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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6월 1일

by 귤담 2023. 5. 20.

오늘의 역사 6월 1일

 

 

 

매연처럼 이미 썩어 문드러진 아침 식탁.

무 한다발 배추 한포기 신신한 것 하나 없는

내 온몸

헛배 키우며

시름 시름 독이 밴다.

 

막힌 혈관 찌든 허파, 중금속 투성이의

아무리 씻어봐도 끈적한 삶의 배면.

산과 물

바람마저 답답한

이 땅 집짓는 사람은.

 

어릴적 동네 개울 피라미떼 잡던 고향.

이젠 기억 저 편, 악취 진동 폐기물 뿐

살아도

살아도, 나 혼자 뿐인

썩은 몸뚱이만 사는 마을.

                 - 이재창 「우리가 사는 마을」 전문, (중앙일보 초대시조, 1997,11,25일자)

 

 

 

*의병의 날, 임진왜란때 의령에서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집과 땅을 팔아 전국 최초로 의병 일으킨 날(1592년)을 기념해 의병제전행사 하다가 2010년에 오늘을 ‘의병의 날’(국가기념일)로 정함

*국제아동의 날

*성소수자 인권의 달(Pride Month)

*대통령의 날(President's Day): 팔라우

*가와이 다약 축제의 첫날: 말레이시아 사라왁주

*아조레스 데이: 아조레스

*해방기념일(Madaraka): 케냐

*해군의 날: 멕시코

*식목일: 캄보디아

*판카실라 데이: 인도네시아

*승리의 날: 튀니지

 

 

 

“캄캄한 세계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내 마음속에 언제나 태양이 떠있기 때문이다.” “문학은 나의 유토피아이다. 감각의 장해가 책이라는 친구들의 아름답고 고마운 이야기로부터 나를 가두는 일도 없는 것이다.” “나는 나의 한계에 대해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한계는 나를 절대 슬프게 하지 않습니다(I never think about my limitations, and they never make me sad).” -헬렌 켈러(1968년 오늘 세상떠남 87세, ‘빛의 천사’라 불린 미국 사회사업가, 생후19개월에 앓은 열병으로 눈멀고 귀먹고 말못하게 됨, 스승 맨스필드 설리번의 헌신적 보살핌으로 농아학교 거쳐 하버드대 입학 1904년 세계최초로 대학교육받은 시각장애인으로 졸업, 자기와 같은 맹농아인을 위한 구제 교육 사회사업에 생애를 바침)

 

 

34년 신라, 일식 발생

92년 백제, 일식 발생

818년 신라, 일식 발생

1114년 [음]예종(睿宗) 9년 송 황제가 왕에게 악기를 하사함

1126년 [음]천회(天會) 4년, 고려가 금에 표문을 올리고 번국을 칭함

1145년 고려, 일식 발생

1270년(고려 원종 11) 삼별초의 난 발생

--1270년부터 1273년 까지 강화도 중신의 삼별초군이 몽고에 대향해 일으킨 의거이다

삼별초는 좌,우별초와 신의군을 합쳐 삼별초라 부른다

송도 방범대인 야별초로 시작, 소속인원이 늘어나자 좌,우별초로 편성하였으며

신의군은 몽고군과의 전쟁 중에 포로가 되었다 탈출한 이들로 조직되었음

강화도로 옮긴 고려 조정에 대해 몽고가 항복을 종용하자 원종 임금과 문신들은 항복하고 1270. 5.27에 개경으로 갔다

이에 대해 무신은 반대하였으며, 삼별초는 반대세력에 가담하였따

무신과 삼별초는 6월 1일 몽고에 항쟁하기로 결의하고 지휘자인 배중손은 왕족인 승화후 온을 추대하여 진용을 갖추고 1,000여척의 배로 진도로 옮겨가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항몽투쟁 벌였다

고려와 몽고연합군이 진도를 점령하자 김통정이 잔여 세력 이끌고 제주도로 옮겨 항파두리 성 쌓고 항거하였다

1273년 4월28일 여몽연합군 1만여명이 제주도에 상륙하고 삼별초는 패배하자 김통정과 70여명만 남은 삼별초군은 한라산에 들어가 스스로 목매 죽은 사건이다

1406년 조선, 일식 발생

1433년 [음]세종 15년, 평안도 여연(閭延)과 강계(江界) 사이에 자성군(慈城郡)을 설치함

1443년 [음]세종 25년, 전라도 조운선(漕運船) 88척이 표류하거나 침몰함

--전라도 조전선(漕轉船) 99척이 충청도 비인현(庇仁縣) 법도(法島)에 이르러, 77척은 바람에 떠밀려 가고 11척은 침몰되었으며, 오직 11척만이 온전하였는데, 통례문 판관(通禮門判官) 박회(朴回)를 보내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1484년 [음]성종 15년, 새로 찍은 《진서(陣書)》 1천본(本)을 무신들에게 배포함

1452년 조선 5대 국왕 문종 작고.

1509년 [음]중종 4년,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설치함

1516년 [음]중종 11년, 의정부가 다시 서사(署事, 6조 업무를 의정부를 거쳐 왕에게 올림)함

1523년 [음]중종 18년,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왜구를 물리친 사실을 보고함

--전라도 수군 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 정윤겸(鄭允謙)이 치계(馳啓)하기를,

"지난달 24일 신시(申時)에 남도포(南桃浦) 관할인 초도(草島)에 왜선 1척이 내박(來泊)하였으므로, 신이 병선 10척을 정돈하여 좌우로 대(隊)를 나누고서 우후(虞候)·군관(軍官) 등을 인솔하고 약 90여 리쯤 나가니, 남도포 만호(萬戶) 하홍(河洪)도 병선 5척을 거느리고 급히 초도에 이르렀습니다. 25일 미시(未時)에는 대묵도(大墨島) 서변에 왜선이 정박하고 있으므로 신이 1백 보(步) 남짓한 거리까지 추격하였더니, 왜인 50여 명이 혹은 갑옷을 입고 혹은 흑개(黑鎧)253) 를 입고 혹은 철갑(鐵甲)을 입고 혹은 부채를 휘두르고 혹은 방패를 잡고 혹은 판엽(板葉)을 가리고, 각기 장검을 휘두르면서 서로 시끄럽게 떠들어 소리가 배 안을 진동하였습니다. 그래서 5∼6명이 서로 교대하여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목궁(木弓)에 혹은 철촉전(鐵簇箭)을 무수히 발사하여 혹 화살을 맞은 자가 있었으나 사상자는 없었습니다. 신은 처음부터 신기전(神機箭)과 총통전(銃筒箭)을 무수히 쏘고 장전(長箭)·편전(片箭)을 비오듯이 발사하였더니, 왜적 1명이 화살 10여발을 맞고도 몸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신 등이 3면으로 포위하여 왜적과 역전(力戰)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배안으로 숨어버리고 집(楫)·노(櫓)·기계(機械) 등을 챙기지 않고 내버린 채 배만 끌고 서서히 가기에 신이 화전(火箭)을 많이 놓았더니, 화염이 배 위에 치성하므로 불을 끄려고 물을 뿌리던 왜적이 화살을 맞고 즉사하였습니다. 그러자 왜적 1명이 단검(短劍)을 갖고 떠들면서 우리 배로 뛰어들어 칼을 들고서 격인(格人)254) 김구정(金仇丁)을 찌르려 하므로 곧장 팔을 휘둘러 칼을 빼앗아 버리니 왜인이 다시 저들의 배로 들어가므로 진무(鎭撫) 박동(朴同)이 그의 등을 쏘아 맞혀 그는 배에 들어가 곧장 죽었습니다. 신은 관솔[脂松]로 홰[炬] 50여 자루를 만들어 불을 붙이게 하여 왜선에 던지고, 또 초둔(草芚)255) 3백여 장[番]에 불을 붙여 던져 놓았더니, 시목(柴木) 등에 불이 붙어 창공이 환하도록 화염이 치솟았습니다. 이때 왜적 20명이 배에서 뛰어나와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 가므로 모두 쏘아 잡았고, 또 16명은 화살을 맞고 익사하였으며, 배 안에도 화살을 맞고 불에 타 죽은 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혹 그 배의 갑판 아래 살아서 숨어 있는 자라도 있을까 염려되어 배가 본판(本板)만 남도록 모조리 타버리기를 기다렸다 그날 밤 3경(更)에야 발선소(發船所)로 회군(回軍)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왜인의 머리 20급(級)·왜전(倭箭) 14개·칠죽궁(漆竹弓) 1개·환도(環刀) 4자루·장검(長劍) 1자루·창(槍) 5자루·창병(槍柄) 1자루·호항(護項) 4개·갑상(甲裳) 1건·녹비 저고리(鹿皮赤古里) 1건·사을갑지(沙乙甲之) 6건·도초(刀鞘) 1건·반의(斑衣) 2건·비적(臂赤) 1건 등을 함께 봉해서 올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왜골(倭骨) 및 무기가 반드시 많이 쌓여 있을 것으로 여겨 남도포 만호 하홍으로 하여금 왜선의 본판(本板)을 새끼로 연결해서 끌어오게 하였더니, 하홍이 ‘바다에서 배를 끌어올 때에 참바가 저절로 끊어져셔 배의 본판을 유실했다.’ 하므로, 하홍을 용의주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사(監司)에게 이보(移報)하여 추고(推考)할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윤겸(鄭允謙)이 아뢴 왜변이 황해도에서 일어났던 왜변과 일시(日時)가 비슷한데, 지난번 회령포(會寧浦) 및 지금의 황해도·전라도에 내침한 왜인이 모두가 창·칼·기계를 준비하였다 하니, 이는 반드시 우리에게 화친을 허락하도록 하려는 속셈이다. 이런 때를 당해서 정윤겸이 그들 다수를 포획하였으니, 지극히 가상한 일이다. 그의 공을 논상하는 데는 해조(該曹)가 스스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듣건대 저 왜노(倭奴)들은 그 전선(全船)이 다 불에 타는 바람에 죽었다 하니 반드시 분개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왜변이 그칠 때까지는 제주(濟州)를 왕래하는 선박 및 강원도의 영동(嶺東) 지방, 황해도·충청도·경상도 등지는 공사(公私) 간의 해채(海採) 작업을 일체 금지하도록 하고, 또한 황해도를 엄격히 조치하여 방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정윤겸에게 유시하기를 ‘경의 공로가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승전(勝戰)한 것으로 마음을 해이하게 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한다면 어떠하겠는가? 조방장(助防將) 김철수(金鐵壽)를 처음에는 황해도를 위해 초정(抄定)했었으나, 동서로 충격하여 왜변이 무상하게 일어나니, 사변이 있는 곳에 따라 보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곧바로 사관(史官)을 보내어 삼공에게 수의(收議)하라."

