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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 비판에 대한 변증(辨證)
글쓴이 박수밀 / 등록일 2024-08-30
주지하다시피 실학(實學)이란 용어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 일컬은 자생적인 용어가 아니라 근대의 학자들이 발견해서 붙인 용어이다. 또한 앞서 이경구 선생의 ‘실학의 풍경’이란 글에서 정리했듯이 실학은 특정 시기에 사용되던 새로운 용어가 아니라 유학-성리학에서 보편적으로 쓰던 용어로서 불교, 도교 등과 대비되어 진실한 학문, 실질을 추구하는 학문이란 의미로 쓰이던 일반 명사였다.
더불어 실학이 담고 있는 현실 개혁의 정신은 실학자의 전유물이라기보다 조선 후기에 전 분야에 걸쳐 일어난 광범위한 현상이었다.
실학은 근대 기획이자 허상이라는 비판
그리하여 실학이란 명칭의 타당성부터 그 실체의 진위에 이르기까지 각종 논란은 현재진행 중에 있으며 실학은 자생적인 근대를 찾기 위한 기획이자 허상이라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실학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실학에 대해 더 깊이 숙고하게 하고 실학을 더욱 신중하게 접근하도록 이끈다. 이제 이러한 비판들에 대해 반추해 보려 한다.
실학이란 용어는 전통 유학자들과 실학자들이 함께 쓰고 있다. 성호(星湖), 연암(燕巖), 담헌(湛軒), 다산(茶山) 등 실학의 중심인물들도 실학 혹은 실학에 비견되는 용어를 쓰고 있으며 전통 유학에서의 실학과 비등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는 성리학자들의 실(實)과는 다른 맥락을 갖기도 한다. 그 증좌 가운데 담헌의 『의산문답(醫山問答)』에 등장하는 실옹(實翁)과 허자(虛子)가 있다.
허자(虛子)는 중화주의 생각을 지닌 전통적인 유학자를 상징하는 반면, 실옹(實翁)은 인물균(人物均)과 우주무한설(宇宙無限說),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주장하고 문화상대주의를 지지하며 자연 과학에 대한 이해를 갖춘 신학자(新學者)이다. 실옹은 담헌의 자아이자 이른바 ‘실학(實學)’ 정신을 지닌 인물이다.
유학의 실질적 학문을 나타내던 성리학의 실(實)이 담헌의 의식에서는 허학(虛學)으로 바뀌고 담헌의 실(實)은 전통 성리학의 허위를 깨뜨리는 언어가 되었다. 이 실옹(實翁)이 오늘날 실학 연구자들이 내세우는 실학자의 모델이다.
담헌의 실옹(實翁)에게 전통 성리학은 허학(虛學)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사용하는 실(實)은 윤리와 수기(修己)의 프레임에서 작동되는 유학에서의 실(實)과 개념을 공유하면서도 다른 맥락으로 쓰이기도 하며 때로는 대립 관계를 맺기도 하는 것이다.
실학자들의 실(實)의 ‘학(學)’은 한편에서는 유학 일반에서 사용하는 실학과 구별되는 고유한 정체성을 확보하며 경세와 제도 개혁을 넘어 전통 유학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인간관과 존재론과 우주론, 자연과 문명의 관계에 대한 비판 정신을 담고 있다.(실학 개념의 공유와 분리에 대한 문제는 다음 연재에서 다룰 것이다.)
비록 실학을 유파적 개념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실학자로 불리는 학자들은 조선 후기의 활발한 사회 문화 변동 속에서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지향하는 의식을 보여준다.
임병양란(壬丙兩亂) 이후 성리학이 형해화(形骸化)되어 허학(虛學)이 되었다는 인식 아래 새로운 개념을 담은 실(實)을 주장한 학자들이 존재해 왔고, 성리학의 한계를 직시하고 낡은 도그마와 사상을 바꾸려는 새로운 학풍이 일어났으며, 각종 부조리와 모순을 개혁하려는 실제적인 노력이 전개되었기에 역사적, 인식론적 개념으로서의 실학의 정신은 분명 존재했다고 본다.
곧 실학은 전통 유학으로서의 실학(實學)이 허학(虛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무언가’를 실(實)로 세워가려는 정신과 운동이다. 때로는 분명하게 때로는 은밀한 언술들 속에 기존의 관념적이고 퇴행적인 의식과 사상, 제도와 정책을 개혁하려는 일련의 흐름이 있었다. 특히 새로운 사상과 정신은 은밀한 언술 속에 담아낸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실학 개념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제의식과 시대 정신을 담을 그릇으로써 실학이란 개념은 유효하다고 본다.
양란(兩亂) 이후 새로운 실(實)을 담아내려
조선 후기 새로운 변화의 물결 속에서 사회 정치적으로 각종 제도적 개혁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실학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동의한다. 다만 그러한 현상을 유학에서 쓰는 일반 명사였던 실학으로 명명해야 하는지, 그 시대의 일반적인 현상을 이른바 ‘실학자’들로 독점해서 써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다.
실상 실학적 성격이라고 부르는 각종 제도적 사회적 개혁의 목소리는 조선 후기에 전 계층, 전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그러한 개혁과 개방의 노력을 학적 담론으로 담을 수 있는 계층은 문자 지식층인 유학자였고, 유학자 중에 개혁과 개방 담론을 구체적인 학적 언어로 주장한 이들이 이른바 ‘실학자’라 이름 붙인 이들이다 보니,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새로운 개혁 개방 담론을 실학이 독점해서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실학적’으로 불리는 각종 개혁과 변화의 목소리는 실학자들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도도한 시대 현상과 궤를 같이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목소리를 이론적 토대를 갖추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실학자들이었다. 문자를 사용하는 지식인 가운데 유학자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므로 실학의 계층은 유학자였고, 유학자 중에 전통 성리학을 비판하고 성찰하면서 새로운 실(實)을 담아내려 한 사람들이 근대 이후 연구자들이 발견한 ‘실학자’이다.
곧 조선 후기의 실학은 달리 표현하면 ‘개방 개혁의 정신을 지닌 유학자들의 신실학(新實學) 운동’이라 하겠다.
(다음에 계속)
■ 글쓴이 : 박수밀 (고전학자, 한양대 연구교수)
[주요 저서]
『연암 산문의 멋』, 『열하일기 첫걸음』, 『연암 박지원의 글짓는 법』, 『오우아』, 『고전 필사』, 『청춘보다 푸르게 삶보다 짙게』, 『탐독가들』, 『리더의 말공부』, 『알기 쉬운 한자 인문학』, 『18세기 지식인의 생각과 글쓰기 전략』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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