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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의 정약용 : 신교육의 선구자, 브나로드의 실천가? - 노관범

by 귤담 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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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의 정약용 : 신교육의 선구자, 브나로드의 실천가?

글쓴이 노관범 / 등록일 2024-10-04

1931년 3월 30일자 〈동아일보〉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 정인보가 자택 서재에 앉아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당시 정인보는 이 신문에 ‘조선고전해제’를 연재하고 있었는데 함경도 성진의 한 독자가 정인보의 서재를 구경하고 싶다고 신문사에 요청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신문사는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아예 ‘서재풍경’이라는 신규 코너를 만들었다. 정인보 서재의 사진은 말하자면 ‘서재풍경’의 제1회 풍경으로 수록된 것이었다.

 

신문 기사는 정인보 서재를 이렇게 묘사한다. ‘컴컴침침한 뒷방 오천여권의 누더기책. 비록 누더기이나 그 속에는 고조선의 빛나는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온갖 우리의 보물이 들어있는 금광. 이 광 속에서 작업하는 교수는 조선의 귀한 광부.’ 조선의 귀한 광부, 명언이다. 고조선의 빛나는 역사와 문화, 이 때만 해도 고조선은 단군조선이 아니었다. 정인보의 ‘조선고전해제’에서 차용한다면 고전 조선이라 불러도 좋을 옛 조선이었다.

 

1900년대 민간에서 전개된 신교육운동의 역사상

 

그러면 정인보가 금광에서 채굴하던 보물은 무엇이었을까. 정인보는 조선의 고전을 발굴하고 대중 매체를 통해 그 가치를 알렸다. 어떤 고전은 아예 신활자로 인쇄해서 널리 보급하였다. 정약용의 전집을 『여유당전서』로 출판할 때 그는 안재홍과 함께 이를 교열했고 스스로 ‘후학’을 자처하였다. 사실 정약용에 대하여 ‘후학’을 자처한 이는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목민심서』 간행시에는 양재건과 현채가, 『대한강역고』 간행시에는 장지연과 권중현과 김교홍이 책에 후학 아무개라고 공표했다. 대한제국기 간행물의 전통을 이어받아 정인보는 『여유당전서』에다 ‘후학 정인보’를 새겨넣은 것이다.

 

정인보가 생각한 정약용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정인보는 조선의 고전을 연구한 학자로서 정약용에 대한 역사적인 이해에 주력했을 것 같지만 의외로 그는 현대적인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정다산 서세 백년 기념’ 특집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정인보의 기고문 「다산선생의 일생」(1935.7.16.)에서 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글은 1930년대 조선학운동의 핵심 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다산학의 현창과 관련된다. 정인보의 정약용 인식 역시 무엇보다 이 글에서 살피는 것이 순리롭다고 하겠다.

 

정인보는 정약용을 거의 대한제국 시기를 살고 있는 근대인으로 감각하고 있다. 정인보에게 정약용은 무엇보다 ‘신교육’을 시작한 인물이다. 정약용은 이익의 학문을 수용하고 민중의 현실을 목격하며 이벽의 서학과 접촉하여 스스로 학문적 진보를 이룩했고 나아가 동지들과 함께 학회를 결성하여 신흥 단체를 만들었고 이것이 조선에서 ‘신교육’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00년대 민간에서 전개된 신교육운동의 역사상을 정약용에게 부과해서 꾸며낸 역사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정인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정약용은 ‘신교육’의 지도자로 정조 임금 때에 마침내 정계에 진출했고 국왕의 지우를 받아 치적도 세우면서 장차 크게 쓰일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정조 임금의 승하와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신교육’ 지도자의 몰락, 이는 신흥 학문 단체의 진멸로 인식되었다. 어쩌면 정인보는 이승훈을 생각했을까. 대한제국 시기 평안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육자 이승훈은 순종 황제의 서순행 당시 특별 초청을 받았고 황성신문 논설은 이를 대서특필하였다. 하지만 국망 후 그는 어떤 고난을 당했는가. 이를테면 105인 사건으로 어떤 핍박을 받았는가.

 

민중의 경학을 일으켰다는 역사상과 민중 계몽

 

정인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정약용은 정치적인 박해를 받았으나 신교육의 이상을 저버리지 않았다. 학문 연구에 전념하여 실물과 실사를 추구하여 실익을 도모하는 학문을 완성하였다. 그런데 신교육의 선구자로서 정약용의 간절한 마음은 조선의 민중의 사상적 혁신에 있었다. 어떻게 하면 조선 민중 모두가 실(實)을 생각하게 될까. 이것은 정치를 연구하고 경제를 연구해서 실학의 지식을 적립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실학 지식에서 실학 사상으로, 정약용의 경학 연구는 그렇게 해서 촉발되었다.

 

정인보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정약용의 경학 연구의 지향점을 압축적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정인보는 ‘경학의 통속화’를 말한다. 정약용이 유학자의 경서에서 민중의 경서로, 그런 쉬운 경학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생애 전반기 조선 ‘신교육’의 선구자가 생애 후반기 민중에게 실학의 근본 의식을 고취하는 민중의 경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브나로드, 민중 속으로, 정인보는 이번에는 정약용에게 1930년대 브나로드 운동의 역사상을 부과한 것일까. 정약용의 경학이 브나로드로 읽힐 수 있었을까. 정인보의 「다산선생의 일생」을 읽은 〈동아일보〉 독자는 두 달 후 심훈의 소설 『상록수』와 만날 수 있었다.

 

정인보의 정약용. 정인보는 정약용의 역사적 상상을 위한 키워드로 신교육과 민중 계몽을 제시하였다. 이로부터 9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사회는 정약용의 역사적 상상을 위한 키워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글쓴이 : 노 관 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