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여자에 관한 몇 가지 이설, 혹은 편견
유금호 (소설가)
바다 위로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흩뿌리지 않았다면 나와 박민주 사이에는 별 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여자가 배 난간에 기대서서 텅빈 하늘에 대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는 모습이 잠깐씩 시선을 끌긴 했지만 내 머리 속은 그때까지 채희와 내 친구 B의 아내, 그리고 B의 셋이나 되는 어머니에 대한 생각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거친 빗방울이 배 난간을 두드려대기 시작했을 때까지도 나는 그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조차 알지 못했다. 짧게 치켜 깎은 스포츠형의 머리나 청바지와 청재킷의 옷차림도 그랬지만 메고 있었던 배낭의 부피와 목에 걸고 있던 세 대나 되는 카메라들이 우선 그녀를 여자로 느끼게 하는 데는 무리였다. 바람과 빗방울이 동시에 3층 갑판으로 몰려 왔을 때까지 그 여자는 삼각대 위에 특수 촬영용으로 보이는 카메라 한 대를 세워 놓고, 또 한 대는 목에 건 채 다른 한 대로 계속 하늘을 향해 셔터를 눌러 대고 있었다. 그녀의 작업이 너무 희극적으로 보여 나도 몇 번 카메라의 렌즈가 향하고 있는 하늘을 올려 보았지만 하늘은 잔뜩 흐려 있어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배에 오를 때까지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었다. 비가 내릴 거라는 예상을 했었다면 여객선 터미널에서 아예 계획을 바꾸었거나 비닐 우산이라도 준비를 해서 승선했을 것이다.
우리가 탄 배, 신진 페리호는 목포(木浦) 여객선 터미널을 출발해서 고하도, 허사도, 매월도, 등대, 외다리, 율도, 달리도, 일곱군데 작은 섬들에 잠깐씩 머물었다가 정확하게 두 시간 후에 출발지로 되돌아온다고 했다. 여섯 군데의 기착지 중 어느 곳에 내리건 정확하게 두 시간후 내렸던 부두로 나오면 다음 순회선을 탈 수 있고, 네 시간을 지났다 하면 또 그 다음 배를 타고 출발지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새로 써 붙인 안내판이 호기심을 끌어서 가벼운 기분으로 표를 끊었었다. 어차피 친구 B는 퇴근 시간이 지나야 학교를 빠져 나올 것이고 그때까지 초행길의 낯선 항구에서 혼자 해야 할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람선 3층은 흰색 알미늄으로 빙 둘러진 난간과 기관실만 있어서 작은 섬들의 풍광을 드넓게 볼 수 있었지만 30여 분이 지난 뒤에는 생각보다 바닷바람이 거세져서였는지 그 여자와 나, 그리고 부부로 보이는 중년 한 쌍, 대학생들인 듯한 젊은이 셋만이 남아 있었다. 배가 출발할 때는 꽤 많은 사람들이 기관실 뒤편 넓직한 갑판 여기 저기에 이동식 간이 의자를 옮겨가며 수선스럽게 떠들었는데 하나 둘씩 1, 2층의 객실 안으로 빨려 들어가 듯 사라진 모양이었다.
그때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이 우리가 타고 있는 배 전체를 휘감았고, 빗줄기가 방향도 없이 3층 갑판을 두드려 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세워 두었던 카메라 삼각대가 쓰러졌고, 그 곁의 엄청나게 큰 배낭이 난간 한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삼각대를 추스리는 동안 나는 커다란 배낭을 붙들었다. 어어어, 하면서 젊은이들과 부부로 보이던 중년도 얼굴에 흩뿌려진 빗물을 손으로 훔치며 바쁘게 사다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놈의 하늘 괜히 심통을 부리네.”
여자가 한 손으로 난간을 붙잡은 채 나를 보고 씨익 웃었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어져서 우리 역시 2층으로 통하는 사다리를 내려갔다.
“참, 아까 고마웠어요.”
금방 후줄근하게 젖은 채 마루가 깔린 2층 선실로 들어 온 여자가 젖어 버린 짧은 머리를 타올로 털며 말을 걸어 왔다. 유리창 밖으로 내려긋는 빗줄기는 쉴새 없이 방향을 바꾸어 갔다.
“바람을 찍으려구요. 흔들리는 피사체 없이 순수한 바람을요.”
“바람을요?”
그녀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상한 긴장감이 왔다. 추상적인 대화를 즐기는 여자는 신비감이 있을지 모르지만 금방 상대방을 피곤하게 한다는 나름대로의 선입관 때문이었다...... 왜 있잖아요? 홍콩 영화나 무협 소설, 더러 만화책 같은데도 등장하는 도사님 있죠? 제자에게 칼쓰는 법이나 활 쏘는 걸 가르치면서....음성 한 옥타브 깔구요....왜 이러는 거 있죠?.... 저기 앉아 있는 송골매를 맞추거라....하지만 죽이는 게 아니고....매가 놀라지 않게 그 꼬리 깃털만을 스쳐 화살촉이 떨어지게 해야 한다....또요 이렇게도 해요......이 칼을 휘둘러 저 소나무가지 끝의 잎 한 개만을 반 토막으로 잘라 보아라....... 그게 얼마나 신기하고 깊은 은유인가 하고 감명 받은 적이 있어요........저도 사진에서요....바람을 한 번 찍겠다고 어느 날 결심을 했어요....그녀는 주섬주섬 젖은 짐을 정리하면서 꼭 나를 향해서만은 아닌 독백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저 섬에 내리실 건가요?‘
그녀의 질문을 빨아들이면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리자 배는 바위가 울퉁거리는 포구에 기우뚱 닿고 있었다.
