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오늘의 역사

오늘의 역사 6월 3일

by 귤담 2023. 5. 22.

오늘의 역사 6월 3일

개자식들이다, 내부수리의 현장에서 일어서지 않는.

나폴레옹 꼬냑, 드라이진, 보드카 하야비치, 조니워카, 알레산더, 마패 브랜디, 로진스키, 노블와인…… 모두가 식탁 밑에 안경을 쓰고, 잊을 것은 잊고 버릴 것은 버리는 눈이 먼 얼굴은 몇개의 얼굴로 넘나들고, 피곤한 정신은 옆에 서서 늘 오기를 부리는 대학 강사의 눈빛같은 기항지를 찾아 게나 고동이나 정봉준이는 깡다구가 있었네, 종달새는 사라진지 오래네, 신학국문학사는 오해를 하고 있네, 술꾼들은 언제나 평온하네, 애드벌룬의 낙하는 우리들의 제삿날이네, 리얼리즘을 취급하는 깡냉이 같은 이빨을 갈고 있었네, 순수시가 어쩌네, 참여시가 어쩌네, 노벨문학상이 어쩌네, 가을철 문학상 제도가 간나구 같네, 출판기념회가 재이 있었네,현대시는 독자들을 외면하네, 꽃을 파는 여자를 좋아하네 라고 지껄이는 개자식들의 발(足)에 땀이나 홀리리라. 그들의 머리가 진실하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가 진실한 자는 거리의 팅족들이다. 돌아서서, 슬픈 얼굴을 짓누르며 잔을 드는 그녀의 화대(花代)로 취하는 오늘을 기념하기 위하여 오, 방황하네 부활이여 환희여.

풀꽃과 나무를 베어내는 모습을 보다가

나는 그만 발길을 옮기고 말았다.

                                    - 이재창 시인의 「위대한 사기꾼」 전문, (시조문학 22, 1980년 봄호)

“죽음이란, 날마다 밤이 오고 해마다 겨울이 찾아오는 이치와 같이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밤이나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는 준비를 한다. 그렇듯 죽음에 대한 준비는 단 하나밖에 없다. 훌륭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들이 훌륭한 인생을 살면 살수록 죽음은 더욱더 무의미한 것이 되며, 그에 대한 공포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성자에게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 -프란츠 카프카(1924년 오늘 40세로 세상떠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소설가 『변신』 『심판』 『성』)

*금연절(禁煙節): 중화민국

*마보 데이: 호주

*남군 전몰자 현충일: 켄터키주 루이지애나주 테네시주

1116년 [음]예종(睿宗) 11년, 송 휘종이 대성악을 하사함

--왕자지(王字之)가 송(宋)에서 돌아왔다. 휘종(徽宗)이 조서에 이르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예법이 쇠퇴해지고 음악이 훼손되었으므로, 짐이 옛날의 제도를 자세히 살펴 전술(傳述)하여 밝히고 백년 만에 일으켜서 마침내 대성악(大晟樂)을 만들었다. 천년이 지나서야 선왕(先王)을 뒤좇아 가락을 갖추고 소리를 어울리게 하여, 드디어 악기[羽物]의 고상하고 담백한 소리에 이르게 되었으니, 온 나라에 가득 차게 하여 빈객을 편안하게 하고 먼 데서 온 사람을 기쁘게 할 만하다. 생각건대 멀리 있는 그대의 나라는 동해의 끝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하리(下吏)에게 명을 청하고자 사신을 조정에까지 보내왔다. 옛날 제후가 교화가 존엄하고 덕이 융성하면 음악으로써 상으로 내렸으니, 이에 헌거(軒簴)를 나누어 주어 그대의 천복(天福)이 되게 한다. 대체로 풍속을 개량하여 세상을 좋게 하는 데에는 이만한 것이 없으니, 가서 이 명을 받들어 나라를 다스리면, 비록 강토가 다르고 국토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다 같이 화합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이제 대성아악(大晟雅樂)을 하사하노라.”라고 하였다.

1151년 [음]의종(毅宗) 5년, 보문각 학사 등에게 『책부원구(冊府元龜)』를 교정하게 함

1338년 고려, 지진 피해

1388년 [음]우왕(禑王) 14년,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실각함

--6월 계묘 초하루. 모든 군사가 근교에 와서 둔을 치고 글을 지어 김완(金完)에게 주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우리 현릉(玄陵, 공민왕)께서 지성으로 큰 나라를 섬기셨고, 천자도 일찍이 우리나라에 군사를 일으킬 뜻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최영(崔瑩)이 총재(冢宰)가 되어 조종(祖宗) 이래로 사대한 뜻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대군을 일으켜서 장차 상국(上國)을 침범하려고 하였으니, 무더운 여름에 군사를 움직여서 삼한(三韓)이 농기를 잃었고, 왜노(倭奴)가 틈을 타서 깊이 침입해와 노략질하며 우리 인민을 죽이고 우리 창고를 불태웠습니다. 이에 더하여 한양(漢陽)으로 천도한다고 하여 안팎이 소란합니다. 지금 최영을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종사(宗社)를 뒤집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우왕(禑王)이 진평중(陳平仲)을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교서를 전하기를,

