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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6월 6일

by 귤담 2023. 5. 24.

오늘의 역사 6월 6일

 

 

이른 새벽 차창에 새겨지는 인파 차파

무수한 발걸음의 행선지는 어디일까

씩씩한 새벽 눈빛의 기항지는 어디일까.

 

돌아가리, 누님의 저자 위에 떨고 있는

헐벗고 굶주린 생선처럼 창백한 우리

모 심고 밭을 일구는 날들의 기억을 하며.

 

서울의 동생들도 핏기 잃은 누님의 얼굴도

익숙한 내 삽질만큼 불확실한 집을 버리고

따스한 체온으로 느껴지는 강변 숲으로 돌아가리.

                               - 이재창 시인의 「新귀거래사 · 2」 전문

 

 

 

*오늘은 망종, 벼 등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 뿌리고 보리 베는 시기, 망종을 넘기면 보릿대가 꺾어지거나 부러질 염려 있음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오”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

*오늘은 현충일, 호국영령의 명복을 빌고 순국선열과 전몰장병의 숭고한 호국정신과 위훈을 추모하기 위해 1956년에 오늘을 현충기념일로 지정 1975년12월 현충일로 이름바꿈

*조선소년단 창립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구스타프 바사(Gustav Vasa) 즉위 기념일: 스웨덴

*노르망디 상륙 작전(오버로드 작전) 기념일

*유엔 러시아어의 날: 유엔

*퀸즈랜드 데이: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주

*교사의 날: 볼리비아

 

 

 

1004년 [음]목종(穆宗) 7년, 문하시중 한언공이 사망함

1073년 [음]문종(文宗) 27년, 귀부해 오는 여진족들을 받아들이도록 함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가 아뢰기를, “삼산(三山)‧대란(大蘭)‧지즐(支櫛) 등 9개 촌(村)과, 소을포촌(所乙浦村) 번장(蕃長) 염한(鹽漢), 소지즐전리(小支櫛前里) 번장 아반이(阿反伊), 대지즐(大支櫛)과 나기나(羅其那)‧오안(烏安)‧무이주(撫夷州)‧골아이(骨阿伊) 번장(蕃長) 소은두(所隱豆) 등 1,238호(戶)가 와서 부적(附籍)하기를 요청합니다. 대지즐로부터 소지즐(小支櫛) 요응포(褭應浦) 바닷가 장성(長城)에 이르기까지 무릇 700리인데, 지금 여러 번인이 끊이지 않고 귀순하므로, 그들을 막기 위하여 관방(關防)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마땅히 유사(有司)에게 주호(州號)를 아뢰어 정하게 하고, 또 주기(朱記)를 하사하십시오.”라고 하자, 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1117년 [음]예종(睿宗) 12년, 송 황제의 하사품을 천장각에 두게 함

1273년 [윤]원종(元宗) 14년, 원이 탐라에 다루가치를 설치함

--탐라유진장군(耽羅留鎭將軍) 송보연(宋甫演)이 적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의 시신을 찾았다고 보고하였다. 또 수색하여 적장(賊將) 김혁정(金革正)과 이기(李奇) 등 70여 인을 체포하여 홍차구(洪茶丘)에게 보냈는데, 홍차구가 모두 죽였다. 원(元)이 탐라(耽羅)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을 설치하였다.

1388년 [음]우왕(禑王) 14년, 왕이 이성계 등 회군 장수들의 급습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함

