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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난고』를 통해 본 서학 네트워크 - 김선희

by 귤담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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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난고』를 통해 본 서학 네트워크

글쓴이 김선희 / 등록일 2024-03-18

“(담헌) 선생(1731~1783)은 영조와 정조 연간의 사람으로서, 이재 황윤석과 함께 미호(渼湖) 문경공(文敬公) 김원행(金元行)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이때 성호 이익이 아직 생존하고 있어 자손과 문하의 제자들은 대부분 실(實)을 숭상하고 용(用)을 힘썼으므로, 많은 신진들이 의귀(依歸)하였다. 이에 비록 문호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나, 성기(聲氣)는 서로 통하였다. 같은 사람끼리 서로 호응하는 법이다.”(『담헌서(湛軒書)』, 「담헌서서(湛軒書序)」)

 

정인보의 기록은 홍대용-정철조-황윤석의 노론계와 이익-정약용의 남인계의 지적 소통에 관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정인보가 언급한 18세기 중후반 소론과 남인 학자들의 소통은 긴밀한 차원에서의 학술적 교제였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실(實)을 숭상하고 용(用)에 힘쓰는’, 다시 말해 학술적 관심을 공유하는 느슨한 소통이었을 것이다.

 

서양 수학서 『기하원본』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이 느슨한 소통과 연계를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 있다. 호남의 유학자 황윤석(黃胤錫, 1729~1791, 호: 頤齋)이 쓴 『이재난고(頤齋亂藁)』다. 황윤석이 보고 듣고 읽은 학술, 생활, 예술 등 다양한 방면의 기록을 담고 있는 『이재난고』는 18세기 조선에 어떤 지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그 단면을 보여준다.

 

당시 황윤석은 서양 수학서를 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1768년, 황윤석은 관상감 관원 문광도(文光道)를 방문해 역상에 관해 토론하던 중 『기하원본』의 수학 이론에 이야기가 미쳤는데 현재 이 책이 계동 홍가와 성호 이익의 조카였던 이용휴(李用休)의 집에 있다는 말을 듣는다. 이후 이용휴의 집안에서 『기하원본』을 찾았지만 아들인 이가환이 이미 그의 처남인 정철조에게 돌려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가환의 처남인 정철조(鄭喆祚, 1730~1781)는 박지원, 홍대용과도 막역하게 지낸 재주많은 인물이었다.

 

정철조는 서학의 천문역산학을 연구하고 직접 천문의기를 제작하며 같은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었다. 황윤석은 정철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정철조는 평생 서양 역법의 연구에 매진했는데, 『수리정온』과 『역상고성』 두 질을 토열(討閱)했다고 한다. 이 두 질은 모두 강희제 때 서양 역법으로 윤색된 것으로, 『수리정온』 40여 권과 『역상고성』 9권은 『기하원본』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다고 전했는데, 특히 『기하원본』은 매부인 이가환의 집에 있다고 했다.”(『이재난고(頤齋亂藁)』)

 

황윤석에 따르면 정철조는 방 하나를 서학서로 가득 채워놓고는 동생도 들이지 않을 정도로 서학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황윤석은 정철조가 가지고 있다는 『기하원본』을 보기 위해 정철조의 집을 방문해 서양 수학과 천문의기에 대해 토론한다.

 

당파·학맥·신분을 가로지르는 횡적 네트워크

 

이들의 교류와 관심사는 조선 후기에 서양 수학과 천문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확산되었는지 보여준다. 홍대용, 박지원, 정철조, 이용휴, 이가환, 홍계희, 홍양해 등 남인과 노론계 뿐 아니라 중인인 문광도와 이덕성 등의 이름이 등장하는 황윤석의 기록을 통해 18세기 조선에 서학을 축으로 한 새로운 네트워크 즉 당파나 학맥, 신분을 가로지르는 횡적 네크워크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에는 연행을 따라간 역관이 자비로 『율력연원』과 같은 수학서를 사오는 경우도 있었고 이렇게 들어온 서학서들과 이를 필사한 책들이 상당한 규모로 유통되기도 했다. 당시 서양 수학을 연구하던 정철조, 문광도, 이가환 같은 이들은 서양 천문학에 근거해 지평경위의(地平經緯儀),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 등 천문의기를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 18세기 조선에서 서학은 범위뿐 아니라 깊이로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황윤석은 이가환과도 직접 만나 다양한 주제로 토론한다. 이들의 토론은 천문역산서와 천문의기, 규원경과 유리 등 다양한 서양의 지적 정보를 포괄한다. 이런 풍토가 아마 우리가 예상하는 ‘실학’의 면모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이 현대의 분과적 구분으로서 ‘과학’으로 수렴되었다고 평가하는 데는 신중한 태도가 요구된다. 예를 들어 정철조는 다시 연행에 나갈 이덕성의 편에 서양인 선교사 유송령(劉松齡, August von Hallerstein)에게 전할 『문목』을 황윤석에게 보여준다. 이 『문목』에 서양 역법뿐 아니라 천주교에 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지적 관심을 단순히 과학과 종교라는 근대적인 분과적 제도 안에서 분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외래의 사유를 개방적 태도로 수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서학에 대한 이런 지적 개방성은 남인 소장학자들이 서학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넘어 이를 삶의 본질로 들여오려던 시기에 닫히게 된다. 서교의 가르침이 유교의 근본적 이념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글쓴이 / 김 선 희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