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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은 이름이 성공한 인생을 만든다"
자유게시판

(단편소설) 하늘을 색칠하라

by 귤담 2023. 1. 12.

(단편소설 ; 196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하늘을 색칠하라

 

유금호(소설가)

반들반들하게 닳은 자갈이 길을 덮고 있었다. 그는 냅다 돌멩이 하나를 걷어차고 나서 돌멩이를 따라 눈길을 주었다. 저 만큼서 자갈길 위를 회오리 바람이 맴돌며 부옇게 다가왔다.

노인은 고개를 숙인 채였다. 듬성듬성 빠져버린 머리칼이 먼지 속에서 흩날렸다. 꽁초가 아직 노인의 끊어진 손가락 끝에서 찌지직거렸다. 꽁초는 여느 때와 같이 짧은 거였다.

“이걸 피시죠.”

植이 담배 갑을 꺼냈다.

“괜찮아.”

노인이 푸석푸석 부어오른 얼굴을 돌렸다.

“이걸 피우시라구요.”

그는 좀 계면쩍어져서 작업복 칼라를 세웠다.

“아, 아닐세.”

노인은 끊어진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소중한 것같이 다시 빨았다. 그것은 빨갛게 빛을 발하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자네한텐 좀 고될 걸세.”

노인은 다시 담배를 빨며 중얼거렸다.

“그렇지도 않아요.”

“바닷일은 손에 익지 않으면 어려워요.”

“일이야 어디 나 혼자 하는가요?”

담배 갑을 다시 집어넣고 결국 그는 부두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배는 아직 출발하지 않고 있었다. 흰 반점의 파도 조각들로 통통선 주변은 왼통 요란했다.

그것들은 끝없이 밀려드는 파도 때문에 더욱 낮게 보였다. 해안 감시소 앞에서 바다 쪽으로 뻗어나간 부두 위까지 뱃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천천히 그의 시선이 사람들 틈새를 헤쳐나갔다. 가로등 아래였다.

“못 보던 애군.”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네 좀 전에.”

“네 배에서 올라오다가……”

단발머리의 소녀는 진밤색 외투를 입고 막 연기를 뿜기 시작한 퉁퉁선 쪽을 보고 있었다.

“허, 그거……”

“이걸, 피우세요.”

꽁초가 아직도 노인의 손에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여기서 저 배를 보고 있으려면 초조해져요. 오늘은 더 그런데요.”

“내 담배가?”

“제가 붙여 드리죠.”

植은 또 힐끗 부두 위를 보았다. 소녀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자네도 또 소용없는 생각을 한 게로군.”

“아닙니다.”

“표정을 보면 알지 내 다……”

파란 해군 작업복 속에 머리를 더 깊숙히 묻으며 노인은 의미있게 웃었다.

植은 걸음을 빨리해서 노인 곁으로 다가갔다.

자갈길 위로 회오리바람이 몰려왔다. 그는 그때마다 몸을 돌렸다. 낮은 하늘과 섬 전체를 뒤덮은 울창한 송림이 갑자기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 밀밀(密密)할 색감(色感)이 여느 때보다 진하고 우중충했다. 그는 부두 쪽에서 고개를 돌리자 갈 길만 내려다보며 걸었다.

갱생원(更生院) 본관 앞까지 왔을 때에도 그는 통통거리는 뱃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는 초조해졌다. 이상스런 초조감이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소록도(小鹿島)와 녹동(鹿洞) 간을 연결하는 정기선의 늘 듣던 엔진 소리가 오늘은 다른 때 의식치 못했던 초조감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바람이 씽씽거리며 전깃줄을 흔들고 지났다. 병사지대(病舍地帶)의 경계선을 표시한 철조망이 노인의 어깨 너머에서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그때야 그는 놓쳐버린 통통 소리를 의식하면서 노인의 웃음띤 얼굴을 보았다.

“허, 그놈들 거참.”

육아원(育兒院) 운동장에는 어린애들이 나와 있었다. 노인의 시선을 쭈욱 육아원 쪽에 머물러 있었던 모양이었다.

植은 구호 물자들을 입고 있는 원생(院生)들을 오늘따라 울긋불긋한 색소를 느끼고 있었다.

“저놈 좀 봐, 허.”