--우왕(禑王)이 밤에 환관[宦豎] 80여 인과 함께 모두 갑옷을 입고 우리 태조(太祖) 및 조민수(曹敏修)·변안열(邊安烈)의 집으로 들이닥쳤으나 모두 문 밖에 군사를 주둔시키고 있어 집에 없었기 때문에 해를 입히지 못하고 돌아왔다. 기유. 여러 장수들이 숭인문(崇仁門)에서 회의한 뒤 이화(李和)·조인벽(趙仁璧)·심덕부(沈德符)·왕안덕(王安德)으로 하여금 궐에 들어가 궁중의 병장기와 안마(鞍馬)를 모두 내놓기를 청하도록 하였다. 경술. 우왕을 강화(江華)로 추방하였다. 처음에 여러 장수들이 영비(寧妃)를 내쫓을 것을 청하니 우왕이 말하기를, “만약 이 비(妃)를 내쫓으면 나도 함께 나가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원수(元帥)들이 군사를 이끌고 궁궐을 지키면서 강화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우왕이 어쩔 수 없이 나와서는 채찍을 잡고 안장에 기대어 말하기를, “날이 이미 저물었구나.”라고 하였다. 좌우가 엎드려 눈물을 흘렸으며, 응답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영비 및 연쌍비(燕雙飛)와 함께 회빈문(會賓門)으로 나와 강화로 향하였다. 백관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어 정비(定妃)에게 바쳤다.

사신(史臣)은 말하기를, “진(秦)의 정(政, 시황제)과 진(晉)의 예(睿, 원제)의 일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지만 여씨(呂氏)가 다른 사람의 아들을 세워 혜제(惠帝)의 후사로 삼은 데 이르러서는 주문공(朱文公)이 곧은 필치로 특별히 기록하여 조금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으니, 그것은 천하 후세의 사람들을 위해 경계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공민왕(恭愍王)은 일찍이 아들이 없는 것을 근심하였으므로 마땅히 종실(宗室)의 어진 자를 구하여 후사로 삼았어야 했지만 신돈(辛旽)의 아들을 취하여 몰래 궁중에서 기르며 죽은 뒤의 계책으로 삼아 끝내 그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고, 우왕 또한 황음하고 난폭하여 자신이 망가지고 왕실도 무너졌다. 아아, 우왕은 진실로 논하기에 부족하다고 해도 공민왕 또한 유독 무슨 마음이었던가.”라고 하였다.

1395년 [음]태조 4년,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고침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

1406년 [음]태종 6년, 속공(屬公)된 노비의 진고법(陳告法)을 제정

--의정부에서 속공(屬公)된 노비(奴婢)를 진고(陳告)하는 법을 올리니, 그대로 따랐다. 소장은 이러하였다.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임을 분변(分辨)할 수 없는 자와 비첩(婢妾)의 소생은, 모두 천인을 면하고 양인이 되도록 허락하여, 사재감(司宰監) 수군(水軍)에 붙였었는데, 완악(頑惡)한 무리들이 성상의 덕을 몸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도망쳐 숨어서 역(役)을 피하는 자가 매우 많으니 장차 이름을 훔쳐 양반(兩班)과 섞이는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오는 10월 초 1일을 기한으로 하여 그 전에 현신(現身)하지 아니하는 자는, 전에 상송(相訟)하던 자와 본주인의 친족에게 진고(陳告)하도록 허락하여 아울러 종천(從賤)080) 하도록 하되, 반(半)은 진고한 자에게 주고 반은 속공(屬公)시킬 것입니다. 또 상송(相訟)하던 양편이 모두 부당하여 속공된 노비는 사천(私賤)을 면한 것도 또한 족할 것인데, 오히려 도망쳐서 역(役)을 피하는 자가 있으나, 공처(公處)에서 쉽게 추고(推考)하지 못하니, 또한 10월 초1일을 기한으로 하여 나타나지 아니하는 자는, 전에 서로 다투던 양편의 친족에게 진고하도록 허락하여, 3분의 1은 진고한 자에게 상(賞)으로 주고, 그 나머지는 도로 속공 하게 하도록 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을 것입니다."

[註 080]종천(從賤) : 부모 가운데 어느 한 쪽이 천인(賤人)일 때, 그 자식도 천인이 되던 법. 반대로 양인(良人)이 되는 것은 종량(從良)이라고 함.