하매, 남곤 등이 의논드리기를,

"엎드려 정윤겸의 첩보(捷報)를 보니, 경오년 이후로는 전혀 이런 일이 없었는데, 지난해에 회령포에서 당했던 수치를 씻기에 충분합니다. 상전(賞典)을 빨리 해조로 하여금 마련하여 시행토록 하는 것이 온편하겠습니다. 제도(諸道)에 하유(下諭)하여 거듭 방비를 엄격히 하고 아울러 해채(海採) 작업을 금지시키는 것과, 조방장을 사변이 일어난 곳에 따라 보내는 등의 일은 상교가 지당하십니다. 다만 해변(海邊)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가 해산물을 채취하여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왜변이 아직 급하지도 않는데 먼저 금지부터 시킨다면 빈민(貧民)들의 생계가 막연하게 되어 폐해 또한 적지 않으리니, 우선 황해도의 왜변에 대해 다시 치계(馳啓)를 기다려 그 진위(眞僞)를 알고 나서 하유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 전교하였다.

1535년 [음]중종 30년, 각 도의 역승(驛丞)을 없애고 찰방(察訪)을 두는 문제를 논의하게 함

1538년 [음]중종 33년, 평안도에서 전염병으로 사망자 150여 명 발생

1548년 [음]명종 3년, 경상도에서 전염병으로 630명이 죽음

1554년 [음]명종 9년, 이황(李滉)이 병조 참의가 됨

--이황(李滉)을 병조 참의로, 이포(李苞)를 제릉 참봉(齊陵參奉)으로, 【앞서 상소(上疏)하여 시폐(時弊)를 논하였는데 말이 매우 간절하고 정직하여 상이 이를 아름답게 여겨 벼슬을 주게 하였다.】 홍담(洪曇)을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

1556년 [음]명종 11년, 경상 좌도 병사(慶尙左道兵使)가 울산에서 왜적을 물리친 사실을 보고함

1581년 [음]선조 14년, 이이(李珥)가 대사헌이 됨

1587년 [음]선조 20년, 황해도에서 기근과 전염병으로 5,570명이 죽음

1590년 [음]선조 23년, 최영경(崔永慶)이 감옥에서 죽음

1592년 곽재우, 의령군에서 의병 일으킴.

1592년 [음]선조 25년, 이덕형(李德馨)을 명나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함

--상이 숙천(肅川)에 머물면서 이덕형을 청원사(請援使)로 삼아 요동에 가서 급박함을 알리도록 하였다. 당시 이항복과 이덕형이 야대(夜對)하여 상께서 영변에 진주(進住)하기를 청하고, 그들이 직접 요동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겠다고 하면서 서로들 다투며 가기를 자청하였다. 이에 부제학 심충겸(沈忠謙)이 ‘항복은 현재 병조의 직책을 맡고 있으니 파견할 수 없다.’고 하자, 마침내 덕형을 파견하게 되었다. 장차 떠나려할 즈음 항복이 남문에서 전송하였는데 덕형이 말하기를,

"날랜 말이 없어 주야로 빨리 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하니, 항복이 즉시 탔던 말을 풀어주면서 말하기를,

"군사가 나오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지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서로 만나지 못할 것이다."

하자, 덕형이 말하기를,

"군사가 나오지 않으면 나는 의당 뼈를 노룡령(盧龍嶺)에 묻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지 않겠다."

하며, 두 사람이 눈물을 뿌리고 작별하였다.

윤두수 등이 장수를 보내어 밤에 왜군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불리하여 퇴각하였다. 왜병이 마침내 대동강을 건넜다. 상은 이미 떠났지만 두수는 그대로 성을 지킬 계획을 하였다. 성중의 민병(民兵)이 도합 4천여 명이었는데 여러 첩(堞)에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으나 지키지 못하는 첩이 많았다. 유성룡은 그들이 틀림없이 패할 것을 알고 중국 군사를 불러들여 구원하겠다 하고 먼저 떠났다.

이날 적병이 모두 이르렀지만 강가에 배가 없어 건널 수 없었다. 두수 등이 연광정(練光亭) 위에 있었는데 적이 조총으로 집중 사격을 하니 탄환이 정자 위에 비오듯 쏟아졌다. 아군 역시 배를 타고 중류(中流)에서 편전(片箭)을 쏘아 적을 맞히는 한편 화전(火箭)을 발사하니 적진이 조금 퇴각하였다. 순찰사 이원익은 병사 이윤덕(李潤德)과 왕성탄(王城灘)을 지켰다. 원익이 계책을 내어 용사 수백 명을 뽑아 고언백(高彦伯)과 문언(文言) 등을 영장(領將)으로 삼아 밤을 틈타 강을 건너 곧장 적의 진영을 공격하여 몇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쏘아 죽인 자도 많았다. 얼마 되지 않아 날이 밝아지자 아군이 퇴각하는데 한 척의 배가 모래톱에 걸려 배 전부가 해를 입었다. 이때 배 안에 있던 토병(土兵) 공수(孔秀) 등이 처음부터 끝까지 혈전(血戰)을 벌였는데, 공수가 직접 수십 명을 베다가 칼이 부러져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왜적이 앞으로 나오며 생포하려고 하니 공수가 바로 두 사람의 적을 옆에 끼고 강으로 뛰어들었다. 이를 보는 자들이 장하게 여겼다. 이날 밤에 감사 송언신(宋言愼)이 성문의 열쇠를 가지고 민가에 있었는데 불시(不時)에 와 회합하여 문을 열고 군사를 내보냈으나 때가 늦었기 때문에 밤에 공격을 하다가 도리어 손해를 보았다. 이날 관군(官軍)으로 죽거나 다친 자가 50∼60명이나 되었다.

이튿날 적이 진을 정비하고 왕성탄에서 방어하는 군사를 공격하자 군사들이 모두 패하여 흩어졌다. 이원익과 이빈은 퇴각하여 행재소로 가고, 이윤덕은 영변(寧邊)의 본영(本營)으로 돌아갔다. 이에 적이 왕성탄을 따라 건넜다. 이날 밤에 윤두수 등이 지킬 수 없음을 알고 먼저 성 안의 노약자와 부녀자를 내보내고, 적이 성에 가까이 오자 병기(兵器)를 강물에 가라앉힌 뒤 군사를 인솔하여 몰래 빠져 나왔는데, 더러는 배를 타고 강서(江西)로 내려갔다. 성 안이 텅 비어 아무도 없었으나 적이 모란봉(牡丹峯)에 올라가 한참 있다가 들어갔다. 성 안에 쌓아둔 수십만 석의 식량이 모두 왜적의 소유가 되었고 왜장이 마침내 평양을 점거하였다.

