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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6월 4일

by 귤담 2023. 5. 22.

오늘의 역사 6월 4일

죽어서도 아름다운 사랑을 위해서

우리는 그 울창한 전나무 숲길을 갑니다

하늘이 맞닿는 아침햇살

적막한 마음 하나 비웁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잠시 머문 이승의 길

새소리 대숲소리, 더 깊은 기다림의,

이제는 그대를 위해

꽃길 하나 마련합니다.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섬세한 사랑을 위해

죽어서도 살아 두 손 가슴이 묻습니다.

내 그대 시리도록 맑고 밝은

그리움이 눈부십니다.

                             - 이재창 시인의 「내소사 가는 길」 전문

*세계 침략희생 어린이의 날 ;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무고하게 희생된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아이들을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유엔이 제정

*1989년 천안문 광장시위 희생자 추모일

*국민 화합의 날: 헝가리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탄신일: 핀란드

*핀란드 방위군 군기의 날(Flag Day celebration of the Finnish Defence Forces): 핀란드

*국기의 날: 에스토니아

*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5,962회라는 최장기공연 기록세운 뮤지컬 <오! 캘커타>의 1989년6월 도쿄 공연은 일본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음, 남녀 각4명씩 8명의 배우가 출연한 이 연극은 배우들이 일순간 목욕가운을 벗어던지고 전라로 무대에 도열, 초연 당시부터 비평가들로부터 “섹스라는 영역을 탐색한 파격적인 연극성이 이 작품의 메시지이고 쇼킹과 에로틱의 두 단어가 이 작품을 대변하는 가장 적절한 말”이란 평을 받음

1304년 [음]고려 충렬왕31, 국학의 대성전 준공,

--국학=신라에서 시작된 유학기관 648(선덕왕2)년 국학제도 도입 682(신문왕2)년 서라벌에 국학 세움 747(경덕왕6)년 제업박사와 조교 두고 태학감으로 고침 776(혜공왕12)년 국학으로 환원, 고려 성종11년(992) 국자감 두었고 충렬왕1년(1275) 국학으로 바꾸었다가 충렬왕24년(1298) 성균감으로 하고 대성전 세움, 충렬왕34년(1308)에 성균관으로 개칭, 공민왕5년(1356)에 국자감, 공민왕11년(1362)에 다시 성균관. 조선조에는 성균관으로 일관

1354년 [음]공민왕(恭愍王) 3년, 기근 때문에 쌀값이 폭등함

1388년 [음]우왕(禑王) 14년, 명의 연호와 복식을 다시 사용함

1435년 [음]세종 17년, 함경도 고원·영흥·문천·의천·안변의 백성 200호를 경성(鏡城)으로, 300호를 길주(吉州)로 이주시킴

--고원(高原)·영흥(永興)·문천(文川)·의천(宜川)·안변(安邊)의 백성 중에 2백 호를 경성(鏡城)으로, 3백 호를 길주(吉州)로 옮겼다. 처음에 길주·경성의 백성들을 신설한 회령(會寧)·경원(慶源)에 옮겼었는데, 길주·경성도 역시 변경이고, 거민(居民)이 희소하여졌고, 군사의 액수(額數)가 줄어들었으며, 또 경작할 만한 땅이 많으므로, 백성을 옮겨 채우게 된 것이니, 본도 감사의 아룀에 따른 것이었다.

1447년 [음]세종 29년,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여민락 與民樂〉 등을 행사에 사용하게 함

1509년 [음]중종 4년, 무격(巫覡)을 엄격히 규찰하게 함

1530년 [음]중종 25년, 김헌윤이 유배되고, 김극핍(金克愊)·김극개(金克愷)가 파직됨

1539년 [음]중종 34년, 성균관 유생들이 봉은사와 봉선사의 철거를 상소함

1565년 [음]명종 20년, 문정 왕후(文定王后, 중종 비)의 능호를 태릉(泰陵)으로 정함

1575년 조선 15대 국왕 광해군 출생

1592년 상주 전투 발발

1608년 [음]광해 즉위년, 선조(宣祖)의 시호를 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으로 고침

1675년 [음]숙종 1년,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갈림

--부응교(副應敎) 오정창(吳挺昌)이 상소(上疏)하기를,

"대신(大臣)의 직임은 그 지위가 대단히 높고 그 세력이 아주 무거워서 비록 잘못이 있더라도 오직 대간(臺諫)만이 이를 말합니다. 이러하므로 〈대간은〉 반드시 고고(孤高) 결개(潔介)하고 항직(抗直)한 사람을 언론(言論)하는 자리에 두고 절연(截然)히 서로 보지 않게 함은 그 뜻의 소재(所在)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삼사(三司)가 서로 호창(呼唱)하면서 재상[宰揆]의 문(門)에 함께 출입하고 연소(年少)한 사람들의 논의(論議)가 간혹 정승의 자리에 관계된다면, 이는 곧 나라의 체통(體統)과 조정의 기강(紀綱)을 엄숙하게 하는 것이 못됩니다. 옛 말에 이르기를 ‘군자(君子)는 서로 화(和)하면서도 〈소견(所見)은〉 같이 하지 않고 소인(小人)은 〈소견은〉 같이 하면서도 서로 화(和)하지 아니한다.’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周)나라의〉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은 서로 기뻐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서로 손상(損傷)하지 아니했으며, 〈한(漢)나라〉 엄연년(嚴延年)이 곽광(霍光)을 논박(論駁)하였지마는 곽광(霍光)은 성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진(晉)나라〉 왕도(王導)는 사람들이 다 잘한다고 일컬었습니다마는, 왕술(王述)은 ‘사람이 요(堯)·순(舜)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매사를 다 잘한다 하리요?’ 하였습니다. 만일 오늘날 서로 말만 많고 잘못을 교정(矯正)하지 아니한다면 이는 국가의 복(福)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마땅히 여러 신료(臣僚)들을 정량(貞亮)해서 아부하지 않는 가운데서 살피시와, 예(禮)를 숭상하고 책임을 다해 힘쓰는 이 두 가지 일을 병행(並行)하면서 과오를 짓지 않으시면, 조정은 스스로 바르게 되고 여러 사람의 마음도 다 복종할 것입니다."