노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植은 멀겋게 병사지대로 눈을 주며,

“영감님이 부럽습니다.”

한 마디를 했다.

“내가?”

노인은 의왼 듯 반문했다.

“정말입니다.”

“죽을 날이 가깝다는 이야기인가?”

노인이 담배를 꺼버렸다. 그리고 푹 고개를 숙인 채 점점 병세가 나타나고 있는 植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렇잖구야 문둥이가 문둥이를 부러워할 턱이 있나?”

둘의 시선은 곧 철조망 쪽으로 날아갔다. 그것은 아카시아 나무에 연결되어 섬을 나누고 있었다.

“자네 또 朱利인가 하는 그 여자 생각을 한 게로군.”

노인이 입을 떼었다.

“젊어서 그래.”

“것두 아닙니다. 그냥 이상해져서요. 다른 날 전혀 느끼지 못했던 기분인데 모르겠습니다.”

“자넨 그래두 자식이 있잖아?”

“……”

“그림이라도 그릴 수 있고, 거기에 석우(石雨)란 놈이 커갈 게구.”

"그게 저하고 상관이 있나요?“

“젊어서 그래.”

다가드는 바람이 차다. 소록도의 기후치고는 추운 날이었다. 반들거리는 자갈길 위를 바람이 맴을 돌며 스쳐들었다. 그는 아주 끊겨져버린 뱃소리를 다시 붙잡으려는 듯 귀를 기울였다. 전기 줄의 씽씽거리는 소리가 아까보다 더 커갔다.

“이번 검진(檢診)은 언제 한 대나?”

“……”

노인의 질문에 관심이 없는 듯, 그는 이런 날엔 눈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용소로 옮겨온 지 사년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었다. 재롱을 떨어주던 석우 놈이 이제 이곳으로 옮겨온다.

그래 여기서 고아처럼 자랄 것이다. 고개를 흔들었다. 뱃소리는 영 들리지 않는다.

“왜 아까……”

“네?”

“자네 그 침통한 표정 말일세.”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면 다 가시지. 날 보게……항상이지…….”

“요사이 새로 온 직원이 있나요?”

담담하게 그가 물었다.

“며칠 전 경리과장이 다시 왔다는 얘길 들었네만, 딸이 있나까진 모르겠구.”

노인이 다시 의미깊고 웃엇다.

“아니예요. 그런 게.”

“죽을 날이 가까우면 또 틀려지지, 생각나는 게.”

“다시 그림에 손을 대볼까 생갑입니다.”

“그건 좋지, 그거 좋아…….”

경계선(境界線) 감시소의 왼편 쪽에 눈을 준 채 노인은 좋지, 좋아,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네모의 시멘트 기둥 위의 그 커다란 글씨들이 바람에 조금씩 벗겨져 있었다. 둘 다 몸을 움츠린 채 말없이 경계선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도 그는 부두에 올라오면서 습관처럼 발 뿌리에 눈을 주고 걸었다.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부두에 많았다. 우박처럼 몰려드는 시선을 그는 피부로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

그때였다. 그가 당황해서 자기와 부딪친 소녀에게 사과를 하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순간 그는 이상스런 전율 속에 몸을 떨었다. 소녀의 눈빛은 단순히 혐오만이 아니었다. 급작스런 혼란 속에 그는 굴러 떨어졌다. 소녀의 외투 빛깔이 모든 빛깔을 갈색으로 물들였다.

“젊었을 때는 내가 솔선해서 바닷 일을 나갔지. 이제 너무 늙어버렸어. 전에 생각 안했던 생각들을 하게 되니……”

노인은 목을 꾸욱 움추린 채 걸어가고 있었다. 노인의 걸음걸이가 전같잖게 불안했다. 마을이 가까워졌다. 그는 다시 한번 보이지도 않는 부두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바람 소리가 작아갔다.

그것은 아주 멀리로 아늑하게 가라앉으며 사라져 갔다. 그는 똑바로 누워 잠잠해가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었다.

“교횔 나오래요.”

더 낮아진 듯한 천장이었다. 선반 위의 화구로 눈이 옮겨갔다.

그는 점점 눈을 아래로 내려 벽의 거울을 보았다.

< 祝 結婚 >

피익 웃음이 나온다.