1613년 광해군, 원군(院君) 김제남에 사사(賜死)

1670년 [음]현종 11년, 전라도에 비 피해 발생

1694년 [음]숙종 20년,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왕비 책봉례를 행함

1755년 [음]영조 31년, 영조가 동적 친경전(東籍親耕田)의 대맥(大麥)을 친히 받음

1773년 [음]영조 49년, 영조가 지은 권세위효제문(勸世爲孝悌文)을 간행하게 함

1774년 [음]영조 50년, 수로왕릉(首露王陵)을 수축하고 제사 지내게 함

1778년 [윤]정조 2년,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 등 3영에 궁성을 지키는 격식을 정함

--3영(三營)에 궁성(宮城)을 파수하는 격식을 정하였다. 그전 규례에 궁성이 무너진 곳을 훈국(訓局)의 내외 입직군(內外入直軍)이 파수해 왔고,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 양영은 참여하지 않았었는데, 이에 이르러 3영에 나누어 주어 노일(勞逸)이 균등해지게 하고, 절목(節目)도 개정하도록 명한 것이다. 【1칸[間]은 8명, 2칸은 10명, 3, 4칸은 15명, 5, 6칸 이상은 20명으로 하고, 10여칸이 넘을 적에는 병조에서 품지(稟旨)하여 수를 더하여 파정(派定)한다.】

1784년 [음]정조 8년, 《규장각지(奎章閣志)》가 완성되어 정조가 친히 서문을 지음

1863년 [음]철종 14년, 빈청(賓廳)에서 철종과 왕비의 존호를 올림

1864년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 자살

1871년 (조선 고종8)신미양요, 강화 해협에서 한미간 포격전

1888년 조선 전보 총국, 개국·전신 업무 개시

1895년 갑신정변으로 중단된 한성·인천 우체사의 우편 사업 재개

 

 

1901년 용산 전환국 은화 주조 개시

1907년 서울-평양 전화 개통

1908년 김기중 등에 의해 기호학교 설립

1911년 동대문 북쪽 성벽 헐고 도로 개통

1918년 재야운동가 문익환 목사 출생

1920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황병길 작고.

--러일 전쟁 이후 러시아의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이범윤의 사포대(射砲隊)에 가입했다가, 최재형, 안중근이 조직한 의병대 소속으로 함북의 국경 지대에서 항일 무장 투쟁을 벌였다. 그는 이때 경원의 신아산에서 일본군 여럿을 혼자 사살하면서 “훈춘(琿春) 호랑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1919년 3·1 운동에는 훈춘 지역의 만세 시위를 조직하여 참가하였고, 혼춘 대한국민회(회장 이명순), 건국회, 북로군정서(총재 서일)에 가담하고 이광택과 함께 한민회(韓民會)를 결성하는 등 훈춘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 운동가로 활약했다. 일본군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쫓기며 도피 생활을 하던 그는 병을 얻어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인인 김숙경도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 운동가이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열림

1922년 개벽사 월간 「부인」 창간

1927년 이기연, 단오절비행대회서 기체고장으로 추락사

1936년 〈조선 변호사령〉 시행

1939년 총독부, 국민등록 실시

1943년 백금회수 강행

1943년 원불교 창시한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 열반(53세)

1944년 개마고원 유격대장 김봉 대장 별세

--6.25가 발발하기 전 백두산 자락 험산준령에서 청년유격대를 이끌고 북한 정권에 대항했던 한 전설적인 인물이 오갈 데 없는 무의탁노인 수용시설에서 1994년 6월 1일 쓸쓸히 눈을 감았다. 북한군에겐 증오의 대상이었던 백두산 호랑이 김봉. 그도 처음엔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까지 했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곧 이념의 허구에 회의를 느낀 그는 1948년 11월 지하조직 서북광복동지회를 만들어 반김일성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적색기관에 복무하는 양심분자에 고함` 이라는 삐라 등을 곳곳에 뿌리다 조직이 발각돼 산으로 들어갔다. 백산, 두문봉 등 해발 2천m 안팎의 높은 산과 봉우리가 즐비한 개마고원은 게릴라전에 최적이었다. 화전민 움막을 근거지로 삼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와 사냥용 엽총 등으로 무장, 유격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마을 곳곳에는 김봉을 생포하는 자에겐 현상금과 훈장을 준다는 김일성 명의의 공고문이 나붙을 정도였다. 1971년 잡지에 응모한 그의 투쟁수기에 감명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개마고원 자유의병` 이란 친필휘호를 선사했다.

그러나 김씨 자신의 말년은 비참했다. 군번없는 반공유격대원에게는 보훈혜택도 돌아오지 않았다. 1985년 잇달아 중풍으로 쓰러진 김씨 부부는 양로원, 단칸 월세방을 전전하다 1993년 2월 결국 가평 꽃동네에 찾아들어 이곳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1947년 한국의 국제 무선부호를 HL로 결정

1948년 군정재판 폐지

1949년 서울시경, 반민특위 포위하여 무기 압수하고 특경대 해산

1949년 반민족 행위 처벌법 피고 노덕술, 제2회 공판에서 평생 고문한 적이 없다고 주장

1950년 의무교육 실시 -초등학교 6년 실시

1953년 대구일보 창간

1957년 KBS 제1방송 종일방송 실시

1957년 국립극장, 구 명동예술회관으로 이전

--국립극장이 1957년 6월 1일 명동에 있는 구 명동예술회관으로 이전했다. 당시 예술인들은 700석 규모의 좌석을 메운 관객들과 함께 연극,무용,창 등 문화의 꽃을 이곳에서 피웠다. 이 건물은 이후 1973년 10월 국립극장이 중구 장충동으로 옮겨질 때까지 이 나라 예술의 산실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 1975년 10월 당시 대한투자금융에 21억원에 팔렸다.

이 건물에서는 오태석의 `환절기`와 차범석의 `산불` 등이 공전의 히트를 쳤고 번역극으로는 `안네프랑크의 일기`가 인기를 끌었다. 이 건물에는 당시 시대상이 녹아있다.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로 악명을 떨쳤던 유지광이 해방이후 이 극장의 문지기를 봤으며 장면 전부통령이 이곳에서 저격당하기도 했다.

1957년 한국-미국, 유엔군 주둔지 자문위 설치에 합의

1959년 한국-중국 과학협조 협정

1959년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서울서 열림, 14개 가맹국·지역대표와 6개국 옵서버 참석

1960년 동아대학생, 부산일보 집단 습격코 인쇄시설 파괴

1960년 허정 과도내각 부정축재자수기간 설정, 삼성 등 9개재벌 36억8,200만환 탈세 신고

1961년 대학생 교복착용, 중고생 삭발령

1961년 ROTC 창설, 1기생 전국 16개 대학에서 모집

--1960년대 초, 당시 매우 불안정한 국가 안보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당시 정부는 자주 국방력 확보 차원에서 시급히 군사력을 증가시켜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입장에 처하였고 이의 일환으로 대학에 재학중인 우수 학생들을 선발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고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임관시켜 군의 초급지휘자로 활용하는 제도를 시행함으로서 당시 군의 지휘체계상 가장 심각한 문제였던 초급지휘자들의 자질문제를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자원으로 단기간내 대거 충원하여 상비전력을 획기적으로 증강시키고, 현역복무후에는 이들을 예비군지휘자로 편입시킴으로써 예비전력을 실질적으로 전력화할 수 있을 뿐만아니라 이와같은 대규모적인 군 장교 충원에 소요되는 양성교육예산 부담을 현격히 경감시킬 수 있는 등의 다면적인 정책 목표를 가지고 ROTC(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제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ROTC 제도는 대학재학생중에서 우수자를 선발하여 2년간의 군사훈련을 실시함으로써 대학의 전공 학문 완성과 더불어 소정의 군사지식과 실무능력을 갖춘 문무겸전의 우수한 장교를 양성하여 활용할 수 있는 효율성이 매우 높은 제도로서 미국의 ROTC 제도를 모델로 하여 시행되었다

1962년 김상돈 등 민주당계 41명 반정부음모혐의 발표

1963년 월간 <세대> 창간

1963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출마시 군복 벗을 것과 〈선거법〉 개정 언명

1964년 전북대·청주대생들, 구속학생 석방과 박정권 하야 요구 시위

1964년 제1전투비행단 창설

1965년 청소년선도 위해 밤10시에 사랑의 종 치기 시작

1966년 월남파병 전투사단 백마부대 창설

1967년 신민당 전국구국회의원 후보 김재화 반공법위반 혐의로 구속

1968년 여의도개발 준공, 윤중제 준공

-- 6월 1일 서울시가 수해를 방지하고 현대식 택지로 조성하기 위해 7,533m의 윤중제를 축조하여 한강의 기적이 열매를 맺게됐다. 이날 오전 10시15분쯤 공사현장에서 베풀어진 윤중제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릇, 삼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각계대표, 시민, 학생 등 1만여명이 참석했다.