“명을 받들어 국경을 나갔다가 이미 지휘[節制]를 어기고서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고 또한 강상(綱常)을 범하였으니, 이러한 흔단(釁端)에 이른 것은 진실로 보잘 것 없는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군신의 큰 의리는 실로 고금에 통하는 법칙이다. 그대는 책 읽기를 좋아하면서 어찌 이를 알지 못하는가. 하물며 조종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역(疆域)을 어찌 쉽사리 남에게 넘겨줄 수 있겠는가.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러 사람에게 모의하니 모두가 좋다고 하였는데, 이제 어찌 감히 어기는 것인가. 비록 최영을 지목하여 핑계로 삼았지만, 최영이 내 몸을 호위하고 있음은 경들도 아는 바이며 우리 왕실을 위해 힘써 수고한다는 것 또한 경들이 아는 바이다. 교서가 도착하는 날에 고집을 피우지 말고 잘못을 고치기를 주저하지 말 것이며, 함께 부귀를 보존하여 처음과 끝을 도모하기를 내가 진실로 바라는데, 경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라고 하였다. 또한 설장수(偰長壽)를 군영으로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술을 하사하고 그 뜻을 알아보고자 하였는데, 여러 장수들이 도성 문 밖까지 진군하여 둔을 쳤다. 동북면(東北面)의 인민 및 여진(女眞)으로 본래는 종군하지 않았던 자들도 태조가 회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투어 모여들어 밤낮으로 뛰어온 자가 1,000여 명이었다. 우왕이 이에 창고의 금과 비단을 풀어 군사를 모집하여 수십 명을 얻었으나 모두 창고의 노예이거나 시정의 무리들이었으며, 여러 도에서 군사를 징집하여 개경으로 들어와 원조하게 하고는 수레를 모아서 골목 입구를 막게 하였다. 조민수(曹敏修) 등의 관작을 삭탈하고, 최영을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으로, 우현보(禹玄寶)를 우시중(右侍中)으로, 송광미(宋光美)를 찬성사(贊成事)로, 안소(安沼)를 평리(評理)로, 우홍수(禹洪壽)를 대사헌(大司憲)으로, 정승가(鄭承可)를 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護軍)으로, 조규(趙珪)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김약채(金若采)를 지신사(知申事)로 삼았으며, 저자에 방을 붙여 알리기를, “조민수 등의 여러 장수들을 붙잡는 자는 관사(官私) 노예를 막론하고 크게 벼슬과 상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을사. 우리 태조가 숭인문(崇仁門) 바깥 산대암(山臺岩)에 주둔하며 유만수(柳曼殊)를 보내어 숭인문으로 들어가게 하고 좌군(左軍)은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게 하니, 최영이 맞서 싸워 모두 물리쳤다. 처음에 태조가 유만수를 보낼 때 좌우에 말하기를, “유만수는 눈이 크고 광채가 없으므로 담이 작은 사람이다. 가면 필시 패배하여 달아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과연 그러하였다. 이때 태조가 들판에 말을 풀어놓았는데, 유만수가 달아나 돌아오자 좌우에서 아뢰었음에도 태조는 응답하지 않고 장막 속에 꼿꼿이 누워있었다. 좌우에서 두세 번 아뢰자 그제야 천천히 일어나 식사를 하고서 명을 내려 안장을 갖추고 군사를 정돈하게 하였다. 장차 출발하려 할 적에 100보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태조가 소나무 그루를 쏘아 승전의 조짐을 점쳐봄으로써 군사의 마음을 모으고자 하여 드디어 활을 쏘아 한 번에 꺾어버리자 여러 군사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진무(鎭撫) 이언(李彥)은 나아와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우리 영공(令公)을 모시고 간다면 어디인들 가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태조가 숭인문(崇仁門)으로 성에 들어서서 좌군(左軍)과 함께 나란히 진군하였다. 도성의 남녀가 다투어 술과 음료를 가지고 군사들을 환영하고 위로하며 수레를 끌어내어 길을 열었고, 노약자들은 성에 올라 이를 바라보며 기뻐 날뛰었다. 조민수가 흑대기(黑大旗)를 세우고 영의서(永義署) 다리까지 갔다가 최영의 군대에 의해 쫓기고 있었는데, 조금 뒤에 태조가 황룡대기(黃龍大旗)를 세우고 선죽교(善竹橋)를 거쳐 남산(男山)에 오르니 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북소리가 땅을 흔들었다. 최영의 휘하 안소가 정예병을 이끌고 먼저 남산을 점거하였으나 깃발을 보고 달아나 무너졌다. 최영이 형세가 궁박한 것을 알고 달아나 화원으로 돌아왔으나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문지기를 창으로 찌르고 들어갔다. 태조가 드디어 암방사(巖房寺) 북쪽 고개에 올라 큰 소라를 한 번 불었다. 이에 군사들이 화원을 수백 겹으로 둘러싸고 큰 소리로 최영을 내놓으라고 소리쳤다. 매번 출정하여 전투할 때 여러 장수들은 소라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오직 태조만이 말 앞에서 소라를 불었기 때문에 도성 사람들이 소라 소리를 듣고는 모두 태조의 군사가 이미 이르렀음을 기뻐하였다. 우왕이 영비(寧妃) 및 최영과 함께 팔각전(八角殿)에 있었는데 최영은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조라치[吹螺赤] 송안(宋安)이 담장에 올라 소라를 한 번 불자 군사들이 한꺼번에 담을 허물고 궁정으로 난입하였고, 곽충보(郭忠輔) 등 3~4인은 곧바로 전각 안으로 들어가 최영을 찾았다. 우왕이 최영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니 최영이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나왔다. 태조가 최영에게 말하기를, “이러한 사변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국가가 안녕하지 못하고 인민들이 곤경에 처하여 원성이 하늘에 이른 까닭에 부득이하게 된 것이니,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라고 하였다. 서로 마주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마침내 최영을 고봉현(高峯縣)으로 유배 보내었다. 과거 최영은 명을 내려 정벌에 나선 여러 장수의 처자들을 가두고자 하였으나 이미 일이 급박하게 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이인임(李仁任)은 일찍이 말하기를, “이 판삼사(李 判三司)는 모름지기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최영이 그 말을 듣고 매우 분노하였으나 감히 말하지는 않았다. 이에 이르러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인임의 말이 정말 맞았구나.”라고 하였다. 송광미·안소·조규·정승가 등은 달아나 숨었다. 두 도통(都統) 및 36인의 원수가 궐에 가서 절하여 사례하고 다시 궐문 밖으로 군사를 돌렸다. 이보다 앞서 잠저(潛邸)가 있는 동네에 동요가 있어 노래하기를, “서경의 성 밖에는 불빛이, 안주(安州)의 성 밖에는 연기가 있네. 그 사이를 오가시는 이 원수(元帥)여, 바라건대 이 백성을 구제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러한 변이 생겼다.

