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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의 농지탈환운동과 궁방전 문제 - 박찬승

by 귤담 2024.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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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의도의 농지탈환운동과 궁방전 문제

글쓴이 박찬승 / 등록일 2024-10-25

전남 신안군의 하의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으로도 유명하지만, 사실 하의도의 역사에서 더 중요한 사건은 조선후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진행된 이른바 ‘하의도 농지탈환운동’이었다.

 

하의도 농지탈환운동은 인조가 인조반정 직후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서 난 정명공주에게 정명공주의 결혼을 축하하여 하의도의 땅 20결을 절수해준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 토지가 소유권을 준 유토(有土)인지, 아니면 토지의 수조권만을 준 무토(無土)인지는 사료상으로는 확실하지 않다.

 

인조가 정명공주에게 하의도 땅을 주다

 

최근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임진왜란 이후 절수된 궁방전의 상당수가 세금을 거두는 권리인 수조권만을 준 이른바 ‘민결면세지’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토지 20결은 정명공주방에 황무지를 주어 이후 도민들로 하여금 개간하게 만든 땅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미 개간된 민전에서 결세, 즉 세금을 거두는 권리만을 준 땅일 가능성도 있다.

 

정명공주가 시집을 간 풍산 홍씨가는 18세기 초, 즉 경종대 즈음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의 땅이 더 개간되어 150여결에 이르자 이를 모두 자기들이 사패받은 땅이라고 우겨 하의3도의 농지 전체에서 세를 받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민전에서는 관에 전세와 대동미를 1결당 미 23두를 내고 있었는데, 홍씨가에서 다시 1결당 미 40두를 거두어가게 되자 도민들은 이를 일토양세(一土兩稅)라고 부르면서 한성부에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하였다.

 

그런데 당시 궁방에서 토지소유권을 갖는 영작궁둔(永作宮屯)의 경우 1결당 조 200두(미 80두)를 거두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미 40두만을 거두던 정명공주방의 150결은 영작궁둔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아마도 이는 민결면세지로서 원래는 결당 미 23두를 거두어야 하지만, 잡세를 보태어 미 40두를 거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의3도 토지문제는 영조대에 조정에서도 계속 문제가 되었으나 홍씨가의 세도로 인해 시정되지 못하였다. 당시 홍씨가에는 영의정 홍봉한과 같은 권세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의도민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였다. 정조대에는 윤세민 등 2명의 대표가 한양에 올라가 신문고를 두들겨 국왕에게 직접 진정서를 올려 국왕으로부터 도조 수취 금지에 대한 어제문(御製文)을 받기도 하였으나 홍씨가의 무고로 인해 윤세민 등이 도리어 귀양을 가는 등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70년 고종대에 들어 홍씨가의 세도가 약화된 틈을 타 하의도민들은 전라감사 이호준(이완용의 아버지)에게 하소연하여 24결 외 120여 결에 대해서는 절대 도조를 거두지 못하도록 하고, 24결에 대해서도 1결에 백미 20두씩만 수봉하도록 하는 판결을 얻어냈다.

 

바뀐 권세가들을 상대로 한 기나긴 탈환운동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인 1900년 궁내부 내장원경 이용익이 전국의 과거 궁방전 명목이 있던 토지를 모두 색출하여 내장원 소속으로 만들 때 하의3도의 땅도 모두 내장원 소속으로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용익이 실각하고 이완용이 득세한 1908년에 이르러 홍씨가 가운데 홍우록이란 자가 하의3도의 땅을 모두 차지하려는 욕심을 갖고 이완용에게 접근하여 그로부터 하의3도의 땅이 모두 홍씨가의 소유라는 증서를 받아냈다.

 

이런 사정을 잘 몰랐던 하의3도민들은 1908년 내장원에 속한 하의3도의 땅을 되돌려 달라고 임시재산정리국 등에 진정서를 내 요구하였다. 그런 가운데 홍우록이 보낸 차인들이 하의3도에 들이닥쳐 도조를 요구하고서야 하의도 사람들은 홍우록이 증서를 받은 상황을 알게 되었다. 하의3도민들은 도조 수납을 거부하였으나, 지도군수와 경찰 등이 반강제로 도조 수납을 강요하여 결국 일단 군수를 통해 도조를 내고, 홍우록을 상대로 1909년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경성지방법원에 제기하였다.

 

도민들은 경성지방법원에서는 패소하였으나, 경성공소원에서는 하의3도의 땅은 20결을 포함하여 모두 ‘무토사패지’, 즉 결세만을 받는 땅으로서 하의도민의 소유임을 확인하고, 홍우록은 도민들에게 이미 거두어간 도조를 반환하라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홍우록은 재판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 땅을 조병택과 백인기에 팔아넘겼고, 이들은 다시 정병조에게 팔았으며, 정병조는 다시 일본인 우콘 곤자에몬(右近權左衛門)에게 팔아넘겼다.

 

일본인 우콘에게 넘어간 하의도 땅은 이후 일본 오사카에 사는 일본인 도쿠다 야시치(德田彌七)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하의3도 도민들은 이제 도쿠다를 상대로 한 농지탈환운동을 벌여야만 했다. 이런 일은 모두 조선후기에 왕실 궁방전의 제도가 문란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실학자들 가운데 이러한 궁방전의 문란상을 바로잡으려 한 이들은 별로 없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글쓴이 : 박 찬 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