로 30일부터 6월 2일까지 북한을 방문했다
김씨는 한국선명회 오재식 회장과 국제선명회 관계자 3명과 평남평원 등 6개 지역에서 국제선명회측이 운영중인 국수공장을 둘러보고 방문중 국제선명회의 대북지원 문제도 협의하였다
김씨는 그동안 선명회 후원자로 아프리카 소말리아 등 극심한 기아를 겪고 있는 현장을 다녀오는 등 국제적 지원활동에 참여해왔다
1999년 국내 첫 마라톤전문지 ‘달리는 사람들’ 창간
--마라톤 전문지가 국내 최초로 창간됐다. 조선일보는 SAKA(한국사회체육센터 육상중앙연합회), 서울마라톤클럽과 공동으로 계간지 ‘달리는 사람들’ 창간호를 30일 냈다. 육상잡지로는 대한육상경기연맹의 ‘육상월드’(월간)에 이어 두번째다.
‘달리는 사람들’은 엘리트 선수보다 아마추어 마라톤 애호가들에게 눈높이를 맞춘 게 특징. 최근 수년 사이 급속히 증가한 동호인들을 위해 마라톤 상식과 훈련법, 국내 마라톤단체, 각종 대회 안내 등 상세한 정보를 담았다. 스포츠의학 전문의의 ‘부상방지 요령 상담’도 유익한 코너. 이밖에 99 조선일보 춘천마라톤(10월 24일)에 맞춘 연습일정도 자세하게 실었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초·재선 의원, 5·18 전야 술자리 사건 관련 대국민 사과
2002년 SBS 제주지국 폐업 및 JIBS 제주방송 개국준비
2002년 대한민국의 기독교 페미니스트 겸 노동운동가 이우정 작고.
2004년 이라크에서 김선일 피납
2005년 안상수 북측의 공식초청으로 평양과 남포 방문
2005년 고려대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 새 학교 UI(University Identityㆍ대학이미지) 선포
2005년 불법 대선자금을 모금한 혐의로 징역형이 확정됐던 김영일 전 한나라당 의원 가석방
2006년 서울중앙지법 김우중 전 대우회장 징역10년 추징금21조원 선고
--김우중(金宇中·70) 전 대우그룹 회장에게 법원이 징역 10년과 추징금 21조4484억원,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김 전 회장은 나이가 많은 데다 심장병 등을 앓고 있는 점을 고려해 법원이 구속집행정지(7월 28일까지) 결정을 취소하지 않음에 따라 법정구속은 면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재판장 황현주)는 30일 20조원대 분식회계 및 9조8000억원 사기 대출, 재산 국외 도피 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된 김 전 회장의 대부분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며 이같이 선고했다.
재판장이 30분간 판결문을 낭독하는 동안 김 전 회장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하얗게 센 머리에 흰 병원복을 입은 채 왼쪽 팔에 링거병 2개를 꽂고 있었다. 지난 9일 결심 공판 최후 진술에서 “잘못 채워진 ‘운명의 단추’ 또한 내가 책임을 질 것”이라고 했던 김 전 회장은 뜻밖의 중형이 선고되자 당황하는 듯 보였다.
2011년 고혹적 누드화의 작가 김종하 별세
--1918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화백은 1932년 14세의 나이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최연소 입선, ‘신동’으로 불리며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 해 일본 도쿄로 건너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야간으로 일본 가와바다 미술학교를 다녔다. 1941년 동경제국미술대학을 졸업하면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1942년엔 조선미술전람회에 특선했다.
1956년 한국 최초의 상업화랑인 반도화랑이 개관할 때 박수근과 함께 2인전을 열었고, 그해 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 다양한 유파들을 연구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1959년 귀국한 후에도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활동했다. 1950년대 말~1960년대 초엔 조선일보에 ‘파리의 이모저모’,‘오후의 파리’ 등 파리의 풍물을 그린 삽화와 글을 연재해 해외 사정에 어두웠던 국내 독자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줬다.