하였다. 처음에 서인(西人)들이 이미 패하여 물러섰을 적에, 허적(許積)이 맨 먼저 권대운(權大運)을 정부(政府)에 끌어들여 허목(許穆)·윤휴(尹鑴) 등과 합류하여 하나가 되었는데, 두 복(福)587) 이 실지로는 종주(宗主)가 되었다. 대개 변국(變局)하려는 계모(計謀)에 어려 남인(南人)들이 힘을 모아 양성(釀成)하였지마는, 그러나 허목과 윤휴(尹鑴)와 오씨(吳氏)588) 와 복(福)589) 의 힘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그 때에 환관들은 궁 안에서 〈변국의 일을〉 주도하였는데, 복(福)은 환관들과 결합하고, 여러 오씨(吳氏)들과 허목과 윤휴 등은 복(福)과 연결을 지었는데, 여러 오씨(吳氏)들은 주로 중간에서 전하여 주는 역할을 하였고, 허목과 윤휴 등은 주로 논의를 지시하고 사주하는 일을 하였는데, 윤휴 등이 세력을 떨치어 조정의 정사를 전천(專擅)하려는 데 급급하였기 때문에 허적(許積) 등은 그 세력이 너무 커져서 자기의 권세를 뺏을 것을 두려워하여 드디어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청남(淸南)·탁남(濁南)의 명목(名目)이 있게 되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허목과 윤휴가 괴수(魁首)가 되고 오정창(吳挺昌)이 모주(謀主)가 되고, 오정위(吳挺緯)·오시수(吳始壽)·이무(李袤)·조사기(趙嗣基)·이수경(李壽慶)이 골자(骨子)가 되었으며, 장응일(張應一)·정지호(鄭之虎)·남천한(南天漢)·이서우(李瑞雨)·이태서(李台瑞)·남천택(南天澤)의 무리들이 매와 사냥개[鷹犬]의 구실을 하였다. 이때 이동규(李同揆)라는 자가 있었으니, 고(故) 상신(相臣) 이성구(李聖求)의 아들이었다. 이성구가 〈이동규에게〉 유언(遺言)하기를 ‘숨어 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이동규는〉 아버지의 유명(遺命)을 버리고 윤휴(尹鑴)와 더불어 죽음을 함께 하는 당(黨)이 되니, 윤휴가 현재(賢才)라고 추천하여 등용하였다. 또 상인(喪人) 이희채(李熙采)라는 자가 있었는데, 심복이 되어 비밀한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래서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이 우두머리가 되고 허목·윤휴(尹鑴)·이하가 이남(李柟)을 봉대(奉戴)하기를 마치 군부(君父)와 같이 하였다. 남(柟)은 또 역관(譯官)과 환관(宦官)들과도 한 마음이 되었었다.

한편으로는 허적(許積)·권대운(權大運)이 우두머리가 되고 민희(閔熙)·김휘(金徽)·민점(閔點)·목내선(睦來善)·심재(沈梓)·권대재(權大載)·이관징(移觀徵)·민종도(閔宗道)·이당규(李堂揆)·이우정(李宇鼎)·최문식(崔文湜) 등이 우익(羽翼)이 되었으며, 오시복(吳始復)·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권유(權愈)·목창명(睦昌明)·박신규(朴信圭)·김환(金奐)·민암(閔黯)·유하익(兪夏益)·윤계(尹瑎)·권환(權瑍)·이항(李沆)·김해일(金海一)·안여석(安如石)·이덕주(李德周)·우창적(禹昌績)·김빈(金賓) 등이 조아(爪牙)가 되니, 달라붙는 자가 매우 많았다. 유명천(柳命天)의 형제(兄弟)는 나이 젊으면서도 영수(領袖)가 되었다. 유명천은 성질이 음흉하였으며 허적(許積)의 세력에 의존했기 때문에 그 무리들 가운데서 추중(推重)되어 오정창(吳挺昌)과 더불어 서로 겨루었다.

윤휴(尹鑴) 등은 스스로 청남(淸南)으로 일컬었고,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 등의 무리들은 선조(先朝)에 높은 벼슬을 한 자가 많았다 하여 이를 탁남(濁南)이라 일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양쪽을 모두 매우 혼탁(混濁)하게 여겨서 이는 마치 암수의 까마귀와 가마와 솥의 밑이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허목(許穆)은 늙었으면서도 교묘하고 치밀(緻密)하여 혹은 좌(左)로 혹은 우(右)로 하였으며, 허적(許積)은 더욱 세상을 살아가는 데 노숙(老熟)하여 신축(伸縮)하는 데 기술이 있었으므로 안으로는 권대운 등을 부호(扶護)하면서도 겉으로는 중립(中立)인 양 하였다. 홍우원(洪宇遠)은 처음에는 윤휴·허목과 당(黨)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권대운의 당(黨)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하진(李夏鎭)·이옥(李沃)·조위명(趙威明)·이담명(李聃命) 등은 두 쪽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면서도 허목(許穆)과 윤휴(尹鑴)를 아첨하여 섬기기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 강석구(姜碩耉)의 무리와 같이 양쪽에서 서로가 수로 치지도 아니하는 자도 또한 많았다. 또는 복(服)을 입는 가운데에 있던 자가 3인이 있었으니, 이원정(李元楨)은 비록 밖에 있었지마는 시의(時議)를 멀리서 주장하여 윤휴와 허목의 성원(聲援)이 되었고, 강석빈(姜碩賓)도 또한 윤휴 등의 논의에 붙었다. 김덕원(金德遠)은 권대운 등의 도회(都會)가 되었으면서도 모두 몸으로 직접 담당하지 못하여 울울(鬱鬱)하여 견디지를 못하였다. 오시복(吳始復)은 김덕원과 한 덩어리이었다. 그래서 오정창(吳挺昌)이 가적(家賊)처럼 보았다. 오시수(吳始壽)는 속임수가 많았다. 그래서 때로는 가만히 정성을 표시하여 스스로 허적(許積) 등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윤휴는 당은 비록 수가 적었지마는, 궁 안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에 능히 그들과 서로 겨루었다.