“아니요.”
나는 얼른 고개를 젓고 출입구 쪽에 살이 부러져 내던져진 비닐 우산 한 개를 집어 들고 혼자 3층 갑판으로 올라가 버렸다. 비가 계속되었지만 빗줄기가 가늘어졌고 바람결도 조금 얌전해져 있었다.
그녀가 두려워졌다면 지나친 표현이었을까. 오늘 만나게 될지도 모를 B의 아내 같은 여자나, 채희 역시 남자 편에서 본다면 예측 불허의 생각과 행동 속에 이쪽이 대처 방안을 세우기 전 저희 멋대로 결정하고, 행동하고, 결론 내리는 타입이었다는 자각이 소심증으로 이어 졌는지도 모른다.
전날 밤 나는 갑자기 옛 친구 B를 한 번 만나 보자, 그것도 육지의 끝. 야간 열차 종점의 항구까지 한번 가 보자, 그런 충동으로 목포행 열차에 올랐었다. 자기 아내가 임신을 했다며 어눌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B가 전화를 한 순간, 그를 한 번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 특히 그의 아내를 한 번 보고 싶었고, 3대 독자인 B의 기분이 현재 어떤 것일까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채희(采姬)가 한 달전 예고도 없이 내 곁을 떠나 버린 후 나는 여자에 대해 새로운 혼란에 휩싸이면서 B네 부부생활이 궁금증으로 다가 왔었다.
“ Y형 나, 지금 살고 싶지도 않아.”
도수 높은 안경 속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 된 채 눈물까지 보였던 B의 결혼은 너무도 엉뚱한 계기로 이루어져서 나는 그들이 결혼 생활을 계속하고 임신까지 했다는 사실이 무슨 희극처럼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었다.
B의 고백대로라면 그는 당시에 여자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당했고, 그 때문에 심각한 정신적 혼란을 감당하기 힘들어했었다. 말도 안돼. 나도 막걸리 실컷 퍼 마시고 막차 한 번 타 볼까. 나는 농담처럼 B의 하소연을 흐려 버리려 했지만 그가 심각하게, 우리나라 법률엔 이런 경우 법적인 대응책조차 없는 걸 확 인했다며 제 머리칼을 움켜 흔드는 모습을 보고는 그때의 사건에 나 자신도 일말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공범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대학의 신학기가 시작되면서 환영회다, 단합대회다. 무슨, 무슨 동아리 모임이다, 해서 잦아지는 술자리가 사건의 시발이었다. 그 날 저녁의 일이 있기까지 나와 B는 안면조차 없었고, 학과 마저 나는 국문과, 그는 수학과여서 강의실에서 마주칠 일도 거의 없는 사이였다. 그 날 밤 거의 막차에 가까웠던 버스 뒷자리에서 나는 설핏 잠이 들었지 싶다. 버스 뒷자리에서 잠이 들어 종점과 종점 사이를 두어 번 왕복하다가 내린 경험 같은 건 보통 사람들에게도 더러 있겠지만 이날은 좀 고약한 일이 일어났었다. 이상하게 엉덩이 쪽이 미지근하게 축축해지는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 때문에 눈을 떴다. 부우연 시야 속에서 꼭 구겨진 담배 갑 같은 왜소한 청년이 내 곁에서 나를 향해 두 손을 싹싹 빌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왼쪽에 앉은 젊은 여자에게도 똑같이 번갈아 가며 손을 부비고 있었다. 이 따위 짜식이 있어? 여봐요. 기사 아저씨. 차 좀 세워요. 차가 덜컹 서면서 앞자리의 승객 몇이 고개를 빼고 우리 쪽을 향했다.
여자가 청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을 때 그의 바바리 코트로 가려 있었던 다리 사이에서 플라스틱 물뿌리개 하나가 발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 일들은 그러나 거의 동시에 일어나서 나는 사태를 파악하는데 한참동안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 댁은 안 내릴 참이예요?”
여자가 나를 향해 닥달하듯 눈을 치켜 뜨지 않았다면 나는 바지 엉덩이가 젖은 채 그들이 내리는 것을 보고만 있었을지도 몰랐다. 나는 얼떨결에 멱살을 잡힌 사내 뒤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운전 기사가 우리 뒤통수에 대고 뭐라고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너, 좀 맞고서 해결할 거니? 아니면 파출소에 가서 조서 작성한 뒤에 차분히 피해 보상할 거니?......”
버스가 떠나자 여자는 움켜쥐었던 청년의 멱살을 앞으로 밀치면서 거친 사내들처럼 말했다. 그때 밤바람이 우리를 휘감고 지나가서 젖은 아랫도리가 섬뜩거려 왔다......그놈의 막걸리 때문이구먼요. 그놈의 막걸리가.....고개를 주억거리며 어눌하게 중얼거리고 있는 사내가 안경을 쓰고 있는 것도,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던 여자가 우리 또래의 젊은 여자인 것도 나는 그때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댁은 이 자식을 어떻게 할거예요?”
젖은 엉덩이 때문에 엉거주춤하고 서 있는 내게로 여자의 치켜 뜬 시선이 다가 들었다......우선 추워서 안 되겠네....여자가 진저리를 한 번 치고 나서 길가 포장마차 쪽으로 눈을 주었다.....우선 저기로라도 갑시다. 나도 엉덩이가 서늘해 와서 우선 불 곁으로 가고 싶었다.....야, 이 변태 같은 자식아. 이리로 와....구겨진 인상의 청년은 계속 고개를 주억대며 포장마차로 따라 들어왔다. 포장마차 안의 연탄 난로 앞에 왔을 때 힐끔 나를 쳐다보던 사내가, 형도 P대학 맞지요?....학교에서 더러 본 것 같은데.....나도 P대학....예..난 92학번 수학과, 이름은 B고요.....그놈의 막걸리 때문이구먼요......막걸리 마시고 차 타면 안 되는데....좌우간 보통 실례가 안 되었구먼요....사내의 도수 높은 안경 속에서 선량해 뵈는 눈이 연신 나를 향해 구원을 청하고 있었다....이런 변태....여자가 금방 다시 따귀라도 올려붙일 듯 그를 향해 눈을 치켜 뜨더니, 너도 한 패거리 아냐? 하는 식으로 나까지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얘기나 좀 들읍시다. 뭐가 어떻게 된 거요?”