"교회라도 좀 나가 보세요.“

어린애에게 이불을 덮어주다가 아내의 눈길이 이쪽으로 화악 쏠려왔다.

희멀쑥한 얼굴이었다. 그는 갑자기 울컥하는 메시꺼움을 느끼면서 눈을 감아버렸다.

모래를 핥는 물결 소리가 들려왔다.

“석우 검진이 모레래는데…….”

며칠동안 계속 들어온 말이었다. 이제 닷새밖에 안 남았는데…… 사흘밖에 안 남았는데……아내는 늘 그랬다. 植은 갑자기 울컥 또다시 메시꺼워졌다.

“그런데?”

“교회 좀 나가 보라구요.”

“검진받는 것하고 교회가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지?”

“그래두……”

“허……”

“혼자밖에 몰라요. 당신은……”

아내의 눈동자가 이상스럽게 번쩍였다. 희멀쑥한 얼굴이 더욱 추해 보인다. 그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 祝 結婚 >

“에고이스트들에겐 수선화가 어울리죠.”

그때 주리는 미색 스웨터에 진밤색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희고 긴 목에서 가슴으로 내려온 그 스웨터 빛. 그는 그때 화실에서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무슈 장, 그림에 너무 객관성이 결여된 것도 에고인 때문이예요. 후후.”

“에고는 나보다는 주리일 걸.”

“어머, 그래도 이렇게 온실에서 꽃을 가꾸는 걸 보세요. 괜히.”

“나 주려구?”

텁석 그녀 목을 물었을 때 그녀는 갑자기 묘한 콧소리를 내었었다.

으으응 하고 아기가 잠꼬대를 했다. 아내는 젖을 물리고 있었다.

植은 지금 어린애와 아내가 석고상이라고 생각했다.

‘모성’ 이라는, 그리고 그것은 자기 화실에 객체(客體)로서 놓여 있다는……

물결 소리가 흐르듯 계속 들려온다. 그것은 일정한 박자와 규칙을 가지고 계속되었다.

“나병입니다.”

“네에?”

피부과의 창 너머로 보이던 그때의 거리의 풍경. 모든 것은 그때 분명히 정지되어 있었다. 모든 것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자신마저 그 속에 한 개 정물로 화해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문득 흐느낌 같은 음률을 들었다.

물결 소리가 음악 소리처럼 들리고 있었다.

“얘, 모래면 간다니까요. 모레면, 영영 가요.”

“……”

“인정(人情)도 없나 저렇게도…….”

음악이 끊겼다. 갑자기 그는 일어났다.

“교회에나 가라구요.”

문을 열었다. 하늘은 맑아 있었다. 아내가 쥐어주는 성경책을 받아 들었다. 물결 소리가 점점 가까이 템포를 지닌 채 흐르고 있었다.

“……”

“인정(人情)도 없나 저렇게도……”

음악이 끊겼다. 갑자기 그는 일어났다.

“교회에나 가라구요.”

문을 열었다. 하늘은 맑아 있었다. 아내가 쥐어주는 성경책을 받아 들었다. 물결 소리가 점점 가까이 템포를 지닌 채 흐르고 있었다.

그가 큰길에 나왔을 때, 그 음악은 문득 멈추고, 파도 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는 이쪽으로 가까워지는 강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도 교회를 나가나?”

쉰 듯한 음성이었다. 노인은 걸음을 멈췄다. 점점 외투가 노인을 더욱 작게 만들고 있었다. 노인은 외투 속에 더 깊숙히 고개를 묻은 채였다.

한참 만에야 植은 자기 손에 들린 성경책을 내려다봤다.

“웬지 무서워져.”

노인의 부석부석한 얼굴이 좀 어색스럽게 웃어왔다.

“영감님이 교회를요?”

“무서워졌어. 그럴 것 같지 않더니……”

“난 바닷가에라도 계시나 하고 나가는 길인데요.”

“바다도 이젠……”

“처럼 나가시는 길이군요.”

“자넨 어린애가 있잖아?”

물결 소리는 거칠었다.

그것은 끝없는 울림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무서워졌어.”