2008년 1월엔 62세 때인 1980년에 그린 ‘여인의 뒷모습’이 당시로서는 인터넷 경매 사상 최고가인 1억7100만원에 낙찰돼 화제가 됐었다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 한국미술대상전 심사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2002년엔 문화관광부에서 주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2년 서울지방경찰청 보안수사대 GPS간첩사건 발표, 2012.12.6. 1심에서 무죄판결후 경찰 항소심때 증인에게 뒷돈 줌
2013년 대한민국의 라디오 DJ 이종환 작고.
2016년 대한민국의 천주교 인천교구 교구장인 최기산 작고.
2019년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 개봉, 53일만인 7.22 1천만관객 돌파
2020년 수학자·문명비평가 김용운 한양대 명예교수 세상떠남(93세)
2022년 소상공인 371만명에 손실보전금 최대 1천만원
1265년 이탈리아 시인 단테 출생
1416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황제 지기스문트의 지지를 받은 대립 교황 요한 23세가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프라하의 제롬(Jerome of Prague)을 이단재판을 통해 화형에 처했다.
1431년 영국과의 전쟁에서 조국 프랑스를 구한 프랑스 백년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 영국으로 잡혀가 종교재판받고 화형당함(19세), 1920년 로마교황청이 성녀로 시성하였으며 지금은 프랑스의 수호성녀로 추앙받고 있음
--백년전쟁의 영웅 잔 다르크가 1431년 5월 30일 열아홉의 나이로 마녀의 누명을 쓰고 종교재판에 회부돼 이단선고를 받고 화형 당했다. 잔다르크가 군사를 일으킬 당시 프랑스의 왕위는 당시의 국왕 샤를6세가 죽으면 영국왕이 계승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상황을 일거에 반전시킨 사람이 잔다르크였다.
그는 1429년 영국군에게 포위되고 있던 오를레앙을 단숨에 해방시키고 랭스까지 진격해서 그곳의 성당에서 전통전 관례에 따라 샤를7세(샤를6세의 아들)의 대관식을 거행하도록 해, 프랑스의 왕위가 영국왕에게 계승되는 것을 막았다. 잔 다르크는 그 이듬해 콩피에뉴 전투에서 부르고뉴파에게 사로잡혀 영국군에게 넘겨진 뒤 불붙은 장작더미 위에서 죽었지만, 이미 전황은 프랑스에 유리해져서 그가 죽은지 20년 만에 백년전쟁이 끝났다.
1536년 헨리 8세가 첫 번째, 두 번째 아내의 여시종이었던 제인 시무어와 결혼
1574년 프랑스의 왕 샤를9세 사망
1574년 앙리 3세가 프랑스 왕이 되다.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마지막 배가 리스본에서 영국해협을 향해 출항
1640년 3대 통감에 사내정의(寺內正毅)임명
1640년 화가 루벤스 사망
--아버지가 정치적인 이유로 피해 있던 독일 지겐에서 태어났지만 10세 때 아버지의 고향인 안트웨르펜으로 이주, 그곳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5세 때 노르트, 베니우스 등에게서 그림을 배워 1598년에는 안트웨르펜 화가조합에 가입했고 23세 때인 1600년에는 이탈리아로 그림 유학을 떠났다. 이탈리아 유학 8년동안 그는 고대미술과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명성을 떨쳐나갔다. 1609년 플랑드르 총독 알브레흐트 대공의 궁정화가가 되었고, 10월에는 명문 집안의 딸 이사벨라 브란트와 결혼했다.
바로크 회화의 집대성으로 손꼽히는 그의 대표작 `마리 드 메디시스의 생애`는 관능적인 색채와 웅려한 구도 등 루벤스 예술의 특질들을 담고 있는 수작이다. 외교관으로서도 활약하였으며 원만하고 따뜻한 인품으로 말미암아 유럽 각국 왕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744년 영국시인 알렉산더 포프 세상떠남(56세)
--“과오는 인간의 일이요, 용서는 하느님의 일이다.” “To error is human, to forgive, divine.” “여성은 기껏해야 모순덩어리이다.” “Woman is at best a contradiction still.” “축복 있으라,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이여, 결코 실망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Blessed is he who expects nothing, for he shall never be disappointed.”