나 역시 목소리를 필요 이상으로 높였다. 사내는 풀이 죽어서 고개를 숙인 채, 아주머니 여기 꼼장어하고 술이나 좀 줘요, 했다. 그가 더뜸거리며 설명한 사태의 진상은 그의 말대로 막걸리가 원죄였다. 과 회식에 소주를 나누어 먹고 평소에 마시지 않던 막걸리를 2차로 실컷 마음놓고 마신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어느 정도 뱃속을 정리하고 버스를 탔어야 하는데 분별력을 잃고 좌석버스를 탄 것이 잘못이었던 셈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이라도 아랫배는 터져 나갈 것 같아지고, 변두리의 정류장은 도무지 감감해서 힐끔 힐끔 차안을 둘러보았다는 것이다. 늦은 시간이어서 손님들은 한결같이 잠에 취해 있었고 더구나 뒷자리 양쪽에 앉은 남자와 여자 승객도 꿈나라를 헤매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앞 의자 밑에 있던 플라스틱 물뿌리개가 눈에 들어 왔다. 금방이라도 아래배가 터져 죽을 것만 같아 마침 바바리 코트도 입었겠다, 물뿌리개를 바바리 코트 자락으로 감싸고 앞단추를 풀었다는 것이다.
“그놈의 물뿌리개 아래쪽이 터진 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결국 그가 쏟아낸 소변은 물뿌리개를 통과하여 의자를 적셔 갔고, 끝내 죄 없는 옆자리의 여자와 내 엉덩이와 속옷을 그대로 적셔 버린 것이다.
화가 치밀기도 했지만 나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배를 움켜쥐고 말았다. 내 웃음이 그녀를 더욱 화나게 했던지 여자가 잽싸게 B의 따귀 한 대를 올려붙였다.
“아이 드러워...아이...드러워..야, 이 짜식아. 내가 믿을 줄 알아? 이 변태 같은 자식....아이 드러워....”
씨익 씨익거리며 앞에 놓인 꼼장어 접시와 소주병을 쏘아보는 여자의 시선을 비켜서 나는 내 잔에만 술을 한잔 따라 마시고 일어서 버렸다.
“아가씨 속옷, 목욕, 그 정도 책임은 B씨가 지는 게 좋겠우.”
우리 앞에 놓인 술 한병과 안주 값을 던지듯 아주머니에게 밀어 놓고 나는 그 집을 그대로 나와 버렸다. 무슨 말인가 애원하는 듯한 B의 음성과 내게 향하는 것 같은 여자의 욕설이 들려 왔지만 나는 버스 정류장을 향해 질척거리는 바지를 입은 채 뛰기 시작했다.
며칠 후 울상이 되어 나를 찾아온 B는 그 날 밤 그녀에게 동정을 잃었노라고 울먹였던 것이다. 여자의 새 속옷을 사 가지고 목욕을 끝낸 여자가 기다리던 여관으로 돌아 갔을 때 그녀가 말했다는 것이다.....너 같은 변태는 정상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치료될 수 있는 거야. 알았어?....내가 치료사가 될지는 몰랐지만 말야.....여자는 그에게 당장 옷을 모두 벗고 침대 위에 누우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난 당한 거야.”
그때 나로서는 울먹이는 그를 데리고 그가 며칠 전에 막걸리를 마셨다는 선술집을 찾아가 같이 술을 마셔 주는 게 고작이었다.
“처음 본 남자를 강제로 침대로 끌어들이는 여자를 난 아직 상상도 안 해 봤어.. 아마 그 여자 좀 특수한 여자가 아닐까, 가령...말하자면 B형은 말야, 좀 특수한 체험을 한거라구...그렇게 생각 안해?...”
그때까지 내게 있어서 여자는 시골에 묻혀 있던 내 어머니에게서 받은 인상으로 거의 고정되어 있었지 싶다. 인내와 강인함, 침묵, 그런 분위기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여자를 인식하던 내게 B의 고백은 너무 충격적이었고, 의외의 일이었다. 일찍 돌아가신 내 아버지가, 말하자면 바람 같은 존재여서, 어머니가 늘 같은 자리에 버티고 선 산이나 바위 같다고 느껴졌던 것일까. 시골 집 뒤 켠에 대밭이 있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대밭에 바람이 스산하게 일기 시작하는 계절이 오면 아버지는 집안에서도 늘 안절부절 못하셨다. 그런 며칠 후면 아버지는 그 대바람 소리에 섞여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그럴 때 어머니는, 네 아버지 돈 벌러 가셨다. 나직한 음성으로 그렇게만 말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지 않는 여러 날 동안 아랫목에 아버지의 밥이 식지 않도록 방석으로 덮여 있었던 것 역시 낡은 흑백 사진처럼 내겐 늘 남아 있다. 아버지의 옷가지들은 그때도 늘 정갈하게 손질되어 채곡채곡 개켜 있었다. 보름이고 한 달이고 지나 아버지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돌아 오셨을 때도 어머니의 표정이 언제고 한결 같았던 것을 나는 당연하게만 보아 왔다.
