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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 천문학자의 북학(北學), 또는 “국제적” 과학 교류 - 임종태

by 귤담 2023.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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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인 천문학자의 북학(北學), 또는 “국제적” 과학 교류

글쓴이 임종태 / 등록일 2023-12-18

오늘날 과학은 인간 사회의 다른 어떤 문화 영역보다도 국제적인 성격을 띤다. 과학자들은 국제적 과학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연구를 교류하고 자신의 성과에 대한 국제 학계의 인정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적어도 규범적 차원에서 “과학에는 국경이 없고”, 과학자들은 학문적 능력과 성취 이외의 다른 정치적, 문화적 기준으로 차별받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다루고 있는 조선 시기에는 아직 국경을 넘어서는 과학자들의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 사이의 교류를 규정하는 규범도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과학자들의 국제적 교류라고 볼 만한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 교류는 노골적으로 위계적 차별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과 청조(淸朝) 중국 사이의 과학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 시작한 18세기 초도 마찬가지였다.

 

지난 글에서 살펴보았듯, 1705년과 1708년의 북경 여행을 통해 청나라 시헌력(時憲曆)의 계산법을 배워온 관상감의 천문학자 허원(許遠)은 자신의 북경 여행을 “북학(北學)”이라고 불렀다. 이는 자신의 북경 여행을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려는 고상한 행위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였지만, 그 바탕에는 문명과 야만의 위계적 구분이 전제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주변부 나라의 천문학자는 “대국(大國)”으로의 유학을 통해서만 유능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문화적, 인식적 위계 위에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정치적 차별이 더해졌다. 조선은 청나라를 상국(上國)으로 섬겼고, 그 복종의 상징으로 매년 황제가 반포하는 달력을 받아왔다. 천문을 관측하고 달력을 반포하는 일은 중국의 “천자(天子)”만이 할 수 있다는 인식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요컨대 조선 천문학자들은 북경 흠천감(欽天監)의 천문학자에 대해 정치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을(乙)”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허원의 북경 유학은 그 성패를 거의 전적으로 청나라 천문학자들의 호의(好意)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면에서 허원은 아주 운이 좋았다. 그 자세한 정황을 알 수는 없지만, 그는 하군석(何君錫)이라는 흠천감의 연로한 천문학자를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허원은 하군석과의 필담(筆談)과 편지 교환을 통해 시헌력의 행성 계산법을 배웠고, 그의 도움으로 여러 전문 서적과 관측기구를 구해 올 수 있었다. 물론 그의 도움이 공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겠지만, 과거 효종 대에 북경을 찾았던 선배 김상범(金尙範)이 엄청난 뇌물을 쓰고도 시헌력 학습에 실패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허원은 정말로 행운아였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하군석은 명나라 때부터 흠천감의 관원을 배출해 온 세습 천문학 가문의 일원이었다. 청나라가 세워진 뒤 서양의 시헌력이 반포되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흠천감을 장악한 상황에서도 하군석은 그들과 대립하며 명나라의 옛 역법인 대통력(大統曆)의 전문가로 활동했고, 강희(康熙) 초년 전통 천문학의 수호자 양광선(楊光先, 1597-1669)이 선교사 세력을 몰아내고 대통력을 잠시나마 회복했을 때 그와 협력했던 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조선 방문객에게 서양 역법을 가르치게 되었는지는 잘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이다.

 

허원이 맺은 관계는 하군석의 아들에게까지 이어졌다. 1713년 강희제가 파견한 청나라 사신단에 포함되어 서울에 온 흠천감의 “오관사력(五官司曆)” 하국주(何國柱)가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조선과 티베트를 포함한 청 제국의 지도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조선의 지리 정보를 조사하는 임무를 띠고 파견된 이 사신단에서 하국주는 서울을 포함한 조선 지역의 경위도 측정을 담당했다.

 

하국주가 강희제에 의해 중용된 것은 허원과 하군석이 마지막으로 만난 1708년 이후에 일어난 하씨 가문의 급격한 지위 상승을 반영한다. 그 직전 로마 교황과의 전례(典禮) 논쟁을 거치며 서양 세력에 대해 깊이 불신하게 된 강희제는 서양 선교사들을 대신하는 토착 천문학자 집단을 양성하고자 했고, 그렇게 발탁된 인물 중에 바로 하군석의 세 아들, 하국주, 하국종(何國宗), 하국동(何國棟)이 포함되었다. 강희제의 적극적 후원 아래 이루어진 이들의 연구 결과 약 10년 뒤 청나라 수리과학의 삼부작인 『역상고성(曆象考成)』 , 『수리정온(數理精蘊)』 , 『율려정의(律呂正義)』 가 편찬되었다.

 

강희제의 총애를 받는 젊은 천문학자 하국주가 바로 하군석의 아들인지 허원은 바로 알아채지 못했던 것 같다. 청나라 천문학자가 서울에 제 발로 걸어들어온 이 흔치 않은 사건을 시헌력을 배울 좋은 기회로 여긴 조정은 허원에게 사신 숙소로 하국주를 찾아가 배우라고 했다. 흥미롭게도 숙종은 허원에게 관상감 천문학자라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중국 황제의 특권인 천문학을 조선의 군주가 독립적으로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려 한 것이다(『승정원일기』 숙종 39년 윤5월 13일).

 

조정의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 둘은 하군석을 매개로 한 인연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인지 하국주는 자신의 아버지만큼이나 적극적으로 천문학의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칙사(勅使)들의 서울 체류 기간으로는 부족했던 듯 허원은 하국주의 귀국 길에 국경까지 동행하며 학습을 이어갔다. 하국주는 허원에게 조선이 필요로 하는 서적과 기구를 황제에게 청하여 구해 주겠다고 약조한 뒤 북경으로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비변사등록』 숙종 39년 8월 1일). 실제로 허원은 이듬해 북경으로 파견되어 하국주를 만났다.

 

이렇게 허원은 당시 청나라 천문학의 핵심 인물과 관계를 맺었지만, 그렇다고 그 관계를 동료 천문학자 사이의 대등한 과학 교류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그의 북경행은 문명의 중심지를 향한 순례였고, 하군석과 하국주는 그에게 선진 천문학을 가르쳐 준 “대국(大國)”의 친절한 선생들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사신들의 서울 체류 기간에 조선의 한 수학자 또한 하국주를 만났는데, 그는 자신의 만남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이해했다. 바로 호조(戶曹)의 수학자 홍정하(洪正夏)로서, 그와 하국주의 유명한 만남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고자 한다.

 

글쓴이 : 글쓴이 (서울대 과학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