1412년 [음]태종 12년, 기신재(忌晨齋) 행향사(行香使)의 관복 제도(冠服制度)를 정함

1412년 [음]태종 12년, 단군(檀君)과 기자(箕子)를 함께 제사 지내기로 함

1418년 [음]태종 18년, 경승부(敬承府)를 순승부(順承府)로 고침

1437년 [음]세종 19년, 《개국 정사 좌명 삼공신 등록(開國定社佐命三功臣謄錄)》을 편찬함

1456년 [음]세조 2년, 집현전(集賢殿)을 파하고, 경연(經筵)을 정지함

1592년 (선조25)임진왜란중 신립 장군 충주 탄금대에서 세상떠남

1593년 [음]선조 26년, 선조가 숙천(肅川)에서 영유현(永柔縣) 행궁으로 돌아옴

1620년 [음]광해 12년, 도성 안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이 죽음

1636년 조선 중기의 무신 정충신 작고

1698년 [음]숙종 24년, 우의정 최석정(崔錫鼎)이 파직됨

1718년 [음]숙종 44년, 각 도에 기근과 전염병이 유행함

1723년 [음]경종 3년, 영의정 조태구(趙泰耉) 죽음

1789년 [음]폭우로 대동강이 넘침

1789년 [음]삼성사(三聖祠, 환인·환웅·단군을 모신 사당)를 개수하고 제사 의식을 개정함

1798년 [음]정조 22년, 구씨(仇氏) 성을 구씨(具氏)로 바꾸게 함

1810년 [음]순조 10년, 순조가 경희궁(慶熙宮)으로 거처를 옮김

1842년 [음]헌종 8년, 비가 내려 보사제(報祀祭)를 시행하게 함

1844년 기독청년회(YMCA) 창설

1849년 [음]헌종 15년헌종이 승하함(23세)

1849년 [음]강화(江華)에 살던 이원범(李元範, 철종)이 왕위에 오름

1849년 [음]좌의정 김도희(金道喜)가 순원 왕후(純元王后, 순조 비)에게 수렴 청정할 것을 청함

1858년 [음]철종 9년, 강화 만녕전(萬寧殿)을 다시 세우게 함

1882년 한국-영국 수호통상조약 조인

1885년 [음]〈조청 전선 조약〉 조인, 인천∼서울∼의주 간 전선 가설 합의

1888년 [음]박문국 폐쇄, 〈한성주보〉 폐간

1895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장진홍 출생

 

1904년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한국 영토의 3할이 넘는 황무지의 개간 건을 요구

1916년 대한민국의 가수 이난영 출생

1918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사업 완료

1920년 봉오동 전투(~6월7일), 중국 지린 봉오동에서 홍범도 등이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가 일본군 대파, 일본군 전사157명 부상300여명 독립군 전사4명 부상10여명

1925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익상 작고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설치 : 식민 사관 통한 한국사 왜곡 작업의 본부 역할.

1926년 6·10만세 운동 계획이 탄로남 : 200여 명이 검거됨.

1930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사건의 장진홍(1895~1930), 대구 감옥에서 자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사건) 일어남, 안창호 등 동우회원 150여명 치안유지법위반 혐의 투옥(1941.11.17 최종재판에서 전원 무죄판결)

1942년 재미한족연합회 집행부, 미화 1천 달러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

1946년 졸업가 제정(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1949년 국군, 북한군과의 옹진 전투에서 까치산 탈환

1949년 이기붕이 서울시장에 임명

1949년 이승만정권 지시로 서울시경 반민특위 포위 무기압수하고 특경대 해산

--6월 6일 오전 8시 30분쯤 윤기병 당시 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중부서 및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서 차출된 경찰 80여명이 남대문로 2가에 있는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청사 앞에 도착, 삼엄한 포위작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선 출근길의 특위 조사관들을 연행, 무기를 압수한 뒤 청사에 난입했다. 경찰은 특위 조사관들에게 주먹과 발길질을 하면서 책상 위의 서류를 찢었다. 직원 주소록 경비전화 자동차 4대 등도 압수했다.

반민특위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1948년 10월 23일 발족했다. 반민특위는 출범 초부터 친일세력의 심한 반발에 부딪쳤다. 해방직후 발족된 새 경찰의 50%이상이 일제 경찰 출신들이었고 이들이 반발세력의 중심이었다. 친일파 세력을 집권 기반으로 한 이승만도 반민특위가 눈에 가시였다. 이승만은 노덕술, 최연 등 심복인 경찰간부들이 특위에 체포되자 특위 해체를 추진했다.