여의도 윤중제공사는 서울시 한강개발의 일환으로 2월 20일 착공, 1백여일 만에 준공하게 됐다. 시당국은 이 공사를 위해 1월 4일 한강건설사업소를 신설, 전 하수과장이던 이종윤씨를 소장으로 기용하고, 50명의 직원을 한강건설사업소 건설요원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본격화한 한강개발공사는 한강의 한복판에 버려진 달걀모양의 여의도를 개발키로 하고 26억원의 예산을 책정, 우선 7억원의 돈으로 여의도 둘레에 제방을 쌓는 윤중제공사를 시작했다.

서울시는 윤중제준공을 1968년 말까지 계획했었으나 서울시장의 강한 의지와 한강건설사업소장의 밤낮없는 투지로 예정기일의 80%를 앞당겨 준공, 한국 기술진의 새기록을 수립했다. 이 공사에는 연인원 52만명이 동원되었다. 20∼30m 폭의 윤중제 위에는 길이 7.5km의 4차선도로가 마련되었고 둘레에는 15년생 수양버들이 7m 간격으로 1천그루가 심어졌다. 가로등은 30m간격으로 1개씩 506개가 가설돼있으며 윤중제 강변둘레에는 2m폭으로 36만7천2백35장의 잔디가 곱게 깔렸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 〈워싱턴포스트〉와의 회견에서 제주도 미군기지 제공 용의 표명

1970년 북,'남조선 민족 방송'(평남 순안)을 '통일 혁명당 목소리 방송'으로 개칭.

1971년 충남 청양에서 백제요10개 발굴

1971년 소흑산도 근해 무장간첩선 사건

1972년 제3방송을 통한 방송통신대학(2년제) 개강

1972년 육군보안사, 군납 싸고 1억8000만원 뇌물 받은 육군 장성 2명 구속 발표

--육군 보안사령부는 1972년 6월 1일 군납 부정사건과 관련, 국방부 조달본부 제1국장 김용찬 준장과 전 제1국장 하중원 준장 등 장성 2명과 구매1과장 김흥만 대령, 전 구매1과장 조병모 대령, 구매장교 박성환 중령 등 6명을 수뢰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또 군납부정과 관련, 23개 민간업체 직원 34명을 뇌물공여 혐의로 서울지검에 넘기고 죄질이 가벼운 하급장교 30여명은 경고조치했다.

김 준장 등은 1969년말부터 약3년 동안 군작업복, 천막, 내의, 드럼통, 농구화 등 26개 품목을 군납하는 과정에서 불량품을 눈감아 주거나 납품가격을 시가보다 높여주는 조건으로 1억6천여만원을 받았다. 한편 육군보통군법회의는 6월 29일 선고공판을 열고, 하 준장에게 사형, 김 준장에게 무기징역, 김 대령 등 2명에게 징역 15년, 조 대령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1973년 호남매일 폐간

1973년 새 가정의례준칙 발효

1973년 가격표시제 실시

1973년 불국사의 법음종 첫 타종, 종무게7,500kg 높이2.8m 종소리여운3분10초 세계최장

1974년 한국적십자 중앙혈액원 명동에 헌혈의 집 개관

1976년 신용보증기금 설립.

1977년 한국은행, 새 5000원권 발행

1980년 언론 대탄압 사건 발생

1981년 대구에 첫 점자도서관 문 염

1981년 아시아최대서점 교보문고 문 염

1982년 경기 성남 서쪽 상공에서 군수송기C123기 추락 장병53명 전원사망

1983년 김정일 중국 방문(~12일)

북한 김정일이 호요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의 초청으로 1983년 6월 1일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다. 방중 초기에는 북경에 머물며 등소평을 비롯한 중국 수뇌부와 회동했으며 이후 상해와 남경 등 지방도시를 둘러봤다.

그의 중국 방문목적은 중국의 현대화 계획 추진상황과 성과를 직접 시찰하고 중국 지도층과의 친분유지를 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이번의 중국방문을 계기로 대외관계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그해 9월 7일 건국 35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한 중국 공산당 대표단을 김정일이 평양역에서 맞이했다고 보도했다.

1984년 윌리엄 립시 대장, 주한 미군사령관(유엔군 사령관 겸임)으로 부임

1985년 화장품, 밀가루 등 65개 품목 수입 자유화

1985년 국회, 대북 회신 통해 통일헌법협의회 구성 제의

1985년 서울시내 택시운전사 월급제 실시

1987년 중앙기상대, 강수(비,눈)여부에 대한 확률 예보제 실시

1987년 서울 13개대학 학생회장 등 간부 20여명, 호헌철폐 요구하며 단식농성(∼5일)

1987년 제10회 이탈리아 오픈유도대회에서 한국 종합 우승(금2·은3·동2)

1987년 서울 신정경찰서 신설 (서울 25개서, 562개 파출소)

1987년 제134회 임시국회개회, 민주당의원들 단식 농성

1987년 국사교육심의회, 고조선을 최초국가로 쓰는 등 국사책 개편방향 확정

1988년 서울올림픽 선수촌 및 기자촌 준공식

1988년 유전공학센터 이경광·김지영 박사팀, 세계 4번째로 슈퍼생쥐 3마리 생산 발표

1989년 대학생과 광주시민 4000여명, 검찰의 이철규군 익사발표에 항의 격렬 시위

1989년 국방부는 민통선내 전방지역 4억7000여만평 중 6100여만평을 통제구역에서 해제

1989년 군산시내서 토머스중사 등 미헌병 4명이 한국인 차병기씨등 3명을 곤봉과 구둣발로 집단 폭행

1989년 내외경제신문이 8년 6개월만에 복간

1989년 정부는 하와이 동남쪽 태평양 공해상에 7만 5000㎢ 해저광구를 확보 연구개발 착수

1990년 북한, 한반도 군축안 제의. 10만 수준까지 병력감축·DMZ 평화지대화 등

1990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전자계산소는 지난 1월 미국 하와이대와 컴퓨터 직통선을 구성

1990년 한국 네트워크, 인터넷에 처음 연결됨으로 한국 인터넷시대 개막

--6월 1일.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자계산소 빌딩에서 작지만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이벤트가 열렸다. KAIST 전길남 교수가 썬 스팍1이라는 워크스테이션을 켜자 국내 HANA망(KAIST 및 연구기관들끼리 연결 된 것)과 미국 하와이대학간에 설치된 56Kbps 인터넷 전용선을 따라 이메일과 데이터 파일이 흐르기 시작했다. 국내 네트워크가 인터넷에 직접 연결돼 국제사회에 처음 출생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국내 인터넷의 효시는 1982년 서울대 전자계산기학과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경북 구미)간 전용회선으로 연결한 SDN이었다. 이 네트워크는 인터넷 표준 규약인 TCP/IP를 이용하고 있었지만 미국과는 연결되지 않는 국내 온라인망이었다. 미국은 군사적인 이유로 전용회선 접속을 불허했고 국제전화를 이용하는 이메일은 비용이 너무 비싸 인터넷 선구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KAIST와 한국통신을 중심으로 약 1억5천만원을 각출, 해외 인터넷에 직접 접속하는 HANA망 구축 프로젝트를 계획해 오늘에 이르렀다.

1990년 평민당 토지투기조사위는 선경그룹이 정부의 5·8 부동산투기 근절대책 발표직후인 토지구입 발표.

1991년 김일성 북한 주석, 한국의 동시 사찰을 전제로 조건부 핵사찰 제시

1991년 문화부, 남북한통일후 언어생활지침이 될 「종합국어통일어사전」의 편찬을 추진키로

1991년 정부, 20일 866명의 시.도의원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 첫날 1561명이 등록.

1991년 부산대에서 전국 178개대생 3만여명, 전대협 (의장.김종식 24.한양대 총학생회장) 제5기 출범식 개최

1991년 김용강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92년 유고 사라예보 최악의 내전-유엔 파병경고, 경제제재

1992년 민주자유당 당정회의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오는 95년으로 연기 최종결정.

1992년 노태우 대통령과 소글로 베냉공화국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갖다.

1992년 현대중공업은 5억 3000만 달러짜리 인도 국영석유공사의 닐람해 양석유 생산설비 공사 수주.