오정창(吳挺昌)이 또 그의 부옹(婦翁)590) 정익(鄭榏) 등 소북(小北)의 무리들을 끌어들여서 그들과 더불어 일을 같이하려 하였다. 그러나 소북(小北) 사람들은 속임수가 심하고 이리저리 돌아보며 변천하는 양상을 관망하기를 잘하였다. 오정창은 본래 억세고 사나워서 그 생질의 세력을 끼고 화(禍)를 일으킬 마음을 품고 있었으며, 또 공(功)이 있음을 자부(自負)하여 마음속의 바라는 것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빨리 온 세상을 씹어 삼키려고 하였지마는, 얼마 안되어 이정(李楨)과 이연(李㮒)이 패(敗)함에 따라 처음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우정(李宇鼎) 등이 정(楨) 등의 일을 발론(發論)한 것을 성내었고 여럿이 이를 꾸짖었으니, 그것은 힘을 다하여 국세(局勢)를 뺏으려는 것이었는데, 이미 국세(局勢)를 얻고나니, 다른 사람이 가로채었다. 이에 〈국세를〉 전적으로 차지할 수 없게 되매 매우 분노하여 불평(不平)이 많았다. 당초 선조(先朝)에 허적(許積)이 사론(士論)의 배척을 받았을 적에 여러 남인(南人)들이 한 사람도 그를 구하여 주는 자가 없었는데, 오정창(吳挺昌)이 홀로 몸을 바쳐서 허적(許積)을 구하여 주었으므로 허적이 이를 매우 은덕(恩德)으로 여기었고, 오정창도 자기의 공(功)으로 여기었었다. 이에 이르러 허적이 형세에 압박을 받아 이미 정(楨)과 연(㮒)을 구해 주지 못하였고, 또 오정창과 더불어 이동(異同)을 보여 오정창이 더욱 분하게 여겼던 것이니, 이른바 ‘정량(貞亮)하여 아부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을 가리킨 것이고, 곽광(霍光)의 폐립(廢立)의 일591) 로써 허적 등을 가리켜 배척한 것이다. 또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이 모두 허적(許積)과 권대운(權大運)의 문(門)에 노안(奴顔)592) 을 하여 품명(稟命)하여 사주를 받았기 때문에 오정창(吳挺昌)이 이들을 아울러 언급(言及)한 것이다.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이 비록 둘로 나뉘어졌지마는, 서인(西人)을 공격하는 데 이르러서는 두 편이 또한 같은 소리로 합세(合勢)하여 마치 벌떼가 모이듯 하였다. 이태서(李台瑞)는 대북(大北)파 사람의 아들이었고 형모가 여우와 쥐 같아서 사람축에 끼지도 못하였지마는, 오랫동안 오(吳)와 복(福)의 문객(門客)이 되었었고, 허목(許穆)도 문장(文章)으로 인정하여 주었기 때문에 한때 삿된 소[邪疏]는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그의 무리들은 ‘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마땅히 종백(宗伯)593) 과 문형(文衡)594) 으로 있게 하겠다.’고 꾀었다. 이태서는 경박(輕薄)하게 날뛰어서 항상 사람을 대하여 말하기를 ‘나는 예조 판서(禮曹判書)나 대제학(大提學)이 될 만하다.’ 하였으니, 그 혼란[淆亂]함이 이러하였다. 당시 소북(小北)파의 사람으로서 팔을 걷어 붙이고 앞장서서 남인(南人)에게 붙은 자는 이수경(李壽慶)이었고, 남익훈(南益熏)도 또한 날마다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의 문에 나아갔었다. 서인(西人)으로서 남인(南人)에게 붙은 자는 김수홍(金壽弘)·이지익(李之翼)·정유악(鄭維岳)·곽제화(郭齊華)였고, 서인으로 떴다 잠겼다 하면서 용납되기를 구한 자는 조사석(趙師錫)·이단석(李端錫)·이하(李夏) 등이었다.

허적(許積) 등이 매양 비국(備局)에 모여서는 반드시 말하기를 ‘계해년595) 뒤의 일이 이와 같다.’ 하며 선조(先朝)를 자의(恣意)로 헐뜯어서 당론(黨論)에만 조급하여 공사(公事)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문서(文書)가 퇴적(堆積)하였지마는 결재하여 처리할 줄을 알지 못하였고, 낮과 밤으로 여럿이 모여서는 사람을 물리치고 은밀한 말을 하기에 급급하여 마치 미친 것 같았다. 또 모두 때를 타서 탐욕(貪慾)을 부렸으므로, 문을 열어놓고 뇌물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염치(廉恥)가 없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하는 것이 날로 더욱 심하였다. 이에 중외(中外)에서 그들의 사독(邪毒)을 싫어하였으며, 당시 하늘의 재변(災變)이 겹쳐 나타나서 한 여름인데도 얼음이 얼고 눈이 왔으며 여러 달을 메마르고 가물었는데, 이는 다 여러 소인(小人)들이 권세를 잡고 흔들어서 조정(朝廷)이 흐리고 어지러운 데 대한 보응(報應)으로 여겼다.

[註 587]두 복(福) : 복창군(福昌君)·복선군(福善君).

[註 588]오씨(吳氏) : 오정창의 형제들을 가리킴.

[註 589]복(福) : 복창군 형제들을 가리킴.

[註 590]부옹(婦翁) : 장인.

[註 591]곽광(霍光)의 폐립(廢立)의 일 : 곽광(霍光)은 전한(前漢)의 명신(名臣). 곽광이 무제(武帝)의 유조(遺詔)를 받들어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서 소제(昭帝)를 도왔으며, 다음 창읍왕(昌邑王)이 음란하므로 그를 폐위시키고 선제(宣帝)를 세웠음.

[註 592]노안(奴顔) : 종같이 굽실거리는 비굴한 얼굴.

[註 593]종백(宗伯) : 예조 판서(禮曹判書).

[註 594]문형(文衡) : 대제학.

[註 595]계해년 : 1623 인조 원년.

1712년 [음]숙종 38년, 무너진 신라와 고려의 왕릉을 보수함

1720년 [음]숙종 46년, 숙종의 병환이 위중하여 종묘 사직 등에 제사 지내도록 하고 죄수를 석방함

1728년 [음]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조명규(趙命奎)를 참형에 처함

1731년 [음]영조 7년, 《선조보감(宣祖寶鑑)》이 간행됨

1731년 [음]영조 7년, 관서 강변 고을에 돈의 통행을 금지시키는 문제를 의논함

1755년 [음]영조 31년, 순강원(順康園, 선조 후궁 인빈 김씨의 무덤)의 수호군으로 원호(元戶) 30명을 입역시킴

1757년 [음]영조 33년, 정성 왕후(貞聖王后, 영조 비)를 홍릉(弘陵)에 장사 지냄

1764년 [음]영조 40년, 영조가 운한편(雲漢篇)을 지어 전국에 반포함

--친히 운한편(雲漢篇)을 지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162) 에 반포하였으니, 대체로 가뭄을 걱정하고 백성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이때에 성수(聖壽)가 이미 칠질(七窒)이 지났는데도 성궁(聖躬)의 노고를 꺼리지 않고 친히 묘사(廟社)에 비를 빌었으나 비를 얻지 못하자, 또 친히 운한편을 지었는데 그 지성으로 가뭄을 걱정하는 마음이 사륜(絲綸)163) 사이에 애연(藹然)히 나타나 있으니, 옛날에 견준다면 바로 주시(周詩)의 운한편(雲漢篇)164) 이라 하겠다. 참으로 방백(方伯)과 수재(守宰)가 된 자들로 하여금 조금만 임금의 뜻을 받들어 일념으로 보효(報效)하게만 할 수 있었다면 아마도 백성을 위한 정사에 크게 보탬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장마와 가뭄 등 재이(災異)의 보고에까지 거의 사실대로 계문(啓聞)하지 않고 오로지 가리우기만 일삼고 고식(姑息)에만 힘써 드디어 재이를 숨기는 풍조만 갈수록 더 심하게 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걱정하였다.