이 사건은 그날로 뜨거운 정치문제가 됐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 사건을 계기로 결정적으로 약화돼 결국 석달 후인 1949년 9월 22일 와해되고 말았다.

1953년 아이젠하워 미대통령,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 용의 친서 송부

1956년 현충일 제정-국립 묘지에서 합동 위령제, 서울 동작동 제1회 현충일 추도식

1961년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공포

1961년 〈부정 축재 처리법〉 공포

1961년 천주교 인천대목구 설립.

1961년 북한방문한 코시킨 소련제1부총리 남북연방제 지지성명

1962년 고려대학생, 한ㆍ미행정협정촉구 데모. 8일 서울大生도 행정협정 촉구 데모

1964년 버거 미국 대사·하우즈 주한 유엔군 사령관, 박정희 대통령과 계엄 후 사태 논의

1972년 김대중의원 3단계통일방안(남북 평화공존-남북교류 확대-정치적 통일) 제창

1976년 카터 미국 대통령 후보. 주한미군 철수계획 발표

1984년 입주자폭행 연립건축사장체포-남의 땅에 집짓고 중도금 챙겨 달아나

1985년 한일상공그룹, 105억 부도

1986년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된 서울대 제적생 권인숙, 부천경찰서에서 문귀동 경장에게 성고문 당함

1987년 서울 29개 대학 학생 1500여명, 고려대서 연합 대동문화제 열고 시위

1989년 김영삼 민주당총재 소련방문중 허담 북한 조평통위원장과 회담

1989년 대우조선 관리직 3000여명 사표, 노조측 불법집회 폭행에 항의

1990년 일본 사회당 모토오카 의원 일본정부에 정신대 조사요구, 일본정부는 군이나 국가와는 관계없고 민간업자가 한 일이라고 답변

1990년 노태우 대통령, 부시 미국 대통령 정상회담서 남북한관계개선에 한미 긴밀 협력 합의

1991년 검찰, 밀입북사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던 문익환 목사(73) 재수감.

1991년 전국 6대도시와 경기도 지방의 2주택 이상 소유자가 19만5214명, 3주택 이상은 2만8649명.

1993년 뒤셀도르프 싱크로나이즈드 수영 에이지그룹 국제대회에서 한국사상 첫 개인·단체 우승.

1993년 전기운 중국 전인대부위원장 의회지도자로는 처음 우리나라 방문

1993년 MBC ‘장학퀴즈’ 1천회방송 특집, 중국 조선족학생들 초대출연

1996년 통계청, 『통계로 본 세계 속의 한국인』에서 남아 출산·간암 사망률 세계 1위로 집계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미국 국빈방문

 

2000년 매향리 주민·1백여 개 시민·종교 단체 회원 3천여 명, 매향리 사격장 폐쇄 등 요구 시위

2000년 미 CBS방송, 6·25 전쟁 당시 미군의 피난민 기총 사격 지시 문서 발견 보도

2001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세계신문협회(WAN) 수석 부회장 선임

2005년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 출범식

--전국 47개 고등학교 학생회가 주축이 된 한국고등학교학생회연합회(한고학련)가 2005년6월6일 공식 출범했다.

한고학련은 이날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각급 고교 학생회장 등 50여명이 모여 출범식을 개최했다. 한고학련은 출범 선언문을 통해 “역사의 전환기마다 대한민국 개혁에 이바지해 온 고등학생의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아 고교 학생회의 바람직한 운영을 통해 고교생의 의견을 모아 내겠다”고 말했다. 이들은 또 “명목적인 활동에 그치고 있는 고교 학생회의 제자리 찾기를 도모하고 고교생의 권익을 보호, 증진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한고학련은 전날 서울 방화동 국제청소년센터에서 첫 대의원 대회를 열고, 중앙대 사대부고 3학년생 김백건(18)군을 초대 의장으로 선출했다.