1402년 [음]태종 2년,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순위부(巡衛府)로 고침

1411년 [음]태종 11년, 종약색(種藥色)을 혁파하여 전의감(典醫監)에 소속시킴

1412년 [음]태종 12년, 영의정부사 하윤(河崙)이 가곡(歌曲)을 지어 올렸는데, 《염농부지곡(念農夫之曲)》 4장(章), 《염잠부지곡(念蠶婦之曲)》 4장, 《진가언지곡(進嘉言之曲)》 8장이었다.

1418년 [음]태종 18년, 양녕 대군이 폐위되고 충녕 대군(忠寧大君, 뒤에 세종)이 왕세자가 됨

1429년 [음]세종 11년, 석척군(石擲軍, 단오에 돌 던지는 놀이를 행하는 군사)을 폐지함

1455년 [윤]단종 3년, 명나라 사신에게 금강산 그림을 줌

1512년 [음]중종 7년, 정로위(定虜衛)를 설치하고 한량(閑良) 1,000명을 뽑아 소속시키게 함

1553년 [음]명종 8년, 윤원형(尹元衡)이 좌찬성이 됨

1554년 [음]명종 9년, 부민 고소법(部民告訴法)을 개정함

1573년 [음]선조 6년, 조목(趙穆)·이지함(李之菡)·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김천일(金千鎰)의 학행이 뛰어나 관직에 추천됨

1612년 [음]광해 4년, 《경제육전(經濟六典)》의 완본을 구하게 함

1635년 [음]인조 13년, 삼남 지방에 새 양안(量案)이 작성됨

1646년 (조선 인조24)임경업 장군 청나라에서 풀려나 돌아옴

1664년 [윤]현종 5년, 황해도에서 전염병으로 174명 사망

1678년 [음]숙종 4년, 관서·호남의 감영(監營)·병영(兵營)에서 동전을 주조하게 함

1689년 [음]숙종 15년, 전 좌의정 송시열(宋時烈) 죽음

1694년 [음]숙종 20년, 장희재(張希載)를 심문함

1711년 [음]숙종 37년 수구문(水口門)을 축조한 뒤 돈의문루(敦義門樓)를 조성하게 함

1717년 [음]숙종 43년, 황해도 곡산에서 화재로 민가 220호가 연소하고 사망자 2명 발생

1718년 [음]숙종 44년, 옹진현을 혁파하고 수영(水營)에 합치시킴

1740년 [음]영조 16년, 《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하게 함

1743년 [음]영조 19년, 《황명정사(皇明正史)》 중 열조 본기(列朝本紀)와 조선(朝鮮)이 첨부된 책 및 사신이 무역해 온 책자 등을 사국(史局)에 비치하게 함

1760년 [음]영조 36년, 추수 이후까지 정전에 나아가지 않고, 음악을 정지하게 함

1774년 [음]영조 50년, 군문(軍門)의 군사들이 몰래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함

1778년 [윤]정조 2년, 동가(動駕, 임금의 수레행차)할 때의 연주에 관한 정식을 정함

1786년 [음]정조 10년, 청주성(淸州城)을 쌓음

1786년 추사 김정희 출생

1794년 [음]정조 18년, 울릉도의 수색 결과에 관해 강원도 관찰사가 장계함

1816년 [윤]순조 16년, 동(銅) 생산지에 점포를 설치하여 주조에 필요한 동을 가져올 수 있게 함

1867년 [음]국내에 반입된 청나라 화폐의 통용 합법화

1878년 (고종15)강원도 간성의 건봉사 불 3,000여간 태움

1884년 (고종21)미국선교사 매클레이 포교와 육영사업 허가

1894년 동학난 진압위해 청에 파병 요청. 이홍장 파병

1899년 〈중추원 의사 규칙(中樞院議事規則)〉 반포

1902년 산돌 손양원 목사 출생

1903년 서울-수원 전신전화 개통

1905년 국어학자 일사 방종현 출생

1911년 사찰령 공포 선-교 양종으로 통합 30본산제

1921년 소설가 유주현 출생

1936년 장항제련소 준공

1936년 총독부 발행 조선민력에 음력이 폐지됨. 양력 발행을 결정

1942년 경성부, 절미 운동에 따라 쌀 대용품으로 면미(麵米) 배급 개시

1942년 독립운동가 윤세주 작고.

-- 한국의 독립 운동가이다. 경상남도 출신으로 아명은 소룡(小龍), 호는 석정(石正)이다. 약산 김원봉의 동향 사람으로 함께 의열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백범일지에는 석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본관은 무송 윤씨(茂松)이다.

경상남도 밀양 태생이다. 두 살 위인 김원봉과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평생 함께 독립 운동을 하는 동지가 되었다.

1910년 일본에 나라가 강점되는 경술국치를 맞자 김원봉과 함께 일본어 시간이 있는 날은 학교에 가지를 않았고,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에 학교에서 일장기를 나누어주면 화장실에 넣어 버리는 등 어릴 때부터 강한 민족의식을 나타냈다.

보통학교를 자퇴한 후 밀양의 민족주의적 사립 학교인 동화중학을 입학했다. 당시 교장 전홍표는 유명한 항일 인사로서 "빼앗긴 국토를 도로 찾고,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기 전에는 우리 민족의 운명은 언제나 슬프고 비참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이 있는 동안 강도 일본과의 투쟁을 한때라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고 강조했다. 이런 영향을 받은 석정은 약산과 함께 역무단이라는 비밀 조직을 만들었고 여기서 개천절 기념행사를 가지고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동화중학은 폐쇄되게 된다

1943년 해군 특별 지원령 공포(10.1. 시행).

1944년 경남 진해에서 제1회 해군 징모(徵募) 검사 실시

1946년 이범석 장군 및 광복군 5백여명 귀국

1946년 이승만 남한단독정부 수립계획을 정읍서 밝힘(정읍 발언)

--6월 3일 이승만 박사가 전북 정읍에서 남한 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했다.

해방정국에서 국제정세에 가장 밝았던 현실주의 정치가 이승만은 이미 북한의 소비에트 권력체제가 현실적으로 깊숙이 진전되어 있다고 판단. 아무 뚜렷한 전망도 없는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위에 더이상 남한의 정권수립을 무작정 맡겨둘 수 없다고 보고 이같은 연설을 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정읍발언`의 배경이다.