1992년 일제하의 정신대피해자 9명 등 유족회회원 41명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피해보상소송 첫공판

1992년 국립전주박물관, 변산반도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죽막동 산 35-17 일대에서 삼국시대 제사유적 발 굴

1994년 김영삼 러시아 방문-러, 엘친대통령

1994년 국내 최고령 이아기 할머니, 향년 118세로 사망

1995년 나웅배 부총리 남북직교역확대 추진방침 발표

1996년 보건복지부, 금연구역서 흡연시 2~3만원 범칙금 부과

1996년 건교부, 도쿄-베이징간 운항기 서울 통과 허용

1997년 서울, 인천, 경기도 제외한 전국 아파트분양가 전면 자율화 실시

1997년 북한, 나진, 선봉 주민 자영업 허용.화폐체계 단일화 실시

1998년 러시아,북한 어선 13척 나포

1998년 유물복원 1인자 ‘마이더스의 손’ 이상수씨 별세

--6월 1일 52세의 아까운 나이에 타계한 이상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은 우리나라 문화재 보존처리 분야의 개척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평생 ‘보존기술자’ 라는 명칭에 자부심을 지녔던 장인(匠人)이었다. 그는 부식되기 쉬운 철기유물 보존처리 등에서 특히 1인자로 꼽혔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감은사터 서탑 출토 사리장치, 금령총 출토 말탄 사람의 토기,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향로 등 숱한 국보급 유물이 그의 손을 거쳐 원형의 색과 빛깔을 찾았다. 1973년 출토 직후 자작나무판의 균열로 퍼즐조각처럼 조각난 천마도 역시 그의 손을 거쳐 출토 직후의 원형을 찾았다. 문화재계에선 이런 그를 두고 ‘마이더스의 손’ 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그가 개발한 보존처리기술 중 찜통의 원리를 이용, 철기유물을 푹 쪄서 염분을 빼내는 방법은 보존과학이 우리보다 훨씬 앞선 일본에서조차 도입할 정도였다.

최종학력은 철도고등학교. 지난 1971년 중앙박물관 미술부 유물실측요원으로 박물관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 보았던 최순우 전 관장이 보존처리기술을 공부할 것을 권유, 1974년 대만 고궁 박물원 연수를 시작으로 보존과학기술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2000년 대한민국 요리전문채널 채널F(現 tvN STORY)개국

2001년 일본 법원, 원폭 피해 한국인에 첫 배상 판결

--일본 오사카 지방법원은 1일 한국으로 이주해 의료보험이 말소된 한국인 원폭 피해자 곽기훈씨에게 오사카 지방정부는 200만엔(약 216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본 법원이 해외 거주 원폭 피해자의 피해 배상권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국내 거주 외국인 피해자들에 대해서만 치료비를 제공해왔다.

재판부는 지난 1988년 한국으로 이주한 곽씨의 의료보험을 말소해 치료비 혜택을 주지 않은 지방정부 조치는 잘못이라며 위로금 17만엔과 1999년 1월부터 2003년 5월까지 치료비(매월 3만4000엔) 등 모두 200여만엔을 제공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곽씨가 요구한 정신적 피해 위자료 200만엔 지급 청구는 기각했다.

재판장인 미우라 준 판사는 판결문에서 “곽씨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하지 않은 지방정부 조치는 인종과 종교, 성별 등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 헌법 제14조에 위반된다” 고 밝혔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 당시 징용병으로 일본군에 복무하다 피해를 본 곽씨는 1988년 한국 이주 후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자 같은 해 10월 오사카지방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2002년 김남수 주교 사망

--김남수 주교가 2002년 6월 1일 향년 80세로 선종했다. 김 주교는 동갑인 김수환 추기경, 두 살 아래인 윤공희 대주교 등과 함께 20세기 한국 천주교를 대표했던 인물이다.

김 주교는 한국 천주교의 공식적 대표인 주교회의 의장을 1987년부터 1993년까지 6년 간이나 역임했으며, 1980년대 초에는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 위원장을 맡아 103위(位) 성인에 대한 시성(諡聖) 추진 등을 주관했다. 또 주교가 되기 전인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실무적인 일을 총괄하는 등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천주교의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그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면서 진보적 입장의 윤 대주교, 중도적 입장의 김 추기경과 함께 삼각 축을 형성했다.

만주 간도에서 태어난 김 주교는 이 지역을 관할하던 베네딕도 수도회가 설립한 함경남도 덕원신학고등학교와 덕원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서품을 받았다. 이어 서울 혜화동 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나 우르바노 대학에서 `불교의 근본교리`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1953년 귀국 후에는 경북 왜관 순심고와 부산 대양중 교장, 부산 양정동-서면 교회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다. 주교회의 사무총장을 거쳐 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하던 1974년 주교로 서임돼 수원교구장에 임명됐다. 이후 1997년 수원교구장 자리를 최덕기 주교에게 물려주고 정년 퇴임할 때까지 23년간 재임했다.

2004년 한국, 군(軍) 첫 ‘부부원사’ 탄생

--군 부사관(옛 하사관)의 최고 계급인 원사 부부가 처음으로 탄생했다. 육군 특수전사령부 7공수특전여단 소속 김영우(46) 원사의 부인인 국방부 여군발전단 고충처리과 이현숙(43) 상사가 6월 1일 진급해 원사가 됨으로써, 창군 이래 첫 부부 원사가 됐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검은 베레’ 시절인 1989년 7월. 이들은 모두 공수부대원으로 창공에서 낙하산에 의지해 ‘안 되면 되게 하라. 귀신처럼 접근해서 번개같이 쳐라’ 를 목청껏 외쳤다. 13공수여단에 근무하던 김씨와 특전사 여군중대의 이씨는 부대 상관의 소개로 알게 된 뒤 10개월간 사귄 끝에 1990년 4월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의 결혼식장에선 “보아라! 장한 모습 검은 베레모…” 로 시작하는 ‘검은 베레’ 가 축가로 불려 눈길을 끌기도 했다.

2004년 로버트 김 8년 만의 귀환. 정식 출감 전 가택연금

--6월 1일 오전 9시 미국 버지니아주 애시번의 자택으로 돌아온 로버트 김(한국명-김채곤)씨는 그러나 감옥에서 8년을 보낸 사람 같지 않게 표정은 온화하고 밝았다. 김씨는 이날부터 정식 출감 전 집에서 생활하는 가택연금(Home Confinement)에 들어갔다. 만기 출소는 7월 27일. 출소 뒤에도 3년 동안은 집 근처 일정 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보호관찰을 받아야했다.

로버트 김 사건은 8년 전인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24일 당시 미 해군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로버트 김씨는 스파이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김씨가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미국의 ‘국가 기밀’ 을 넘겨줬다는 것이었다. 김씨가 전달한 정보들은 주로 북한 관련 고급 정보였다. 국내에서는 김씨 후원회가 결성되는 등 구명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졌으나 정부는 이 사건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로버트 김씨는 전남 여수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뒤 24세 때 유학차 도미(渡美), 4년 후 미 항공우주국(NASA)에 취직했고 미국 시민권도 얻었다. 그는 이어 1996년 9월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체포될 때까지 1978년부터 19년 동안 미 해군 정보국에서 군사 기밀을 다루는 정보분석관으로 근무해왔다.

한편, 6월 4일. 장남의 출소를 손꼽아 기다리다 지난 2월 별세한 부친 전 한국은행 부총재 김상영씨를 따라 어머니 황태남씨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에 로버트 김은 미 법무부 감찰관에게 한국 방문을 요청했지만 감찰관은 전례에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2005년 국보 제224호 경회루 일반인에게 공개

--경복궁 경회루(慶會樓·국보 제224호)가 44년 만에 일반에 개방됐다.

개방시간은 3월부터 10월까지 오전 11시, 오후 2·4시 3회(화요일 휴무)이며, 안내원의 인솔에 따라 경회루 1, 2층을 볼 수 있다. 매회 관람 인원은 60명. 2층 누마루는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게 했다. 광화문 뒤 흥례문 매표실에서 입장시각 20분 전까지 선착순으로 관람권을 구입할 수 있다. 관람료는 5000원(경복궁 관람료 3000원 포함)이다.

경회루는 조선시대 때 국가의 경사를 축하하는 연회가 벌어지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곳으로, 1395년(태조 4년) 창건된 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867년 경복궁 중건 때 재건했다. 빼어난 주변 조경과 잘 어울리는 조선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물에 비친 누각의 그림자가 아름답다. 유홍준(兪弘濬) 문화재청장은 “목조건축은 사람의 손때가 묻어야 오래 보존할 수 있다”며 지난해 11월 시험 개방한 데 이어 이번에 개방을 결정했다.