이 단체는 “대입제도, 학교급식 등 학생생활에 밀접한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했으나, “학생 권익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활동을 배제하겠다”며 정치 편향성을 갖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06년 대한민국의 극작가 차범석 작고

2009년 월드컵본선 7회연속진출 확정, 두바이에서 열린 아랍에미리트연합과의 최종예선 6차전 2-0 승리

2009년 범민련 전 의장 강희남 목사 자살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의 초대 의장(남측본부)을 지낸 강희남(89) 목사가 2009년 6월 6일 오후 전북 전주시에 있는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강 목사는 1990년대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대표적 친북성향의 재야운동가로 1990년대에 범민련 남측본부 초대의장을 맡아 활동해왔다. 하지만 이 단체는 연방제 통일 지지,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을 내세우고 있어, 1997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 판결을 받았다.

지난 1994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범민련 남측본부 대표단을 이끌고 방북 조문을 기도해 구속되기도 했었다. 강 목사는 통일운동과 함께,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와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기도 했다.

강 목사는 ‘6·15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와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등에서도 활동했다. 특히 이명박 정권 출범이후에는 정부가 대북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2019년 김혜순 『죽음의 자서전』으로 캐나다 그리핀 시문학상 수상

2020년 BTS 흑인인권운동캠페인 BLM(Black Lives Matter)에 100만$(120억원) 기부

2022년 한미, 지대지미사일 8발 새벽에 발사...북미사일 8발에 대응

2022년 국수 33%, 식용유 23%...73개 가공식품중 4개 빼고 다 올라

 

 

 

1236년 남송의 정치가 문천상 출생

1523년 구스타브 1세 바사가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

1799년 러시아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푸시킨 출생

1799년 미국 독립혁명가 패트릭 헨리 세상떠남(63세)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1818년 폴란드의 장군 얀 헨리크 동브로프스키 작고

1829년 일본 에도 시대의 바둑 기사 혼인보 슈사쿠 출생

1832년 영국 공리주의철학자 제레미 벤담 세상떠남(86세) 『도덕과 입법원리 입문』 『파놉티콘』

1844년 기독청년회(YMCA) 창설

1850년 무선통신 개발로 190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 출생

1868년 영국의 남극 탐험가 로버트 스코트(-1912) 태어남

1875년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 출생 - 1929년에 노벨문학상 수상

1880년 아일랜드의 정치인 윌리엄 토마스 코즈그레이브 출생

1881년 벨기에의 음악가 앙리 비외탕 작고

1882년 인도 봄베이 지방 태풍 사망10만여명

1884년 안남,`후에`조약으로 프랑스 보호령

1891년 캐나다 초대 총리 존 맥도널드 사망

1901년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1949-66) 수카르노 출생

1903년 러시아의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 출생

1916년 위안스카이(원세개) 중화민국 초대대총통 세상떠남

--“손문의 입, 황흥의 두다리도 원세개(위안스카이) 뱃속의 꿍꿍이는 따라잡지 못하네.” (20세기 초 중국 민간에 유행한 노래가사). 이렇듯 거대한 땅 중국을 통치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그가 1916년 6월 6일, 제제(帝制)의 부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만성 피로와 요독증으로 사망했다.

중국 허난 성 샹청[項城] 지방의 군인 지주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탁월한 재능을 지니기는 했으나 젊었을 때는 학문보다 운동에 더 뛰어난 재주를 보였고 쾌락을 탐닉했다. 이런 그가 이홍장이 지휘하던 안후이군(安徽軍)에 들어가면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882년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기 위해 조선에 파견되었고 이에 군사·경제면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 1885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사의로 임명됐다. 청일전쟁의 패배후 새로운 군대의 육성이 시급한 문제가 되었고 이 일이 원세개에게 맡겨지자 그의 정치적 위치가 크게 높아졌다. 1901년 직례성 총독에 임명, 후에 내각 총리대신으로서 중국 근대화와 국방계획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 신해혁명의 물결이 만주족을 위협하자 청조는 원세개를 나라의 분열을 막고 평화롭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간주, 결국 원세개가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으로 취임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뒤 원세개는 중국 내의 모든 세력을 단결시키고 중앙정부의 지도력을 강화한다는 취지하에 제제(帝制)를 부활시켜 황제가 되려고 했다. 이런 그의 야욕에 반대파는 물론이고 지지세력인 보수파 관료와 군부 내에서까지도 불만을 일으켰고 결국 그는 총통직에서조차 물러나야했다.