“아니야. 아니라고....말도 안 돼......”
B는 연거퍼 술을 들이키면서 수백 번도 더 아니야, 소리만을 반복했다. 그의 아니야,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뜻을 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자꾸만 난감해졌다.
B가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온 게 졸업하던 해의 가을이었다. 시골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선생으로 취직이 되어 아마 완전히 촌놈으로 정착을 할 것 같다는 넉두리를 전해 온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나는 졸업후 바쁘게 뛰어 다니느라고 그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었는데 B는 결혼 결정을 하면서 나를 그들 결혼의 중요한 증인으로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나는 가끔 허물없는 술자리에서 B의 이름만을 익명으로 그들이 결혼에 이른 전말을 좀 과장해서 떠든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반응은, 그러니까 우리도 막걸리를 많이 마시는 거야. 그러다 보면 기가 막힌 인연이 생길 수도 있다. 이거야. 그런 식으로 왁자하게 웃는 것으로 대개 막이 내려졌다. 그런데 한 번은, 그건 모권(母權)사회로 복귀되는 한 징조요, 사례라고 입에 침을 튀기는 친구를 보았다. 다른 자리에서 어떤 청년은 페미니즘의 구현과 실현이라는 거창한 이론까지 꺼내면서 다양화의 시대에 암수의 행동 양식을 단선적 기준으로 재단하는 어리석음에 주는 경종으로 그녀에게 찬사를 보낸다고 깊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도 했다.
좀더 심하게는, 콜 보이라는 직업은 이미 성업중인 고전적 직업이고, 지금도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모모 호텔에 여자가 혼자 숙박을 하면 아예 스무 살 안팎의 미소년들과 근육질 청년들의 앨범 사진을 종업원이 들고 들어오는데 그까짓 게 무슨 이야기거리라고 분위기 썰렁하게 만드는 거냐고 힐난하는 사람도 있었다.......대여섯 명 여자들이 모이면 말이지.... 기분 좋게 양주로 몇 잔씩 마시고 말야..... 이건 사진이 아니고 말야, 시중들던 청년들 앞에 맥주 잔을 가득 가득 채워 한 잔씩을 놓는 거야.....그걸 마시라는 게 아니라구.....청년들이 한 녀석씩 모두 물건을 꺼내 컵에 담구는 거야.....그래서 맥주 잔에 제일 맥주가 적게 남는 청년이 그 날의 쨩으로 뽑히는 거라구......박수를 받고 팁을 배로 받고....귀여움을 받고.....뭘 좀 알아라. 이 석기시대 사내놈들아....이런 식의 이야기까지 나오면 우리들 대부분은 술기가 가시면서 조금씩 쓸쓸해지는 기분이 되곤 했었다.
B가 결혼 전 꼭 나를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서 그의 고향집에 한 번 들른 일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그의 다섯 명의 누나와 세 명의 여동생, 그리고 그 자매들을 낳은 두 분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렸다.
“중학교 때부터는 지금까지 친구를 집으로 데려 온 적이 없어. 무슨 짐승들 같을 거라고...지레 겁이 나서...”
2대 독자였던 아버지의 욕심 때문이었지만 자기로서는 아들이 안 생겨 대가 끊겨도 한 여자 외에 다른 여자에게 아이를 갖게 하진 않을 거라고. 그래서 결혼 전에 나한테만은 그 결심을 알려 주고 싶었다고 그는 또 눈시울을 붉혔다.
“ B형 생모는 그럼 어떤 분이.....”
나는 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돌아 가셨어. 순서로는 두 번 째였고....”
“B형 아버지도 힘드셨겠네. B형도 그랬겠고....”
그때 그는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세 어머니들이 언제나 그를 극진히 아껴 주어서 중학생이 될 때까지만 해도 누가 자기의 생모인지를 몰랐다고 했다. 결국 생모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야 앞서 간 분이 직접 자기를 낳은 어머니인 걸 알았지만 그 모자 관계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고는 지금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그동안 30년을 지내 오면서 맹세코 어머니들간에 다툼이나 갈등 같은 게 일어난 걸 본 적이 없어. 친자매들 같애. 지금 두 분도 그렇지만 세 분 다 항상 한방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거하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신기해. 그런 게 가능했던 게 세 분이 좀 별난 분들이었는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어렸을 때 왜 다른 집에는 큰방에 어머니들이 한 사람씩만 있나, 그게 아주 이상하곤 하더라구......아버지도 세 명 어머니 중에 누구와도 큰 소리 한번 안 내셨고.....지금도 마찬가지지만....”
5년 전의 일이었지만 B의 어머니 들을 떠올리면 여성에 대한 내 생각은 또 다른 차원에서 혼란스러웠다. B가 얼마간 과장과 윤색을 했다해도 세대 차이라는 한 가지 조건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독특한 분위기가 그분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나서 잊고 있었던 B가 자기 아내의 임신 소식을 전해 왔던 것이다.
지난 겨울을 나는 몹시 춥게 지냈다. 그리고 그 겨울의 끝자락에서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죽음이라는 것을 나와 상관지어 생각해 보기도 했다. 정신적인 삭막함이 실제 기온보다 더 추위를 느끼게 했는지 아니면 다른 해보다 기온이 특별히 낮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추위에 떨며 남자에게 있어 여자라는 존재가 죽음의 유혹까지를 일으킬 수 있는가, 여러 밤을 생각했다.