이승만의 연설은 미국정부와 국내 중도적 온건파 등을 당황하게 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은 민족단합을 통한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원했고, 미국은 소련과 합의한 `모스크바 의정서`에 따라 미소협조에 기초해 한반도에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성사시켜 남북을 통틀어 조선임시정부를 세우려는 계획을 진행해 왔기 때문이었다. 미소공동위나 좌우합작운동도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미국의 이러한 정책을 맹렬히 공격했다. 소련의 침략적 팽창주의의 본질을 모르는 유화주의자들이 한반도정책을 오도하고 있으며 미국의 구상대로 일을 추진하다가는 결국 남한마저 소련에 의해 공산화될 것이라고 정읍발언에서 경고한 것이다.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불가피론은 도쿄에 자리잡고 있는 태평양지역연합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도움으로 1946년 12월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조야를 상대로 설득전을 폈다.

미국은 마침내 1947년 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소련에 대한 종전의 유화정책을 버리고 소련의 팽창주의정책과 세계적화전략에 과감히 맞설 것임을 다짐했다.

1947년 미군정청, 한국정치기구를 ‘남조선과도정부’로 호칭

1947년 북한조선민족혁명당, 인민공화당(당수 김원봉)으로 개편

1949년 국회, 全 국무위원 인사책임안 가결

1953년 이승만, 미국에 휴전협정 전에 한미상호방위협정이 체결되어야 한다고 주장.

1963년 기독교오순절협동교회연합회 창립(국내 오순절교단으로 박덕종목사에 의해 창립됨)

1963년 시인 오상순 세상떠남

--“폐허지 동인으로 신문학운동에 선구자가 되다. 평생을 독신으로 표랑하며 살다. 몹시 담배를 사랑하다. 유시집 한 권이 남다.”-오상순 비문(시인 구상 씀)

1964년 6.3사태, 1만여 학생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시위 서울일원 비상계엄 선포

--5·16군사혁명 후 2년7개월 만에 권좌에 오른 박정희 대통령이 첫 대규모 난관에 봉착했다. 한·일 간 국교수립을 서둘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구악 근절을 내세우면서 신악을 양산한 것도 반발을 부채질했다. 야당을 중심으로 `범국민투쟁위원회`가 결성되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매국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면서 정국은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 문리대생 500여명이 거리로 진출한 것을 신호탄으로 각 대학 학생들도 거리로 뛰쳐나왔다. 이때부터 6월 3일까지 대학가와 거리는 최루탄 연기와 곤봉, 널브러진 돌덩이들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정부는 유화적인 태도로 사태확산을 막아보려 했지만 학생들이 단식농성 등 강도를 점차 높여나가자 강경책으로 선회했다.

6월 3일 시위가 절정을 이룬 이날, 국회의사당에서 청와대에 이르는 길은 수만명의 학생들과 경찰들로 뒤덮였다. 사태가 4·19를 방불케 하자 정부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오후 9시40분, 마침내 오후 8시를 기점으로 한 계엄령이 서울시 전역에 선포됐다. 계엄은 55일 뒤에 해제됐지만 1120명이 검거되고 348명이 구속됐다. 이때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던 세대를 학생운동사에선 `6·3세대`라고 부른다.

1969년 호남정유 공장 준공

1970년 국회 본회의,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압수 문제로 공화·신민당 의원들 난투

1971년 김종필 제11대 국무총리 취임

--김종필의(1926~)의 정치 인생을 상징하는 단어는 ‘2인자’와 ‘풍운아’다. 1960년대 이후 우리나라 현대 정치사 곳곳에 흔적을 남긴 그의 정치 역정은 영광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김종필은 육군 정보국 전투정보과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던 박정희를 만나 대위 시절이던 1952년 2월 박정희의 조카인 박영옥과 결혼, 조카사위와 처삼촌의 관계로 발전했다.

이러 김종필은 박정희가 주도한 5·16쿠데타에 기획자로 깊숙이 참가했다. 5·16 성공 후 김종필은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군사정부의 두 번째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1963년 1월 9일 중앙정보부장을 사임한 뒤 “자의반 타의반”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1963년 2월, 8개월간의 1차 외유에 나섰다.

1963년 10월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귀국한 그는 그해 12월 고향인 충남 부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뒤이어 공화당 당 의장으로 복귀했다

개헌 국민투표 때는 전국을 돌며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충성을 맹세해 1971년 6월 3일 풍운아 생활 10년 만에 국무총리로 기용되었다. 김종필은 1975년 12월까지 4년 6개월간 재임했으나 김형욱·이후락으로 이어지는 중앙정보부장의 전횡에 눌려 주요 국정에서는 소외되었다.

1973년 작곡가 윤이상 동양인으로는 처음 베를린예술원 종신회원으로 뽑힘

1975년 도피성 이민 우려 있는 명사 84명 출국규제

1975년 연간 농가소득, 도시노동자 가구 소득보다 3만 원 증가

1983년 서울 강동경찰서, 판정에 불만 품고 주심 폭행한 프로야구 감독 구속

1985년 국회, 남북한통일헌법을 만들자고 북한에 제의

1985년 국회 13개 상임위원회,<문제발언> 등 야당의 정치공세로 파란

1985년 4월 말 현재 외채 총액 443억달러, 84년보다 12억달러 증가

1986년 전두환 대통령,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의 청와대단독회담 4일 이만섭 국민당 총재와 단독회담

1986년 한국축구 36년만에 월드컵 본선진출

1987년 서울형사지법 보도지침폭로 유죄판결, 김태홍 징역10월 집행유예2년 김주언 징역8월 자격정지1년 집행유예1년 신홍범 선고유예, 김영삼정부 들어선뒤 대법원은 모두 무죄판결

