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다산 글방

누구를 위한 법치주의인가 - 김진균

by 귤담 2024. 3. 6.

 

> 다산글방 > 다산포럼

누구를 위한 법치주의인가

글쓴이 김진균 / 등록일 2024-03-05

법으로 다스리자는 법치주의는 근대 입헌 국가의 정치 원리이다. 이상적인 법에 의한 통제는 사회 내의 갈등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막는 안전장치로 작동할 수 있다.

 

전근대 조선왕조에서도 법에 의한 통치를 표방하였는데,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종성헌(祖宗成憲)으로 불리며 왕조차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규율로 작용하였다. 그렇게 보면 전근대 조선왕조를 국왕 한 사람의 독단으로 움직이는 전제 왕조라고만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는 15세기에 완성된 경국대전 체제를 19세기까지도 운용하였으니 법률이 오히려 갈등을 양산하는 장본이 되기도 하였다. 현실의 모든 갈등을 법률로 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어떠한 법률도 어느 순간에도 완전할 수가 없는데, 오래될수록 불완전성의 밀도는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법은 과연 완벽한가

 

다산 정약용은 조선왕조의 낡은 법률 질서인 경국대전 체제를 극복해 보고자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저술하였다. 정약용 스스로 “신아구방(新我舊邦)”이라는 개념으로 이 작업의 의미를 설명하였는데, 낡은 우리의 나라를 새롭게 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개헌과도 같은 새로운 법률 질서 수립의 가능성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운 당시의 현실도 곱씹고 있었다. 자신이 죽은 뒤에나 임금께서 살펴보시라는 뜻의 ‘유표(遺表)’가 제목에 들어간 것도 그런 판단의 귀결일 것이다. 정약용은 다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통해 경국대전 체제 하에서라도 최대한 백성을 보호할 장치를 마련해 보려고 하였다. 『목민심서』의 작업은 현행 법률을 인정한 상태에서 민생을 위한 해석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경국대전 체제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저술했다는 『목민심서』의 곳곳에서 당시의 모순된 현실 체제에 대한 부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수법(守法) 대목에서도 백성을 편하게 할 수만 있다면 다소 법을 넘나들 수도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치기도 하고, 갓난아이에게 병역의무를 부과하여 군포를 징수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대목에서는 이 법이 고쳐지지 않으면 백성이 모두 죽고 말 것이라고 절규하기도 했다. 모순에 대한 분노가, 이따금 해석 투쟁의 경계를 넘어 신아구방의 체제개혁 투쟁으로 비약하는 것이다.

 

정약용이 곡산부사로 부임하러 가는 길에 나타난 이계심(李啓心)이란 백성의 경우는 1천여 명의 백성들을 조직하여 전직 사또에게 항의한 전력이 있었다. 일종의 불법시위 주동자로 체포 즉시 처벌될 예정이었는데, 1년 동안의 도피 끝에 신임 사또 정약용 앞에 자수한 것이다. 처벌하자는 아전들의 요구를 물리치고, 정약용은 오히려 시위의 원인이 되었던 폐단을 바로잡을 기회로 삼으며 이계심을 칭찬하였다. 정약용은 법의 원칙을 어긴 것일까?

 

법보다 앞서야 하는 것

 

법에 의한 통제가 진정한 안전장치로서 기능하기 위해서는 법률이 합리적으로 제정되어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신뢰가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제정 과정의 합리성이나 적용 과정의 평등성을 기대할 수 없는 사회라면, 법치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고 개혁 의지를 꺾는 폭정의 논리가 될 뿐이다. 정약용은 그 폭정의 길을 차마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가령 곡산의 아전들처럼 법을 적용하면 이계심은 처벌되고 곡산의 폐단은 바로잡힐 기회를 잃을 것이다. 그랬다, 법의 이름으로 백성들만 처벌되고 세도정권과 탐관오리는 법 위에 군림하며 나라 바로잡을 기회를 놓친 것이 19세기 조선왕조였던 것이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훌륭한 문장을 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평등권에 대한 규정으로서, 특수계급을 설정할 수 없음과 특권을 인정할 수 없음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헌법 11조를 두고 고 노회찬 의원은 “법은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고 일갈한 바 있다. 입법과 행정과 사법의 3권이 힘을 합쳐, 상속세 회피한 재벌이나 뇌물 받은 검사에게는 따뜻한 햇살을 비추다가, 800원 잔돈 자판기에 넣은 버스기사나 뇌물 검사 명단 폭로한 의원만 골라 불을 뿜는 법치주의라면, 차라리 법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유발하는 부비트랩이다. 한반도 북쪽의 핵무기만 자기파괴적 무기인 것은 아니다.

 

글쓴이 : 김 진 균(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