노인이 걸음을 옮겼을 때 그는 급작한 현기를 느꼈다. 회색 빛으로 띄엄 띄엄 웅크린 작은 집들과 마을 중앙의 불을 밝게 켠 교회로 통하는 큰 길이 그 물결 소리의 여음 속에서 부응하니 떠서 어디론지 멀리로 흘러가고 있었다. 노인의 모습도 그 흐름 속에 용해되어 버렸다. 그는 문득 노인의 손에 늘 들려있던 담배꽁초를 생각했다. 으스스 한기(寒氣)가 왔다. 공허감이 전율처럼 전신을 감싸 돌았다.

소나무에 몸을 기댔다. 양 어깨가 뻐근하다. 바닷일이 힘에 겨웠던 모양이었다. 눈을 감은 채 얼마를 있었을까. 자동차 ‘크락숀’ 소리에 눈을 떴다. 도로는 헤드라이트로 눈이 부셨다. 그는 잠시, 불빛을 받아 더 차게 보이는 도로 위의 자갈들을 보고 있었다.

“교회 안 가우?”

유쾌하게 운전수가 소리를 쳤다. 그는 껌을 씹고 있었다. 植은 대꾸없이 빨간 적십자표의 흰색 자동차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안 가려우?”

운전수가 그의 ‘헌팅 캪을 고쳐 썼다. 바위 위로 눈을 돌렸다.

무늬를 새기듯 별 그림자가 검은 해변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한 곳에 모아졌다가 그것은 순식간에 폭발하듯 부스러졌다.

“경리과장님도 나오신다고 하는데……장씨, 웬만하면 갑시다.”

“저분이 미술대학을 졸업했다는 분인가요?”

자동차가 부응하니 그의 곁을 떠난 후에야, 그는 진밤색 외투를 의식했다. 바로 운전대의 옆자리였다. 물씬 휘발유 냄새가 다가들었다. 그는 그 냄새를 소중한 것이나 같이 들어 마셨다. 그것은 바다에서 풍겨 나오는 짭짤한 내음과 동화되어 폐 속으로 퍼져들었다. 저만큼 그 적십자표의 자동차 뒤꽁무니가 멀어졌다.

물결 소리가 불규칙한 여운을 발하면서 검은 해면(海面)에 쪼개지는 별빛도 훨씬 산만해졌다. 그는 그대로 소나무에 기대 서 있었다. 바람 소리가 또 멀리서 울려왔다. 그는 생각했다. 결혼을 하면 바닷가로 신혼여행을 가자던……그래 같이 바다를 그리자던. 정말 주리는 깔끔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언제고 티 하나 묻은 것 같지 않은 차림이었고, 성격이었다.

눈을 감았다. 피부과 의사의 무서운 선고(宣告)와 함께 ‘키니네’를 먹고 온 세상이 노란 물감 속에 젖어들던 그 의식의 혼란 속에서 문득 떠오르던 주리의 얼굴이 새삼 검은 해면을 배경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저분이 미술대학…….”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산만하게 흔들렸다. 별빛이 부서졌다. 물결이 거칠어져 갔다.

<망집(妄執)?>

고개를 흔들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며 그는 쓰게 웃어버렸다.

날씨가 풀렸다. 마침 이튿날은 작업과 동원이 없어 植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화구를 끄집어내렸다.

사년 동안 선반 위에 그대로 놓여있던 것이었다. 물감을 녹히며 그는 손가락 끝에 새로 잡힌 물집을 들여다보았다.

“내일이면…….”

아내는 옷고름을 손으로 말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풀어져 내리고 그녀는 그것을 다시 말았다. 아내는 아까부터 그것을 반복했다.

“낼이면 애가 가요.”

몇 번이고 들어온 말을 아내는 또 했다.

“그런데?”

植은 물감을 만지며 아내 쪽엔 한눈도 던지질 않았다. 아내의 표정은 끄집어낼 수 없이 착잡해져 있었다. 손끝이 뜨뜻해지며 물감은 말랑거렸다. 물집이 생긴 손끝의 피부가 이미 거므스레해 있었다.

“나, 그림 그리러 갈 테니 말이요.”

“애가 낼이면 가요.”

“누가 그걸 모른대?”

그의 음성이 약간 높아졌다.

“차라리 진성이면 안 가지, 안가고 말고.”

실성한 사람같이 말을 더듬거리는 아내에게,

“문둥인 말야……”

그도 말을 매지 않았다. 목구멍을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와서 막았다.