겨울이 시작되고 있던 주말 채희가 증발해 버렸을 때 나는 벽시계 곁에 걸려 있던 온도계의 바늘에부터 눈길을 보냈다. 평소 거의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그녀가, 습관처럼 아이, 추워. 왜 이렇게 춥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여겨보던 그 온도계를 향해 내 시선이 맨 먼저 날아갔던 것이다. 서른 세 살의 겨울이 얼마큼의 한기로 나를 학대해 올지 막막한 기분에서 나는 그동안 지내 왔던 원룸의 넓이에 대해 생각했다. 옛날에는 비좁았고, 그 다음도 비좁았지만 불편하진 않았고, 그리고 그때 이제 휑하게 비어 있는 공간을 확인했었다.
옛날에 T.V 프로에 내 사랑 지니라는 게 있었어....조그만 체구를 구부리고, 아이 추워. 아이 추워를 연발하는 채희의 동그만 어깨를 끌어당기며 나는 그 이야기를 곧잘 하곤 했다. 그러면 채희는, 그건 서양식 우렁 각시 얘기야.....그리고는 낄낄거렸다.....하기야 그래, 현실에서 그런 상황이 일어날 수 없으니까 꿈을 꾼 거겠지. 원래 신화나 전설이란 것의 본질이 다수인 들의 공통된 꿈의 투사거든.....아이. 춥고 간지러워...채희는 갑자기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작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꽝꽝 때리곤 했다. 한 여자가 남자를 향해 기울일 수 있는 무게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내의 감성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또 그 반대 상황에서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그 무렵 나는 그런 생각을 가끔 했다.
이별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었는데도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예기치 않게 사물이 한꺼번에 흔들리며 허옇게 탈색되어 버렸던 것을 ........그 전혀 다른 낯선 세계로의 변화에 당혹해 하면서 나는 그 거리와 무게에 대한 생각에 다시 빠져들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사실 그녀 한채희와의 동거는 역시 미리 계획된 것도, 미래에 대한 시덥잖은 계산이나 의미를 내포하면서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잠시 같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해 초겨울, 포장마차에서 허겁거리며 우동 국물을 마시다가 같이 눈이 마주쳤었다. 서로의 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한 순간, 필요 없는 감정의 낭비를 우리는 금방 생략해 버렸었다.
늦은 밤, 추위가 몰려오고 있는 계절의 그 펄럭거리는 포장마차의 두꺼운 황토색 비닐 장막과 가스 불, 적당한 외로움과 감상 속에서 남녀 관계의 잡다한 서막들을 반복할 만큼 우리는 한가하지 않았고 그만큼 나이들이 어리지도 않았었다.
혼자 살아요? 여자가 앞서 물었다. 댁은? 나는 소주 한잔을 따라 그 여자 쪽으로 밀어 놓고 내 잔을 앞서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이 시간 이런 곳에서 우동 국물 훌쩍거리며 먹는 여자라면 .......그쪽 좀 둔한 편인가요? 신경이?.....우리는 그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내가 낡은 바바리 깃을 한껏 세우고 그 포장마차를 나섰을 때 한떼의 플라타너스 낙엽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바짓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갔다. 여자는 두 손으로 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추워. 참, 추워, 인생이 춥다는 걸 전에는 잘 몰랐었는지, 아니지. 옛날도 추웠어....여자는 정말로 으스스 온몸을 떨어 보였다.
우리가 그 포장 마차를 떠나 걷기 시작했을 때, 이미 다 떨어져 보도 위에 몇 낱씩 남아 있던 가로수 잎사귀들이 왜 그토록 회오리를 치며 우리 주변을 휘감으며 흩어져내렸는지 알 수 없다. 여자가 추워, 때때로 사는 게 너무 추워, 그런 말을 현실성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을 때 내리기 시작한 그 추적거리던 겨울비 역시 나는 아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미스....”
“미스.?....미스라고 그랬나요?..... 좀 둔하다는 이야기, 그쪽 자주 듣죠? 미씨...안 들어 봤어요? .....난 세상에서 가장 경멸하는 거, 위선. 거짓말.....나, 한 채희. 남편 없음, 자식 없음, 복잡한 인과 관계 없음, 내일에 대한 계산 없음, 가장 싫어하는 것, 어떤 식이든지 인연을 빙자해 끈적거리는 거.....그리고 지금 추운 것, 아, 내일 아침 아홉시 정상 출근해야하는 직장 있음........현재 한 잔 더 하고 싶음. 가장 맛있는 술로 딱 두 잔만 .......한 잔은 한채희의 어제, 한 잔은 한채희의 현재....어때 멋있지 않아요? 순수의.... 아, 딱 하나만 물을까요? 가장 맛있는 술이 무언지 알아요? 로얄 샬루트...아니 발렌타인 17,.....30....조니 워커 블루 .....누룩 잘 띄워 담근 우리 농주.......아니지. 옥수수로 담군 민속주, 정답 몰라요?.... 자기 호주머니 부담 없이 자기가 살 수 있는 술....어때요? 지금 내 얘기, 동감 안 해요?”
“그렇군요.”
우리는 그 날 밤 좁은 원룸의 내 침대 위에서 같이 잤다. 그 여자는 작고 동그스럼한 어깨를 자꾸 움추리며 내 가슴속에서도 추워, 추워. 그렇게 여러 번을 더 중얼거렸다.
아침에 그녀가 너무 깊이 잠들어 있어서 나는 그녀를 깨우지 않은 채 집을 빠져 나왔다. 여자가 잠이 깨어 곧바로 그림자처럼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고 혼자라도 냉장고를 뒤져 달걀 후라이나 라면이라도 끓여 먹은 뒤, 집어갈 것이 없나 방안을 훑어보다가, 재수 더러워. 이렇게 추운 남자가 어디 있어?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직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지하철 계단을 내려섰었다.