1987년 전두환 대통령, 제4차 평통자문회의서 남북 최고책임자회담 재촉구

1987년 민정당 중집위,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 후보로 제청

1987년 이동영 부총재 등 민주당 의원 5명, 이한기 총리서리에 김대중씨 연금해제 요구

1988년 대검찰청, 1980년 이후 1987년 6·29까지 집시법 위반 3241건·4832명 입건·2780명 구속으로 집계

1988년 이현재 총리, 남북고위당국자회담제의 북에 전달. 북, 남북연석회의 준비일환으로 고려용의 밝혀

1988년 야권3당 국회법개정특위, 국회권한강화. 의장권한축소 등을 골자로 한 국회법개정 단일안 마련

1988년 서울지검, 한국에너지 연구소의 방사선 폐기물 누출사건 경위 조사

1989년 대우조선 파업 한달만에정상-노사타협 - 결렬 반복

1989년 임수경 평양축전 참가-46일만에 귀환-문규현신부 파북

1989년 용인 동부파출소와 서울 강남 대치파출소 조사받던 민용기씨와 임광식씨가 경찰에 폭행당해 사망

1989년 김대중 평민당총재 광주에서 `연내 광주· 5공 청산 못하면 노정권종식 투쟁 벌이겠다'고 군중 연설

1989년 소련 방문중인 김영삼 민주당총재, 소련 외교 특보 만나 한반도정세 및 한·소 교류방안 등 논의

1989년 KBS라디오 프로듀서 60여 명, 노태우 대통령의 라디오 주례 방송의 절차·방법 문제로 첫 방송 거부 결의

1990년 노태우 대통령, 샌프란시스코 한.소정상 회담과 워싱턴 한ㆍ미정상회담 위해 미국 방문(∼8일)

1991년 정원식 국무총리,외국어대 교육대학원 강의를 마친후 학부학생들로부터 계란과 밀가루세례 봉변

--정원식 계란 투척 사건(鄭元植-事件) 또는 외대 사태(外大事態)는 1991년 6월 3일 오후 18:30분 경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 강당에서 당시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되어 교수직을 사퇴하는 정원식(鄭元植)에게 계란, 밀가루, 페인트, 짱돌, 소주병, 맥주병, 유리조각, 인분 등을 집단으로 투척한 사건이다. 전두환 정권에서 문교부 장관을 지냈던 그는 서울대학교와 덕성여자대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육대학원의 시간강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는 그가 문교부 장관으로 있을 때 전교조를 불법화하고 전교조 인사들의 구속과 불이익 조치를 취한 데 대한 학생 운동권의 집단 반발이었다. 전교조 불법화 문제와 강경대 치사 사건과 학생운동가들의 연이은 분신 자살 사건, 시위 도중 도망치다가 동료 시위대에 깔려죽은 김귀정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학생운동권의 정부, 문교부 당국에 대한 반감은 거셌고, 전교조 불법화와 전교조 소속 교사들의 집단 해고를 강행한 정원식은 운동권 학생들의 표적이 되었다. 당시 계란과 밀가루, 페인트를 뒤집어 쓴 정원식의 사진이 각 일간지와 외국신문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6·3 외대 사태, 외대 계란 사건 등으로도 부른다.

1991년 재미교포대학생 강병석군이 단독 요트 크루즈 호로 로스앤젤레스항을 출발, 87일만에 부산항 입항

1992년 한국기후생물협약 서명-180개국 환경개발 회의

1992년 민주당 14대 초선의원 12명 회견 갖고 `깨끗한 정치의 구현'과 `정치문화의 개혁'운동 발표.

1992년 건설부는 지난 4월중 건축허가면적이 796만 6000평방㎡로 작년 4월에 비해 36.1%가 감소.

1992년 구 식민지출신 군인 군속 징용노무자 종군 위안부들이 전쟁중 강제저축 미환불액 73만 계좌.

1992년 한국 표준과학연구원 강홍열 박사팀 금성 마이크로닉스와 공동 소형 고성능 니켈수소전지 개발

1993년 정부, 슬롯머신업 전면폐지키로

1993년 해군, 잠수함 장보고 함 취역

1993년 김영삼 대통령. 15대 공천 `대폭 물갈이'시사. `5·16은 쿠데타'라고 규정.첫 내외신 기자회견

1993년 올림픽도로 확장구간 19km 전면 개통.

1996년 노동부, 정년ㆍ명예퇴직자도 실업급여를 지급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실업급여지급기준 발표

1998년 제2기 노사정 위원회 출범, 전국 민주노동조합총연맹 불참

1998년 금융감독위, 삼성, 현대, 대우, LG, SK 등 5대 그룹 구조조정에 주채권은행 개입

200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정부의 집단소송제·집중투표제 도입 방지 위해 기업인 서명운동 추진 결정

2004년 제2차 남북장성급군사회담이 설악산에서 열리다.

2009년 원로배우 도금봉씨 별세

2010년 유창순 전 국무총리 별세

--유 전 총리는 1918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1937년 평양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1950년 헤이스팅스(Hastings)대학을 마쳤다.

1951년 한국은행 도쿄(東京)지점장을 시작으로 뉴욕사무소장, 부총재 등을 거쳐 1961년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다. 1962년엔 상공부 장관, 이듬해인 1963년 경제기획원 장관 등을 지내며 당시 박정희 정부의 국가 경제발전 전략을 짜는 데 기여했다. 그는 1982년 제15대 국무총리로 재직했고, 이후에도 대한적십자사 총재, 한미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국정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비기업인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제19·20대 전경련 회장을 맡아 산업화 시대의 경제발전을 이루는 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경련 명예회장, 대신경제연구소 회장, 롯데제과 고문, 호남석유화학 회장 등도 역임했다.

영어가 유창했던 유 전 총리는 한국무역협회장이었던 1981년엔 '88서울올림픽' 유치 대표로 활약했다. 특히 당시 유치위원장이었던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도와 올림픽 유치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2010년 6월 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2015년 이승엽(삼성) 한국프로야구사상 첫 400홈런(국내기준, 일본8년기록 합치면 559개)

2015년 애국지사 최도균 선생 별세

--애국지사 최도균(92) 선생이 2015년6월3일 오전 7시 50분 별세했다.