1778년 프랑스의 철학자, 작가 볼테르.
1814년 러시아의 작가, 무정부주의자 바쿠닌 출생
1845년 스페인의 왕(1870.11.6 -1873.2.11) 아마데우스 출생
1866년 베드르지흐 스메타나의 3막 오페라 ‘팔려간 신부’ 프라하에서 초연
1908년 스웨덴의 천체물리학자 알벤 출생 - 플라스마 물리학으로 노벨물리학상 수상
1909년 미국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 출생
1910년 일본육군대장 데라우찌 마사다께(寺內正毅) 3대 통감 취임
1912년 미국의 비행기제작자 윌버 라이트 세상떠남(45세), 동생 오닐과 함께 1903년 최초의 동력비행 성공
1913년 발칸전쟁 끝남 런던에서 평화조약 조인
1918년 러시아 혁명가 게오르기 발렌티노비치 플레하노프 사망
1919년 볼리비아의 정치인 레네 바리엔토스 출생
1924년 중소협정 성립 국교회복
1925년 중화민국의 상하이에서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1925년 5.30사건 발생,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군이 학생 군중 향해 총격
1929년 영국 총선거 노동당이 보수당에 승리
1930년 트루히요 도미니카공화국 대통령 피살
1931년 런던회의 제1차 발칸전쟁의 강화조약 조인(터키와 발칸제국간) 런던평화조약 조인(발칸전쟁 끝남)
1934년 소련의 우주비행사 레오노프 출생
1937년 러시아계 미국의 물리학자 조지 츠바이크 출생
1942년 2차대전중 영국공군 독일 쾰른에 사상 첫 융단폭격, 90분동안 폭탄2,000톤 퍼부음 사상5,500명 이재민45,000명
1960년 도미니카의 라파엘 트루히요 대통령 피격
1960년 노벨문학상(1958, 정치적 압력으로 거부) 받은 소련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세상떠남(70세)
--“러시아를 떠나는 것은 죽음과 같다” 후르쇼프 소련공산당서기장에게 보낸 탄원서
-- 『닥터 지바고』는 소련발표를 허락받지 못해 이탈리아에서 출판, 1958년 노벨문학상 받았으나 수상 거부하고 1년반 뒤 모스크바 교외 작가촌에서 외롭게 세상떠남, 아버지는 톨스토이의 『부활』 삽화를 그린 화가, 어머니는 피아니스트
--1890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그는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한때 작곡에 뜻을 두었으나, 모스크바대의 역사철학부에 입학하면서 철학과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주로 시작(詩作)에 전념해 ‘구름속의 쌍둥이’ ‘슈미트 대위’ 등 많은 시집을 출간했다.
스탈린 사후, 다시 창작의욕을 되찾은 그의 유일한 장편 ‘닥터 지바고’(1957년)는 다시 그를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갔다. 그는 이 소설이 소련내에서의 발표가 허락되지 않자 이탈리아에서 출간했다. 그는 이 작품으로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지만 러시아작가동맹을 비롯한 러시아 내에서 커다란 반대가 야기되자 수상을 거부했다. 이 작품에서 그는 혁명이나 사회주의 건설을 찬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러시아작가동맹으로부터 제명처분됐으며 시민권 박탈 압력까지 받았다. 그는 당시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러시아를 떠난다는 것은 죽음과 같다” 고 탄원해 국외추방만은 면했으나 큰 타격을 입어 노벨상 수상을 거부했다. 1987년 사후 복권되었고, 출판금지로 묶여있던 작품들도 적법성을 인정받았다.