1925년 미국의 자동차 제조회사 크라이슬러 창립

1928년 중국 국민혁명군(북벌군), 북경 입성 시작(19일 완료)

1933년 미국 뉴저지주 리버튼에 세계최초의 드라이브인 극장 들어섬

1934년 벨기에의 국왕 알베르 2세 출생

1944년 2차대전중 연합군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 개시

--2차대전 중 독일의 히틀러는 1944년 봄부터 영국 남부 해안에 수십만명의 연합군이 몰려들고 다량의 무기와 탄약, 보급품 등이 쌓이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상륙지점을 예측하는 데 골몰한다. 상륙일자도 오리무중이었다. 상륙 저지 역할을 맡은 롬멜은 “악천후로 연합군이 1주일 이내에는 상륙할 수 없다”며 전선을 비우고 생일을 맞은 아내 품으로 달려갔다. 당초 6월 5일로 예정됐던 상륙이 하루 연기될 정도로 1944년 6월은 25년 이래 최악의 악천후를 기록했다.

6월 6일, 마침내 ‘D-데이’가 결정됐다. 작전명 ‘오벌 로드 작전’. 아이젠하워가 연합군 총사령관을 맡고 몽고메리가 상륙을 지휘했다. 상륙지점은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 6월 5일 늦은 밤, 40개 사단의 연합군 16만명과 2000척의 함정이 영국을 출발했다. 상륙용 주정(舟艇)도 4000척이나 됐고, 전투기 만도 1만1000대나 돼 7초 간격으로 이륙했다.

6월 6일 새벽 0시15분, 낙하산 부대가 해안 뒤편에 떨어진 데 이어 새벽부터는 독일군의 완강한 저항을 뚫고 상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히틀러는 이때까지도 진짜 공격이 따로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병력보강을 주저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독일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피차간의 피해가 너무 컸다.

1946년 노벨문학상(1912년) 받은 자연주의문학의 기수 독일극작가 하우프트만 세상떠남 『해뜨기 전』 『직조공들』

1955년 영화 ‘7년만의 외출’ 뉴욕 개봉,

--지하철 통풍구에서 바람이 급격히 회오리쳐 일어나 마릴린 먼로의 흰 원피스자락이 날리는 장면은 뉴욕 렉싱턴52번지에서 촬영, 빌리 와일러 감독은 먼로의 매력을 ‘육체의 충격’으로 표현

1961년 스위스 심리학자 칼 융 사망

1962년 요르단 아랍권 5개국 아랍 경제통합협정 조인

1962년 단색화의 작가로 불린 이브 클라인 세상떠남

--“청색은 바다와 하늘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연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66년 미국 우주비행사. 2시간 5분동안 우주유영

1967년 통일아랍 수에즈 운하 봉쇄

1968년 미국의 정치가, 상원위원 로버트 F. 케네디 작고

1976년 사바 주지사 툰 푸아드 스테픈 등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코타키나발루 상공에서 폭발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

1981년 인도 동부에서 열차추락 사망5,000여명

1982년 이스라엘 레바논 침공, 아라파트 PLO의장 1만5천 지지자와 함께 망명

1983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노동기구에 가입

1983년 중국. 제6기 전인대 개막

1987년 중국-몽골 국경협정 체결

1991년 소련 KGB, 히틀러 참모 헤스관련 1941년 비밀문서 공개

1993년 카르피오, 과테말라 의회에서 새 대통령에 선출

--6월 6일 과테말라 의회 특별보궐선거에서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이로써 그동안 헌정중단 사태를 겪어온 과테말라는 다시 민주통치로 복귀하게 됐다.

과테말라 의회로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아 대통령에 선출된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 신임 과테말라 대통령은 지난 1985년 과테말라에 민정이 들어선 이후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까지 줄곧 인권검사로 활약해 온 인권운동가 출신의 정치인이다.

