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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서도 진보의 꽃은 피어야 한다
글쓴이 이도흠 / 등록일 2024-05-07
종일 입가에 맴도는 노래의 한 소절처럼, 요새 다산의 「애절양(哀絶陽)」의 시구가 자주 떠오른다. 여러 차이가 있지만, 백성들의 삶은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 다르지 않다. 불평등과 사회 격차는 점점 심화하는데 장기침체 상황에서 물가와 금리, 환율은 치솟는다. 가계부채가 1,900조 원에 육박한다니 반토막이 난 소득에서 또 얼마나 많은 이자를 떼어내야 할 것인가. 관료들의 잇따른 수탈에 성기를 자른 그때 농부처럼, 10만 명 당 25명이 넘는 이들이 버티다가는 자발적으로 삶을 마감하고 있다.
진보의 괴멸은 정치의 실종을 야기한다
상황이 이럴진대, 이번 총선에서 진보정당은 괴멸하였다. 이는 앞으로 여러 상실을 불러올 것이다. 이제 서민, 노동자, 농민, 빈민,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이들의 요구를 법과 제도, 정책과 예산 배정으로 바꿀 이들이 사라졌다. 이제 과연 누가 이들의 피눈물을 닦아줄 것인가. 사회문화의 장에서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담론을 형성하는 것도 힘을 얻기 어렵다. 정치도 사라진다. 필자는 정치를 ‘정당성에 근거한 헤게모니와 권력을 이용하여 가치를 분배하는 기술’로 정의한다. 돈, 권력, 정보, 정책 등 모든 가치를 두 보수 야당이 독점하고 견제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는 두 정당이 그 비율을 놓고 정쟁하거나 여당이 정부의 권력을 이용하여 강제하는 행정만 난무하게 된다. 무엇보다 유토피아가 사라진다.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진보가 집권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데 왜 우리는 국회에 원내교섭단체마저 만들지 못했는가. 분단상황에서 모든 진보적 담론이나 주장을 ‘빨갱이’나 ‘종북’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여 배제하는 지배층의 전략이 먹힌다. 미국과 기득권 동맹은 진보적 세력이나 담론을 거세시키면서 대미 종속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40년을 지나면서 “부자 되세요”라는 참으로 천박한 광고가 인기를 얻을 정도로 대중들은 시나브로 경쟁심과 이기심, 화폐증식의 욕망을 점점 내면화하였다. 보수 양당은 권력과 가치를 양분하며 적대적 공존을 하고 있다. 게다가 팬덤정치가 기승을 부리며 공론장을 해체했다.
어두울수록 별은 맑게 반짝인다
객관적 조건을 탓할 일이 아니다. 진보도 이참에 처절하게 성찰해야 한다. 정파로 분열되어 서로 배제의 언어만 반복했다. 국민이 귀담아들을 만한 담론 투쟁도, 신랄한 이데올로기 비판도, 신선한 정책 제안도 하지 못하였다. 모두 중앙에서 열매를 따는 것에만 집중했을 뿐 멀리 보고 현장에서 민중들과 함께 뒹굴며 풀뿌리 조직을 건설하는 데 등한하였다. 공부하지 않아 대다수가 대학 시절, 혹은 산업사회의 문제의식에 머물러 있다. 올곧은 투쟁은 늘 섬이 되고 연대 정신을 상실하였다. 대다수의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상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폐증식의 욕망을 증대하고 소비향락주의에 물들어 ‘자본가적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그나마 투쟁하는 동지들은 현안에 급급하여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변혁의 꿈을 포기하고 민주당과 수시로 연합하여 진보의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폐허에서 진보의 꽃을 피우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다산은 “세상의 그릇됨을 근심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겨 늘 힘이 없는 사람을 구제하고 … 가슴 아파하고 차마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뒤에야 비로소 시가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공감과 연대’는 가장 인간다운 본성이자 진보가 ‘강단 좌파’로 전락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주체들이 노동자를 중심으로 적(노동)/녹(환경)/보(소수자) 연대를 한다. 불평등의 극대화, 기후위기, 패권의 변화와 전쟁의 위기 등 복합위기는 모두 한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모순이 부문별로 재현된 양상이기에 대안은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는 것이다. 이를 향한 새로운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되, 목표를 수정하지 말고 여건과 역량을 따라 함께 정거장을 하나씩 점유하는 운동을 하면 언제인가 목적지에 도달하리라. 이제라도 지역으로 내려가서 일터와 마을에서 풀뿌리 조직을 만들고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진력한다면 시기도 앞당길 수 있다. 어두울수록 별은 맑게 반짝이고 길이 험할수록 함께 걸어갈 벗이 있다.
■ 글쓴이 : 이 도 흠(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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