1791년 [음]정조 15년, 서얼과 중인의 기사장(騎士將) 추천을 허용함

1792년 [음]정조 16년,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 홍수 피해 발생. 민가 2000여 호 유실, 사망자 100여 명 등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鄭大容),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다시 고령(高靈) 등 16개 고을에서 1천 7백 48호(戶)가 떠내려 가거나 무너지고 1백 3인이 빠져 죽거나 깔려 죽었으며, 남원(南原) 등 5개 고을에서는 6백 31호가 무너지고 9인이 빠져 죽거나 깔려 죽었다고 계문하니, 전교하기를,

"한 동네에서 빠져 죽은 사람의 수가 많은 곳은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거나 혹은 흙을 쌓아서 해당 원이 뇌제(酹祭)를 지내게 하고, 호남에도 분부하라. 작년에 떠내려가고 무너졌을 때에 특별히 견휼(蠲恤)한 일이 있었는데, 영남의 도백(道伯)이 가장 분명하게 하지 못하여 10월에 이르러서도 민읍(民邑)에서 조정의 영(令)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었다. 더군다나 금년의 홍수가 을해년보다 못하지 않음에랴. 이처럼 미리 하교하였는데도 또 작년처럼 하여 적간(摘奸)에서 발각되면 도백은 곧장 나처 전지(拿處傳旨)를 받을 것이니 묘당에서는 알아두라."

하였다.

1793년 [음]정조 17년, 영의정 채제공과 좌의정 김종수를 파직함

1795년 [음]정조 19년, 울릉도 산삼 채취 시기를 앞당기게 함

1805년 [음]순조 5년, 청산현(靑山縣)에서 화재로 민가(民家) 102호가 연소됨

1830년 [음]순조 30년, 청나라에 고부사를 보냄

1878년 (조선 고종15)리델 주교 등 3명 석방하고 북경으로 송환

1886년 [음]미국 정부, 길모아·벙커·헐버트 등 교사 파견하여 육영공원 개설

1886년 (고종23)한-프랑스 수호통상조약 체결

1892년 (조선 고종 29) 화가 이당 김은호 태어남

1896년 (고종33)의병장 김하락 일본군과 교전중 총맞고 강물속으로 뛰어들어 자결

1902년 대한민국의 서예가 손재형 출생

1904년 〈어채구역 조례〉 공포. 일본이 황해·충청도 연안 어업권 탈취

1906년 유림지도자 최익현 임병찬 등 전북 태인에서 의병 일으킴

1908년 대한민국의 화가 심형구 춣생.

1913년 박용만 등, 미국 네브라스카주에서 유학생회 조직

1920년 봉오동 전투.(∼7일), 대한독립군, 홍범도 지휘 하에 만주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

1920년 최초의 공중욕탕 평양에서 개설

1935년 카프 산하 좌익극단 신건설사 해체

1937년 보천보 전투 : 동북 항일연합군 유격대원 80여명이 국내 진공- 혜산 보천보 점령.

--6월 4일 만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국 공산당 소속의 항일 유격대 동북항일연군 제1군 6사 병력 100여명이 압록강을 건너 함남 갑산군내 보천보를 급습했다. 보천보는 일본인 50여명과 조선인 1300여명이 거주하고 있는 작은 시골 도시 일본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등을 파괴하고 관청을 불태운뒤 밤 늦게 떠난 유격대의 뒤를 인근에있는 일본경찰이 추격에 나섰지만 7명의 전사자와 14명의 부상자만 내고 말았다.

이상이 북한이 그들의 영도자 김일성이 주도 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보천보전투다, 이전투는 당시 국내 신문이 호외를 발행할 정도로크게 보도됐지만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를 실제로 지휘 했는지는 북한의 김일성이 보천보 전투에서 활약한 김일성과 동일인물인지 대해서는 여전히 학계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1948년 〈헌법 초안〉(작성 유진오) 발표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 및 계몽협회 간부 등 체포

1950년 상공은행 발족, 한국-일본 무역협정 조인

1951년 민간항공기 광주선 개설

1952년 교육자치제실시

1953년 한국파병 16개국 대표, 미 국무성에서 휴전에 관한 비밀회의 개최

1959년 추풍터널 개통

1961년 축첩 공무원 1,385명 해임

1961년 깡패 965명, 국토개발사업장에 작업 동원

1964년 서울과 부산, 광주, 목포, 인천, 춘천 등지에서 소규모 시위 발생

1966년 장면 전 국무총리 세상떠남

--6월 4일 제2공화국 총리였던 장면이 간염으로 작고했다. 1899년 인천에서 출생했고 호는 운석(雲石)이다.

YMCA 영어학교를 거쳐 도미(渡美),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했고 외국대학 여러곳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근무했고 1946년에는 정계에 진출했으며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이 됐다. 초대 주미대사로 한미국교수립에 크게 이바지했으며 1951년에는 국무총리가 됐다. 그 후 민주당을 조직하여 최고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56년에는 부통령이 됐다. 부통령 시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피격됐으나 미비한 상처였다. 1960년에는 부통령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했다. 1960년 8월 19일 제2공화국의 국무총리로 피선되어 정권을 장악했으나 5ㆍ16군사정변으로 취임 9개월 만에 물러나야했다.