“귀찮아지면 언제든지 내게 말해. 이제 우리 꿈 그만 꾸자. 그렇게 말하고 출근해. 알았지?”
섹스를 나누고 난 다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알았어. 밤 열시까지 채희 안 돌아오면 ....그래, 이제 꿈 그만 꾸고 싶어서 채희가 호리병 안으로 들어가 버린 걸로 하겠어. 그러나 그런 대화를 나누고 나면 이상하게 가슴속이 서늘해져서 우리는 더욱 열심히 서로의 몸을 탐하곤 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이 밀려오면 그녀 팔 위의 솜털 하나 하나, 내 머리칼 한 올 한 올도 모두 횃불이 되고 바늘 끝이 되어 서로의 몸 속 물기 한톨마저도 전부 빨아들여 푸스스 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 갈증의 정체에 대하여 우리는 말하지 않았다. 햇빛 희게 부신 사막에 같이 내동이쳐진 물고기로의 원초적 인식, 그런 것이었을까.
나는 채희에게 내 어머니 이야기를 했고, 친구 B의 사건과 그 여자, 그리고 B의 셋이나 되는 어머니 이야기도 해 주었다.....세 어머니가 한방에서 아버지랑 산 거야?...짐승스럽다. 그지?.....아냐. 그 친구 엄마들은 신(神)이 되려고 했던 거야. 맞지?...그래도 그렇다. 섹스할 땐 두 여자는 지켜보고 있어야 할 거 아냐?....에이 싫다....그녀는 아이, 추워. 하면서 내 품속으로 다시 파고들며.....우리 말야,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렇게 물었다......우리, 서로 사랑하는 거 같애.....채희의 입에서 그 말이 한숨에 섞여서 그 다음에도 몇 번인가 더 나왔었다. 어느 날인가 나 역시 말했다. 나도 채희를 사랑하는 거 같애. 그 말을 하고 난 뒤 우리는 동시에 잠시 공허한 눈빛으로 창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심하게 바람 소리가 거리로 달려가는 것을 들었다.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거 같애.....그것이 우리 이별의 서곡이었음을 나는 엉뚱한 북구의 겨울 거리에서야 확인해 냈다.
짐작하는 친구들도 있기는 하겠지만 채희를 기억하는 친구들은 그녀가 내 곁에 머물러 있었던 동안 내 뿜었던 박하향 같이 싸아하던 매력을 잊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밤이 긴 북구 쪽의 매서운 겨울 바람 속에 전혀 모르는 낯선 인종들 사이에 철저히 혼자 서 있어 보자. 완전한 고독과 완전한 자유. 내 기준으로는 충동적이었던 그 여행이 그때로는 내 자존심의 전부일 수도 있었다.
나를 떠난 여인이, 혹은 잠시 몸담았던 출판사의 동료들이 어쩌다 내 소식을 들으면서 빙하처럼 새하얀 순백의 내 영혼을 확인할 거라는 그런 치기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추위가 매섭게 몰려 들거라는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코펜하겐 국제공항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가 갠 아침에는 자동차의 시동을 거는 순간 전조등이 곧바로 켜지도록 되어 있는 자동차들이 유령의 도시 같은 거리를 어슬렁거렸고, 그 낮 시간마저 그곳에서는 언제 지나가 버렸는지 곧바로 긴긴 밤이 다시 시작되었다.
서너 시간의 낮에도 내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은 한 번도 햇빛이 비친 적이 없었다. 인어 공주의 동상이 겨울 바닷물에 씻기고 있는 코펜하겐의 우울한 부두 가에 서서 나는 채희를 이해했다. 나 역시 사랑한다는 감정이 밀도를 높여 가면 서둘러 그 여자를 떠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밤 코펜하겐의 그 유명한 섹스 숖 들을 질리지도 않고 두어 시간이 나 구경하고 나서 금발 머리카락의 여자 하나를 샀다. 백마를 타리라. 백마 위에서 한때 사랑이 생겨나려던 검은머리 여자의 기억을 말끔히 지우리라......그러나 나는 막상 금발의 북구 여자가 내 방문을 밀고 들어 왔을 때, 미안하다는 말을 스무 번쯤하고 화대만 치른 채 그 금발 머리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유리창 밖의 음습한 어둠을 응시하며 내 볼 위로 흘러 내렸던 그 날 저녁의 눈물은 무엇이었을까.
거칠게 뿌리던 비가 보슬비로 바뀌면서 배는 등대가 서 있는 작은 포구 앞에 멈추어 섰다. 아직은 오후 3시. 섬 오른쪽 언덕을 울창하게 덮은 늙은 소나무 숲 이 바닷물이 부딪쳐대는 절벽까지 이어져 있었다.
나는 절벽을 핥아대는 작은 파도들 사이로 그때 검게 일렁이는 해초더미를 보았다. 물 속에서 일렁여대는 그 수초들의 흔들림을 보고 있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진저리를 한 번 쳤다. 상상해 보지 않았던 엉뚱한 연상이었다.
욕조 속에 몸을 담고 있던 채희의 나신 위에서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흔들거리던 그녀 머리칼과 체모를 떠올리며 나는 서둘러 배를 내렸다. 급격한 욕정처럼 포구의 작은 선술집에서 소주라도 한잔 마시고 싶어져서였다.
그 여자 박민주가 그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낑낑거리며 메고 그 섬에 내리리라 는 생각은 미리 못했었다.
“쏘주에다 세발 낙지나 쬐깐 썰어 드릴게라?”