2006년 북 외무성 6자회담수석대표 초청, 미국은 거부

2006년 서울강남지역 거주민 85명, 서울행정법원에 〈종합부동산세법〉 위헌법률 심판 제청

2007년 한국철도공사의 수많은 간이역들이 여객 수요 감소로 인해 여객 취급이 중지

2008년 폭염특보제도 도입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첫 사망자 발생

2015년 위안부 피해 김복동 할머니, ‘자유 영웅 100인’에 선정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김복동(89)씨가 ‘국경 없는 기자회’와 프랑스 AFP 통신이 함께 선정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 100명’(100 heros pour la liberte de la presse)에 뽑혔다. 언론 자유 증진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 ‘국경 없는 기자회’는 최근 창립 70주년을 맞아 전 세계 ‘자유 영웅’ 100명을 선정해 그들의 사진이 담긴 화보를 펴냈다. 김씨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 등과 함께 100인에 포함됐다.

국경 없는 기자회는 화보에서 김 할머니가 2011년 12월 14일 1000번째 수요집회에서 발언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싣고, 그 아래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에 끌려가 성 노예로 살았던 아시아 여성 20만명 중 대부분은 한국인이었다. 생존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1992년 이래 줄기차게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 정부는 외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15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호암상 시상식 참석… ‘첫 대외 행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와병(臥病) 중인 부친 이건희 회장을 대신해 1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호암상(湖巖賞) 시상식에 참석했다. 이건희 회장이 맡아온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지난 15일 선임된 이후의 재단 관련 첫 공식 행사다. 이 부회장이 오너 일가(一家)를 대표해 혼자 참석한 데 대해, 재계에서는 사실상 삼성 승계자의 첫 대외 행보로 보고 있다.

이날 이 부회장은 포토라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행사장으로 입장했고 맨 앞줄 손병두 호암재단 이사장 및 고건 전 국무총리 옆자리에서 시상식을 관람했다. 축사나 시상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행사가 끝난 뒤 수상자들과 사진을 찍었다.

그는 이날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수상자 만찬에 참석해 정의화 국회의장과 함께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시상식에 불참한 어머니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여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패션부문 사장 등도 축하 만찬에는 참석했다.

2015년 소록도 한센인 지원 15년… ‘참길 복지’ 신임 대표 김가범 취임

--40년 전통의 봉사 단체 대표에 여성 화가가 취임했다. 사단법인 ‘참길 복지’의 김가범(68·사진) 대표가 6월 1일 3년 임기를 시작했다. ‘참길 복지’는 1973년 아동 봉사로 시작해 2001년부터 전남 소록도 한센인을 위한 활동에 주력하는 단체다.

김 대표는 취임 행사를 생략했다. “250명 회원이 달마다 1만~2만원씩 내는 후원금을 허투루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복지회는 여름과 겨울 고등학생·대학생 100여명과 소록도를 찾아가 나흘간 한센인을 돌보고, 한센인 2·3세의 사회 참여를 별도로 지원하고 있다.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는 김 대표는 40대에 붓을 잡고 50대에야 첫 전시를 가졌다. 참길복지와는 1998년 인연을 맺었다. “처음엔 누구나 (소록도 봉사를) 꺼려요. 첫 봉사를 마치고 나면 목욕탕에 들러 씻고 나올 정도죠.” 김 대표 역시 그렇게 두려움을 갖고 시작한 봉사가 어느덧 15년이 넘었다. 회원들은 해마다 먹거리와 생필품을 싸들고 소록도 한센인 마을을 찾았다. 페인트칠을 하고 하수구 청소도 하며 이것저것 거들다 보니 차츰 ‘친구’나 ‘동생’처럼 대하는 이들이 늘었다고 한다.

2016년 남양주시 지하철공사현장 가스폭발 사망4명 부상10명

2017년 낙동강 강정고령보 달성보 합천창녕보 창녕함안보 금강공주보 영산강죽산보 개방

2018년 제주도 무비자입국 예맨인에 대해서 중단

2020년 오조선3사(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카타르 LNG선 100척이상 수주(23조6천억원)

2020년 세종대왕이 보던 밤낮 겸용 시계(일성정시) 발견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선 천문과학기술을 실증할 유물들이 출토됐다. 앙부일구, 자격루 등 세종 대에 많은 과학 기기가 만들어졌지만 당대 실물은 전해진 게 거의 없었다.

처음에 임금이 주야측후기(晝夜測候器·밤낮으로 기상 상태를 알기 위해 천체를 관측하는 기기)를 만들기를 명해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했는데, 이를 완성해 보고했다

일성정시의는 당시 천문과학기술의 집약체다. 농업이 국가 경제의 기본이던 사회에서 해와 달의 움직임, 계절에 따른 별자리 변화 등을 살펴 시간과 절기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은 국가가 해결해야 할 최우선적인 과제였다. 또 왕의 권력이 하늘에서 비롯된다고 여겼던 유교에서도 천문학을 제왕의 학문이라고 일컬었다. 이런 배경에서 일성정시의가 제작되기 전 조선은 중국에서 전래된 천체 관측 기기인 혼천의와 간의(簡儀)를 변형해 이용하고 있었다.

혼천의와 간의는 윤일을 반영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윤일은 우리가 세는 1년의 길이와 실제 1년의 길이가 달라 발생하는 오차다. 지구의 공전주기는 약 365.25일로 우리가 아는 1년의 길이인 365일보다 0.25일이 길다. 일성정시의는 주천도분환을 이용해 이를 해결했다. 주천도분환에는 4분의 1도를 기본 단위로 1461개의 눈금이 새겨져 있다. 이를 모두 더하면 365와 4분의 1도인데, 이는 당시에 정확한 1년의 길이를 측정하고자 했음을 의미한다.

일성정시의는 매년 동지 자정에 주천도분환을 한 눈금씩 반시계 방향으로 회전해 0.25일을 보정함으로써 지금과 같이 4년에 한 번씩 1일을 추가하지 않고도 윤일 오차를 방지했다. 이 명예교수는 “당시 조선에서 정밀하게 365와 4분의 1도만큼 정밀하게 눈금을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며 “세종 때 독립적으로 창제한 일성정시의를 보고 영국의 과학사학자 조지프 니덤 교수는 서양에도 이런 것은 없다며 극찬했다”고 말했다.

2021년 BTS의 ‘버터’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100’ 1위(네번째), 잭슨파이브 이후 그룹으로 최단기간에 네번째로 1위에 오름

2021년 화가 손장섭 세상떠남(81세)

2021년 엄유정 작가 식물그림책 ‘푀이으’ 국제 책디자인공모전에서 ‘2021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최고상 받음

2021년 김오수. 제44대 검찰총장 취임

 

 

 

193년 로마 제국의 황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작고

1780년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출생

1862년 미국 남북전쟁, 남부연맹의 제프 데이비스 대통령, 중상을 입은 존스턴의 후임으로 리 장군을 남군 최고 사령관에 임명.

1863년 근대올림픽 경기의 창시자 쿠베르탱 출생

1873년 캐나다 정치가 조셉 하우 사망

1878년 영국 계관(桂冠)시인 메이스필드 출생

1906년 미국-일본 해저전선 준공

1909년 미국 뉴욕서 전미흑인위원회(NNC)가 결성

1910년 영국 탐험가 스코트, 남극탐험을 위해 영국 출발

1923년 일본해군, 중국 장사에 상륙, 배일운동 탄압(장사사건)

1925년 미국의 28대 부통령 마셜 사망

1926년 미국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 출생

1928년 최초로 과학적인 용도의 유인정류장을 만든 소련의 우주비행사 도브로볼스키 출생

1934년 독일.유고슬라비아 통상협정 조인

1952년 제1차 중-일 민간무역협정 서명

1952년 미국 교육학자 존 듀이 사망

1958년 공산당 기관지 `홍기`창간

1958년 드골 프랑스총리 취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프랑스는 전쟁의 위기를 잘 극복해 재빨리 민주적인 새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전후를 주도하면서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해방한 후 알제리에서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를 프랑스공화국 임시정부로 개조하여 총리가 되었다. 이로써 파리해방과 함께 파리에 돌아온 그는 전후 프랑스 최고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전후체제의 향방을 둘러싸고 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당과 대립, 총리직에서 물러나 프랑스국민연합을 조직했다가 해산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알제리 재류군(在留軍)등의 반란 위기에 즈음해 다시 등장하여 1958년 6월 1일 내각을 결성, 총리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1965년 일본 복강현 광산폭발사고 236명 사망