제2공화국이 대한민국 역사상에서 가장 민주적이었던 시기였던만큼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민주주의자`라고 평가하지만 한편에서는 성격이 부드럽고 온순한 탓에 한 국가의 최고권력자로서는 의지가 강건하지 못했다는 평도 받았다

1968년 대한민국의 탁구선수 유남규 출생

1970년 연평도 서방서 해군방송선, 북한경비정에 납북

1977년 매출액 기준 국내 1백대 기업 대졸신입사원 초임은 평균 12만 9천 원

1980년 우리나라 첫 태양광발전소 강화 아차도에 건립 준공

1980년 신라 첫 비구니 사찰 영흥사 터 경주서 발견

1982년 보건사회부, 7월 1일부터 목포에 의약분업을 강제 실시하기로

1982년 조흥은행,5월19일 자살한 전 조흥은행 명동지점 차장 86억 원을 유용했다고 밝힘

1983년 나카소네 일본 수상, 사할린 잔류 한국인 교포 392명의 귀국을 희망한다고 언명

1984년 부산의 택시 운전사 1000여명, 사납금 인하를 요구하며 집단시위

1985년 북한 보천보전자악단 창단

--북한의 `보천보 전자악단`이 1985년 6월 4일 결성됐다. 북한의 2대 경음악단의 하나로 김일성의 혁명 전적지인 보천보에서 이름을 따왔다. 최고의 음악교육을 받고 기량이 가장 뛰어난 연주가, 가수, 작곡가로 구성됐으며 평양을 주무대로 활동했다.

신디사이저 등 전자악기를 주축으로 해서 피아노 등의 양악기와 전통악기를 혼용하고 있으며 음악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성악 무용을 하는 전속배우와 합창단을 사이에 두고 있다. 노동당의 문예방침에 의해 리듬보다는 가사를 중시하는 북한식 음악을 지향하고 있으나 팝송 등 세계 각국의 대중음악 여러 곡도 레퍼토리로 갖고 있다.

1985년 이민우 신민당 총재·김대중·김영삼, 시국전반 협의하고 86년중 개헌 주장

1987년 제134회 임시국회 개회 박종철군사건에 대한 국정조사권 발동요구에 민정당 불응하자 민주당 의원들 단식농성

1987년 민주헌법국민운동본부, 민정당은 전당대회를 즉각 중지,합의개헌에 응하라고 성명

1987년 동해에서 대규모 해상훈련. 국산 소형잠수함 첫선 보여

1987년 서울시경, 3개대학연합좌경단체 민민전 결성한 서울대생 임철봉 등 7명에 구속영장

1888년 치안본부 6·10 남북청년학생실무회담」을 불법집회로 간주, 학생대표 35명 수배

1988년 현대 하청업체 대표 700여 명, 중소기업 생존 권보장 궐기대회

1988년 숭실대생 박내전 분신 스스로 목숨끊음

1990년 북한, 한반도군축과 관련 미국을 포함한 3자 협상을 열자고 주장

1990년 일본 노동성, 태평양전쟁중 강제징용된 한국인수는 66만7684명이라고 밝혀

1990년 한-소 정상회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려. 조속 수교·두 정상 교환방문 등 합의

--노태우 대통령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1990년 6월 5일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날의 회담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양국이 단교한 이래 86년만에 국교수립을 가능케 했으며 동시에 동북아 냉전구조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됐다.

한소정상회담은 소련의 한반도정책과 노태우정권의 북방정책이 맞아떨어져 성사된 것으로, 고르바초프는 한반도 평화정착과 한소경제협력 확대를 바탕으로 소련의 경제발전을 도모함으로써 자신의 개혁,개방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으며 한국측 역시 사회주의권 특수를 통해 경제침체를 극복하면서 한소수교를 통한 한반도 평화구조의 정착이 필요했던 때문이다. 이 회담 결과 남북교차승인 문제가 활발히 거론되고,국가보안법 철폐, 방북인사 석방 요구가 제기됐으며 9월 30일 한소수교가 이루어졌다.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동북아6개국 평화회의 제안

1990년 서울시경, 부녀자 납치 폭행한 신종 오토바이 「폭주족」 검거

1991년 경찰, 정원식총리 폭행사건 관련 외대생 374명을 연행한 후 364명을 훈방 16명을 수배.

1993년 국내 첫 과학1호」로켓 서해안에서 발사 - 오존층 측정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한 한국최초의 과학로켓 ‘과학1호’ 가 1993년 6월 4일 서해안에서 발사됐다.

로켓은 인공위성이나 우주왕복선을 쏘아올리는 수송수단으로, 우주 개발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로켓 개발이 1차적으로 돌파해야 할 관문이라는 의미에서 ‘과학1호’ 발사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우주기술 보유국의 대열에 서게 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번에 발사된 ‘과학1호’ 가 비록 과학실험 및 원격탐사용 소형 과학위성을 저궤도상에 올리기 위한 중형과학로켓으로 선진국에서 방송통신위성이나 우주왕복선을 쏘아 올릴 때 활용하는 3단추진 로켓에 비해서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한번 추진으로 지구상공 75km까지 올라갈 수 있어 다른 나라의 과학로켓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을 받았다.

‘과학1호’ 는 길이 6.7m, 무게 1.4t, 직경 42cm의 고체연료추진형 로켓으로, 발사 후 최고 비행고도 38.6km, 비행거리 77km를 188초 동안 비행하면서 한반도 상공의 오존층 농도를 측정했다. ‘과학1호’ 는 1990년 7월부터 3년간 항공우주연구소 유장수 박사팀과 서울대, 삼성항공 등 3개 대학, 5개 기업이 공동참여, 28억4천7백만원의 연구개발비와 총3백22명의 연구인력이 투입돼 설계 제작했으며 탑재되는 전파송수신기 오존측정기, 온도측정기 등 전자장치의 경우 국산화율이 약70%나 됐다.

1993년 민주당, 김영삼 대통령의 `5·16쿠데타' 규정 발언과 관련해 김종필 대표의 사퇴 촉구.

1993년 정부 「5·8조치」를 6월말로 해제하고 재벌의 상용건물 취득 허용 발표.

1993년 3년 4개월만에 개기월식. 4일오후 8: 11~ 9:49 까지 달이 완전히 가려져 11:50 끝나.

1994년 김영삼 대통령ㆍ클린턴 미국 대통령ㆍ옐친 러시아 대통령, 유엔 안보리의 북핵 제재 결의안 지지

1996년 민주당, 이기택 상임고문을 총재로 선출

1996년 보건복지부, 35년만에 산아제한 폐지

1996년 재경원 한택수 국고국장 구속

1996년 국경경비대소속 상등병 우광빈(22), 북한 탈출후 중국서 전전하다 천인호로 밀항,인천도착 귀순

1997년 김영삼 대통령, 아스카르 아카예비치 아카예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서울)

1997년 한성기업, 스팀다리미의 스팀분종 압력용기의 파편과 고온 스팀 방출로사망3, 부상2.