평북 영변 출신으로 일본 동경문리대 재학 중 독립운동을 위해 ‘나라당’을 결성해 활동하다 1943년 체포돼 3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귀국해 독립유공자협회 편집장과 부회장을 지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18년 비올리스트 김세준 제4회 도쿄 국제비올라콩쿠르에서 한국인 첫2위

2019년 이정은 미국 LPGA 최고권위대회 US오픈 우승

2021년 헌재 “주거침입+강제침입+상해 미수범도 둥현 합헌”

2022년 김동연 “민주당이 가진 기득권 내려놓고 필요하면 협치해야”

1657년 영국생리학자·의사 윌리엄 하비 세상떠남(79세),

--혈액순환의 원리 밝혀 근대생리학의 기초 세움, 심장박동에 의해 혈액이 순환한다는 학설 발표

1843년 러시아 과학자 클리멘트 티미랴제프 출생

1853년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도쿄 우라가(浦賀)에 내항

1875년 프랑스작곡가 조르주 비제 세상떠남(36세)

--“비제는 ‘카르멘’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오페라 코믹극장에서 초연된 자신의 오페라 ‘카르멘’의 성황리 공연 지켜보다가 33회 연장공연의 막이 내릴 때 숨을 거둠

1899년 왈츠의 왕 오스트리아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세상떠남(74세),

--‘봄의 소리’ ‘빈 숲속의 이야기’ ‘아름다운 푸른 도나우’ 등 400곡이 넘는 왈츠와 오페레타 남김, 6세때 왈츠 작곡, 19세때 악단 조직해 곡 발표, “젊은 지휘자는 등장하자마자 우레같은 격려와 박수를 받았다. 어떤 곡은 5번이나 앵콜을 받았다.” “머리꼭대기에서 발톱 끝까지 전기와 같이 저려온다. 흥분됨으로 번개와 같이 스파크가 일어난다.” “부친의 천성이나 재능이 아들에게 유전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인데, 스트라우스는 ‘왈츠의 화신’이라 말할 수 있다. 겨우 19세로 벌써 승리를 거둔 스트라우스2세여! 우리 빈은 스트라우스 부자가 있어 자랑스럽다.”-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콘서트 신문평

1895년 청, 일본에 대만과 팽호도 할양

1899년 오스트리아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사망

1899년 헝가리 출신의 생리학자,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자 게오르크 폰 베케시 출생

1910년 미국작가 오 헨리 세상떠남 『마지막 잎새』 『20년 후』

1911년 미국의 장로교목회자, 선교운동 지도자 피어선 작고

1915년 파리서 제1회 연합국전쟁경제회의개최, 경제적공동체제수립 결정

1916년 미국, 국가방위법 제정

1917년 알바니아 독립선언

1924년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사망

--20세기 문학사의 한 축을 이룬 체코 출신의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가 1924년 6월 3일 빈 교외의 킬링 요양원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41세였다. 프라하의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프라하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나 이즈음 시작된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본격적인 습작에 들어갔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08년부터는 노동자재해보험국에서 14년 동안 근무했다.

독일어와 체코어가 함께 사용되던 프라하에서 그는 독일어로 작품을 썼다. 그의 문장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간결하지만 독일어 산문 문학 중 가장 명료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인간의 부조리와 인간존재의 불안 등을 날카롭게 통찰해 현대 인간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에 이르기까지 표현한 그의 작품들은 사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받았다. 소련 공산당은 ‘절망과 불안을 조장하는 부르조아 퇴폐 반동 작가’ 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작품을 오랫동안 금기시했으나 1964년 해금됐다. 그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성(城)’ 과 미완성 장편소설 ‘심판(審判)’ 등이 있다.

1924년 미국의 기업가(암웨이 창립자) 제이 밴앤덜 출생

1929년 스위스의 세균학자 아르버 출생 - 1978년 노벨 생리학·의학상 수상

1929년 칠레.페루 국경분쟁 해결, 미국중재

1931년 쿠바의 혁명가, 정치인 라울 카스트로 출생.

1936년 이디오피아 황제 영국에 망명

1937년 영국왕 에드워드8세 사랑위해 왕위 포기하고 미국인이혼녀 심프슨 부인과 결혼, 심프슨 부인은 1936년 「타임」 ‘올해의 인물’로 뽑힘

1943년 알제리에서 드골지휘하에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결성

1946년 러시아의 혁명가 미하일 칼리닌 작고

1947년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안 발표

--6월 3일, 영국의 루이스 마운트배튼 인도 총독이 영국령 인도를 힌두교 지역과 무슬림 지역으로 나눠 각각 제헌의회를 세운다는 분리독립안을 발표했다.

힌두교의 국민회의파를 중심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던 독립일정이 차질을 빚은 것은 무슬림연맹이 분리독립을 요구하면서였다. 영국은 내전과 분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고, 국민회의파도 종교갈등과 이로 인한 살육행위를 마냥 모른 체할 수 만은 없었다. 간디는 “인도를 생체해부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8월 15일, 마침내 인도와 파키스탄 2개 국가가 분리독립됐지만 이 과정에서 또 대규모 학살이 자행됐다. 힌두교도와 시크교도가 파키스탄으로부터, 이슬람교도가 인도로부터 쫓겨나면서 140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100만명이 살해된 것이다. 분리 후에도 양국은 경계지역인 카슈미르를 둘러싸고 지금까지 3차례나 전쟁을 치렀지만 긴장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1948년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마산천문대 개소식, 200인치 망원경 설치

1948년 파라과이 쿠데타 발생

1950년 프랑스등반대(대장 모리스 에르조그) 안나푸르나(‘수확의 여신’이라는 뜻) 제1봉(8,091m) 올라 사상처음으로 인류가 8,000m 넘는 산에 발 디딤

1955년 프랑스 보호령 튀니지에 자치권 부여 협정 조인

1955년 미국-이스라엘 원자력쌍무협정에 조인

1957년 미국 중동조약기구(METO)에 가입

1957년 흐루시초프, 신스탈린파 말렌코프, 몰로토프 등 숙청

1959년 싱가포르 자치독립국 선언

--6월 3일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부여받은 싱가포르가 새 헌법의 공포와 함께 영국의 자치령이 됨으로써 140년간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났다.

140년 전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조호르 영주에게 불과 얼마되지 않는 비용 만을 지불하고 싱가포르를 사들였다. 당시에는 무인도로 가치가 없던 때였다. 이후 싱가포르는 영국의 식민지로 자유·중계 무역항이 되었으며, 말레이반도를 비롯하여 인근 여러 나라와 유럽 무역의 중심이 되었다.