32년 간의 군부통치에 종지부를 찍으며 지난 1985년 출범한 제헌의회 의장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1986년 부통령 후보로 나선 적이 있으며 1988년 당시 비시니오 세레소 대통령에 의해 4년 임기의 대통령 직속 인권검사로 발탁, 연임해왔다. 대통령 측근으로 있으면서도 군부의 잔학 행위 등에 대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카르피오는 전임 호르헤 세라노 대통령의 강력한 비판자였는데 세라노가 1993년 5월 25일 비상통치를 선언하고 자신을 가택연금하자 곧바로 지붕을 통해 탈출, 다음날 세라노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다. 그는 또 지난 1990년 국제적으로 말썽이 된 2건의 인권침해사범에 대한 수사를 통해 현직 군대령과 대통령 경호원을 기소하는 배짱을 보이기도 했다

1994년 중국 여객기 추락 160명 사망

--6월 6일 오전 8시12분쯤 승무원 14명과 승객 1백46명이 탑승한 중국 국내선 서북항공 2303편이 이륙 직후 8분 만에 공중폭발해 서안 남쪽의 장안현 농촌지역에 추락,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기에는 중국인 150명 외에 미국인 2명, 이탈리아인 6명, 스위스인과 홍콩인이 각각 1명씩 탑승하고 있었다.

사고는 온전한 시체가 60구에 불과할 정도의 대형 참사였다. 추락한 여객기는 러시아제 투폴레프154 서북항공 2303편 항공기로 산서성 서안공항을 이륙, 남부 광동성 광주시로 비행할 예정이었다. 이날 사고는 중국 역대 항공사고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했다. 사고는 연 20% 씩의 고성장을 구가하고 있던 중국 항공산업에 경종을 울려 중국 정부는 뒤늦게 안전점검과 정기정비에 나서는 등 부산을 떨었다

1995년 남아공 흑인노동자 5만명, 노동법개정 요구 시위

1999년 세계 최소형 2백56메가D램 개발

--일본 도시바와 미국 IBM, 독일 지멘스가 대량생산이 가능한 세계 최소의 256메가D램을 공동으로 개발했다고 1995년 6월 6일 발표했다. 256메가D램은 삼성전자도 개발에 성공했으나 양산체제용으로 공동개발에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3사가 개발한 256메가D램의 면적은 2백85.5㎟로 신문 1천 쪽 이상의 정보를 기억할 수 있으며, 미국의 공동전자기기기술위원회(IEDEC)가 1995년 여름 정한 표준규격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D램은 퍼스널컴퓨터나 게임기에 쓰이는 반도체 기억장치로 현재는 4메가비트와 16메가비트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번 개발로 2백56메가D램 시대가 열렸다

2002년 2002 Eastern Mediterranean event: 직경 10미터로 추정되는 근지구 소행성(NEO)이 그리스와 리비아 사이의 동부 지중해 상공에서 폭발

2003년 일본 자위대 유사(有事)법제 통과

--6월 6일 노무현 대통령 일본 국빈방문 1시간 전 유사(有事)법제가 일본 국회에서 통과됐다. 일본 참의원은 이날 오전 10시쯤 본회의를 개회, 토론과정을 거쳐 자민당 등 연립 3당과 야당까지 가세한 90% 가량의 압도적인 다수로 이를 가결했다.

유사법제는 일본이 무력공격을 받았을 경우 자위대와 주일미군의 국내 출동과 작전을 원활히 하기 위해 일본 국내의 행정적 지휘·협조체계를 확립하는 것이 골자로, 일본으로서는 안보상 필요한 국내법 정비에 해당한다. 일본의 경우 헌법에서 무력의 보유·행사를 포기하고 미국에 안보를 일임해 왔기 때문에 ‘법의 공백상태’로 남아 있었던 부분이다. 유사법제는 ‘공격’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법률 자체만으로는 외부에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런 법률이 없는 상황에서 북한이 미사일이라도 쏴서 실질적인 전쟁상태가 되면 ‘초법적’인 명령이 난무할 것이고, 그게 더 위험하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동안 전쟁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태세가 정비되지 않았던 일본이 앞으로 최소한의 방어전쟁을 치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점에서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들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군사대국화’ 경향과 관련해 우려를 표시해 왔다. 특히 미·일 협력을 통한 일본 안보가 강화되면 될수록 동맹국과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금지한 평화헌법과의 괴리는 점점 커져 결국 개헌론으로 이어지게 된다는 점도 주변국의 경계심을 강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2004년 슈뢰더 독일 총리,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행사 참석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가 전후 독일 지도자로는 60년 만에 처음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슈뢰더 총리는 6일 오후 3시30분(현지시각) 노르망디의 아로망쉬에서 열린 공식 기념식에 참석한 데 이어, 오후 6시30분에는 캉 전쟁기념관에서 프랑스·독일 기념식을 가졌다.