마음씨 후덕하게 생긴 아주머니는 손가락 크기의 작은 낙지 너댓마리를 바닷물 채운 대접에 담아 내 놓았다. 이것은 요렇게 묵어야 쓰는 것잉게......시범을 보이 듯 대나무 젓가락으로 아주머니는 잽싸게 낙지의 아가미를 꿰어 올리더니 손으로 주욱 다리를 훑어내린 다음 젓가락에 둘둘 말아 초고추장을 찍었다. 그리고 는 내 입 속으로 밀어 주었다....요새는 이 세발 낙지도 귀해라.....그래도 섬까지 오세서 이걸 못 묵고 가먼 안되제.....어짜요? 맛이 기가 막헤 불제라?......빨판이 입 안 여기 저기에 달라붙었다. 아주머니 흉내를 내어 젓가락으로 직접 아가미 를 꿰어 보려 했지만 계속 움직이고 있는 작은 낙지를 젓가락에 감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갖고는 날이 새도.. ...안 되것소. 나가 감어 주께, 아자씨는 쏘주만 잡수시오...... 아주머니는 세 마리째도 네 마리째도 능숙하게 젓가락에 감아 내 입에 밀어 넣어 주었고, 나는 시키는 대로 소주 한 병을 금방 비웠다.
그때 다시 비가 내렸던 모양이었다.
큰 배낭을 멘 채 얼굴의 물기를 손으로 흩뿌리며 박민주가 들어섰던 것이다. .....가만 가만 그대로 조금만요....막 입으로 들어가려던 젓가락에 감긴 낙지 발들이 풀어지면서 그녀의 필름 위에 각인되는 것 같았다.
소나무 가지 끝에 머물다 간 바람과 동백 숲 위를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필름 위에서 구별될 수 있을까 내내 그 생각을 했는데요......있잖아요? 같은 인물을 필름 위에 옮겨도 그 사람의 사색의 깊이나 감정을 담지 못하면 의미가 없지 않겠어요?....샥씨는 여그 사람도 아닌디 참말로 낙지도 잘 묵어 부요....이 아자씨는 엉터리여라......그녀는 아주 능숙하게 세발 낙지를 처리할 줄 알았다.....방해 안 되시죠?....비만 안 왔으면 몇 컷 더 해 보는 건데.....동백이 곱던데요....아, 제 이름 은 민주, 박민주예요. 프리랜서죠.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가늘고 긴 담배가 연 기를 파랗게 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비 내리는 바다를 바라보며 소주를 마셨다.
“퇴직금을 털어 가지고 코펜하겐엘 갔었 거든요. 무서운 강추위 속에 얼어붙어 봤으면 하구요....그런데 구질거리며 비만 내려서....이번에는 남쪽 바다로 왔는데..... 남쪽 바다도 비가 내리는군요.”
“뭘 찾아 다니시는 데요?”
“목포에 옛날 친구가 있어서요....친구보다 임신을 했다는 친구 아내 소식을 들으려구요.”
“애인이었어요?”
애인이라니? 웃음이 터져서 자칫 입 속에 들어갔던 낙지를 내뱉을 번 했다. 술기운이 정수리 한 가운데로 몰려 왔다........ 뭐래드라. 암수의 행동 양식에 대한 단선적 사고에 변화를 보인 한 사례로의 여자....... 다른 친구가 술에 취해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나서요......낙지가 머리만 입안으로 들어간 채 낙지 발들이 꿈틀거리며 그녀 입술 주위에 달라붙고 있었다. 그녀는 그러나 능숙하게 그 발들을 입안으로 몰아 넣고 소주를 마셨다. 도발적이고 선정적이라는 의외의 느낌이 왔다.....난 뭐든 잘 먹어요. ...체력은 국력....그녀는 킬킬 웃으며, 답답했는지 젖은 재킷을 단추도 제대로 풀지 않고 스웨터를 벗듯 머리 위로 벗어 빈 탁자 위에 팽개쳤다. 그녀의 단단해 보이는 허리와 목선이 들어 났다. 가무잡잡한 피부였다. 한 순간 내 등뼈 마디 사이를 짜르르하게 시린 전류가 흘렀다. 바위 사이를 핥아대며 내는 물결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 왔다....동백꽃 안 보실래요? 그녀도 알콜 기운이 밀려 오는지 고개를 몇번 내젓고 앞서 카메라 한 대만 든 채 밖으로 나갔다.
길 반대쪽이 소나무 숲이었다......이 늙은 소나무들은 몇이나 되었을까요?......50년? 100년?......우리 죽은 뒤에도 이 나무들은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이상하지요?......비는 다시 가늘게 부슬거리며 내렸지만 나무 잎에 붙어 있던 물방울들이 후드득대며 목덜미로 가끔 떨어져 내렸다.
부두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귀퉁이에 동백나무의 군락지가 있었다. 나무 밑둥의 젖은 땅 바닥에 수십, 수백 개의 꽃들이 떨어져 있었다......동백꽃은 시들지 않고 떨어져서 추하질 않아요. 그렇잖나요? .....늙은 동백나무 밑둥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치켜들어 작은 비 알갱이들을 얼굴 가득 받고 있는 민주 얼굴이 동백꽃을 닮아 갔다.....김유정의 동백꽃 생각이 빠르게 머리 속을 지나 달려갔다. 바닷물이 바위 틈 사이를 드나들며 내는 규칙적인 신음 소리, 알싸한 갯 냄새에 섞인 동백꽃 향기...다시 내 등뼈 마디 사이를 한 가닥 전류가 시리게 흘렀다.
꽃들은 그동안에도 우리 발 밑에 둘, 셋, 넷, 그렇게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처 들고 얼굴에 빗방울을 받고 있는 그녀 반쯤 벌린 입 속으로 하얀 이가 들어 났다. 바람이 그녀 젖은 짧은 머리칼과 속눈썹을 핥다가 귓불로, 입술로, 그녀 겨드랑이와 허리로....갑자기 꽃송이들이 흩어져 젖어 있는 땅바닥에 그녀를 스러뜨리고 싶어진다. 그녀를 쓰러뜨려 그 위에 덮쳐 들고 싶다.