1921년에는 영국군의 군사기지가 설치되어 군사·경제적으로 영국 식민지배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잠시 일본군에 점령당하기도 했으나, 종전 후 다시 영국 식민지가 됐다. 그후 反식민지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 결국 이날 영연방 자치국으로 독립했다

1961년 미국, 소련 비엔나에서 회담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1961년 6월 3일 비엔나에서 역사적인 냉전회담을 시작했다. 케네디 대통령과 흐루시초프 수상은 비엔나에 이틀간의 정상회담에서 여러 국제적인 현안에 합의하지 못했으나 양국은 적어도 대화를 재개했다. 대화재개 자체가 지난 1960년 5월 흐루시초프가 U2기 사건으로 결렬시킨 파리 정상회담에 비하면 성공적었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는 베를린의 미래와 위상에 관해 첨예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 소련은 동베를린의 통제를 동독 당국에 넘겨주겠다고 위협해 왔고, 미국은 서베를린에 대한 소련 간섭의 결과에 대해 경고했다. 양 지도자는 라오스의 주권에 관해 제한된 합의에 도달했다. 라오스 정권은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는 공산 게릴라에 의해 위협받아 왔다.

1962년 프랑스항공 보잉707기 파리공항 이륙도중 추락 사망130명

1963년 미국 노스웨스트항공 DC-10기 태평양 추락 사망101명

1963년 로마 교황 요한23세 서거

--6월 3일 로마 카톨릭의 교황 요한 23세가 오랫동안 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다가 81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881년 12월 25일 태어나 1953년 베네치아 대주교를 거쳐 1958년 10월 9일 교황의 자리에 올랐다. 261대 로마법왕으로 5년 재임하는 동안 세계평화를 위해서 그가 남긴 업적은 크다. 그는 국가와 정치와 종교의 차이를 초월해 모든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 힘썼다.

그는 교황으로서의 위엄을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평민적인 냄새를 풍기는 사람으로서 교황으로 당선된지 몇 달만에 전 교황 비오12세가 19년 동안에 한 것보다 많은 공개석상에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1962년 10월 11일에 카톨릭교공의회를 열었다. 이것은 2천년의 카톨릭교 사상 21번째의 공의회이며 근 백년 동안에 처음으로 열리는 회합이었다.

비(非) 카톨릭신자들에게도 유명했던 교황은 평화와 종교단결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로 세계 지도자들과 종교인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며, 교회의 현대화를 위해 상당한 영항력을 행사했다. 요한23세의 뒤를 이어 밀라노의 대주교인 바티스타 몬티니를 교황으로 선출했다. 그는 바오로6세가 됐으며 6월 30일 바티칸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1965년 미국 2인승우주선 제미니4호 우주유영 성공

--미국의 2인용 유인위성 `제미니4호`가 1965년 6월 3일 발사돼 우주비행사 에드워드 화이트 소령이 미국 최초로 21분간의 우주유영에 성공했다. 소련의 레오노프 소령보다 3개월 늦은 것이었다.

화이트는 우주선과 함께 시속 2만9천Km로 지구를 선회했다. 당시 우주의 아름다운 광경에 매료된 화이트는 우주선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에 "내 일생에서 가장 슬픈 순간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후 화이트는 1967년 1월 26일 아폴로1호 발사시험에 참가했다 화재사고로 사망했다.

1972년 서독 폴란드 수교

1972년 미-영-프-소 베를린협정 정식조인

1973년 소련 초음속항공기(TU144) 파리에 추락

--소련의 최신형 TU144 초음속 항공기가 1973년 6월 3일 파리교외 르브르제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항공쇼에서 시험비행중 귀빈석 스탠드를 저공비행으로 통과한 직후 공중폭발, 인근 주거지역에 추락하여 소련승무원 6명 전원을 포함한 8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고지점인 구생빌르 마을에는 가옥 15채가 파괴됐고 1백여채가 기체파편의 낙하로 부분파손을 입었다.

에어 쇼의 마지막날인 이날 소련항공계의 자랑인 TU144기를 구경나온 30만명의 관중들은 귀빈석 위를 저공비행한 후 구름속으로 수직상승 하자마자 곧 폭음,화염과 함께 산산조각난 기체의 파편들이 떨어지는 극적인 추락현장을 목격했다. 이날 공중폭발한 초음속항공기 TU144는 영불합작 의 콩코드기의 유일한 경쟁자이였고 외형도 콩코드와 흡사했다. TU144기는 1968년에 처녀비행을 했고, 1970년 5월 21일 일반에 첫선을 보였다.

1975년 노벨평화상(1964년) 받은 일본총리 사또 에이자꾸 세상떠남

1977년 이스라엘 시나이 반도에서 철군 시작

1978년 방글라데시 대통령 라만 당선

1989년 캐나다의 로저스 센터가 개장

1989년 이란 최고지도자 호메이니 세상떠남

--1902년 수도 테헤란 남쪽 오아시스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6세 때 이미 코란을 암송할 정도였고 19세때 시아파 중심지인 콤시에서 성직자가 되었다. 1963년 팔레비 국왕에게 공개적으로 죽음을 경고하는 투쟁을 벌이다 추방되었으나, 1978년 7월 계엄령속에 시민 수천명이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검은 금요일’ 이후 혁명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팔레비 독재왕정을 무너뜨리고 최고권자에 오른 호메이니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도덕적 회교 원리주의국가를 실현시키고자 노력해왔으나 이란-이라크전 때문에 대부분의 집권기간을 전쟁속에 보내야만 했다. 이러한 그의 삶을 뒤로하고 오늘날 세계는 그를 회교정신을 부흥시킨 탁월한 종교-정치적 지도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의 기존질서를 위협한 인물로서 엇갈린 평가를 하고 있다. 1989년 6월 3일 테헤란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991년 일본 규슈 나가사키 현의 운젠다케화산 폭발 사망38명 행불36명

1992년 유엔환경개발회의 리우회담 개최

--6월 3일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회의가 개막됐다. `유엔환경개발회의 (UNCED)`란 공식 명칭의 이 회의는 정부 대표들이 참가한 지구정상회담과 민간 환경단체들이 개최한 지구포럼으로 이루어졌다. 지구정상회담의 경우 미국 등 114개국이 국가원수 또는 정부수반이 이끄는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178개국과 국제기구에서 8000여명이 참석했다.

