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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국사사전』에서 ‘실학’을 찾으면? - 노관범

by 귤담 2024.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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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국사사전』에서 ‘실학’을 찾으면?

 

글쓴이 노관범 / 등록일 2024-04-29

 

 

얼마 전 헌책방에서 『기초국사사전』을 구입했다. 편찬자는 유지옥, 발행처는 조선공업문화사출판부, 발행일은 ‘서기’ 1949년 4월 15일이다. 글을 쓰는 오늘이 4월 20일이니 75년 전 이맘 때 세상에 나온 셈이다. 표지에는 ‘1949년판’이 명기되어 있는데 이후에 수정판을 계속 내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표지를 넘기면 이 사전을 구입한 인물이 오려붙인 도서 카드 서식이 있다. 서식의 좌상측에 ‘焌星藏書’라는 이름의 붉은 장서인이 찍혀 있다. 우상측에는 ‘국사’라는 도서 분류와 ‘4283. 12. 1.’이라는 구입 날짜, 그리고 ‘於欲知’라는 구입처가 기입되었다. 좌하측에 도서 번호 ‘181’과 책 이름 ‘기초국사사전’ 및 저자 이름 ‘柳志玉’이 기입되었다. 우하측에는 ‘독서기’라는 이름으로 다섯 줄이 마련되어 있는데 내용은 비어 있다.

 

헌책방에서 구입한 1949년판 『기초국사사전』엔

 

재미있다. 출판 날짜는 서기인데 구매 날짜는 단기이다. 1949년 4월과 1950년 12월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구입처는 ‘욕지(欲知)에서’라고 했는데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기입된 친필 메모로 보면 구입자는 원량(遠梁) 학교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구입했다. 이 학교는 오늘날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 원량초등학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 학교 교사가 초등학교 수업을 위해 학교 도서를 구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초등학교 교사의 구입으로 보건대 사전 편찬자의 편찬 기획은 대략 성공한 것 같다. 이 책의 머리말에는 중등학교 국사 과목의 학습을 돕기 위하여 엮었다고 편찬 목적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사를 배움에 반드시 알아야 할 기초 정보 620여 가지를 추렸고 되도록 쉬운 말을 썼지만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하기도 했다는 일러두기 기능을 하는 설명도 있다. 해방 이후의 사실(史實)을 넣지 못해서 한스럽다는 말도 있는데 사전 편찬자는 상당히 실천적인 역사의식의 소유자였던 것 같다.

 

필자가 이 사전을 구입한 이유는 한국사 사전에 적혀 있는 조선후기 실학 지식을 알고 싶어서였다. 해방 이후 한국사 사전의 전개 과정을 보면 ‘소사전’에서 ‘대사전’으로의 추세가 확인되는데, ‘소사전’의 경우 해방 후 최초로 나온 이 사전과 함께 『국사사전』(1957), 『한국사사전』(1959) 등이 있으며, ‘대사전’의 경우 이홍직의 『국사대사전』(1962․1963), 유홍렬 감수 『국사백과사전』(1975) 등이 저명하다. 비슷한 시기 북한의 『력사사전』(1971)도 간행되었다. (김철웅, 2015, 「한국사사전 편찬의 역사와 과제」) 한국사에 관한 ‘국사’ 사전으로 가장 오래된 책이라 하니 소장 가치도 있겠다 싶어서 구입했는데 74년 전 구입한 학교 교사의 재미있는 메모까지 볼 줄은 몰랐다. 헌책방에서 도서를 구하면 이렇게 망외의 소득이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 이 사전에서 실학 항목을 찾았는데 표제어에 ‘실학’은 없고 그 대신 ‘실사구시학’, ‘실학파 학자와 그들의 중요 저술’, ‘국학의 발흥’이 올림말로 잡혀 있다. 조선후기 실학에 관한 자세한 서술은 ‘국학의 발흥’에 있고, 조선후기 실학의 개념에 관한 간명한 서술이 ‘실사구시학’에 있다. ‘실학파 학자와 그들의 중요 저술’은 사람과 책 나열로 그쳤다.

 

‘국학’과 ‘실사구시학’을 나누어 소개

 

‘국학의 발흥’을 보면 조선시대는 유학의 중독으로 자아에 관한 학문을 상실했다가 양난을 겪은 후 자아의식이 싹터서 역사, 지리, 문학, 법률, 경제, 풍속을 연구하는 국학자가 출현했다. 이것은 최남선이 『조선역사강화』에서 양난 후 자아의 각성과 조선학의 전개를 서술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국학, 곧 조선학으로서의 실학을 말한 것이다.

 

‘실사구시학’을 보면 유형원, 이익, 박지원, 정약용은 조선 말기 서양 문물의 유입으로 재래 학문의 무실함을 깨닫고 실지에 토대를 둔 진리를 추구하되 우리의 당면 문제를 알고자 하였다. 실지에 근거한 진리를 추구해 조선의 현실 문제를 연구한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실사구시의 학문을 상정했다. 이것은 문일평이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경제부터 착수하여 조선의 자아를 재수립하고자 했다고 설명한 ‘실사구시파의 학풍’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선후기 실학을 말한 것이다.

 

『기초국사사전』(1949)은 왜 ‘실학’ 항목을 통일하지 못하고 ‘국학’과 ‘실사구시학’으로 나누어 소개했는가? 지식사에서 보면 이것이 문제적 지점이다. 한때 한국 학계는 양자를 통일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는 국학을 실학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이후 같은 기관 신편 『한국사』는 결국 실학에서 국학을 분리했다. 다시 『기초국사사전』으로 돌아온 셈이다.

 

『기초국사사전』 이후 한국사 소사전과 대사전, 그리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1)(이하 민백), 『역사용어사전』(2015), 『한국학학술용어』(2020)에서 ‘실학’ 항목을 찾을 수 있다. 민백 온라인판은 작년에 새로운 ‘실학’ 항목을 공개했는데, ‘실학’의 개념, 지식, 연구를 아울러서 살폈다. 향후 ‘실학’ 탐구는 근현대 지성사 연구의 시각에서 더욱 생동감을 얻을 수 있다. 이를테면 1960년대 한국 사회의 근대화론과 신문 잡지의 ‘실학’ 기사는 어떻게 읽을까? 『기초국사사전』도 지성사 연구 시각에서 재미있게 읽을 방법이 있을 텐데 필자는 까막눈이라 잘 모르겠다. 독자 여러분의 가르침을 바라며 글을 마친다.

 

글쓴이 : 노 관 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알림] ‘풀어쓰는 실학이야기’ 코너는 이번 글로 일단 종료합니다.
실학 내지 한국학을 위한 지면이 필요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에,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어떤 형태로든 재개할 예정입니다.
그동안 좋은 글을 보내주신 필자와 관심을 갖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