“송곳으로 다릴 쪼는 머슴애가 될지 누가 알우?”

아내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쓸데없는 소린 그만둬.”

“작년 얘기 잊었수? 제 에미한테 보내달라고, 허벅다리를 다 찍어논 가시내 얘기.”

그녀의 어깨가 들먹였다. 뛰듯이 그는 밖으로 나와버렸다.

육아원은 골목을 빠져 나오면 바로 보였다. 경제선인 철조망이 운동장과 이층 목조건물에 금을 긋고 있었다. 운동장은 구호물자들의 울긋불긋한 무늬가 산만하게 흩어져 있었다. 그 무늬들은 운동장을 금을 긋듯 대여섯 줄로 쪼개놓은 철조망에 얼기설기하게 걸려있는 듯 보였다.

아내의 흐느낌 소리를 들으며 그는 캔버스를 더욱 꼭 옆구리에 끼여 안았다. 햇빛은 눈부시게 밝았다. 그는 뛰기 시작했다.

많은 것들이 머릿속을 왕래했다. 철조망 곁에 캔버스를 세운 후에다 그것은 계속되었다.

바람이 소나무를 가볍게 흔들었다. 어금니를 눌러 물었다. 얼마큼 그는 넋 잃은 것같이 바다 속을 쏘아 보고 있다가 일어섰다.

그의 붓이 천천히 움직였다. 모든 것은 정적 속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의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 갔다.

“저 아저씨 우리 그리나봐.”

얼마 후였다. 그는 조그만 계집애의 목소리에 잠깐 붓을 멈췄다.

“여기 못 들어가?”

조그만 손이 철조망을 잡아 흔들었다. 빨간 리본이었다. 대여섯살 박이 소녀가 말끄러미 그를 올려다 보았다.

피로가 급작스레 엄습해 왔다. 지근지근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철로를 베고 누워 온 세상이 노란 색깔 속에 젖듯 암담한 뇌리 속에 느꼈던 냉기. 그는 갑자기 몸을 떨었다. 눈을 감았다.

“그림 그리시네요.”

이번엔 놀라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진밤색 외투의 소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꼬마의 손을 잡은 채 그녀는 철조망 저쪽에 있었다.

“네.”

좀 어색스럽게 그가 대꾸했다. 온 몸이 부스러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 좀 넣어 줘. 응, 언니야.”

꼬마가 소녀의 진밤색 외투자락에 매달렸다.

“그러는 거 아냐. 아버지가 너 차자. 지금.”

소녀를 植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아직 어렸다. 그런데도 눈빛엔 여러 표정이 엇갈려 있었다. 그를 당황하게 만들던 연민과 호기심이 그녀 눈동자엔 뒤얽혀 반짝였다.

“아저씨야, 나 좀……”

꼬마가 다시 철조망을 잡아 흔들었다.

“그러는 게 아니래두……”

소녀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아저씨, 나 좀……”

꼬마가 다시 응석을 부렸다.

“……”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캔버스를 그들 쪽으로 돌려 세웠다.

“야, 언니. 너다.”

“어마.”

꼬마의 외침과 동시에 소녀는 입을 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소녀의 얼굴을 그는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년 눈이 무엇인가를 집어낼 듯 그의 눈동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언니야, 너 언제 이 아저씨한테 그렸어?”

빨간 리본이 움직였다.

햇살은 눈부셨다. 철조망 저쪽으로 부응하니 자동차가 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점점 그에게 점점 그에게 거리감을 두고 멀어져 갔다. 부옇게 먼지 속을 차는 미끌어지다가 끝내 울창한 송림 속에 빨려 들어갔다.

“죽이고 말지, 차라리 카악……‘

아내의 앙탈에 그는 아무 대꾸도 없이 캔버스를 챙겼다.

오늘 검진을 받는 스무 명 중에 열서너 명은 철조망을 빠져나갈 것이다. 걸으면서도 몇 번이고 그는 육아원 쪽을 보았다. 철조망에 의해 줄이 그어진 그 건물이 너무 무겁고 암울스러워 보였다.

화구를 세웠다. 그의 붓자루가 그의 이빨에 자근자근 깨물리고 있었다.

초원은 언제나 변함없이 조용했다.

“내 믿었지. 자네가 한번은 ……그림을……그리라고……허어……”

노인의 시선이 움직일 것 같지 않았다.