1997년 한총련 한양대시위 시민 1명 사망

1998년 6.4 지방선거 실시

1999년 400년전 강화조약 체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기 일본서 발견

2000년 박지은, 美LPGA캐시아일랜드 그린스닷컴 골프대회서 우승

--수퍼 루키` 박지은이 2000년 6월 4일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뮤렐스인렛의 캐시아일랜드 그린스닷컴 클래식 골드대회 4라운드에서 LPGA 명예의 전당에 오른 백전노장 줄리 잉스터와의 기싸움에서 이겼다.

외견상 4라운드 내내 선두를 지킨 완성이었지만 마지막 3홀을 남겨두고 3타 뒤진 상황에서 일궈낸 대역전극이었다.

2000년 LPGA투어 한국선수로는 가장 먼저 우승한 선수가 됐다.

여섯살때 `리틀 미스코리아`로 뽑히며 `미의 여왕`을 꿈꾸던 박지은(미국명 그레이스 박)은 리라초등학교 2학년인 여덟살 때 골프채를 잡았다. 그리고 클럽을 잡은지 한 달 만에 93타를 쳐 주위를 놀라게 했다. 박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1991년 하와이 친척집으로 유학을 떠나 이후 미국의 주니어대회에서만 33승을 올렸다.

1995년 US여자오픈 역대 최연소(16세) 출전, 1997년 외국인으로 첫 전미체육대상 수상. 애리조나주립대 진학 후 학업과 골프를 병행하며 아마추어 랭킹 1위를 달리던 박지은은 1999년 5월 NCAA(전미대학체육협회)여자골프선수권에서 우승하며 아마추어 통산 55승을 달성했다.

1백67cm,55kg의 체격조건에 엄청난 장타가 주특기. 이번대회 2라운드에서는 드라이버샷을 303야드나 날렸다. 한편 서울에서 갈빗집 `삼원가든`을 운영하고 있는 박지은의 아버지 박수남씨는 오전 11시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음식점을 찾아온 손님 모두에게 무료로 음식을 제공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1년 한국 철도역사 102년 만에 최초의 여성역장 탄생

2001년 북한 상선, 서해안 북방한계선(NLL)과 제주해협 침범

2002년 종로서적, 최종 부도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 첫 승, 폴란드에 2-0(황선홍 유상철 득점)

--한국이 2002년 6월 4일 부산에서 벌어진 2002한일월드컵 축구대회 D조 첫 경기에서 유럽의 강호 폴란드를 시종 압도한 끝에 황선홍과 유상철의 골로 2대0 쾌승을 거뒀다. 지난 1954년 스위스 월드컵부터 여섯 차례 월드컵 본선 무대를 노크한 끝에 거둔 첫 승리였다. 한국은 역대 4무10패의 치욕적 월드컵 성적표에 드디어 1승을 보탰다.

부산 주경기장은 경기시작 6시간 전부터 관중들이 몰려들기 시작, 경기개시 휘슬이 울릴 때쯤엔 이미 열광의 도가니였다. 붉은 옷 차림으로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대한민국"을 외치며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전반 초반 폴란드의 거센 공세에 잠시 주춤했던 한국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한국은 최종 수비 홍명보가 상대 진영 깊숙이 침투하는 등 총력 공세를 폈다.

전반 26분 드디어 기다리던 골이 터졌다.

이을용이 왼쪽에서 강하게 밀어준 볼에 황선홍이 가볍게 왼발을 갖다댄 것.

월드컵 1승과 16강 진출의 염원을 담은 이 슈팅은 여지없이 폴란드 골대를 갈랐다. 한국은 후반 8분 유상철이 아크 정면에서 통렬한 오른발 중거리슛을 날려 다시 한번 골대를 흔들었다.

사실상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한국은 계속 승승장구하여 월드컵 4강 진출의 기쁨을 맛보았다.

2005년 해군 사상 첫 여성 파일럿 탄생

--해군 창군 이래 처음으로 여성 파일럿이 탄생했다. 2004년 해군사관학교 졸업 직후부터 강도 높은 비행훈련을 무사히 통과, 앞으로 링스(LYNX) 대잠헬기를 조정하게 될 양기진(24·해사 58기) 중위가 그 주인공이다.

양 중위는 2004년부터 총 32주간의 초등 및 중등 비행교육 과정과 6개월 과정의 야간 공중조작, 해상 전술 단독비행, 비상조치 절차 훈련 등 고등 비행훈련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대잠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링스 헬기 조종사는 기체 조종뿐 아니라 대잠 탐색 및 공격 장비까지 조작해야 하기 때문에 장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조작능력이 필수적이다. 특히 파도로 요동치는 구축함 갑판에서의 이착륙과 해상 15m 상공에서 수행하는 대잠 탐색임무 등에는 고난도의 헬기 운용술과 담력이 요구된다.

양 중위가 조종하게 될 링스 헬기는 대잠초계기와 함께 ‘잠수함 킬러’ 로 꼽힌다.양 중위는 “생도 시절에는 K-2 소총을 애인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링스 헬기를 애인으로 삼아 해상방위의 초석이 되겠다” 고 했다. 양 중위는 앞으로 해상작전 비행대대에 배치돼 3∼4개월간 작전가능훈련(CRT)을 받으며 대잠작전뿐 아니라 대함전, 야간 조명지원 등 전술지원 교육을 받은 뒤 실전에 배치된다.

해군은 2001년 여군장교를 처음으로 배출한 데 이어 2003년 5월에는 전투함에 여군을 처음으로 배치했다.

2009년 한국어 위키백과의 문서수가 10만개를 넘었다.

2014년 제6회 동시지방선거, 광역단체장 여당8곳·야당9곳 승리, 교육감선거에서 진보성향 후보13곳 당선

2016년 대한민국과 프랑스가 한불수교 130주년을 맞이하다.

2021년 백악관 “얀센 백신 100만회분 한국행”

103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 작고

1135년 북송 휘종 작고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에 토르데실라스 조약이 체결

1694년 프랑스의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 출생

1738년 영국 국왕 조지 3세 출생

1798년 이탈리아의 플레이보이 카사노바 세상떠남

--“만일 모든 여성이 똑같은 모습이라면 남성이 부정한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자주 미칠듯이 여성을 사랑했으나 언제나 나 자신의 자유를 더 좋아하였다.”

