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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조선 수학자의 맞대결
글쓴이 임종태 / 등록일 2024-03-11
1713년 조선의 경위도 측정을 위해 청나라의 천문학자 하국주(何國柱)가 파견되었을 때 그의 관소를 찾은 기술직 관원에는 관상감 천문학자 허원(許遠) 외에 호조(戶曹)의 산원(算員, 오늘날의 회계사) 홍정하(洪正夏)도 있었다. 홍정하는 자신이 쓴 수학서 『구일집(九一集)』의 부록 격인 ‘잡록(雜錄)’에 자기와 하국주와의 만남을 자세히 묘사했다.
마치 그 만남이 허구가 아님을 강조하듯 홍정하는 다음과 같은 짧은 도입부로 일화를 시작한다. “계사년(1713) 윤 5월 29일, 나는 유수석(劉壽錫)과 함께 (청나라 사신의) 관소에 들어가, 오관사력 하국주와 산법(算法)에 관해 논했다.”
이후 홍정하는 거두절미하고 하국주와 조선 수학자들이 주고받은 계산 문제와 그 풀이법을 소개했다. 한쪽이 낸 문제에 대해 다른 쪽이 해답과 풀이법을 제시하는 일종의 문제 풀이 시합이었다. 이렇게 문제와 풀이로 수학책을 구성하는 것이 당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대 중국의 수학 경전 『구장산술(九章算術)』 이래 동아시아의 수학책은 구체적인 상황과 수치로 표현된 문제 및 그 풀이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홍정하(조선), 중국에서 사라진 ‘천원술’로 승리
홍정하의 ‘잡록’이 특이한 점은 그가 이 일련의 문제 풀이를 가지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고, 그 속에 자신과 하국주 사이에 일어난 교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담았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홍정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같은 시기 하국주와 허원 사이에 이루어진 천문학적 교류와 그 결이 아주 달랐다. 허원의 이야기가 선진적인 청나라 천문학이 조선에 전해지는 일 방향 전파의 서사였다면, 홍정하는 자신과 하국주의 만남을 두 나라 수학 전통 사이의 대등하고 호혜적인 교류로 묘사했던 것이다.
홍정하의 이야기는 두 나라를 대표하는 수학자 사이의 자존심 대결로 시작한다. 먼저 청나라 수학자가 조선 수학자들에게 아주 쉬운 곱셈, 나눗셈 문제를 냈다. 예를 들어 “지금 360명의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마다 은 1냥 8전을 내면 모두 얼마인가”라는 문제를 냈는데, 물론 조선 수학자들은 ‘648냥’이라고 간단히 답을 맞혔다.
그러다가 합석하고 있던 청나라의 상사(上使) 아제도(阿齊圖)가 조선 수학자들을 도발했다. “오관사력의 산학은 천하에 네 번째요. 그는 산법이 뱃속에 가득하여 그대들이 대적할 수 없을 것이오. 사력이 이미 많이 질문했으니, 그대들도 질문을 내어 그의 술법을 시험해 보지 않겠소?” 그러자 홍정하가 낸 것이 바로 하국주가 쩔쩔맸다는 다음의 문제였다.
“지금 새알같이 둥근 박옥(璞玉) 한 덩어리가 있습니다. 그 안에 정육면체의 옥이 담겨 있는데, 그것을 비우고 난 껍질의 무게가 265근 15냥 5전이고 껍질의 두께가 4촌 5분이라면 정육면체 옥의 한 변 길이와 둥근 박옥의 지름은 얼마입니까?”
홍정하의 이야기에서, 하국주는 결국 답을 맞히지 못했다. 자신의 승리를 확인이라도 하듯, 홍정하는 자세한 해법을 제시했는데, 이는 중국 송나라, 원나라 시대에 등장하여 유행했지만 이후 중국에서는 사라진 고차방정식 풀이법, ‘천원술(天元術)’을 이용한 것이었다.
조선의 수학자가 대국(大國) 수학자의 코를 납작하게 한 이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홍정하의 기록이 여기서 끝난 것은 아니다.
하국주(청), 서양에서 전래된 ‘삼각함수’로 반격
이야기는 다시 반전되어 하국주가 조선 수학자들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수학을 알려준 것이다. ‘원에 내접하는 정오각형 한 변의 길이’를 계산하는 방법이었는데, 이에 흥미를 느낀 조선 수학자들은 “우리 동국(東國)에는 이 방법이 없는데, 어떤 술법에서 나온 것인지” 물었다. 하국주가 알려준 방법은 우리에게 익숙한 ‘삼각함수’로서 당시 서양에서 중국에 전해진 것이었다. 하국주는 조선 수학자들에게 마테오 리치가 번역한 『기하원본(幾何原本)』과 같은 서양 수학책을 참고하라는 충고를 덧붙였다.
홍정하는 이야기의 마지막에 한 번 더 반전을 시도한다. 삼각함수가 조선 수학자들에게 새로운 것이었다면, 하국주에게는 홍정하가 천원술의 계산에 사용한 도구 ‘산가지’도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그림 참조]. 물론 ‘산가지’ 계산법은 고대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지만, 당시 중국에서는 이미 주판과 필산(筆算)으로 대체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홍정하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내가 산가지를 펼쳐 계산하고 있을 때 오관사력이 말하기를 ‘중국에는 이러한 계산 도구가 없소. 얻어서 중국으로 가져갈 수 있겠소?’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내 것을) 바로 그에게 주었는데, 그중 40개를 선택하여 가져갔다.”
두 나라 수학의 호혜적 만남
홍정하가 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해 주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홍정하는 자신과 하국주 사이의 만남을 조선과 청나라가 보유한 서로 다른 수학 전통 사이의 대등한 교류의 과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조선의 수학이 천원술과 산가지 계산 중심이었다면, 청나라의 수학은 마테오 리치 이후에 전해진 서양 수학에 의존했다. 그리고 1713년 윤 5월에 만난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것과 교환했다. 조선 수학자의 산가지 계산법과 청나라 수학자의 삼각함수가 맞교환된 것이다.
이렇게 청나라와 조선의 수학을 대비하고 있는 홍정하의 구도는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상상과는 그 결이 조금 다르다. 홍정하가 ‘동국의 수학’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로 제시한 천원술과 산가지 계산법은 바로 중국의 고전 수학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점을 홍정하가 모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홍정하의 서사 구도는 1708년 마테오 리치의 세계지도에 붙인 최석정의 서문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는 마테오 리치의 지리학이 고대로부터 명나라까지 이어져 온 중국 지리학의 유산이며 이제 중국 문명의 유일한 계승자가 된 조선의 조정이 그것을 잘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정하가 자신과 하국주의 만남 일화에서 전달하고 싶었던 것도 비슷한 메시지였을 수 있다. 정작 중국에서는 사라진 중국의 고전 수학을 조선의 산원(算員)들이 온전히 보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글쓴이 : 임종태 (서울대 과학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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