1961년 도미니카공화국의 정치인 라파엘 트루히요 작고
1962년 제7회 월드컵 칠레서 개막
1966년 미국 무인우주선 서베이어11호 발사(6월2일 달표면 연착륙)
1966년 미국 원자력 잠수함 스누크호 최초로 일본 횡수하항에 기항
1967년 나이지리아 동부 비아프라 공화국으로 독립
1969년 서독 할슈타인원칙 폐지 결정, 할슈타인원칙=동독 승인국과 단교(할슈타인은 독일 외무차관의 이름), 우리나라는 1973년 6.23선언으로 할슈타인원칙 폐기
1972년 일본 적군파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항에서 무차별총격 사망24명
--5월 30일, 일본 무장 게릴라 3명이 이스라엘 텔아비브 근교 로도공항 구내에 수류탄과 자동소총을 무차별로 난사해 26명이 숨지고 73명이 부상했다. 사건 뒤 PFLP(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는 성명을 발표, 이스라엘군의 기습공격으로 사살된 동지들에 대한 보복이라고 밝혔다. 대학생 신분으로 일본 적군파(赤軍派) 소속이었던 범인들 가운데 2명은 수류탄으로 자살하거나 동료가 쏜 총에 맞아 현장에서 죽었고 나머지 1명은 체포됐다.
적군파는 일본에서 ‘안보투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말 세계동시혁명을 지향하는 ‘국제 근거지론’를 내걸고 결성된 국제테러집단으로, 중동분쟁에까지 뛰어들어 PFLP와 함께 반이스라엘 투쟁을 벌여왔다. 일본 요도호 납치사건(1970년), 헤이그 주재 프랑스 대사관 인질사건(1974년) 등 1970년대를 얼룩지게 한 많은 테러를 저질러 최근까지도 국제사회의 감시를 받아왔으나 검고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테러현장을 누비던 적군파의 여성 지도자 시게노부가 2001년 조직해체를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와해된 상태다.
1981년 라만 방글라데시 대통령 피살
1982년 스페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입
1987년 미국의 고고학자 할렘 레너드 모비우스 작고
1998년 아프가니스탄 동북지역 진도7.1 강진 사망5천여명
1998년 중국 쓰촨성 시창 위성발사센터에서 `장정3B로켓`을 이용, `차이나스타-1호` 통신위성을 발사
1998년 파키스탄 핵실험
2001년 일본 적군파 공식해산
2003년 프랑스 콩코드, 마지막 운항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개발로 탄생했던 콩코드는 1969년 3월 2일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서의 시험비행 성공을 시작으로 1969년 10월 1일에는 초음속비행에 성공했다. 또한, 1970년 11월 4일에는 마하2(시속 2천1백55km)를 기록하기도 했다. 1976년 1월 21일 비로소 상업운행을 개시함으로써 콩코드기는 민간 항공여행의 초음속 시대를 열었다.
25년간 가장 빠르고 안전한 여객기로 평가받아온 콩코드기가 2000년 7월 25일 파리 북부지역에 추락, 1백13명의 목숨을 앗아가자 콩코드기의 안정성에 논란이 일었다. 그로부터 2년여 후 2003년 5월 30일, 그 화려했던 기록들을 뒤로 하고 파리~뉴욕간 운행을 마지막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012년 찰스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전 동안 벌어진 잔혹 행위를 사주하고 도운 혐의로 징역 50년형을 선고받아
2013년 나이지리아가 동성 결혼 금지법을 통과
2013년 터키 이스탄불공원 보존집회 강경진압 '권위주의 반대' 반정부시위 급속확산
2020년 미국 민간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 엑스 유인우주선 크루 드래건 발사
2020년 불가리아 출신 미국 대지미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 세상 떠남(84세), 자바체프와 그의 부인 모로코 출신 대지미술가 장 끌로드는 같은날(1935.6.13) 태어남
2021년 화웨이 해외지사, 악성코드 경유지로 이용...보안소홀 지적
2021년 바이든, 10년간 4천조원 증세 추진...고소득자.대기업 ‘부자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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