--평생 130여명의 여성과 결혼해 무려 210명의 자녀를 뒀던 케냐의 한 남성이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은 지병이었던 당뇨병으로 알려졌다.

케냐 지방도시 은디와 행정구역에서 아센투스 오그웰라 아쿠쿠 씨가 지병인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아쿠쿠씨는 대표적인 일부다처주의자. 22세 때인 1939년에 이미 5번째 부인과 결혼했고, 35세 때는 45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아쿠쿠씨는 지난 1997년 79세의 나이에 18세의 여성을 마지막 아내로 맞아들였다. 아쿠쿠 씨는 그러나 그동안 80여 명의 부인과는 이혼했다. 자녀 수는 무려 210명.

여성들이 거절하기 어려운 잘생긴 외모와 멋들어진 옷 맵시 때문에 ‘위험인물’이라는 별명이 붙은 아쿠쿠 씨는 연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여성들에 관한 일이라면 주위의 모든 남성을 압도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위험인물’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나는 잘 생겼으며, 옷도 멋지게 입고 여성들을 유혹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 어떤 여성도 나의 매력을 거절할 수 없었다. 나는 마치 끌어당기는 자석과도 같은 존재였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864년 중국 신강지역 무슬림, 쿠차에서 청조의 지배에 항거하며 봉기

--6월 4일 중국 신강지역 쿠차에서 무슬림들이 청조의 지배에 항거하며 봉기했다. 쿠차에서의 봉기가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인근 도시로 확산되자 그것은 곧 또 다른 봉기를 촉발시켜, 우룸치 야르칸드 카쉬가르 호탄 일리 등지의 무슬림들이 들고 일어나 6개월도 지나지 않은 그해 말에는 신강 전역을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1862년 중국 섬서성과 감숙성에서의 회민(무슬림) 봉기로 서북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청조가 신강으로의 사태확산을 막기 위해 퉁간(중국인 무슬림)들을 학살할 것이라는 소문이 신강전역에 퍼졌기 때문이었다. 군대의 숫자도 적었고 내지와의 통신도 두절된 상태에서 청군은 변변히 대항하지도 못한 채 대부분 자폭하거나 살해되었다.

봉기에 성공한 무슬림들이 힘을 결집하지 못하고 사분오열 상태에 빠져있을 때 천산 서쪽 코칸드 칸국에서 파미르를 넘어 신강지역으로 온 야쿱 벡이라는 `위대한 성전사`가 1년 만에 천산 남쪽의 양기히사르 야르칸드 호탄 등에 있는 여러 무슬림 세력들들을 모두 평정하고 1870년에는 북쪽의 악수 쿠차 우룸치 투르판 등까지를 손에 넣어 신강 전역을 통일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났던 청나라가 10여년 만에 다시 신강지역 공세를 강화해 오고, 야쿱 벡도 혼란스런 와중에 돌연사함으로 신강지역의 무슬림 정권도 막을 내렸다.

1875년 독일의 서정시인 뫼리케 사망

1878년 영국, 터어키 비밀동맹 체결, 영국 키프러스섬 획득

1895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치가 디노 그란디 출생

1913년 영국여성운동가 에밀리 데이비슨 더비 경마대회에서 여성투표권 요구하다 말에 차여 목숨잃음

1920년 연합국 헝가리와 트리아논 조약 체결

1928년 중국군벌 장쭤린 일본군에게 목숨잃음

1929년 볼드윈 영국내각 총사직

1932년 칠레에 쿠데타, 보수내각을 타도 사회주의적 정책을 채택

1936년 프랑스, 인민전선의 레온.브룸내각 성립. 최초의 사회당정권

1937년 피카소 `게르니카` 완성

1938년 제3회 월드컵(프랑스) 개막

1940년 2차 세계대전 중 벨기에군과 영국 원정군 (BEF) 및 3개 프랑스군은 덩케르트에서 철수

1941년 독일 제국의 제 2제국 황제 빌헬름 2세 작고

1942년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총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사망

1942년 2차 세계대전 중 하나인 태평양전쟁의 주도권을 결정지은 미드웨이 해전이 발발

1942년 일본 버어마에 군정시행

1943년 아르헨티나 군사쿠데타 페론 실권장악

1944년 미국-영국군 로마 점령

1946년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에 취임

--1943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문민정권을 폐하고 스스로 노동부장관에 취임했다. 하지만 그의 지나친 親노동자 정책과 국민을 통제하는 경제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1945년 10월 그는 정적에 의해 투옥된다.

페론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부인 에바와 함께 2차대전 중에 비축해 둔 풍부한 재정을 연간 20%가 넘는 임금인상과 사회보장제도, 노동자 주택정비에 투입하며 ‘페론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심정책은 결국 20세기 남미 최대 부호국이었던 아르헨티나를 파국으로 치닫게 했다.

1952년 온 국민의 사랑을 받던 에바가 세상을 떠나자 페론은 급감한 인기도와 함께 계속된 경제 파탄으로 1955년 실각했다. 이후 1973년 전 부인 에바를 닮은 세 번째 부인 이사벨과 함께 부부가 대통령과 부통령에 나란히 당선되는 이변을 낳기도 했으나 이듬해 조국을 구제할 대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1954년 프랑스-베트남 독립협정 조인

1965년 소련-월맹 원조협정 조인

1969년 서독이 캄보디아와 단교

1970년 -통가가 독립

1971년 마르크스주의자 게오르크 루카치 사망

--루카치는 1885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다페스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베를린대에서 지멜에게, 하이델베르크대에서 베버에게 사사했다. 하지만 부르주아라는 계급적 조건에 반감을 느껴 1918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첫 주저인 ‘역사와 계급의식’은 초기 마르크스의 주요개념이었던 소외와 물화를 재발견하여 블로흐와 벤야민, 마르쿠제 등 서구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히틀러가 등장한 후 모스크바로 망명해 과학학사원 철학연구소에서 미학·문학사에 몰두했다. 1944년 귀국 후 ‘젊은 헤겔’(1948) ‘이성의 파괴’(1952)를 발간했다. 반소파(反蘇派)의 입장을 견지하며 한때는 나지 이무레 정권의 문화장관이 되었으나 곧 루마니아로 추방됐다. 1957년 사면되어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온 후에는 주로 미학 연구에만 전념했다. 유고로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과 ‘윤리학’이 있다.

