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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장례식
글쓴이 김진균 / 등록일 2024-10-29
인간 집단이 저보다 더 날카로운 이빨과 강력한 근육을 지닌 동물들을 압도하며 지금처럼 번성하게 된 동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부러졌다 다시 붙은 흔적이 있는 대퇴골이 문명의 증거라고 했다.
만오천 년 전 이 뼈의 주인이었던 인간은 대퇴골이 부러졌을 때 맹수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부축해주고 굶어죽지 않도록 먹이를 나눠주는 동료들이 있어서, 대퇴골이 다시 붙을 몇 달 동안 생존할 수 있었다. 걸리적거린다고 다리가 부러진 동료를 버리는 관습이 있어 건장한 젊은이만 남게 된 집단은 단기적 생존에 유리할 수는 있겠으나 번성한 문명에 이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동체와 문명을 갱신해 온 교육
돌덩이를 깨서 석기로 만들고, 흙을 녹여서 쇠로 만들고, 독초에서 약성을 찾아내고, 활시위의 탄성을 발견하고, 씨앗을 심으면 만나게 될 추수를 예견하고, 천체와 계절의 질서를 관찰하며, 방종하는 악당들을 다잡아 집단이 붕괴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 같은 일들은, 다리가 부러진 사람과 늙고 병든 사람까지 함께 살아가려는 집단이 훨씬 더 잘 해낼 것이다. 그들은 다친 동료를 버리고 다니는 혈기왕성한 부랑자 집단의 약탈도 물리치고 촌락과 도시를 만들어 왔다. 지금 이토록 번성한 인류에게는 다리가 부러졌던 인간과 그를 도운 인간들의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인류가 문명을 전수하고 확대 재생산하는 데에는 이야기의 상상력이 그 핵심 기능을 담당했다. 맹수가 저기서 달려오는데도 손을 놓치 않던 동료에 대한 눈물의 후일담은 공동체의 자부심과 구성원의 소속감을 높여주는 데에 기여했을 것이다. 공동체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 크고 복잡한 이야기의 상상력이 요구된다.
말하고 듣는 이야기로는 더이상 확대될 수 없는 단계에서 문자를 활용하면서 문명은 비약적으로 확산되었다. 역사 시대 이래 인류는 글을 읽으며 문명의 유산을 배우고 다시 글을 쓰며 문명의 유산을 갱신해 왔다. 읽고 쓰는 활동은 배우고 보태는 활동이며, 다른 말로 교육과 연구 행위이다. 그 사이에서 학문이 형성되고 학교가 만들어졌다.
대구대 사회학과 장례식이 치러진다고 한다. 입학생 미달로 내홍을 치른 대학에서 취업에 유리한 실용학문 위주로 학과 체제를 재편하면서 사회학과의 신입생을 아예 받지 않기로 한 것인데, 현재 재학 중인 학생이 졸업할 때까지는 강좌를 유지하겠다고 했으니 사회학과의 진짜 죽음은 몇 년 뒤에 실현될 것이지만 정황상 이미 시한부 판정을 받은 상태이다. 의식불명에 빠지기 전에 당사자인 사회학자와 사회학도들은 폐과 과정의 문제점을 사회학적 견지에서 검토하는 것으로 장례식을 구성할 것이라고 하니, 대구대 사회학과는 죽어가면서도 문명이 부여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문명의 정수에서 벌어지는 야만
사실 이 죽음은 대한민국에서 부피를 키우고 있는 문명 퇴행 세력이 조장한 것이다. 애초에 튼실하지 못했던 교육과 연구가 여기에서 더욱 위축되면 어떠한 재앙이 발생할지 모르는 대통령실이 R&D예산을 감축하여 연구원들을 아르바이트와 해외로 떠나게 하고, 의사집단의 저항을 유발하여 의대교육에서 2024년을 적출했다. 교육과 연구에서의 선택과 집중이 인구소멸 및 지방붕괴와 얼마나 밀접하게 닿아 있는지 관심 없는 교육부가 글로컬대학30과 라이즈사업 및 자율전공선택제 등으로 선택받지 못한 지방대와 순수학문분야를 소멸로 몰아붙이고 있다. 강의와 연구의 절반을 감당하고 있는 비정규교수의 기여를 뻔히 아는 대학이 인건비의 1할만 그들에게 배분하는 뻔뻔함 같은 것이 이 흐름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모두 문명의 정반대 야만의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앞의 비유를 이어가자면 다친 동료를 버리고 온 부랑자 집단이 우리의 동료도 버리라고 강요하고 있는데, 당초 튼실하지도 못했던 우리 집단의 족장이 드디어 우리의 불행한 동료를 죽음으로 몰고 있는 중이다. 천년만년 지금 있는 대학과 학과가 다 유지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 대응과는 무관한 강압적 구조조정으로 학문적 상상력이 덩어리씩 사라지게 만드는 것은 문명이 아니다. 올해나 내년 대학과 정부의 재정이 흑자로 돌아설지는 모르겠으나, 문명의 상상력이 고갈된 대학에서 누가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신기술을 창출하여 국가의 미래를 확장할 것인가. 이대로라면 내후년쯤 우리는 문명 장례식을 치러야 할 것이다.
■ 글쓴이 : 김 진 균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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