슈뢰더 총리의 참석은 유럽의 화해를 상징한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대체로 많다.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공동 보조를 취하면서 부쩍 가까워졌다.

독일 내에서도 뉴스 전문 채널 N24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77%가 슈뢰더 총리가 기념식에 참가해야 한다고 응답했다. 반면 60세 이상의 고령층에서는 참가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20%에 달했다.

하지만 독일 내에서도 엇갈리는 반응이 있다. 슈뢰더 총리가 연합군 묘지에만 헌화하고 노르망디에 있는 독일군 묘지에는 들르지 않는다는 우파 언론들의 보도로 논란이 거세지자, 벨라 안다 정부 대변인은 슈뢰더 총리가 영국 및 영연방군 전사자들과 독일군 전사자가 같이 묻힌 묘역을 방문해 헌화하고 독일군 무명 용사 묘에도 헌화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슈뢰더 총리는 “나는 독일군 300여명을 포함해 8개국 전사자가 묻힌 묘역을 갈 것이며, 그곳에선 모두가 추모심을 공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슈뢰더 총리의 부친도 2차대전에서 전사했다.

2005년 남미 볼리비아 카를로스 메사 대통령 전격 사임

--3주째 계속된 볼리비아 시위의 참여 인원이 8만여명으로 늘어나고 대통령궁 습격 위협까지 받자, 메사 대통령이 TV연설을 통해 사임 의사를 밝혔다.

볼리비아에서는 천연가스 등 에너지 산업을 외국기업들이 장악, 국부 유출과 그 에 따른 빈곤 악순환에 불만을 품은 주민들이 100% 국유화를 통한 ‘에너지 주권 회복’을 요구해왔다.

카를로스 메사 대통령은 방송인 출신의 정치인이다. 그는 1953년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예술사학자였다. 라파스와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볼리비아 영화사학자가 됐다.

이후 그는 저널리즘으로 전공을 바꾸어 라디오 뉴스 해설가와 TV 앵커로 활약하다가 TV뉴스 제작업체를 설립해 백만장자가 됐다. TV 유명세를 발판으로 2002년 무소속으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듬해인 2003년 2월, 당시의 곤살로 데 로사다 대통령이 소득세 부과 법안을 제출했다가 격렬한 반정부 시위에 부닥쳤다. 메사 부통령은 로사다 대통령의 시위 강경진압에 반발했고, 한달 뒤 로사다 대통령이 미국으로 망명하자 대통령직을 넘겨받았다.

그러나 메사 대통령 역시 취임 이후 천연가스 개발 문제로 거의 매일 시위에 시달렸다. 그는 2004년 6월 천연가스 관련법 처리를 둘러싼 국민투표에서 승리했으나, 급진주의자들이 천연가스 사업의 국영화를 주장하면서 연일 반대시위를 벌이자 결국 사임의사를 표시했다.

2012년 동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금성의 태양면 통과 현상이 관측

2013년 영국 가디언 지 '스노든 파일' 첫 폭로기사 "시민 수백만명 전화기록 수집" 보도

2018년 만취여성 성폭행한 스타 강사 브록 터너에게 징역6개월 선고한 애런 퍼스 캘리포니아주 판사 주민소환투표로 해임

2019년 25조원 기부한 ‘인도의 빌 게이츠’ 아짐 프렘지 위프로 회장(71세)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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