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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심(格心)과 둔심(遯心)
글쓴이 박석무 / 등록일 2025-04-07
지난해 12월 초 뜬금없는 비상계엄 선포 이래, 4개월이 넘도록 나라는 내란의 소용돌이 속에 온갖 것들이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국민들의 먹고 살아가는 문제인 경제가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서민들의 아우성이 멈추지 않고, 시급한 외교 문제가 방향을 찾지 못해 국가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도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른바 ‘탄핵’ 정국에 빠지면서 반대하는 쪽과 찬성하는 쪽 두 진영으로 갈라져 극한 분열과 대립의 모습도 드러냈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나라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에 참담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나라가 이런 정도의 극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이런 때 고경을 통해 정치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논어』의 공자 말씀부터 검토해 봅니다. ‘위정편’에서 “법제로 백성을 인도하고 형벌로 규제하면 백성은 법망에서만 벗어나면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덕으로 백성을 인도하고 예로 규제한다면 백성은 수치심을 알게 되고 감화를 받게 된다.(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라는 위대한 진리를 말했습니다.
나라의 통치란 법과 형벌로 하지 않으면 통제할 방법이 없다고 여기는 보편적인 상식보다 한 단계 높은 통치술을 언급했으니, 공자가 성인이고 지극한 정치철학자임을 알게 됩니다. 법과 형벌보다는 덕과 예로 백성들을 보살필 때 인간은 자신이 잘못한 일에 수치심을 느끼며 덕과 예에 감화되어 아름다운 질서를 회복하는 세상이 된다는 정치철학, 이런 이상적인 정치가 참으로 그리운 때가 바로 오늘의 우리나라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리 못된 짓을 행하고 아무리 큰 죄악을 저지르고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수치심도 느끼지 않아 얼굴에다 철판을 깐 철면피의 인간들이 세상을 주도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산은 『논어고금주』에서 공자의 위 문장을 깊이 이해하며 찬탄을 금하지 못하고, 『예기』를 인용하여 ‘격(格)’을 격심(格心)으로 해석해 감화를 받는 마음이지만, 둔심(遯心)이란 죄를 피해 도망치는 마음으로 해석해 새로운 뜻을 밝혔습니다. “대저 백성을 덕으로 가르치고 예로 규제하면 백성에게는 감화하는 마음이 있지만, 법제로 가르치고 형벌로 제재하면 백성은 도망칠 마음만 생긴다”고 설명하여 법을 통한 형벌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격심은 없고 둔심만 지닌 교활한 인간의 세상, 덕과 예가 사라져 오직 ‘법꾸라지’라는 별명의 인간들이 판치는 세상이 오늘입니다. 법망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면 아무리 큰 죄악을 짓고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들, 가장 무서운 내란죄를 저지르고도 법의 허점을 이용해 도망치려고만 하는 악인들, 그들이 지배적인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유치차격(有恥且格)한 요순시대를 바라지야 않지만, 그래도 악독한 죄를 지었다면 머리라도 숙이고 부끄러운 기색이라도 얼굴에 보여야 하거늘 뻔뻔스럽게 잘했다고만 우겨대는 판국이니, 어디에 이런 세상이 다 있단 말인가요. 오히려 그들의 말을 들어보고 그들의 모습을 보는 우리가 더 부끄러운 지경이니 언제쯤 무치(無恥)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날이 올까요. 기가 막힐 뿐입니다.
박석무 드림

글쓴이 / 박 석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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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다산연구소 명예이사장
· 다산학자
· 우석대학교 석좌교수
· 고산서원 원장
· 저서
『다산의 마음을 찾아―다산학을 말하다①』, 현암사
『다산의 생각을 따라―다산학을 말하다②』, 현암사
『다산에게 배운다』, 창비
『다산 정약용 평전』, 민음사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역주), 창비
『다산 산문선』(역주), 창비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
『조선의 의인들』, 한길사 등
『목민심서, 다산에게 시대를 묻다』 ,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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