지구포럼 역시 전세계로부터 약 7900개의 민간환경단체가 참가했다. 보통 `리우환경회의`로 불리게 된 이 회의는 경제개발로 인해 날로 악화되고 있는 지구의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1998년 독일 ICE 열차 탈선 사망101명

--독일 뮌헨을 출발, 시속 2백km로 함부르크를 향해 달리던 ICE(도시간 고속철) 열차가 1998년 6월 3일 오전 11시 하노버 북쪽 50km 지점에서 철로에 뛰어든 승용차와 충돌하면서 탈선, 최소한 1백명이 사망하고 2백여명이 부상했다.

사고는 함부르크 남쪽 1백km지점인 에쉐데 역 부근을 지나던 고속열차가 고가도로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이는 승용차와 충돌하면서 앞부분 4개 차량이 철로를 벗어나 도로 교각을 들이받아 일어났으며, 열차 객실 13량이 부서졌다.

이 충돌로 철로와 교차하는 도로 교각과 상판이 무너져 객실 2량을 덮쳤다. 사고열차는 최고시속이 2백80km로, 정원 7백59명에 승객과 승무원을 포함, 3백여명이 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원인은 선로이상과 바퀴파손 등으로 밝혀졌다.

2000년 지중해서 고대 이집트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 발견

--고대 도시 ‘헤라클레이온’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시에서 6km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됐다. 당시의 저택과 사원, 항만, 조각상 등이 원형대로 보존돼 있었다. 그리스 고전 문헌을 통해서만 알려졌던 고대 도시 메노우티프와 헤라클레이온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시에서 약 6km 떨어진 해저에서 발견했다고 프랑스-이집트 합동 발굴단이 2000년 6월 3일 발표했다. 이번 발견은 역사적 가치와 보존 상태 등에서 이집트 투탕카멘 왕릉에 비견되는 고고학적 대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다.

발굴 책임자 프랑크 고디오는 이날 검은 화강암으로 된, 높이 15m의 이시스 여신상을 공개했다. 그는 2년에 걸친 탐사 끝에 아부퀴르만 해저에서 1500여년 전 발생한 지진 또는 홍수로 수몰된 고대 도시 유적을 발견했으며, 당시의 화려한 생활상을 보여주는 저택, 사원, 항만, 조각상 등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고 밝혔다.

기원전 7세기에서 6세기 사이인 파라오 시대 말기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고대 도시는 알렉산드리아가 건설되기 전까지,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 여러 도시와의 무역을 통한 번영과 이시스 여신-헤라클레스 등을 모신 화려한 사원으로 유명했던 곳이었다.

기원전 450년 이집트를 방문했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당시 화려했던 헤라클레이온의 생활상과 헤라클레스에게 봉헌된 사원 등에 대해 기술했으며, 그리스 비극과 각종 여행담에도 이들 도시의 이름이 나오고 있지만 약 1500년 간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었다. 유물 중에는 기원전 7세기인 제26대 파라오 시대의 스핑크스상, 이집트·그리스 시대 조각의 머리 부분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2001년 영화배우 앤서니 퀸 사망

--영화 ‘희랍인 조르바’와 ‘길’의 명배우 앤서니 퀸은 60년이 넘는 기간을 스크린에서 활약하며 ‘노틀담의 곱추’ ‘아라비아의 로렌스’ ‘25시’를 포함해 150여편이나 되는 출연작을 남겼다.

퀸은 1915년 멕시코에서 태어났다. 미국으로 이주해 ‘가출옥’(1936)으로 데뷔한 그는 오랜 무명생활 끝에 ‘혁명아 자파타’(1951)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따내면서 주목받았다. 이어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1954)에서 생존 에너지로만 똘똘 뭉친 듯한 차력사 역을 맡아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37년 세실 드밀 감독의 딸 캐서린과 첫 결혼을 했지만 리타 헤이워스를 비롯한 숱한 여배우들과 밀애를 나눴다. 1957년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지만 1993년 퀸이 비서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낳는 바람에 1997년 파경을 맞았다. 퀸의 자녀들은 81세의 나이에 낳아 화제가 된 마지막 아이를 포함해 13명에 달했다. 2001년 6월 3일 미국 보스턴의 한 병원에서 호흡 곤란으 로 별세했다. 86세였다.

2006년 몬테네그로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부터 분리 독립

2009년 인도 의회에서 메이라 쿠마르(64세, 여성)의원이 국회 하원의장으로 당선

2011년 중국 남부지역 50년만에 최악의 홍수 사망175명 실종86명

2011년 적극적 안락사를 주장해 논쟁을 일으킨 미국의 의사 잭 케보키언 작고

2012년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다이아몬드 주빌리)을 축하하는 수상 퍼레이드가 런던 템스강에서 열리다.

2014년 이집트에서 압델 파타 엘시시 전 국방장관이 96%의 득표율로 대통령 당선

2016년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 파킨슨병 합병증으로 세상떠남(74세)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 로마올림픽 라이트헤비급 금메달 3차례에 걸친 프로권투 헤비급챔피언 통산19차례 방어 프로복싱 통산전적56승(37KO)5패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며 양심적 병역거부 실천, 인종차별 반대투쟁인 흑인민권운동 활발히 참여,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와 BBC가 선정한 ‘세기의 스포츠맨’

2021년 모리셔츠의 정치인 아너루드 주그노트 작고

2022년 美, 중.러와 갈등 속 최대규모 다국적 해상 훈련

 

 

'오늘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의 역사 6월 5일  (0) 2023.05.24
오늘의 역사 6월 4일  (1) 2023.05.22
오늘의 역사 6월 1일  (1) 2023.05.20
오늘의 역사 5월 31일  (1) 2023.05.16
오늘의 역사 5월 30일  (0) 2023.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