1965년 방글라데시 폭풍 강타 사망3만명

1968년 미국 교육자 헬렌 켈러 사망

1969년 미국 노동운동가 루이스 사망

1970년 소련 2인승우주선 소유즈9호 발사, 최장우주비행 기록 세우고 6월18일 귀환

1970년 페루 북부 진도7.7 강진 사망66,794명

1971년 미국신학자 라인홀드 니버 세상떠남(78세)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정의에 대한 인간의 능력이 민주주의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부정의에 대한 인간의 경향이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1972년 이라크, 석유국유화 발표

1973년 그리스 15년간의 왕제에 종지부 찍고 공화제 선언

1974년 미국 신시내티대학 산화탄화불소로 인공혈액 개발, 혈액형 구별 없고 소독 가능

1978년 제11회 월드컵 아르헨티나서 개막

1979년 짐바브웨-로디지아 공화국 발족

1980년 세계최초 24시간 뉴스전문채널 CNN 개국

--미국의 `유선TV황제`로 불리는 테드 터너가 세계최초로 24시간 뉴스만을 방송하는 CNN(Cable News Network)을 설립, 1980년 6월 1일 미국 애틀랜타 본사에서 첫 전파를 발사했다. CNN이 낸 첫 뉴스는 텍사스주 포트워크에서 발생한 흑인지도자 저격사건이었다. 이어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팀의 중심타자 레지 잭슨 구타사건을 생생한 화면으로 제공해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세계 뉴스를 현장에서 보도한다는 CNN의 전략은 돌발사고에서 강점을 드러냈다.

1981년의 레이건 대통령의 피격사건과 같은 해 바티칸에서 일어난 교황 요한 바오로2세 저격사건 보도는 CNN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CNN은 너무나 미국이익의 대변자이고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3천만 달러의 예산과 2백만가구를 대상으로 첫 전파를 발사할 당시만 해도 CNN은 황당무개한 벤처사업으로 평가받았으나 지금은 언론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1년 걸프전은 CNN의 존재를 전세계에 확인시켜 주는 절호의 기회였다. 미군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폭격하는 장면이 생방송을 통해 안방에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이때 전세계에서 10억명 이상이 CNN 화면을 지켜봤다. CNN은 현장의 생생한 보도를 토대로 성장을 거듭해 2000년 당시 10억 이상의 시청자를 확보했고 직원수만 4천명이 넘었다.

1983년 유럽핵연구소 Z제로 입자 발견

1987년 라시드 카라미 레바논총리, 군헬리콥터 탑승중 폭탄폭발로 사망

1988년 미-소양국, 중단거리 핵미사일(INF) 폐기조약 비준서 교환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이 1988년 6월 1일 모스크바에서 만나 지난 1987년 12월 8일 조인한 유럽과 아시아지역에 배치된 중단거리 핵미사일(INF)폐기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1985년 11월 첫 회담이 열린 후 2년 7개월 만이었다. 첫 회담의 의제는 공격용 전략무기 50% 감축, 유럽배치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제거, 미국이 추진중이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한 협의였다.

고르바초프는 미국이 SDI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아무것도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답보상태에 빠졌던 군축회담의 전기는 1987년 2월 고르바초프가 유럽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제거를 다른 의제와 분리, 협상할 수 있다고 한걸음 물러난 데서 마련됐다. 이로인해 두 정상은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4%(소련 1천8백46기, 미국 8백46기)를 폐기하는데 합의했다. 이 협정은 미소양국이 핵무기개발경쟁 이래 처음으로 핵감축시대를 열었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1989년 짐 라이트 미국 하원의장 독직사건으로 물러남

1996년 러시아, 루블화 규제 완전 철폐

1997년 일본, 스톡옵션제 전면허용 실시

1998년 유럽중앙은행 출범

1999년 아메리칸 항공 1420편 활주로 이탈 사고로 11명 사망, 110명 부상.

2000년 라틴재즈 `살사의 황제` 티토 푸엔테 사망

2001년 디펜드라 네팔 왕세자 자동소총 난사해 부모인 국왕과 왕비 등 왕족9명 몰살

--6월 1일 네팔의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디펜드라 왕세자가 부모인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슈와리야 왕비를 비롯, 왕자·공주 등 국왕 일가 9명을 총으로 살해하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사귀어 오던 애인과의 결혼을 자신의 어머니가 반대하자 순간을 참지 못한 디펜드라 왕세자가 범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하자 네팔 국가평의회는 긴급회의를 소집, 국왕의 섭정이었던 갸넨드라 공을 새 국왕에 추대한다고 선포했으나, 사고경위를 믿지 않는 국민들은 “정확한 사건 진상을 밝히라”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디펜드라 왕세자는 밤 9시쯤 나라얀히티궁 왕족 가족실에서 빠져나갔다가 군복으로 갈아입고 M-16 소총과 우지(Uzi) 기관단총을 들고 나타났다. 이때만 해도 참석자들은 새로운 게임을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디펜드라는 먼저 아버지 비렌드라 국왕을 총으로 쏴 죽이고, 응접실에 있던 왕족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디펜드라는 자동 총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총구가 위아래로 향하며 천장과 바닥 양탄자에도 총탄이 박혔다. 이어 정원으로 나간 디펜드라는 뒤따라온 어머니와 남동생을 죽였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총질을 한 뒤 머리를 쏴 자살했다는 것이다. 목격자의 친척은 디펜드라가 살려달라는 숙모와 여자 사촌에게도 총을 쐈고, 15분여 총을 난사하는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며 표정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고 전했다. 당시 모임에는 왕족 30여명이 참석해 있었는데, 왕세자의 총에 9명이 죽고 20여명이 부상했다

2001년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작가 행크 케트첨 사망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Dennis and Menace)’로 유명한 미국의 만화가 행크 케트첨(81)이 2001년 6월 1일 심장병과 암으로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의 자택에서 숨졌다.

1951년 3월 처음 등장한 만화 주인공 데니스는 주근깨 투성이 얼굴의 다섯 살 난 장난꾸러기로, 어른들도 깜짝 놀랄 기지를 발휘해 이웃의 성미 까다로운 윌슨 아저씨를 골려주는 역할로 50년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만화 주인공 데니스는 개구쟁이였던 케트첨의 네살배기 아들 데니스를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만화가 히트를 치면서 지난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미 CBS 방송에서 TV 연속극으로 만들어졌으며, 1993년에는 영화도 나왔다. ‘개구장이 데니스’는 케트첨이 숨진 순간에도 전세계 48개국 1000여개의 신문에 19개 언어로 연재되고 있었다. 케트첨은 1920년 3월 14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개구쟁이 데니스`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개인적으로는 1959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진 부인 앨리스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으며 두번째 결혼도 이혼으로 끝나는 등 불운한 삶을 살았다.

2003년 세계최대 수력댐 중국 ‘싼샤(三峽)댐’ 저수시작

--환경 파괴와 유적지 수몰 등 수많은 우려 속에 2003년 6월 1일 세계 최대의 수력댐인 중국 싼샤(三峽)댐이 저수를 시작했다. 이날 0시부터 물을 채우기 시작, 수위는 전날보다 8m 상승한 해발 106m에 달했다. 싼샤댐은 일일 수면 상승폭 5m 이하를 유지하며 서서히 물을 채워나가 15일 최고 수위 135m에 이르자 저수 작업을 끝냈다. 저수가 끝난 다음날인 16일부터는 선박 통행이 시작되고 8월엔 발전기가 가동됨으로써 싼샤댐은 저수·통항(通航)·발전의 3대 기능을 모두 수행하게 됐다. 하지만 최종 완공은 최고 수위가 175m에 이르게 될 2009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15일 저수가 끝난 후 댐 상류에 길이 약 400km, 폭 최고 3km의 거대한 저수지가 형성되어 중국 경제의 주요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그 역할이 기대됐다.

그러나 주위의 수많은 유적들도 차례로 수몰되는 처지에 빠졌다. 1일 오전 이미 한(漢)대 건축물과 협곡 절벽의 잔교(棧橋)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또 유비가 숨진 백제성과 장비 사당인 장비묘, 절벽 누각 석보채, 굴원 기념관도 곧 수몰되거나 일부 피해를 입게 됐다.

쓰촨(四川)성 펑제(奉節)현에 있는 백제성은 유비가 오(吳)의 군대에 쫓겨 피신했다 임종을 맞은 곳이며, 윈양(雲陽)현의 석보채는 이백(이白)·두보(杜甫)·백거이(白居易)·소동파(蘇東坡) 등 수많은 시인들이 머물며 명작을 남겼던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저지대에 위치한 인근 신·구석기 유적지들은 지난달 본격적인 저수 준비를 위해 수위를 올리면서 이미 물속에 잠겼다. 일부 유적은 수중박물관으로 보호되거나 해체된 뒤 다른 장소로 옮겨졌지만 역사적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싼샤댐 때문에 수몰되거나 이전되는 문물은 모두 1087곳에 달했다.

