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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존재를 애호한 연암의 생명 윤리
글쓴이 박수밀 / 등록일 2024-10-11
현대 사회는 거대 시스템 속에서 이익과 효율성을 최우선 가치로 둔다. 자본 만능주의와 성장 지상주의는 자연과 예술마저 이익의 도구로 삼고 인간과 자연을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게 만든다. 크고 화려한 문명과 기계 문명의 홍수 속에서 작은 존재를 관찰하는 기회는 줄어들고 있으며 생명 존중에 대한 감수성은 약해지고 있다. 생명마저 상품화하는 소비주의 시대에 작은 존재들을 사랑한 연암(燕巖) 박지원을 떠올려 본다.
벌레든 범이든 사람이든 만물의 하나일 뿐
작은 존재를 향한 연암의 깊은 관심과 애정은 그가 인간과 동물, 나아가 모든 생명체를 동등하게 바라본 데서 출발한다. 연암은 인간만이 특별히 우월한 존재가 아니며, 모든 생명이 똑같이 소중하다고 말한다. 그는 “사람과 사물이 생겨날 때는 본래 구별되지 않았으며 나와 남은 모두 사물이었다”라고 하는가 하면, “지금 우리 사람이라는 것도 바로 벌레의 한 종족일 뿐”이라고 하여 인간과 사물의 근원이 같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여기엔 인간과 자연을 분리하지 않고 모든 생명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자리한다.
전통 유학에서는 인간만이 윤리의 실천이 가능하며, 사물은 지혜와 예의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연암은 이러한 관점을 뒤집어, 오히려 동물이 인간보다 더 윤리적이고 도덕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내비친다. 그리하여 다리가 부러진 까치와 농담을 나누고, 뜰에 앉은 까마귀에게 고기 조각을 주는 등 동물들과 교감했으며 사람들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 파초를 홀로 사랑한다고 말하며 깊은 애정을 보였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는 말을 함부로 다루는 조선의 방식을 비판하면서, 동물의 성질도 사람과 같아서 피로하면 쉬고 싶고 답답하면 시원하게 뻗치고 싶으며 가려우면 긁고 싶다고 하여 인간과 동물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말을 혹사하며 오로지 효율성과 이익만을 추구할 때 연암은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감정과 욕구를 지닌 존재임을 인식하고 말의 감정과 생리를 이해하고 존중하려 한 것이다.
「호질(虎叱)」에서는 범의 입장에서 인간과 문명을 비판하는 특별한 시각을 보여준다. 연암은 “범의 본성이 악하다면 사람의 본성도 악할 것이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면 범의 본성도 선할 것”이라고 말하며, 인간과 동물의 본성이 다르지 않음을 강조한다. 인간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 모든 생명체의 가치를 동등하게 바라보는 것이다.
나아가 “범이든 사람이든 만물의 하나일 뿐”이므로 “범과 메뚜기, 누에와 벌, 개미는 사람과 함께 길러지는 것이니, 서로 어그러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여 자연을 공격과 파괴가 아닌 공존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 연암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모든 생명체가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의 동물권 운동과 연결되며, 동물 복지와 윤리적 대우에 대한 현대 논의의 선구적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쓸모없는 사람이 반드시 쓸모 있다
자연과 동물에 대한 연암의 애정은 인간 사회의 위선과 차별에 대한 비판과 연결된다. 연암은 세상이 말하는 쓸모 있는 사람은 반드시 쓸모없는 사람이며, 세상에서 말하는 쓸모없는 사람은 반드시 쓸모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기존 사회의 가치 판단을 뒤엎고 사회에서 낮잡아 불리는 존재들이 오히려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사람들임을 말한다. 그리하여 거지와 비렁뱅이, 똥 푸는 사람 등 사회가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과 가까이하며 그들로부터 진실함을 배운다.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에서는 똥 푸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천대받던 똥 장수인 엄행수를 존엄성과 덕을 지닌 인물로 그려낸다. 연암은 똥 장수라는 천한 직업을 가진 엄행수를 통해 당대 신분 사회의 위선을 은연중 비판하며,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도 그들만의 고귀한 덕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엄행수는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약자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당시 사회의 차별과 차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은 것이다.
연암에서 다산까지, 실학의 생명 존중 정신
연암의 작은 존재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자연 보호나 동물 애호의 차원을 넘어,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반성하고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는 깊은 통찰과 연결된다. 또한 그가 보여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존재를 향한 관심은 현대 사회의 불평등과 차별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준다. 작은 존재를 대하는 연암의 시좌는 우리에게 인간과 자연, 그리고 모든 생명체 간의 조화로운 공존을 위한 철학적, 윤리적 기반을 제공한다.
나아가 성호의 「관물편(觀物篇)」에 보이는 작은 미물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의 마음, 담헌의 「의산문답(醫山問答)」에 나타난 인물균(人物均) 정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다산의 따뜻한 연민을 아울러 곱씹어 볼 때, 자본과 기술 앞에서 정녕 놓치지 말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글쓴이 : 박 수 밀 (고전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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