“곧 쾌하셔야 할 텐데요”

“문둥이는 다 혼자가 되는 거여……결국...아아, 결국 그렸군 그래. 그래……그래……”

노인의 쉰 듯한 음성 때문에 그는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노인의 몽롱한 시선이 그를 불길한 예감 속에 몰아넣었다. 천장에서 쥐들이 찍찍거린다.

바람이 문풍지를 윙하니 울렸다.

벽 쪽을 향해 세웠던 캔버스를 노인 쪽으로 돌려 다 그렇지.”

“……”

“내게도 딸이 있었던 것 같애. 여자하고 인연을 맺어본 적이 없는데….”

성경책이 손가락도 없는 노인의 손 안에 쥐어져 있었다.

“바닷물 소리가 들려.”

“담배 드릴까요?”

“아니야.”

노인은 손을 젖고 나서

“이걸 봐.”

불쑥 이불을 들치고 양손을 내밀었다.

두 개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이 새카맸다. 그 주먹만 남은 두 손이 안막 전체를 휘덮어 왔다. 그는 아무 말없이 일어났다.

“내게 딸이 있었음 꽤 예뻤을 걸세.”

바다를 쏘아보는 그의 눈이 어제보다 더 날카로웠다. 얼마큼 그렇게 그는 서서 바다를 보았다. 현기가 일었다.

그는 무릎에 고개를 묻고 꽤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다시 그의 붓이 움직였다. 철조망 밖에 진밤색 외투의 소녀가 와서 선 것도 그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붓끝이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캔버스 위엔 초원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 여인의 입상(入相)이 점점 뚜렷해 갔다. 그녀 손은 호주머니에 깊숙히 찔려 있었다. 그녀의 눈망울은 퍽 피로하게 많은 표정을 담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비해 그 눈은 너무 성숙해 보였다.

하늘은 아직 흰 공백이었다.

그는 소녀의 얼굴과 바다 위의 하늘을 번갈아 비교하였다.맑게 갠 하늘에 그의 눈길이 매혹된 듯 머물렀다가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붓을 내리고 잠시 그는 망설였다.

강노인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정 외투 속에서 노인의 얼굴은 완전히 푸른빛이었다.

“아직 덜 됐군.”

노인은 풀밭에 앉았다.

植은 붓을 든 채 그냥 망설이고 있었다.

“마을에 좀 가봐야겠네.”

쉰 듯한 음성이었다.

“다 끝났는데요.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植은 다시 물감을 섞었다.

“석우란 놈한테 상채기를 냈어.”

“네에?”

갑자기 植은 멍멍해졌다. 모든 것이 순간 또 정지하고 있었다.

그날 피부과 유리창 밖으로 느끼던 풍경의 정지.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갑자기 콧구멍이 간질거려왔다.

“석우란 놈 상처에다 지에미가 피를 발라준 거군요. 그래 문둥이를 만들었군요. 헛허허…….”

“부인이 끌려 갔어.”

“이제 석우란 놈도 문둥이가 됐군요. 헛허.”

실성한 사람같이 그는 한참을 웃었다. 하늘의 빛깔이 점점 진한 농도로 물들어갔다. 석우의 피부 위를 침식해들 그 병균같이……모든 색깔은 순식간이었다.

까만 색깔 속에 모든 게 휘말려들었다.

갑자기 그의 붓이 발광하듯 화폭 위를 꿈틀거렸다. 이마에 땀이 배고 있었다.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우린.”

붓을 던져버리고 휘청거리며, 그는 마을 쪽을 향했다.

“언니야, 왜 하늘이 까마냐?”

빨간 리본의 소녀가 언니의 외투자락에 매달리며 물었다.

“허, 저런.”

동시에 노인은 한참 화면을 바라보다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쓰러졌다. 하늘을 새까맣게 칠해져 있었다.

“언니야, 어째 하늘이 까마냐?”

빨간 리본의 꼬마가 힐끔 하늘을 보았다.

“가만 있어.”

꼬마의 손을 꼬옥쥐며 소녀는 그림 속의 그 소녀가 자기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까맣게 칠해진 하늘의 배경 때문에 소녀의 눈동자는 온통 분노로만 이글거렸다.

(196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