생애 말년에는 “최악의 사회주의 조차 최선의 자본주의보다 항상 더 낫다”라고 주장하며, 세계 유일한 돌파구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이며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 역시 마르크스 이데올로기에 입각해야 함을 강조했다.

1970년 통가,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0년 엘살바도르-온두라스 국경분쟁 종결(1969년 7월이래)

1975년 미국의 영화배우 안젤리나 졸리 출생

1977년 소련 신헌법 신국가 제정

1981년 사다트와 베긴, 팔레스타인과 시나이문제로 회담

1982년 제8회 주요선진국 정상회담 개최(프랑스 베르사유)

1983년 중국-소련 국경무역재개 합의

1989년 폴란드 동유럽 사회주의나라중 처음 다당제 총선

1989년 하메네이 이란 대통령, 이란 최고지도자로 선출

1989년 중국 베이징에서 천안문사태 일어남

--6월 4일, 중국정부가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일어난 유혈참극 `천안문사태`로 전 세계가 큰 충격에 빠졌다.

4월 15일 호요방 前당총서기가 사망하자 그의 명예회복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이 집회를 갖기 시작했고, 일반 시민도 여기에 가세하면서 집회는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천안문에서는 지식인, 노동자, 일반시민 등 100만여명이 연일 모여들어 민주화를 요구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온건파인 조자양 총서기, 호계립 정치국 상무위원 측과 강경파인 양상곤 국가주석, 이붕 총리 측이 대립했으나, 강경파가 득세하자 계엄군이 이날 새벽 천안문광장에서 무기한 농성을 벌이던 학생, 시민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군의 발포로 수천명이 희생됐다.

이후 중국은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가 급속히 냉각되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상층부 권력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 조자양을 실각시키고, 강택민을 당 총서기로 선출, 새 실권자로 등장시켰다. 실권자 등소평은 당중앙군사위 주석직 등 모든 공직에서의 사퇴를 발표했다.

2001년 이란 대통령, 샐먼 루시디의 `악마의 시` 관련사건 종결 선언

--저서 ‘악마의 시’가 이슬람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한때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영국 작가 샐먼 루시디(Salman Rushdie·54)가 10여년 만에 ‘사건 종결’ 선언을 받았다.

모하마드 하타미(Mohammad Khatami) 이란 대통령은 4일 “샐먼 루시디 사건은 이제 종결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며 “종교적·도덕적·문화적 요구에 따른 어떠한 테러에도 분명히 반대한다”고 말했다. 하타미 대통령은 “루슈디의 저술은 이슬람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용납될 수 없지만, 이란은 생각과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다”고 말했다.

인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해온 루시디는 소설 ‘악마의 시’를 출판한 이듬해인 1989년 이란의 이슬람 최고지도자인 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

91년 재개된 이란과 영국의 국교는 98년 하타미 대통령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기로 약속함으로써 대사급으로 격상됐다.

2003년 ‘이빨 가진 새’ 7000만년 만에 부활, 활동중단 유전자 살려내

--영국과 프랑스 과학자들이 공룡 시대 이후 7000년 만에 처음으로 ‘이빨 가진 새’ 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낭트대학의 조시안느 퐁탠느-페뤼 박사와 영국 킹스칼리지의 폴 샤프 박사 등 과학자들은 병아리 배아에 쥐의 세포를 이식해 7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이빨 형성 유전자’ 를 깨어나게 해, 병아리의 부리 안에 흔적 기관으로 남아 있던 이빨이 다시 자라도록 하는 성과를 얻었다.

1억 4700만 년 전 지구를 누볐던 시조새는 날카로운 이빨을 갖고 있었으나, 7000만 년 전부터는 새의 부리에서 이빨이 완전히 사라졌다.

2005년 3600년 전 이집트 제13왕조의 파라오 네페르호텝 1세의 석상 공개

--3600년 전 이집트 제 13왕조의 파라오인 네페르호텝 1세의 석상(石像)이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됐다.

네페르호텝은 제13 왕조 22대 왕으로 기원전 1696-1686년 이집트를 통치했다.

네페르호텝왕의 석상은 장례 마스크에 왕의 두건을 쓰고 있었으며 이마에는 코브라가 그려져 있었다. 고대 파라오의 상징인 코브라는 접근하는 적을 불을 뿜어 쫓아내는 것으로 고대 이집트인들은 믿었다.

이집트 남부 룩소르의 카르나크 신전에서 보수작업을 벌이던 프랑스 고고학자들은 지난 3월 한 오벨리스크 부근의 땅밑 1.6m 지점에서 1.8m 크기의 이 석상을 발견했다. 이 석상은 같은 모양의 또다른 석상과 손을 잡고 있으나, 절반이 아직 땅에 묻혀 있다

2005년 홍콩 빅토리아공원에서 중국 천안문 민주화시위 16주년 기념 집회

--6·4사건 15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지연회)는 4일 빅토리아공원에서 촛불집회를 가졌다. 홍콩시민들은 최근 중국이 홍콩에서 보통선거를 통한 특구 행정수반 및 입법회 의원을 선출하는 것을 부결시킨 것과 중국을 비판한 홍콩 라디오 프로그램의 사회자 3명이 정치적인 압력으로 연달아 사직한 것에 불만이 많아 집회에는 많은 사람이 참가했다.

지연회는 저녁 8시부터 빅토리아공원에서 촛불집회를 갖기로 했으나, 참가한 시민이 너무 많아 8시반이 되어서야 집회가 거행되었다. 집회가 시작됐을 때 이미 6개 축구장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홍콩 천주교 단체들은 집회 전에 기도회를 거행했으며 홍콩교구 천르쥔(陳日君) 주교가 몸소 참가했다. 기도회에 참가한 홍콩 시민은 빠른 시일 내에 민주 중국을 건립하기를 축원한다고 했으며, 현장에서는 6·4 영상물이 방영되었다.

2010년 케이프 케너베럴 공군기지 우주발사대 40번에서 발사된 스페이스X 팰컨 9로켓의 팰콘9 플라이트1이 처녀비행을 시작

2011년 오전 1시(JST)경에 일본 후쿠시마 원전 인근에서 규모 5.6의 지진이 발생

2012년 뉴질랜드의 건축가, 리틀턴로드터널 관리건물 설계자 피터 비번 작고

2019년 UEFA의 제5대 회장 렌나르트 요한손 작고

2021년 스위스의 화학자 리하르트 R. 에른스트 작고

2022년 러시아의 KGB 요원 드미트리 콥툰 작고

2022년 美해양대기국 ‘지난달 이산화탄소 농도 400만년 이래 최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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