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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의 정치를 위하여
글쓴이 정근식 / 등록일 2024-05-21
그 해 5월 21일, 오전 10시경부터 광주시민들은 전날 밤 광주역 광장에서 있었던 계엄군들의 만행에 항의하면서 금남로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오 무렵 시민들은 전남도청을 방어하고 있던 계엄군들에게 밀리지 않는 대오를 형성하고, 이들을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오후 1시가 지났을까. 누군가가 계엄군의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 급하게 후진하던 그 장갑차에 무전병이 희생되었고, 전남도청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애국가가 끝나자 제11공수여단 61대대와 62대대 병사들의 총소리가 잠깐의 정적을 깨뜨렸다.
한국의 현대사가 새로운 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그날 도청 앞 광장과 금남로에서만 62명의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이 대낮의 총성은 17일 밤 대학에 진입하던 계엄군의 군화발 소리, 27일 새벽 공기를 타고 퍼져 나간 시민군의 애처로운 목소리와 함께 5·18의 상징이 되었다.
5·18정신의 헌법 전문화, 빗나가버린 기념사
윤석열 대통령은 며칠 전 열린 제44주년 5·18기념식에서 “지금의 대한민국은 광주가 흘린 피와 눈물 위에 서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성장의 과실을 공정하게 나누고 사회적 약자를 더욱 두텁게 보호하여,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서민과 중산층 중심 시대’를 열어가야 합니다. … 이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온 국민이 행복하고 풍요로운 희망찬 미래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오월의 정신을 이 시대에 올바르게 계승하는 일이며, 광주의 희생과 눈물에 진심으로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이 말은 여느 때 같으면 박수를 받을만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초점에서 빗나가버린, 더 정확하게 말하면 ‘초점을 회피하기 위하여 고심한 끝에 선택’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이 기념사가 ‘맹탕’이라고 비판하였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거의 모든 정치지도자들이 ‘5·18정신 헌법 전문화’를 말하고 있고, 5·18 유족들 뿐 아니라 국민들 다수는 과연 대통령이 이에 대해 어떤 의견을 말할 것인가를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것은 대통령이 국민들과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다는 비판을 들을 만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었던 2021년 11월,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러 온 자리에서 “5·18 정신이라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정신이고, 우리 헌법 가치를 지킨 정신이므로 당연히 개헌 때 헌법 전문에 반드시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고, 2022년 2월 다시 한번 5·18 민주묘지를 찾아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넣는다는 제 입장은 똑같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작년 5.18기념사에도 “오월의 정신은 우리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 그 자체”라고 말했지만, 헌법 전문화는 말하지 않았고, 올해는 아예 헌법에 관한 언급을 회피했다. 이 때문에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사기죄보다 더 엄중한 범죄행위”라는 또 다른 비판을 이재명 민주당 대표로부터 받았다.
언행일치와 약속이행, 제22대 국회의 책무
5·18정신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인간존엄성을 지키며, 국가폭력에 저항하고 그것이 남긴 상처를 극복하는 정의의 철학이자 사상이다. 2016년 촛불대집회를 거치면서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주권재민의 사상을 재발견한 국민들은 5·18정신의 헌법 전문화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것은 점차 시대정신으로 변하고 있다. 이것은 이행기 정의의 제1원칙인 진실의 원칙에 토대를 두면서 제5원칙인 기념과 정신계승의 원칙을 실현하려는 국민적 에너지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3년 연속 5·18기념식에 참석했지만 올해도 5·18 정신 헌법 전문 수록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기념사에서 밝히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5·18 묘지에서 7시간 동안 천개의 꽃송이를 들고 일일이 희생자들의 묘지에 헌화하면서 비석을 닦았다. 우원식 차기 국회의장 예정자는 마석 민주묘지를 찾아 자신이 존경하는 김근태 의장을 그리워하면서 정치에 입문했던 초심을 잃지 않고 국회 운영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정치는 말의 정치와 행동의 정치로 구분되지만, 말과 행동의 일치 여부가 권력의 지속가능성을 결정한다. 모름지기 말은 그럴듯하지만 행동은 다르거나,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을 때 정치인은 신뢰를 상실하며, 그의 정치적 생명은 오래가지 않는다. 이제 국민들은 허언의 정치가 아니라 진정성이 있는 정치를 원한다. 이는 곧 개원하는 제22대 국회에 대한 엄중한 요구이자 기대이기도 하다.
■ 글쓴이 : 정 근 식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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