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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천을 바라보며
글쓴이 정근식 / 등록일 2024-06-25
호국의 달 6월, 삐라 풍선과 오물 풍선이 오가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비무장지대를 바라볼 수 있는 칠성전망대를 찾았다. 그곳에 서면 멀리 교암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동쪽으로 흘러나가는 한 줄기 강이 잘 보인다. 바로 그것이 금성천이다.
전쟁의 참화를 잊은 듯 평화롭게 흐르는 모습이 마치 이동원이 부른 노래 ‘향수’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이 지역은 1953년 7월, 휴전을 불과 2주일 앞두고 한국전쟁 최후의 사투가 벌어진 현장이었다. 젊은 병사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땅, 그곳을 좀더 멀리 보려면, 새롭게 만들어진 케이블카를 타고 1,178m 고지, 백암산에 올라야 한다. 그곳에서는 서북쪽의 산줄기들 사이로 제법 큰 농촌 도시, 금성을 내려다볼 수 있다. 북한은 1954년부터 이곳을 김화읍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금성 전투’의 회한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봄 중국 지원군의 5차 대공세를 물리치고 다시 38선 이북의 중동부지역을 수복했다. 전선이 고착되면서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는데, 비무장지대 설치는 쉽게 합의했지만, 포로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입장이 크게 달라서 회담이 진척되지 않았다.
유엔군은 북측을 압박하기 위해 추계 대공세를 펼쳤는데, 특히 미 제9군단은 중동부 전선이 시작되는 금성 남쪽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봉화산과 교암산을 점령하고 금성을 코앞에 둔 후천리에 방어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김화에서 백암산으로 이어지는 전선에서 북쪽으로 특별히 많이 올라갔기 때문에 이곳을 ‘금성돌출부’라고 불렀다. 중국군은 1952년 6월 금성 동쪽 고직목리의 고지들을 공격했지만, 아군은 이를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1953년 5월 휴전협상이 거의 타결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을 때 북측은 승전이라는 명분이 필요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안전보장을 위한 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중국 지원군은 금성지구에서 공세를 취하여 약간의 승리를 얻었던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한미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하면서 휴전반대 북진통일 캠페인을 강화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급기야 6월 18일부터 약 26,000여명의 반공포로들의 석방을 단행했다.
이에 미국은 당황했고, 중국은 분노했다, 중국 지원군은 7월 13일 금성지구의 국군을 행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 서쪽을 방어하던 수도사단의 부연대장 임익순 대령이 포로가 되었고, 기갑연대장 육근수 대령이 전사하였으며, 국군은 원래의 대치선에서 10km 이상 후퇴했다. 다행히 국군은 마지막 전투에서 백암산과 흑운토령을 탈환했지만 중국군의 7.13 대공세에 의해 빼앗긴 지역을 모두 탈환하지는 못했다. 결국 반공포로석방은 한미방위조약이라는 성과를 얻어냈지만, 국군 14,000여명의 추가희생과 금성돌출부의 상실 등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오늘날 칠성전망대에서 바라볼 수 있는 비무장지대의 북쪽에는 상당한 규모의 농장이 있는데, 그곳은 옛날에 큰골, 능동, 죽동이라는 마을이었고,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금성천 주변 평지는 세운리, 세현리라는 마을이 있던 곳이다. 중국은 2020년, 이 금성 전투를 소재로 하여 금강천이라는 영화를 만들었고, 우리는 이 영화의 상영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을 겪었다, 이런 연유로 칠성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분단경관은 우리에게 특별한 회한을 제공한다.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 협정’의 위험
지난주에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평양을 방문하여 북러 간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을 체결했다. 23개 조항으로 구성된 이 협정은 제4조에 북러 중 한쪽이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상태에 처하면 지체없이 모든 수단으로 군사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 협정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지속되는 상황과 연관된 것이지만, 우리에게는 1961년 7월 6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된 ‘조소 우호, 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을 상기시킨다. 북한은 이 협정 체결 직후인 7월 11일 중국과 유사한 협정을 맺었다. 이들은 모두 세계적 냉전과 중소분쟁에서의 사회주의권의 복잡한 동맹과 견제 전략을 담은 것이다. 조소 협정은 냉전의 해체에 따라 1996년 9월 10일 폐기되었다.
거의 30년만에 북한과 러시아 간 관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되었다는 것은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평화에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번 북러 협정이 1961년의 조약과 다른 점이 많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해서는, 변화하고 있는 북러 관계에 대한 냉정한 분석은 물론이고, 우리의 대북정책이나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대책이 더욱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 글쓴이 : 정 근 식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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