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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정전제 토지개혁론 : ‘정전론’과 ‘정전의’ - 박찬승

by 귤담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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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의 정전제 토지개혁론 : ‘정전론’과 ‘정전의’

글쓴이 박찬승 / 등록일 2024-10-18

다산 정약용은 토지제도의 개혁이 모든 개혁의 핵심이라고 생각하고 이와 관련된 글의 집필에 상당한 힘을 쏟았다. 그의 나의 38세 때 쓴 「전론(田論)」은 여전제(閭田制)라는 독창적인 토지제도를 펼쳐 보인 것이었다. 그것은 토지소유의 공유화와 공동노동·공동분배 원칙에 기초한, 요즘 말로는 ‘협동농장’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매우 혁신적인 구상이었지만, 어찌 보면 젊은 날의 이상주의적인 개혁론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생각은 강진 유배 시절에 크게 바뀌었다. 그는 경전과 역사서 등에 나오는 중국 고대의 여러 제도를 연구하면서 중국의 요·순·삼왕시대의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생각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 시기의 정전제(井田制)를 가장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받아들이게 된다. 정전제란 농지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해서, 주변의 8개 구역은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운데 1구역은 공동으로 경작하여 세금을 바치게 하는 제도였다(9분의 1세법).

 

8구역은 농민에게, 1구역은 공동경작 세금으로

 

정약용은 『경세유표』의 「전제(田制)」를 통해 정전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목조목 펼쳐보였다. 「전제」1(‘정전론’이라 이름붙임)에서는 조선의 지세(地勢)는 산이 많아 정전제 실시에는 맞지 않는다든가, 백성의 수가 일정치 않아 정전제를 시행하기 어렵다든가 하는 당시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이어서 「전제」2~4에서는 중국 삼대의 정전제의 원리에 대한 여러 설을 검토하고 자신의 견해를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전제」5에서는 중국 진·한대 이후의 토지제도사를 검토하였다. 「전제」6~8에서는 우리나라의 토지제도사를 차례대로 검토하였다. 그리고 「전제」9~12(‘정전의’라 이름붙임)에서는 정전제의 9분의 1세법을 원용하여 이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전제」1~4의 글을 보면, 그는 여기에서 후대인들의 정전제 실시 불가론을 비판하고, 정전제는 오늘날에도 실시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정전제란 모든 토지에서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구획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산골짜기의 논밭처럼 정(井)자 모양으로 획정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계산상으로만 같은 넓이의 9구역을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일찍이 정자(程子)·장자(張子)의 정전제 해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의 정전제론에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토지국유제 원칙의 관철이다. 즉 농민들은 8개 구역의 용익권(用益權)만 가질 뿐 소유권은 갖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다. 즉 ‘농자득전’(農者得田)의 원칙은 실현되었지만, ‘농자유전’(農者有田)의 원칙은 배제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다산은 이와 같은 정전제를 자신이 살고 있던 당대의 시점에서도 실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시할 수 있다고 보았을까. 다산은 한전(限田:토지소유 상한제)·균전(均田:토지의 균등한 분배) 등을 장기간 시행하면 정전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으로 언제 가능할지 기약이 없는 일이었다. 그는 또 대전란 같은 것이 있은 뒤에 영웅적인 임금이 나와서 이를 전격 시행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같은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 또한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다산도 정전제를 당장 실시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공전을 확보할 수 있을지, 공전을 열심히 경작할지

 

다산도 정전제의 즉각적인 실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고, 대신 정전제의 9분의 1세법은 시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쓴 것이 『경세유표』 「전제」 9~12의 ‘정전의’였다.

 

그는 여기에서 현실의 토지소유 관계를 일단 인정하고, 그 위에서 거의 모든 토지를 정전제의 원칙에 따라 획정(劃井) 또는 작정(作井)하고, 그중의 9분의 1을 국가가 매입하여 ‘공전’(公田)으로 삼고, 8개 구역의 ‘사전’(私田)을 경작하는 농민들이 공동으로 공전을 경작하여 그 소출을 세금으로 내게 하면 이른바 9분의 1세법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9분의 1세법을 실시한다면 당시의 전정문란을 해소하고, 국가재정도 확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또한 국가가 ‘공전’을 매입할 재원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어서 현실적인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또 과연 농민들이 ‘공전’을 자기 ‘사전’처럼 열심히 경작할 것인지도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이처럼 다산의 『경세유표』에 실린 정전제 토지개혁론은 크게 원칙적인 토지개혁론을 쓴 ‘정전론’과, 현실적인 지세개혁론을 쓴 ‘정전의’로 나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론으로 쓴 ‘정전의’도 사실은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근본적인 토지개혁이나 지세개혁 같은 일은 혁명적인 사회변화가 선행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글쓴이 : 박 찬 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

[주요 저서]

『한국근대정치사상사연구』, 『근대이행기 민중운동의 사회사』, 『민족주의의 시대』, 『민족, 민족주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 『언론운동』(「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시리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21세기 한국사학의 진로』, 『1919 : 대한민국의 첫 번째 봄』, 『혼돈의 지역사회(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