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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히데유키(伴英幸) 선생의 부고에 부쳐
글쓴이 남기정 / 등록일 2024-07-09
일본 원자력자료정보실의 반 히데유키(伴英幸) 공동대표가 지난 6월 10일 향년 72세의 삶을 마감했다. 암이었다. 반 선생은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생활협동조합 활동가를 거쳐 1990년 원자력자료정보실에 합류한 뒤 1998년부터 공동대표로 취임해 일본의 탈원전 운동을 최전선에서 이끌어 왔다. 지난해 11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와의 오랜 인연을 바랐던 필자에게 그의 죽음은 매우 허망하고 슬픈 소식이었다.
벌써 13년 전 일이다. 필자는 2011년 3월 도호쿠대학 강연을 위해 방문한 센다이에서 동일본대지진을 겪었다. 피난 차 머물던 센다이의 한국영사관에서 TV를 통해 후쿠시마 원전의 폭발 장면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후 일본의 원자력발전소 문제는 필자의 제2의 연구주제가 되었고, 원자력자료정보실 홈페이지를 자주 드나들었다.
일본의 탈원전 운동을 이끌어
원자력자료정보실은 ‘시민과학자’라 불리는 핵화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郎)가 설립한 민간 싱크탱크다. 홈페이지를 오가다 반 선생의 글을 발견했는데, 객관적이고 치밀한 자료 분석에 기반해 탈원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일본 상황을 파악하기 어려울 때면 그의 글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작년 여름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방출이 임박했을 때 필자는 관련 토론회와 학술회의를 조직하게 되었다. 반 선생의 의견을 직접 듣고 싶어 메일을 보냈다. 모르는 이가 무작정 보낸 메일에 답을 줄까 싶었지만, 그는 주제에 적합한 전문가를 소개하는 회신을 보냈다. 짧은 메일의 행간에서도 그의 성실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 후 필자는 원자력자료정보실을 직접 방문하기 위해 반 선생에게 다시 연락했고, 그렇게 작년 11월 나카노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그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각종 자료로 가득 찬 사무실에서 그는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가며 필자의 이런저런 질문에 꼼꼼히 답해주었다. ‘관련 연구를 계속해 나갈 생각이니 잘 부탁한다’고 하자 ‘사무실을 가득 메운 자료들이 제대로 활용된다면 기쁘겠다’고 대답하셨던 게 기억난다. 도쿄 출장 때마다 반 선생을 만나 볼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반 선생 자신이 ‘원발불명암’이라는 회생 불가의 희귀암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 3월 말이었다고 한다. 이후 두 달 보름여 투병 생활 끝에 탈원전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고, ‘원전 없는 사회’를 위한 25년의 싸움에서 그가 먼저 물러났다. 남은 사람들의 분투를 비는 짧은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새로운 공론의 장’ 구축에 주력
반 선생은 사실을 과장하거나 예단하지 않았다. 오직 치밀한 조사와 검증을 통해 확인된 사실, 관련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사실에 기초해 발언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관여한 원자력자료정보실의 성명이나 의견, 제언 등은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그만큼 일본 사회에서도 묵직한 의미를 지녔다. 그의 궂긴 소식을 NHK와 아사히신문 등 거의 모든 주류 미디어가 다룬 것은 일본 사회가 그의 존재를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말해준다.
많은 사람이 반 선생의 도움을 원했을 것이다. 특히 기시다 정부가 원전 오염수의 해양 방출을 결정한 이후 그가 직면했을 일상적 과로 상태가 죽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우리의 첫 만남도 그렇다. 난데없이 찾아온 외국의 연구자에게 잠깐의 휴식 시간마저 내어주신 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를 탈원전 운동으로 이끈 다카기 선생도 대장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반 선생은 ‘시민과학자’의 삶을 살았던 스승의 메시지를 ‘시민이 어떻게 과학을 전유할 것인가’라는 과제로 받아들였다. 후쿠시마 사고 후 그는 원전과 관련한 ‘새로운 공론의 장’을 구축하는 일에 주력했다. 하지만 오염수 해양 방출의 결정 과정은 ‘전문과학자’와 ‘시민과학자’가 함께 하는 공론장의 형성이 여전히 미완의 과제임을 보여주었다. 아직 할 일을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얼마나 강렬했던 것일까. 완화의료병동에서 채록된 2분 46초의 마지막 메시지에서 반 선생은 여전히 ‘여러분과 함께 싸워나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 글쓴이 : 남기정(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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