2004년 이라크 임시정부 출범, 신임 대통령에 알 야와르 피선

--가지 야와르 대통령과 이야드 알라위 총리를 정점(頂點)으로 한 이라크 임시정부가 내년 1월까지의 한시적 권한을 갖고 1일 공식 출범했다.

같은 날 미국과 영국은 다국적군의 임무 기한을 늦어도 2006년 1월 이라크의 새 헌법이 비준돼 ‘정치 과정이 완료되는 시점’ 까지로 명시한 새 이라크 결의안을 유엔 안보리에 제출했다. 임시 정부는 그러나 이날 해산한 이라크통치위원회(IGC)의 흔적을 내각 곳곳에 그대로 담고 있어, 임시정부 구성을 위임받았던 라흐다르 브라히미 유엔 특사의 “전문 기술 관료로 구성하겠다” 는 애초 의지와는 거리가 먼 ‘정치 내각’ 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가지 야와르와 부통령 중 1명인 이브라힘 알 자파리, 실제로 행정 권한을 행사할 총리인 이야드 알라위 총리 등 최고위직은 모두 IGC 위원 출신이다. 지난 1년간 이라크인들은 “미군정이 구성한 IGC가 친미(親美) 성향의 해외 망명 정객 출신으로만 구성돼, 미국의 입김에 크게 좌우된다” 고 불신했었다. 이 탓에 IGC 위원들은 “새 정부는 이라크인이 주도해 뽑아야 한다” 고 주장했고, 결국 자신들이 임시정부의 또 다른 한계는 ‘되찾은’ 주권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점. 임시정부는 새 헌법이 가결될 때까지 이라크를 지배할 임시행정법을 수정할 권한이 없다.

2005년 페루의 생후 13개월 된 ‘아기 인어공주’ 다리 분리 수술 성공

--페루에서 다리가 붙은 채 태어난 생후 13개월짜리 ‘아기 인어공주’ 밀라그로스 세론양이 6월 1일(현지시간) 페루 수도 리마의 병원에서 다리 분리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스페인어로 ‘기적(밀라그로스)’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세론 양은 2004년 4월 27일 페루 우앙카요 마을에서 두 다리가 붙은 ‘인어 증후군’으로 불리는 선천적 기형아로 태어났다. 이 증후군은 신생아 7만 명 당 1명 꼴로 발생하는 것으로 현재 전 세계에 생존해 있는 사례는 3명에 불과하다.

페루 리마의 솔리다리티 병원 정형외과와 심장과, 소아과 전문의 등 11명의 의료진은 이날 4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세론양의 발목부터 넓적다리 부분까지 완전 분리에 성공했다. 이번 수술로 세론양이 정상적인 다리를 가질 수 있게 됐지만 생식기와 소화기 등이 기형이어서 장기를 재건하고 회복하려면 최고 15년 간 교정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

2005년 영국 퍼시 부부 기네스북 ‘세계 최장 결혼 기록’ 경신

--1일로 결혼 80주년을 맞은 노부부의 금실 비결은 “미안해”와 “그래, 여보”라는 말이었다.

영국 히어포드에 사는 퍼시 애로스미스(105)와 플로렌스(100) 부부는 1925년 6월 1일 동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법률사무소 직원이었던 남편 퍼시가 스물다섯 살, 주일학교 교사였던 플로렌스는 스물이었다.

이들은 결혼 2년 후 입주한 히어포드 브라인튼가(街)의 집에서 지금껏 살아왔다. 이들의 80년 해로(偕老)는 기네스북의 ‘세계 최장 결혼기록’을 경신했다 기존 기네스북 기록은 일본 노부부의 결혼 78주년이었다.

퍼시 할아버지와 플로렌스 할머니가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어떻게 80년이나 부부로 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대답은 간단했다. 플로렌스 할머니는 “미안해(Sorry)”라고 말하는 걸 절대 주저하지 말라고 했다. 퍼시는 “그래, 여보(Yes, dear)”라는 두 단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결코 다툰 채로 잠자리에 들지 않았으며, 열심히 일하며 산 것이 축복받은 결혼과 장수의 비결이라고 덧붙였다.

이들은 기네스북의 최장기 결혼기록뿐 아니라, 최고 부부 합산 나이 기록도 깨뜨렸다. 두 사람의 합산 나이는 205세하고도 267일이다. 자녀 셋과 손자·손녀 여섯, 증손자 아홉을 둔 이들은 1일 성대한 가족잔치를 열었다.

2008년 프랑스 패션디자이너 이브 생로랑 세상떠남(71세), 1

--9세에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조수가 된 생로랑은 디오르가 세상을 떠나자 21세에 수석디자이너가 되었고 25사에 자기이름을 딴 브랜드 내놓음, 1966년에 남성전유물로 여겨졌던 바지를 여성정장에 처음 도입하고 사파리 재킷을 디자인하는 등 패션혁명 일으켰다 평가받음

2009년 에어 프랑스 추락 사망228명

2009년 세계최대 자동차기업 제너럴모터스(GM) 뉴욕법원에 사상최대규모 파산보호신청, 파산법원이 주도해 구조조정작업 진행, 미국내 13개공장 포함한 불량자산 매각청산하고 새로운 GM(뉴GM) 탄생, GM대우는 뉴GM에 편입돼 살아남

2010년 '백만 송이 장미' 원곡 가사 쓴 보즈네센스키 별세

--가요 '백만 송이 장미'의 러시아 원곡 노랫말을 쓴 것으로 유명한 시인 안드레이 보즈네센스키(Voznesensk)가 2010년 6월 1일 77세로 별세했다.

보즈네센스키는 '60년대 아이들'로 불리는, 스탈린 사후에 지적 자유를 누렸던 지식인 세대의 대표격인 인물이다. 크렘린의 정치권력에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로 인해 니키타 흐루시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부터 추방 위협에 시달리기도 했다.

2011년 예멘 수도 사나에서 정부군과 하시드족 교전 최소 41명 숨짐

2011년 나이지리아 경찰 ‘아기공장’(인신매매용 아이 낳게하려 10대소녀 강제임신시키는 곳) 적발

2015년 중국 양쯔강에서 유람선 둥팡스징호 침몰 사망,실종440여명, 5일만에 인양

--6월1일 오후 9시 30분(현지시각)쯤 중국 양쯔강 중류인 후베이성 젠리(監利)현 인근에서 승객과 승무원 458명을 태운 대형 여객선 ‘둥팡즈싱(東方之星·동방의 별)’호가 침몰했다.

이 선박은 장쑤성 난징(南京)을 출발해 충칭(重慶)으로 향하고 있었다. 1994년 2월 건조됐으며 정원은 534명이다. 승객들은 난징과 창저우(常州), 상하이(上海) 등 지역 여행객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으며, 상하이 여행사가 조직한 50~80세 연령대의 노인 단체여행객도 타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관영 신화통신은 이날 새벽 “여객선 ‘둥팡즈싱’이 1일 밤 9시 28분(현지 시각)쯤 후베이성 젠리현 인근에서 침몰했다”고 긴급 타전했다. 사고 지점의 수심은 15m다. 이 매체는 사고 직후 헤엄쳐 육지로 나온 선장과 기관장의 말을 인용해 “배가 돌풍(회오리바람)에 휘말려 1~2분 만에 전복됐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는 6일 양쯔(揚子)강에서 침몰한 여객선 ‘둥팡즈싱(東方之星·동방의 별)’호 사망·실종자가 442명이라고 최종 발표했다. 승객 456명 중 생존자는 14명에 그쳤다. 당국은 침몰 닷새만인 전날 둥팡즈싱호를 인양하고 선박을 대대적으로 수색했으나 추가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번 사고는 중국 건국 이후 최악의 해상 참사로 남게 됐다.

2015년 프랑스 파리 센 강 예술의 다리의 자물쇠 철거

2015년 독일 베를린 집세를 지역평균보다 10%이상 못올리게 한 집세상승제한법 시행

2015년 미국의 인텔 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기업 알테라 167억$(18조6천억원)에 인수 발표

2016년 세계에서 가장 길고 깊은 터널인 스위스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GBT, 57.09 km)이 개통

2017년 트럼프 미대통령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 공식선언

2021년 이탈리아의 왕족 아메데오 디 사보이아아오스타 작고

2021년 캐나다의 저술가 자크 라쿠르시에르 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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