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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강의 다리에서 - 정근식

by 귤담 2024.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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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나강의 다리에서

글쓴이 정근식 / 등록일 2024-07-23

세르비아의 차차크에서 보스니아의 사라예보로 넘어가는 길은 길고 험하지만, 높은 산과 깊은 계곡으로 이루어져 경외감을 준다. 국경을 지나 조금 더 가면 비셰그라드라는 작은 마을과 함께 이 마을을 휘감고 흘러가는 한줄기 강과 이를 가로지르는 육중한 다리가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1961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반 안드리치의 소설로 유명해진 드리나강의 다리이다. 그의 진짜 이름은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 11개의 아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사이로 흐르는 짙은 녹색의 강물이 뇌쇄적이다. 다리는 드리나강을 발칸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으로, 소설은 다리를 세계적인 명소로 만들었다.

명품과 걸작 그리고 고통

역사적으로 드리나강은 로마제국을 동서로 나누는 경계였고,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접경이었다. 이 지역에 오스만 터키가 들어온 것은 14세기였다. 오스만 터키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577년, 술탄 아래의 최고권력자 소콜로비치는 자신의 고향에 다리를 만들 것을 명령했다.

원나라가 고려의 처녀들을 공녀로 잡아갔듯이, 오스만 터키도 자신이 점령한 기독교 땅에서 세금 대신 어린 소년들을 잡아가 술탄의 친위병으로 키웠는데, 소콜로비치도 그 중 한명이었다. 이들은 예니체리라고 불렸다. 소콜로비치는 단순한 장교를 뛰어넘어 제국의 해군 제독이 되고, 대재상이 되었다. 그의 고향 사랑이 현지 주민들에게는 고역으로 돌아왔다. 낮에는 공사를 하고 밤에는 이를 몰래 허무는 일이 반복되었다. 당국은 이들을 적발하여 다리의 중간에서 사형에 처했다.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다리를 만든 사람은 미마르 코카 시난이었다. 그도 소콜로비치처럼 예니체리부대 출신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로 알려진 술탄 아흐메드 사원과 슐레이만 1세 사원 그리고 에디르네의 셀림사원을 건축하였고, 무굴제국의 타지마할 묘의 설계도 도운 대건축가였다. 중동의 미켈란젤로로 불리는 그가 만든 또 하나의 걸작이 헤르체고비나의 중심도시 모스타르의 네레트바강에 있는 옛다리(Stari Most)이다. 모스타르는 당시 오스만 터키의 세력확장을 보여주는 전초기지였는데, 드리나강의 다리보다 10년 먼저 여기에 다리가 세워짐으로써 도시의 면모가 일신되었다.

모스타르의 옛다리나 드리나강의 다리가 완공된 후 강 주변의 사람들은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공존하면서 살았다. 19세기에는 오스만 터키 대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이곳을 지배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었지만, 이 다리들은 400년의 역사를 버텨냈다. 그러나 20세기 말의 악몽은 견디지 못했다. 티토가 사망한 뒤 발생한 종교간 갈등은 내전으로 번졌고 연방국가는 해체되었다. 비셰그라드에서 멀리 않은 슬레브레니차는 보스니아 학살이 시작된 장소였고, 드리나강 연안의 포차와 고라즈데는 유엔이 개입한 현장이었다.

드리나강의 다리는 큰 손상을 입지 않았지만, 모스타르의 옛다리는 전쟁 발발과 함께 크게 손상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국제사회는 힘을 모아 파괴된 모스타르 시내와 옛 다리를 복원하였다. 새 옛다리는 공존과 화해의 상징이 되고, 2005년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드리나강의 다리도 2007년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20여년전의 끔찍했던 기억이 과연 다 잊혀졌을까? 우리가 찾은 옛다리 주변의 시내는 말 그대로 ‘불금’ 세계에서 몰려든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에 보스니아의 청년들은 얼마나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곧 비가 올 것 같아”

“곧 비가 올 것 같아.” 발칸답사를 하는 동안, 러시아 우크라니아 전쟁으로 기동하는 나토군의 전차를 보았다. 그것은 오래 전에 보았던 만체프스키 감독의 ‘비가 오기 전에(Before The Rain)라는 영화에서 노신부가 말했던 이 대사를 떠올리게 했다. 1994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던 이 영화는 마케도니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시간이 과거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지 않고 미래가 과거로 돌아가는 뫼비우스의 띠를 보여준다.

세상은 정녕 폭력의 연쇄 사슬로 묶여 있는 악무한인가? 이런 무거운 질문을 드리나강의 다리에 걸쳐두고 돌아온 느낌이지만, 내가 어찌 그 강의 깊이를 알 수 있겠는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다리들은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 되었다. 휴전협정 전후에 전쟁포로들이 건넜던 ‘자유의 다리’나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공존과 화해의 다리로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7월의 희망이다.

글쓴이 : 정 근 식 (서울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