예상하지 않았던 욕구에 나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불이 잘 붙지 않는다. 다시 라이터를 켠다. 그때 민주가 바로 내 앞에서 자기 라이터로 불을 붙여 내밀었다.
“후회되는 게 하나 있어요.”
그녀도 담배를 붙여 물었다. 가늘고 긴 담배 끝에서 파란 연기가 윤끼나는 동백나무 잎 사이를 빠져 흩어져 갔다. 내 담배 연기도 동백꽃잎 사이로 날아 올라갔다.
좋아하던 언니가 있었어요.....머리를 길게 기르고, 얼굴이 하얀.....왜 있잖아요? 조용 조용하게 새 소리처럼 그렇게 얘기하고...클래식만 우아하게 듣고......산낙지 같은 건 절대 못 먹는....아시겠죠? 대강......언젠가 내 사진 피사체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엄청 우린 서로 좋아해서요. 훗날에도 남자하고 살지 말고 우리끼리 살면 안될까, 아기는 내가 낳고.....정자 은행 이야길 그 무렵 들었나 봐요.........그 언니가 사진 찍을 기회를 딱 한 번 주었어요. 많은 사람들에게......그런데..... 난 ......사진을 못 찍었어요......찍을 수가 없었어요.....민주는 피우던 담배를 바다 쪽을 향해 멀리로 날려보냈다.
“사람 많이 모이는데도 싫어하던 그 언니가요.....4년 동안 데모대 곁에도 안 갔고, 신문 사회면 기사에도 관심 없던 언니였거든요......최루탄이 심하게 날아든 날 누군가 도서관 앞에서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고 소란스러웠는데.....”
“언니였어요? 그게?”
민주는 고개만 크게 끄덕였다. 후두득거리며 한 무더기의 동백꽃이 그녀 등뒤에서 떨어져 내렸다.
“난 지금도 그 언니를 사랑해요.”
“내려갑시다.”
나는 꿈에서 깬 듯 앞서 걸음을 옮겼다.
그 여자, 박민주하고는 다음 배로 섬을 빠져 나온 후 곧바로 헤어졌다.
돌아오는 3층 갑판에서 그녀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 하늘을 부지런히 더 찍어 댔다.
이상하게 급격하게 피곤이 몰려들었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내 앞으로 다가 온 민주가 다시 정자 은행 이야기를 꺼냈다........U.F.O가 마을에 내렸다가 떠난 다음 한 마을 여자들이 동 시에 임신을 해요. 숫처녀까지요. 우연히 본 만화 같은 비디오였는데......잊고 있었거든요. 언니하고 옛날에 여자끼리 살면서 아기는 하나 기르자고 했던 약속........현실적으로 U.F.O가 올 것 같지는 않으니까, 정자 은행을 알아보자는 그런 생각.......이해하시죠? 여자도 너무 나이 먹으면 출산이 힘들다지 않아요? 나이 들기 전에 예쁜 딸아기 하나를 낳고 싶은 것.........섹스는 싫구요....상상하기도 소름 끼치구요.....여자의 말소리가 물결 소리에 섞여 아주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알싸하게 휘감기던 동백꽃 향기가 왜 순간 사라져 버렸을까. 마치 욕조 속에 누운 여체의 체모처럼 물 속에서 흐느적대던 해초의 이미지가 왜 갑자기 거칠고 지저분한 바닷말들로 되돌아 갔을까.
“이건요. 그래서...그냥 상상인데요. 누군가 남자가 병원까지 같이 따라가 줘요......남자가 말해요. 난 무정자증 확인을 이미 받았습니다. 아내는 아기를 갖고 싶어 하구요. 그래서 건강한 남자 정자가 필요합니다........도움이 필요해요....처녀가 혼자 병원에 가서, 괜찮은 정자 1인 분 파세요. 그랬다간 놀란 의사가 정신과로 보내 버릴 거 아녜요? 여자에 대한 고정 관념이나 편견......,사람들은 멋대로 상식선을 정해 놓고 그 기준에 안 맞으면 무조건 흰 눈으로 보지 않나요?”.
“모르겠네요. 두통이 와서요.”
고개를 저으며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나는 2층으로 향하는 사다리를 내려 섰다. 머리가 지근거리며 아파 왔다.
B의 아내, 채희, 내 어머니, B의 셋이나 되는 어머니, 거기에 민주와 얼굴이 희었다는 민주 선배, 그 모두가 한꺼번에 바위 사이를 헤집고 할퀴어대는 파도로 변해 흰 이빨을 내 보이며 내게 덤벼드는 것 같았다.
나는 양 이마를 두 손으로 누르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부두에 도착하면 B에게 전화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급한 일로 만나지 못하고 다시 밤 기차를 타고 돌아가야겠다고...잘못 했다가는 B, 자네처럼 민주에게 멱살을 잡혀 나는 여관이 아니고 병원으로 끌려갈지 모르겠다고...
목포항을 출발해서 작은 섬을 한바퀴 도는 신진 페리호의 갑판에 왜 그때 비 가 쏟아졌을까. 비가 오지 않았다면 고하도, 허사도, 매월도, 등대, 외다리, 율도, 달리도, 그 작은 섬들의 풍광을 나름대로 즐겼을 것이고, 여자에 관한 혼란이 하나는 줄어들었을 것을..... 이튿날 새벽, 황량한 서울 역 광장에서 여명을 적시는 부슬비를 다시 맞으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한국소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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